인간을 살아가게 하는 동력은 무엇일까. 실패해도 다시 일어서고 좌절 속에서도 버티게 하는 힘은 무엇일까. 사막을 걷는 나그 네는 오아시스를 보고 지친 발걸음을 옮긴다. 그런데 그가 찾아온 오아시스는 저만큼 물러나 다시 그를 손짓한다. 인간의 꿈도 신기루처럼 허망한 것은 아닐까. 그러나 허망할지라도 오아시스를 보지 않으면, 얻으려는 대상이 없으면 그는 살지 못한다. 꿈이 없으면, 목적이 없으면, 얻으려는 대상이 없으면 그는 살지 못한다. 그것만 얻으면 아무런 욕망도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것을 쥐는 순간 욕망의 대상은 저만큼 물러난다. 학문, 돈, 권력, 성의 추구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대상이 욕망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조금씩 상승되는 것. 그녀는 나의 잃어버린 반쪽이지만, 막상 그녀를 얻고 난 후에도 욕망이 여전히 남는다면 , 그녀는, 반쪽이라 여겼지만 그렇지 않은, 그것을 넘어서는, 허상이다. 실재처럼 보였지만 베일을 걷었을 때는 그렇지 못한 것. 그러나 대상이 허상이기에 욕망은 남고 욕망이 있는 한 인간은 살아간다.
프로이트는 [쾌락원리를 넘어서]에서 욕망을 충족시키는 유일한 대상은 죽음뿐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욕망은 인간을 살아가게 하는 동력이다. 그렇지만 허상을 실재라고 믿기에 그것을 얻으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때, 특히 남을 조정하고 제도를 만 들어 자신의 욕망을 대의명분 속에 숨기려들 때, 욕망은 권력자의 눈길처럼 음험해진다. 인간은 대상이 허상임을 알 때 그것을 향한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고, 자신의 시선 속에 타인을 억압하는 욕망의 시선이 깃들어 있음을 깨달을 때 좀더 쉽게 타인을 이 해할 수 있다. 욕망이론이 지닌 미덕이다.
20세기 후반부 세계문화의 흐름 가운데 한 가지 특징은 모더니즘의 건조하고 메마른 추상적 엘리트주의로부터 탈출하여 인간과 역사를 보는 시각에 일상과 감흥을 불어넣으려는 시도이다. 여기에서 욕망, 권력, 담론, 지식, 주체의 문제가 부상되고 특히 그 동안 억눌려온 에로티시즘이 부활한다. 형식이나 기법만을 중시하는 이론에서 벗어나 텍스트에 역사와 욕망을 끌어들이려는 움직 임은 분야별로 조금씩 달리 나타나면서 공통된 분위기를 형성한다. 해체론이 형식주의에 상황을 끌어들여 억압된 것, 주변으로 물러나 있던 음성을 복원시킨 것이나, 푸코가 권력과 지식을 연결시켜 역사를 새롭게 본 것, 바타이유의 에로티시즘의 부활, 벤 야민의 알레고리론의 부활, 바흐친의 대화론의 부활 등 전 시대에 억눌려 있던 음성이 부활하는 20세기 후반부 상황에서 욕망은 주체의 문제와 함께 주요한 지적 동기가 된다.
