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는 서부경남의 중심도시로서, 또 1925년 이전까지는 경상남도 도청 소재지로서 경상남도 지역에서 중요한 도시였다. 이 도시는 유가적 정신이 강한 보수적인 도시로서 특히 배일사상이 강했으며, 민족 의식과 민족교육 의식이 강했던 도시였다.
그러나 이곳에 기독교가 전래 된 후 복음운동은 인접지역으로 확대되었고 기독교 복음에 있어서도 중요한 지역으로 발전하였다.
1. 기독교의 한국 전래와 선교활동
한국에 복음이 전래된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측면으로 고찰할 수 있으나, 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 아침 제물포에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 목사와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라 목사가 입국한 것을 공식적인 기준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한국에 기독교 복음의 접촉을 보통 100-200년 정도로 생각하고 있으나, 사실은 이보다 더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2세기 이전에 한국과 기독교의 접촉의 가능성이 조심스럽게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보통 근대 이전의 접촉으로 8-9세기경 중국을 통한 경교(景敎,Nestorian)와의 접촉, 1593년 임진왜란을 통한 접촉, 1636년(인조14년) 병자호란을 통한 천주교와의 접촉 등을 들 수 있다.
개신교의 경우 한국에 성경을 처음 전해 준 사람은 영국인 바실홀(Basil Hall)은 1816년 9월1일 백령도와 청도(靑島) 근방에 상륙하여 그곳 주민들에게 한문성경을 나누어주었다. 군산만에 들어가 그곳 관리들에게 성경을 전하였고 약10일간 다도해 근방을 순항하였고 추자도에도 상륙하여 성경을 전한 듯하다. 1832년에는 '칼 구츨라프(Carl Gutzlaff)'가 독일 루터파 선교사로 내한했던 첫 선교사로 알려져 있다. 그는 공식적인 선교사가 아니라 동인도회사(東印度會社) 통역관으로 온 것이다.
그는 중국에 선교하던 개척선교사 로봇 모리슨(Robert Morison)의 친구였다. 그는 1832년(순조32년)에 로드 암허스트호(Rord Amherst)를 타고 압록강 지역과 한국의 서해안을 탐사하였는데 백령도와 대청도 그리고 소청도에서 정박하였을 때 성경을 반포하여 복음의 씨를 뿌리는 놀라운 역사였다. 그 후 1866년 8월말에 토마스 목사가 미국상선 제너럴 셔만호(General Sherman)에 통역의 자격으로 승선하여 대동강에 올라 왔다가 순교하였다. 그 당시 한국의 정세는 대원군 섭정 아래 카톨릭 탄압으로 말미암아 기독교에 대하여 거부반응을 계속하고 있었다. 토마스 목사가 처형당하기 전에 가지고 왔던 성경을 나누어주고 무릎을 꿇고 기도한 후 순교하였다. 그때 목격자 중 12세 소년이었던 최치량(崔致良)이 신자가 되었다. 그후 화란, 영국인등에 의한 접촉이 있었고, 보다 직접적으로 한국교회의 형성에 기여한 선교부는 만주지방에서 선교하였던 스코틀란드 연합 장로교회 선교사들이라고 할 수 있다. 1872년 중국선교사로 파송된 존 로스(John Ross.羅約한) 멕킨타이어 (McIntyre,馬勤泰)등은 만주 우장(牛莊)지방에서 1874년 한글로 성경을 번역하기 시작하였다.
1881년 한국인에게 첫 세례를 베풀었고, 서상륜(徐相倫)의 도움을 받아서 1882년에 최초의 한글 성경, 곧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이 간행되었고 백홍준, 서상륜에 의해 1883년부터 매서 전도가 시작되었다. 1887년에는 첫 한국어 신약성경본인 [예수셩교젼서] (Ross Version)가 간행되었다. 스코틀란드 연합장로교 선교사들은 조선에 입국할 수 없었으므로 이와 같은 방법으로 한국선교를 시도하였던 바 후일의 한국교회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런 여러 접촉에도 불구하고 실제적으로 개신교의 한국 선교는 1880년대 이후에 비로소 이루어졌다. 장로교회의 경우 1884년 이래로 미국의 북장로교(1884). 호주 빅토리아 장로교(1889), 미국 남장로교(1892) 카나다 장로교회(1897)를 통해 선교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이들 4대 장로교 선교부는 1893년 선교부간의 연합체인 '선교사 공의회'를 조직했는데 이들은 상호 협의와 합의를 거처 선교 지역을 분활하였다. 이 분활 안을 보통 '예양 협정' (Comity Arrangement)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선교부간의 인적(人的), 재정적 낭비를 막고 단시일안에 한국을 복음화하기 위한 목적에서 시행되었다. 이 협정에 따라 미국 북장로교는 제령,강계,평양,서울,청주,안동,대구,등 평안도,황해도 경상북도 지역을 맡게 되었고, 미국 남장로교는 전주,군산,목포,광주,순천 등 전라도와 충청도 일부 지방을 맡았다. 또 카나다 장로교(후에 카나다 연합교회)는 함경도지방과 간도지방을 선교구역으로 하였다. 호주 빅토리아 장로교회 선교부는 호주 장로교 선교부(Australian Presbyterian Mission)로 불리었는데 이들은 부산과 경남지역을 선교구역으로 하였다. 그래서 진주지방은 호주 선교부의 관활지역이 되었고 호주 선교부에 의해 이 지방에 기독교가 전파되기 시작한 것이다.
