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으로 낳은 우리
문수산성교회 목사님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올해 부활주일에 창립 30주년을 맞는다면서, 문집을 만드니 글 두 편을 부탁하였습니다. 아내에게도 한 편을 요청하였습니다. 글 쓸 사연이야 많지만 막상 써보려니 궁리가 많아집니다. 교회 설립을 한 당사자이니 역사적인 기록을 남겨야겠다는 욕심부터, 남들이 알지 못하는 비밀을 터뜨려볼까 싶은 꼼수까지 마음부터 흥미진진합니다.
벌써 30년이나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서툴고 경험 없는 신학생이 교회를 개척한다니, 하나님도 참 불안하셨을 것입니다. 나는 군대를 다녀오지 않았습니다. 3주간 실역미필자 훈련을 받았을 뿐입니다. 군대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깡으로 악으로’ 한다지만 나는 그런 남들이 갖춘 ‘보편 멘탈’도 없는 셈입니다. 군대는 1983년 민주화운동 시위를 주동하면서 실형을 산 까닭에 징집면제 받았습니다.
남들보다 3년 쯤 앞서 목회전선에 나선 이유입니다. 졸병의 마음이 아닌 부대장의 심정으로 현장에 나가니 두려움 반, 절박함 반이었습니다. 내가 처음 개척을 결심한 곳은 고 박흥규 목사님이 추천한 곳입니다. 신학교 4학년 때 잠시 신학생으로 일한 김포지방에서 그 분을 만났습니다. 말로는 “고생한 놈을 돕고 싶다”는 호의였지만, 나는 아무런 준비도 없던 자격미달자였습니다. 게다가 색안경을 끼고 보면 선량한 전도사가 아니라, 저의가 있는 ‘위장 취업자’로 오해할 만도 했습니다. 1985년 봄, 당시 시절은 그렇게 수상했습니다.
1984년 초가을, 김포군 월곶면 포내리에 답사를 가 보니 정나미가 뚝 떨어졌습니다. 벼를 이미 베어낸 빈 들판은 황량하였고, 누구 한 사람 알 리 없는 마을 풍경은 썰렁했습니다. 마을 한 복판에 겨우 빌린 사랑채를 수리하여 ‘ㄱ’자 예배당과 원룸을 꾸몄습니다. 문수산에서 물푸레나무를 베어다가 십자가를 세웠습니다. 4월 11일, 창립예배를 드리기 전 며칠 동안 포내리, 덕박골, 성동리를 집집마다 다니면서 초청장을 돌리고, 기념수건을 전달했습니다.
첫 날 밤, 초저녁부터 대남방송과 대북방송이 경쟁적으로 왕왕거렸습니다. 이곳은 한강 이남에서 겨우 시오리 남쪽에 위치한 최전방이었습니다. 문밖을 나서면 강화도와 김포 월곳면 사이 염하강 경계 지역에 높은 철조망이 둘러 쳐있고, 마을 주민 보다 군복 입은 군인들이 더 많이 눈에 뜨였습니다. 서울과 멀지 않았음에도 전방지역이니만큼 밤에는 통행금지가 여전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최전방으로 ‘홀로’ 파송하셨습니다. 선교 100년이 되도록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하던 그 곳, 해방 40년을 맞도록 남과 북의 대치를 더욱 실감하던 그곳, 전쟁 후 강 건너 북쪽에서 피난살이 와서 아직 강을 건너가지 못한 이산가족이 살던 그곳, 가난한 농민과 대도시에서 밀려난 변두리 인생들이 섞여 살던 그곳, 내 첫 목회현장입니다. 첫 제단에서 내가 드린 첫 기도는 서원이나 다름없습니다. “주님, 통일될 때까지 이곳에서 살겠습니다”.
그런데 잠을 자려고 뒤척거리면서 이 생각 저 생각 끝에, 도무지 통일이 언제 이루어질지 판단이 서지 않았습니다. 이러다가 평생 여기에서 살아야 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튿날 나는 무모한 서원을 즉각 약삭빠르게 수정하였습니다. “주님, 딱 10년만 이곳에서 살아 보겠습니다”. 그리고 겨우겨우 10년 째 되던 해인 1994년에 독일로 목회지를 옮겼습니다. 돌아보니 내 계획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이란 믿음이 들었습니다.
10년이 채 못 되는 시간 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결혼을 하고 첫 아이를 낳았고, 소나무 숲이 있는 땅을 마련해 교회를 신축하고, 주택도 지었습니다. 교회 살림은 빠듯하나 자립하였고, 단비선교원을 설립해 동네 사람들의 생활중심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김포지역에서 농민회의 맹아를 만들고, 지역 시민운동의 기초를 닦았습니다. 1989년 부활절 헌금은 ‘고난 받는 이들과 함께 하는 모임’의 씨앗이 되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감리교회와 한국교회를 개혁한다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그런 와중에 고난도 숱하게 겪었습니다. 독일로 도망가다시피 한 까닭입니다.
하나님은 내게 ‘멍에’와 ‘명예’를 골고루 주셨습니다. 그리고 독일 복흠교회와 지겐교회, 감리회 본부를 거쳐 지금 색동교회에서 일하도록 주선하셨습니다. 뒤늦은 자기발견이지만 목회자라는 직업은 내게 주신 소명(聖召)이며, 내 뜻과 달리 파송 받은 네 곳의 일터는 그때그때 내가 쓸모 있는 존재임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한 달 후면 2010년 부활주일에 창립한 색동교회도 창립 5주년을 맞습니다. 모든 경우, 출산의 아픔이 있기에 존재의 기쁨도 있는 법입니다. 그런 아픔은 우리더러 더욱 평화롭게 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젊고, 따듯하며, 평화로운 신앙공동체’인 색동교회 생일을 기억하고, 기념하려는 우리에게 “은혜와 평강”(고전 1:3)을 베푸시길 빕니다. 지금 색동가족 모두가 설립위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