진리란 하도 써서 무늬가 다 지워진 동전처럼 관습의 산물이요, 그 자체로는 진리가 아닌 담론이 지식에의 의지와 결부되어 세 워진 자의적 체계라고 니체는 말했다. 니체는 이 시대 학문을 개념 그 자체를 보는 것에서 담론을 누가 조정하는가, 그리하여 어 떻게 진리가 세워지는가라는 담론의 결정과정에 초점을 맞추는 쪽으로 옮아가게 만든다. 이런 경향은 철학뿐 아니라 소설을 보는 시각이나 예술의 양식에도 스며들어 있다. 한 작품의 주제나 내용을 직접 논의하지 않고 담론조정자인 서술자(narrator)가 인물 을 어떻게 조정하는가에 의해 어떤 효과와 어떤 의미가 산출되는지 살피는 서사론, 인물의 내적 독백에 의해 억압됐던 저자를 다 시 귀환시켜 그의 서술을 부활시키는 동시에 그를 권위 있는 저자에서 담론조정자인 서술자로 하락시키는 포스트모던 소설들은 모두 절대논리, 거대서사, 단 하나의 재현을 거부하며 탈이념과 다원화를 지향하는 쪽이다. 그리고 언어, 이념, 절대논리, 재현 에 대한 반성은 인간의 사유하는 이성, 즉 로고스에 대한 반성이기도 하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식 사유체계에서 주체는 환상이 조금도 개입될 수 없는 완벽한 에고이다. 그가 꿈 꾸는 세계와 대상은 정확해서 그가 말하는 언어는 이성의 명령이다. 이런 통합된 이성에 대한 의문은 데카르트 이후 철학에서도 제기되어 왔으나 19세기 말,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에서 성본능이라는 욕망과 어우러져 과학이 아닌 문학의 영역, 아니 그 이상으 로 확산된다. 신경증환자를 치료하면서 프로이트는 연구보고서, 사례연구, 그외 많은 저술을 통해 후세 정신분석이론가들에게 지 적인 자산을 남겨주었고 그가 발견한 무의식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만큼이나 혁명적인 발견이라 일컬어진다. 인간은 유아기를 지나 사회적인 존재로 영입되면서 사회가 금기하는 욕망을 어떻게 처리하는가. 프로이트는 이런 욕망들이 깨끗이 사라져버리지 않고 억압되어서 무의식으로 남아 의식에 영향을 준다고 말한다. 신경증환자는 어릴 적에 받은 상처가 흔적으로 남아 반복되는 증상으로 나타나고, 분석자는 환자가 억압하고 있는 욕망이 무엇인가를 밝히기 위해 의식의 고리를 헐겁게 만든다. 최면을 걸거 나 꿈이야기를 듣고 원인을 찾아내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꿈의 분석뿐 아니라 말실수처럼 정상인의 경우에도 억압된 욕망이 표출 되는 것을 다룬다. 또한 남녀가 성차를 지니고 사회화되는 과정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거세 콤플렉스로 설명했고, 도라의 경 우에서는 여성도 남성과 동일시하려는 경향을 지닌다고 하여 앞의 이론에 모순을 암시하는가 하면, '늑대인간'의 경우에서는 증 상의 원인을 찾는다는게 환상이 아니냐고 암시하는 등 방대한 이론이 수정과 변모를 거치기에 그가 남긴 자료들은 후세인들에 이 해 재해석되고 있다.
정신분석은 환자가 하는 말을 듣고 분석자가 증상의 원인을 알아내려는 것이었기에 비평이론으로 적용된다. 환자의 말은 텍스트 요, 분석자는 독자(혹은 비평가)요, 증상의 원인은 저자의 심리라는 식으로 텍스트의 주제와 관련을 맺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관계는 한 시대의 지배적인 담론체계와 같은 맥락에서 변모된다. 19세기 말에는 작품을 읽고 저자가 그런 작품을 낳게 된 심리 적 동기를 추적하는 이드 심리학, 20세기 모던시대에는 자아가 어떻게 스스로를 상황 속에 적응시켜가는지를 보는 에고심리학 등 당대의 이데올로기를 반영하는 것이다. 20세기 후반부에 프로이트는 어떻게 귀환하는가, 특히 모던 시대에 억압되어온 무의식은 누가 어떤 식으로 재해석하는가. 그가 바로 프랑스의 정신분석가인 자크 라캉이다.
라캉은 프로이트가 발견한 무의식을 다시 끌어들인다. 그리고는 소쉬르의 언어관을 적용하여 구조주의(종래는 후기구조주의)이 론을 만든다.
주체는 결핍이요, 욕망은 환유이다.