2. 호주 장로교 선교부와 경남 지방 선교
1) 호주 선교부의 선교 활동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한 두번째 장로교 선교부는 호주의 빅토리아주 장로교회(Presbyterian Chruch of Victoria)였는데 한국선교는 1889년 10월 데이비스 목사(Rev.Joseph Henry Davies)와 그의 누이 메리 데이비스(Miss Mary T.Davies)양에 의해 시작되었다. 데이비스는 한때 인도 선교사였으나 건강이 좋지 못하여 선교사로 일한지 22개월 후에 귀국하여 멜보른 대학교를 졸업하고 카오필드 문법학교(Caufield Grammar School)를 설립하여 교장으로 일했다. 그는 다시 인도 선교사로 가려고 했으나 한국선교의 긴박성을 알리는 중국주재 영국성공회 선교단체인 씨 엠 에스(CMS)소속인 월푸(John R.Wolfe)주교의 편지를 읽고 한국선교를 자원하게 되었다.
성공회에 속해 있던 그는 학교 교장직을 버리고 장로교로 이적한 후 에딘버러의 뉴 칼리지(New college)에서 신학수업을 마친 후 1889년 8월 목사 안수를 받았다. 목사가 된 그는 빅토리아주 청년연합회(Young Men's Fellows- hip Union)의 파송을 받고 1889년 8월 21일 멜보른을 떠나 한국으로 향한 여행을 시작하였고 그해 10월 2일 이른 아침 부산항에 입항하였다. 10월 4일에는 서울에 도착하였고 언더우드(H.G.Underwood). 헤론(Dr.Heron)등과 함께 생활하며 한국어를 습득하였다.
서울서 5개월을 보낸 후 아직 선교사가 없는 지방으로 가서 일하기로 작정한 그는 메리는 서울에 남겨둔채 1890년 3월 14일 서울을 떠나 부산으로 향했다. 서울을 떠난 그는 수원, 과천등 경기도 지방과 공주 등 충청도지방을 거쳐 경상도 지방까지 300마일에 이르는 약 20일간의 답사여행을 마치고 목적지인 부산에 도착했을 때는 1890년 4월 4일 금요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무리한 도보 여행으로 인해 천연두에 감염되었고 페렴까지 겹쳐 마지막 5일간은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절망적인 상태에 있던 그는 부산에 도착한 다음 날인 4월 5일,오후 1시경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가 한국에 온지 겨우 6개월 만이었다. 당시 부산에 체류했던 캐나다 선교사 게일(J.S.Gale)은 데이비스의 시신을 부산 영선동 뒷산에 매장하였다.
그의 죽음은 호주 교회로 하여금 한국 선교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데이비스를 파송했던 청년 연합회는 1890년 7월 23일 집행 위원회를 소집하여 한국에 선교사를 다시 파송 지원하기로 결의하였다. 또 1890년 창립된 장로교 여 선교회 연합회(P.W.M.U.Presbyterian Womens Missionary Union)도 데이비스양의 유지를 받들어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하기로 결의하였다. 그 결과 1891년에는 청년연합회의 파송을 받은 멕카이 목사(Rev.J.Mackay)부부와 여선교회 연합회의 파송을 받은 세 사람의 미혼 선교사인 멘지스(Miss Belle Menzies). 페리(Miss Jean Perry), 퍼셋(Miss Mary Fawcett)양 등 5명의 선교사들이 1891년 10월 내한하였다.
이들 선교사들은 부산진에 주택(선교관)을 마련하고 한국인과 접촉하기 시작하였고 구체적인 전도활동을 개시하였다. 그후 1894년에는 아담슨(손안로,Rev.A.Adamson), 1900년에는 엥겔(왕길지 Rev.G.Engel), 1910년에는 메킨지(매견시,Rev.N.Mackenzie), 메크레이(맹호은,Rev.F.Macrae), 1911년에는 멕크라렌(마라연,Dr.C.McLaren)등 여러 선교사들이 내한하여 부산, 경남지방에서 값진 봉사를 하였다. 호주 장로교회는 1889년 데이비스를 파송한 이래로 1940년 와킨스(왕영애,Miss I.Witkins)양을 파송하기 까지 76명의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이들은 부산에 선교기점(1891)을 마련한 이후 인접한 경남지역에서 활동하였는데 그 결과로 진주(1905), 마산(1911), 거창(1913), 통영(현 충무.1913)에 선교지부(Mission Station 를 설치하고 전도, 교육, 의료등 3분야에서 활동하였다.