생후 6개월에서 18개월 사이의 어린아기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환호성을 울리며 반가워한다. 아이는 그 속에 비 친 모습을 자신과 완전히 동일시하는데 라캉은 이 단계를 '거울단계(mirror stage)'라고 하여 주체의 형성에 원천이 되는 모형으 로 제시한다. 이 단계에서 아이는 자신의 몸을 가눌 수는 없지만 거울에 비친 자신의 이미지를 총체적이고도 완전한 것으로 가정 한다. 이 형태는 정신분석 용어로 이상적 자아(ideal-I)라 불리우는데 타자에 의해 보여짐을 모르는 객관화되기 전의 '나'에 해 당된다. 이 '보여짐'을 모르고 '바라봄'만이 있는 단계는 생물학적 실험에서도 드러나는데 예를 들어 암 비둘기의 생식선은 성에 관계 없이 같은 종류의 비둘기를 '바라볼 때' 성숙한다. 홀로 사는 메뚜기가 모여사는 메뚜기로 변할 수 있는 것도 바라보기만 하는 것에 의해 일어난다.
거울단계는 '상상계(the Imaginary)'라고도 하는데 이 단계는 '상징계(the Symbolic)'로 진입하면서 사회적 자아로 굴절된다. 언어의 세계요, 질서의 세계인 상징계로 진입하면서 이 거울단계는 사라지거나 프로이트의 경우처럼 억압되는 것이 아니라 변증 법적으로 연결된다. 상상계는 거울 속에 비친 영상과의 동일시 혹은 원초적인 질투가 벌이는 극적 사건에 의해 이루어진다(doubl e 관계). 이제 유아는 타자와 자신을 동일시하기에 자신의 욕망을 타자의 욕망에 종속시킨다. 라캉에게 '실재계(the Real)'는 상 상계와 상징계가 뫼비우스의 띠처럼 변증법적으로 연결되어 이루어진다. 따라서 의식은 출발을 상상계라는 오인의 구조로부터 시 작하기에 자아를 완벽하게 조정하는 절대적 주체란 없다. 그러므로 주체의 형성에서 거울단계의 설정은 데카르트의 이성절대주의 는 물론이고 실존주의나 현상학이 암시하는 실존적 자아까지도 거부한다. 그들은 모두 이 오인의 구조를 바탕에 깔고 있지 않은 흠집 없는 이성, 혹은 현실원칙에만 굳건히 서 있는 의식의 체계를 고집하기 때문이다.
거울단계는 비활동성 혹은 고착이라는 특성을 갖는다. 신경증환자는 모두 이 단계에 머물러 자아와 상황을 구별하지 못하고 소 외된다. 그는 대상과 자신을 일치시키고 타자의 욕망과 자신의 욕망을 구별하지 못하는 오인 혹은 환상의 단계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기에 타자의식이 전혀 없다. 여기에 광기가 존재한다. 그 광기는 수용소의 경험으로 남아 있는 광기뿐 아니라 세상을 귀먹게 하는 광기까지도 포함한다. 오인의 구조를 실재계의 한 부분으로 편입시킴으로써 라캉은 의식이 지닌 환상을 강조하기에 히틀러 와 그외 자기 의견만이 절대적인 진실이라고 착각하는 독선적인 정치가 혹은 사람들을 환자의 범주에 넣는다. 이런 의미에서 정 신분석학은 허구적 이미지에 사로잡힌 주체를 인정함으로써 고착에서 빠져나오게 하고 존재의 본질을 읽을 수 있는 열쇠를 제공 한다. 물론 분석가 자신도 신경증의 원인을 진리로서 규명해내지는 못한다. 다만 거울단계에서 빠져나오게, 고착으로부터 해방되 게 만들 수 있을 뿐이다.
라캉은 사유의 체계에 언어의 구조를 끌어들인다. 그는 프로이트가 발견한 무의식이나 성본능을 억압하고 자아의 자율성만을 강 조한 모던시대 정신분석학이 보수적인 엘리트주의로 흐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프로이트의 무의식과 성본능을 귀환시키면 서 이것에 소쉬르 언어학을 적용하여 주체가 어떻게 언어(혹은 기표)의 지배를 받는지 보여준다. 소쉬르는 언어는 사물을 지칭하 는 기표와 지칭당하는 대상인 기의로 이루어져 있다고 했다. 그리고 언어는 차이(혹은 관계)에 의해 변별의 기능을 갖는 자의적 체계라고 했다. 이 두 가지 정의는 각기 기호학과 구조주의로 가는 토대가 되는데 앞의 것은 기표와 기의의 관계가 일 대 일의 정확한 대응이 되지 못하고 기의가 미끄러져 의미가 수없이 확산되는 언어의 비유성 쪽으로 나가고, 뒤의 것은 은유와 환유의 두 축으로 정립되어(예를 들면 bill과 pill에서 b와 p는 대치, 압축, 은유이고, ill은 인접, 전치, 환유이다) 정,반의 대립항이라 는 구조주의 시학을 낳는다. 라캉은 이 두 가지를 모두 적용하여 주체와 욕망을 해석한다.
'신사', 혹은 '숙녀'라는 단어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모두 안다. 그런데 이 단어가 나란히 어떤 문 위에 씌어 있을 때 의미는 어 떻게 달라지는가. 그때 이 두 단어는 관계, 혹은 차이에 의해 남,녀가 각기 달리 사용하도록 관습지어진 화장실을 의미한다. 그 렇다면 기표는 단 하나의 기의에 고정되지 않고 관계 속에서 또다른 의미를 낳는다. 어린 소년과 소녀가 기차를 타고 어느 역에 들어선다. 마주앉은 두 아이는 유리창에 비친 팻말을 보고 말한다. '이 역은 신사역이야', '아니야, 숙녀역이야' 같은 역을 놓고 두 아이는 서로 반대 이야기를 하고 있다. 형제지간에도 이념의 차이로 얼마나 큰 불화를 겪는가. 라캉은 철도는 기표와 기의 사이에 있는 의미의 저항선이라고 말한다.
기의는 의미의 저항선 아래로 끊임없이 미끄러진다. 그렇다면 언어에는 기표만이 있을 뿐이다. 의미의 연쇄, 기의의 미끄러짐은 기표의 절대적인 우위를 암시한다. 기표들의 차이가 기의를 가능케 하면서도 (은유), 그 기의는 꼬리를 물고 연결된다(환유). 이것이 라캉이 말하는 기표의 두 가지 특성이다. 따라서 '기표들간의 관계에 의해 진리가 만들어진다'는 말은 의미를 낳는 은유 와 그 의미가 끊임없이 자리를 바꾸는 환유의 두 가지 특성을 함축하며 인간은 자신의 의도를 언어를 통해 정확히 전달할 수 없 다는 뜻이다. 두 어린 아이가 같은 역을 놓고 반대 기표를 주장했듯이 말은 의도와 다르게 전달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언 어의 비유적 속성이다. 그리고 이 비유성 속에는 은유와 환유가 들어 있는 것이다.
언어가 한 가지 의미에 고정되지 못하고 의미가 고리를 물 때, 즉 기표만이 존재할 때 그 언어를 통해 생각을 표출하는 인간은 이 기표에 절대적으로 종속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이 언어의 세계 속에 사는 한, 주체는 기표의 지배를 받기에 그것은 '언어처 럼 구조된다'는 것이다. 주체는 언어처럼 구조되어 있다. 그런데 그 언어는 은유와 환유로 구조되어 있다. 여기에서 다시 한번 프로이트의 꿈작용을 되돌아보자.