진주는 경상남도 지방에서 가장 중요한 지역적 중심이었고 1925년 이전까지는 경상남도 도청 소재였다. 또 이곳은 사회신분상 계급의식이 강했고 경남지방에서는 가장 보수적인 곳이었다. 선교사들이 볼 때 이 지역은 서부 경남지역에서 중심 지역일 뿐만 아니라 이곳의 복음화는 인접지역 선교를 위해 전략적 가치가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선교사들은 진주지역 선교를 경남지역의 타지역보다 우선시 하였다.
① 진주지방 첫 선교사 커를(Dr.Hugh Currell)
진주지방에서 사역한 첫 선교사는 1902년 내한한 커를(Dr.Hugh Currell)의사인데 그는 호주에서 온 최초의 의료 선교사였고 진주지방에서 전도한 첫 외국인이었다. 그는 1915년 한국에서 은퇴할 때까지 13년간 이곳에서 일하면서 진주지방선교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의사이자 목사이기도 했던 그는 1902년 5월 19일 내한하였다.
아일랜드 북부지방인 안트림(Antrim)에 인접한 카를로이(Carnlough)에서 출생한 그는 1892년 벨파스트(Belfast)에 있는 아일랜드 왕립대학교(Royal University of Ireland)의 퀸스(Queens)대학에 입학하여 의학을 공부하였고 의사가 된 그는 만주지방으로 가서 선교사역에 동참하려고 하였다. 왜냐하면 이 당시 아일랜드 장로교회는 만주지방에 선교사를 파송하여 선교하고 있었고 또 의료선교사를 필요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호주로 인도하였다. 1889년 호주로 이주한 그는 빅토리아주의 벤딩고(Bendingo)에서 그리 멀지 않은 카아브람 (Kyabram)에서 일반의로 2년 6개월간 일하였다. 그후 그는 한국선교사인 아담슨을 만나게 되면서 한국선교를 생각하게 되었다. 아담슨으로부터 한국, 특히 부산 경남지방에서 일할 의사가 필요하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빅토리아 장로교 해외선교부에 한국선교를 자원하였다. 의료선교사로 임명받은 그는 빅토리아주 청년연합회(YMFU)의 파송을 받고 1902년 5월 19일 내한하게 되었다.
커를 의사가 내한 함에 따라 호주 선교부는 전도와 교육활동에 이어 의료활동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커를 의사는 1902년 10월에 작성한 1902년 5월부터 9월까지의 사역에 관한 보고서에서 자신은 한국 부산에 도착한 다음 날 부터 진료를 시작하였다고 했고 몸이 심히 아픈 경우를 제외하고는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환자들을 돌보아야 했다고 하였다. 처음에는 시약소를 쓸만한 공간이 없었으므로 부산진의 일신여학교의 작은 교실 하나를 빌려 사용했는데 매일 평균 20여명에게 치료를 해 주거나 약을 나누어 주었다고 했다.
커를이 한국에 온지 4개월이 채 되지 않았던 1902년 9월에는 부산과 경남지방에 콜레라가 발생하여 많은 희생자들이 있었다. 일본을 통해 유입된 이 때의 콜레라 때문에 많은 인명피해가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커를은 약품과 소독약을 분배하고 주사를 놓아주며 치료에 임했다고 했다. 이와 같은 그의 노력은 당시로서는 상당한 공헌이었고 한국인들에게는 큰 위로가 되었다. 1903년 엥겔목사와 함께 기장, 기찰, 암평 지역으로 의료순례여행을 다녔고, 아담슨과는 양산지역으로 순회하며 치료와 시약을 베풀었다.
이 당시 부산지방에는 일본인 의사도 있었고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가 운영하는 작은 병원이 있었기 때문에 부산지방에서 사역하던 커를 의사는 진주지방으로 옮겨가기로 작정하였다. 그는 시약소 마저도 없는 경남지방의 다른 곳으로 가서 봉사하는 것이 보다 뜻 있는 일로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호주장로교 해외선교부의 허락을 받아 부산을 떠나 진주로 갔는데 이것이 진주에 선교지부(Mission Station)을 개설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커를 의사 내외가 자신의 조수였던 박성애(1877-1961)부부와 함께 부산을 떠나 진주간 때는 1905년 10월 20일이었다. 이들은 진주성 내면 4동(북문안)에 있는 정 경철씨 소유 초가집을 임시 거주지로 얻었고 이곳에서 이 지방 복음화를 위한 전도,의료 교육사업을 시작하였다.