의식의 고리가 헐거워진 틈새를 비집고 억압된 무의식은 꿈으로 나타난다. 이때 꿈의 내용은 닮은 형상으로 대치되고(압축, 혹 은 은유) 이것도 들킬까 염려되어 그 옆에 인접한 것과 자리를 바꾼다(전치, 혹은 환유). 그렇다면 프로이트의 무의식은 은유와 환유라는 언어의 구조와 같은 게 아닌가. 다만 프로이트의 시대에는 언어과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이었기에 그는 이것을 무 의식의 영역으로 억압시켜 의식과 분리시키는 오해를 범했다는게 라캉의 말이다. 소쉬르의 언어관으로 인해 인간이 기표에 의해 지배받고 그 기표는 은유와 환유로 이루어졌으니 주체는 곧 프로이트의 무의식에 해당된다.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되어 있다' 라는 말은 인간이 언어를 통해 존재하는 한 '인간의 의식은 은유와 환유로 구조되어 있다'는 뜻이고, 이것이 바로 라캉이 시도한 프로이트의 재해석이다. 그리고 이런 재해석에 의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라캉에 와서 정치, 사회, 문화예술의 분야로 확대 된다. 그 모든 영역이 의식에 의해 이루어지기에 이제 문제는 단지 신경증환자의 치료로 한정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욕망은 어찌되는가. 무의식과 똑같은 원리에 의해 욕망 역시 표층으로 올라온다.
욕망은 환유이다. 대상은 신기루처럼 잡는 순간 저만큼 물러난다. 대상은 욕망을 완전히 충족시킬 수 없기에 인간은 대상을 향 해 가고 또 간다. 죽음만이 욕망을 충족시키는 유일한 대상이다. 욕망은 기표이다. 그것은 완벽한 기의를 갖지 못하고 끝없이 의 미를 지연시키는 텅빈 연쇄고리이다. 그렇다면 기표의 특성이 은유와 환유이듯 욕망의 구조도 은유와 환유가 아닌가. 욕망의 구 조를 들여다보자. 주체는 대상에게 욕망을 느낀다. 그것이 자신의 결핍을 완전히 채워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것만 얻으면 아무것도 욕망하지 않으리라 믿는다. 그러나 그 대상을 얻어도 욕망은 여전히 남는다. 아무것도 욕망하지 않는 것은 곧 죽음이 다. 그렇다면 대상은 실재처럼 보였지만 허구가 아닌가. 대상을 실재라고 믿고 다가서는 과정이 상상계요, 그 대상을 얻는 순간 이 상징계요, 여전히 욕망이 남아 그 다음 대상을 찾아 나서는 게 실재계이다. 그리고 이때 실재라고 믿었던 대상이 대타자이고 허구화된 대상이 소타자이다. 그래서 $◇a라는 욕망의 공식이 나온다. $는 주체이고 a(오브제 아, 혹은 프티 아)는 주체로 하여 금 욕망을 끊임없이 불러일으키는 허구적 대상이다. 마름모꼴 ◇는 대상이 결코 주체의 욕망을 충족시키지 못한다는 결핍이다. 실재계에 나타나는 틈새요, 구멍이다. 이 말을 조금만 바꾸어보자. 주체의 욕망을 충족시킬 것처럼 보이는 대상, 즉 대체가 가능 하리라 믿는 단계, 이것이 압축이요, 은유이다. 그러나 충족시키지 못하고 다시 또 그 다음 대상으로 자리를 바꾸는 전치, 이것 이 환유이다. 그러므로 욕망 역시 언어처럼, 무의식처럼, 은유와 환유로 구조되어 있다. 그리고 프로이트는 '쾌락원리를 넘어서' 에서 죽음만이 욕망을 충족시킬 뿐이라고 하여 이미 이것을 암시했던 것이다.
도대체 라캉은 이런 분석을 통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일까, 이렇게 주체를 결핍으로 보는 것에 무슨 미덕이 있다는 것인가.
'나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라는 문장이 있다. 이 말은 물론 내가 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자신이 거짓말을 하고 있음을 지켜보고 하고 있음을 지켜보고 있는 또 하나의 '나'가 있다는 게 아닌가. 이 말을 하고 있는 '나'와 언급된 '나'는 바라보는 주체요, 말 해진 '나'는 바라봄을 당하는 주체다. 거짓말을 하는 '나'를 바라보고 있는 '나'. 그렇다면 '나'라는 주체 속에는 바라봄과 보여 짐이라는 두 개의 주체가 있다. 그래서 라캉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통합된 주체를 '나는 내가 생각하 지 않는 곳에 존재한다'는 식으로 바꾼다. 바라보기만 하는 '나'가 아니라 보여짐을 당하는 '나'도 있다는 주체의 객관화이다. 그렇다면 데카르트식 주체는 보기만 하는 주체, 즉 보여짐을 당하는 주체를 상정하지 않은 셈이다. 보여짐을 모르는 주체는 왜 위험한가. 그것은 아직도 거울단계에 있는 주체이기 때문에 대상을 실재로 믿고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고착상태에 머물러 상황과 자신을 구별하지 못하고 소외된 신경증환자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이 고착에서 벗어나 대상이 허구임을 깨닫고 다시 또 연기된 대상을 향해가는 것, 대상으로부터 탈출하는 것, 끊임없이 대상에서 벗어나는 '반복' 없이 삶은 지속될 수가 없 는 것이다. 이것이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대한 문화사적 해석이다. 부친살해의 욕망은 개인의 삶뿐만 아니라 인류문 화사가 지속되는 동인이기도 하다. 아버지를 살해해야 자신이 일어설 수 있던 아들은 또다시 아버지가 되어 아들에게 전복된다. 그리고 문화사는 바로 이 전복의 힘 없이는 이어질 수가 없다.
라캉 역시 당대의 실존적 자아와 현상학적 자아를 전복하기 위해 자아를 해체하고 있다. 자아가 근본적으로 오인의 구조에서 출 발한다는 것, 바라봄은 보여짐에 의해 분열된다는 것을 모르는 독선적인 주체, 타자를 인정치 않는 고립된 주체는 심한 경우 히 틀러처럼 역사를 광기로 몰아넣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라캉은 주체를 결핍으로 보고 욕망을 환유로 본다. 그것은 주체를 대상에 대한 왜곡된 집착에서 벗어나게 할 뿐 아니라 스스로도 어쩔 수 없는 오인의 구조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여 '타자의식' 을 갖게 한다. 그리고 이 타자의식이 라캉의 이론이 지닌 미덕이요, 그의 이론이 문학, 정치, 사회, 여성이론으로 확장되는 근거 이다.
페미니스트 이론
사랑에 빠진 두 연인은 서로에게 인정받고 싶어한다. 그러나 이 사랑의 요구는 연인들의 갈망을 채워주기는커녕 점점 더 큰 욕 망의 회로 속으로 밀어넣어 두 사람을 외롭게 만든다. 인정받고 싶을수록 갈망이 클수록 외로움은 더욱 커질 뿐이다. 사랑은 구 체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에 손안에 넣을 수가 없다. 그것은 원초적인 힘이요, 대상을 향한 요구(demand)이다. 그러나 연인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성적 욕구(need)의 충족일 뿐이다. 요구는 추상적인 것이요, 욕구는 구체적인 것이기에 그 차 액은 늘 남아 연인을 외로움에 떨게 하고 결핍에 시달리게 하고 끝없이 욕망 속을 헤매이게 한다.
프로이트가 중요시했던 성본능은 무의식과 마찬가지로 자아의 자율적인 능력을 강조하던 모던시대에 와서 억압되었다. 라캉은 성본능을 다시 귀환시켜 새롭게 해석해낸다. 특히 남녀 사이의 차별이라는 당대 사회를 반영했던 프로이트이론이 남녀평등 혹은 여성이론이 부상되는 라캉의 시대에 어떻게 재해석되는지는 중요하다. 라캉은 페미니스트들에게 많은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기 때 문이다.
프로이트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서 유아기의 성심리를 설명했다. 남아는 어머니의 남근이 되려는 갈망으로 아버지를 증오하고 , 여아는 반대로 남근을 선망하여 아버지를 원하고 어머니를 증오한다. 이런 증상은 유아기를 벗어나 남근기로 접어들면서 사회 성을 얻게 되는데 이때 작용되는 것이 거세 콤플렉스이다. 거세공포를 느낀 아이는 어머니의 남근이 되려는 갈망을 포기하고 아 버지와 자신을 동일시하여 또 하나의 아버지를 꿈꾼다. 여아는 자신이 결핍의 존재임을 깨닫고 어머니를 질투하고 아버지(남근) 를 선망한다. 그런데 프로이트는 이런 성본능과 성차별이론이 '도라의 경우' 어긋남을 보게 된다. 도라는 여성이었지만 아버지와 자신을 동일시했고 남성적 요소를 내보였기 때문이다.
라캉은 남근을 생물학적인 성의 기관이 아닌 다른 것으로 바꾸어버림으로서 이런 모순과 성차를 해결한다. 남근은 남성의 상징 으로서 여성에게는 없는 결핍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태고적부터 남녀는 왜 끊임없이 대상을 찾아 헤매고 사랑의 욕망은 결코 충족되지 못하는가. 왜 성적 결합 이후에도 욕망은 여전히 남아 있는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거세 콤플렉스는 라캉에 오면 상 상계와 상징계가 되고 이 둘은 변증법적으로 연결되어 욕망은 여전히 남는다. 주체(아들)는 대상(타자, 어머니)을 남근으로 믿고 자신의 욕망을 타자의 욕망에 종속시킨다(상상계). 그러나 거세 콤플렉스 즉 상징계에 진입하면서 이 타자가 남근이 아닌 허상 인 것을 깨닫는다. 결코 자신이 타자의 남근이 아닌 것을 알게 되면서 그는 다시 대상을 추구하고 상상계로 들어선다. 이런 변증 법에 의해 대상의 추구는 거듭되고 사랑에의 욕망은 지속된다. 그러면 이때 상상계, 혹은 오이디푸스 단계는 타자가 자신의 남근 이요, 자신이 타자의 남근이 되리라고 믿는 단계이므로 은유에 해당되고 그것이 허구였음을 알게 되는 순간, 즉 상징계로 들어서 는 순간 다시 타자에 대한 욕망이 시작되므로 실재계는 환유이다. 은유와 환유로 이루어진 것, 그것은 기표요, 무의식이요, 그리 고 여기에서 보듯 남근이다. 그렇다면 남근은 생물학적 기관이 아니라 기표이고 이것은 남녀 모두에게 똑같이 작용한다. 주체는 기표에 종속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성도 똑같이 남근이 되고 싶고 남근을 소유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남근은 보이지 않을 때만이 기능을 발휘한다. 그것은 드러나면 허상이요, 억압되면 기능을 발휘하는 진리와 같다. 스스로를 감 출 때만 기능하는 진리의 모순. 남근이 보이지 않을 때, 그것이 기능을 발휘할 때가 상상계요, 그것이 제 모습을 드러내 기능을 상실하는 순간이 상징계이다. 그러므로 성욕망은 단 한 번의 성적 결합으로 영원히 종식되는 일회성이 아니다. 그것은 계속 남아 대상을 갈구한다. 따라서 남녀는 정.반의 대립관계가 아니라 영원히 흘러넘치는 '희열(jouissance)'의 관계이다. 남녀는 각기 하나(혹은 전체)가 아니고 더구나 둘이 합쳐 '하나'가 되지도 않는 넘침의 관계이다. 그래서 라캉은 여성이란 단어 앞에 정관사 를 붙였다가 지운다. 있다고 믿지만 씌어지는 순간 지워지는 상상계와 상징계의 변증법적 연결이다. '전체 혹은 하나'인줄 알았 는데 얻는 순간 넘치는 것, 즉 욕망의 또 다른 기호이기다 하다. 그것은 설명되지 않고 설명할 수도 없이 그저 경험헐 수 밖에 없는 여성의 '희열'이며 진리 그 자체이다. 그래서 사유는 '희열'이다. 그리고 사랑의 편지는 진리가 허구임을 보이는 분석담론 이요, 과학적 담론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사랑의 문자, 즉 사랑의 기표이다.
'왜 너는 내가 생각하는 곳에서 나를 생각해주지 않는가.' 타자의 욕망과 자신의 욕망이 일치하리라고 믿는 연인은 이렇게 묻는 다. 그녀의 모습 속에서도 자신의 모습만을 보는 연인. 신을 사랑하면서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요, 먼저 자신을 사 랑하면서 신에게 충성을 바치기에 우리는 신에게서 또 하나의 내 모습만을 볼 뿐이다. 14세기에 유럽을 휩쓸던 궁정풍 사랑이 동 성연애가 극도로 타락한 지경에 이르렀을 때 나왔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궁정풍 사랑은 여성을 닿을 수 없이 높은 곳에 신처럼 위치시키고 변함없이 사랑을 바치는 이상화된 사랑이다. 라캉은 이런 식의 사랑이 유행했던 것은 남녀 사이에 성관계가 없는 것을 은폐하려는 의도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가장 숭고하고 절대적인 듯 보이는 신에 대한 사랑도 이기적인 자기애라는 것을 깨닫고 내가 생각하는 곳에서 그녀가 생 각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그녀는 신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베르니니가 조각한 '성 테레사의 [희열]'은 신의 얼굴이 된다. 신비주의자들의 증언처럼 오직 경험할 뿐 설명되지 않는 것, 남근을 넘어서 희열을 향해 가는 것은 상상계를 넘어서 상징 계를 경험하는 것이고 신은 주체와 대상의 정점에 위치한 거세자로서 둘이 하나됨을 막는다. 그래서 사랑의 욕망은 영원히 지속 되는 $◇a로서 표시된다. 에로스가 하나가 됨을 막기 위해 프로이트도 죽음의 신 타나토스를 둘 사이에 놓았다.
남녀가 합쳐서 하나가 된다는 환상, 즉 주체가 상상계에 머무는 것을 거부하고 상징계의 중요성을 부각시키는 라캉의 분석담론 은 남성을 남근으로 여성을 결핍으로 보는 대립적 성차별론을 극복한다. 그리고 여성의 [희열]을, 드러내면 허상이 되고 마는 진 리와 같은 차원으로 놓아 전통적인 남근중심주의를 넘어선다. 여성의 희열도 남근도 똑같이 기표요, 무의식이요, 스스로를 감출 때만 기능하는 진리이다.
이처럼 라캉의 주체와 욕망에 관한 이론은 페미니스트이론으로서 주요한 원리를 제공한다. 그리고 문학작품의 분석에서, 시각예 술의 영역에서도 이런 논리는 다르게 '반복'된다.
첫댓글아, 감명깊게 읽었습니다. 난 남의 글을 (내 글도 그러하지만) 한글편집기에 밑줄 긋고 굵은 글자로 만들며 읽은 건 처음이었습니다. 배움과 감동이 참으로 컸네요. 이 글은 필히 그 언딘가에 발표해서 많은이들에게 전달해야만 할 글이로군요. 연결고리에 약간의 의문이 일었던 부분도 있지만
첫댓글 아, 감명깊게 읽었습니다. 난 남의 글을 (내 글도 그러하지만) 한글편집기에 밑줄 긋고 굵은 글자로 만들며 읽은 건 처음이었습니다. 배움과 감동이 참으로 컸네요. 이 글은 필히 그 언딘가에 발표해서 많은이들에게 전달해야만 할 글이로군요. 연결고리에 약간의 의문이 일었던 부분도 있지만
이 정도로 뛰어나고 많은 감명과 배움을 주었던 철학글도 드물었던 것 같습니다. 어떤책 한권을 독파해도 이정도의 배움과 감명을 얻기는 쉽지 않겠지요. 수고하셨네요. 정말 고맙습니다. 님의 지향이 어디까지 펼쳐질지 자못 흥미롭고 호기심을 자아내는군요. 정진과 건필을 빕니다 !
아, 아래는 제가 편집한 걸 올려보려 시도한 글인데... 편집 내용이 나오질 않는군요. 방법이 없을지 아쉽네요. 자료실에 올릴 순 있지만 그건 제 몫은 아닐 것 같구요. 기회되면 관련된 의문이나 토론을 이어가고 싶습니다.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