② 전도활동과 첫 교회의 설립
커를의사 부부와 그의 조수인 박성애 부부는 남도 제일의 양반도시이자 배일(背日)사상이 강했던 이곳에서 전도하는 일에 상당한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예견했으므로 우선 의료활동을 통해 간접선교를 중시하였고 또 교육활동을 통해 어린아이와 청소년 그리고 부녀자를 대상으로 활동하였다. 당시 이곳 진주의 인구는 약 4만명으로 추산되는데 전도에 상당한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예상했으나 그의 의료활동 때문에 이 지방에서 신임을 얻게 되자 전도의 결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곧 거주지를 봉래동으로 이전하였고 이곳에서 초신자들을 모아 예배를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1905년 설립된 진주교회(옥봉교회라고도 불렸음)였다. 커를의사가 진주에 도착한 지 2개월후인 1905년 12월에 쓴 보고서에서는 당시의 전도활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 "이곳에서의 저의 사역은 실로 많은 관심을 얻고 있습니다.그래서 처음부터 큰 격려를 받고 있으며 전망은 매우 밝습니다. 복음을 전할 때 상당한 관심을 보이고 있으며 믿는자의 수가 꾸준히 성장하고 있습니다. 매 주일마다 3차례의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평균 20여명의 남자와 7명의 부녀자들이 예배에 참석하고 있습니다.
노방전도와 쪽복음서를 판매하는 매서전도도 좋은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우리가 거주하는 한옥이 이 지방 중심지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이일을 적절히 수행할 수 있는 좋은 여건입니다." -
진주지방에서 첫 집회가 시작된 때는 1905년 이지만 조직적인 집회가 시작된 것은 1906년 부터였다. 커를의사와 박성애부부가 전도한 이들이 첫 회중이 되었고 이들은 이 지방 뿐만이 아니라 인접한 지역에서의 복음운동에 중요한 도움이 되었다.
진주지방에서 첫 세례식이 있었던 때는 1907년 6월 23일이었다. 이날 10명의 성인과 어린아이가 유아세례를 받음으로 진주지방 첫 수세자가 되었다. 그리고 이해에 약 30여명이 학습을 받음으로 진주교회는 날로 성장하여 갔다.
박성애는 후일 전도사로(1907), 장로로(1915)봉사하였고,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진주지방 첫 한국인목사가 되어 (1919) 진주교회의 첫 한국인 담임목사가 되었다.
③ 의료활동
커를과 박성애는 첫 거주지인 진주성 내면 4동(북문안)에 있는 초가집의 방 한칸으로 시약소로 사용하였는데 이것이 이 지방에서의 의료활동의 시작이었다. 커를은 시약소를 중심으로 의료, 보건 증진을 위해 봉사하였는데 비록 시설과 장비가 미약했으나 후일 병원이 설립되기 이전까지 연평균 7,000 명이 의료혜택을 받은 것으로 보고되었다. 이 당시 이 지방의 가장 흔한 질병으로는 피부병과 종양, 폐결핵, 눈병 등이었는데 이것은 주거환경과 비위생적 환경에서 오는 것이었으므로 환경개선, 위생교육, 검역 등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커를은 이 지방에서의 병원설립의 필요성을 느끼고 이를 추진하였다. 호주 장로교 여전도회가 1906년 6월 825파운드를 보낸 이후 호주 교회의 계속적인 지원으로 1913년에는 경남지방 최초의 병원을 개원하였는데 이것이 봉래동에 설립된 '배돈 병원'(Mrs.Paton Memorial Hospital)이다. 이 병원은 호주장로교회의 탁월한 선교사였던 페이튼 선교사의 부인의 서거를 기념하는 뜻에서 그녀의 이름을 따라 배돈 병원으로 명명된 것이다. 병원설립이 준비되고 있을 때인 1910년 간호사인 클라크양(Miss F.L.Cler- ke)이 내한하여 진주로 배속되어 커를를 도왔고 1911년에는 의사 멕클라겐 (Dr.C.I.McLaren)에 내한하여 진주 배돈병원에 배속되었다. 한국명 마라연으로 잘 알려진 멕크라렌은 당시 한국에서 유일한 신경정신과 의사였는데 1911년부터 그리고 1939-1941년은 진주 배돈병원에서 1923-1938년까지는 서울 세브란스병원과 의전에서 교수로 봉사하기도 했다. 1918년에는 여의사 데이비스양(Dr.E.J.Davies)이 내한하여 진주 배돈병원에서 봉사하였다. 그녀는 이미 1910년 내한하여 부산의 일신여학교에서 봉사한 언니(Miss M.S. Davies)와 함께 근 30년간 한국에서 사역하였는데, 이들은 한국에 온 첫 호주 선교사였던 데이비스 목사의 조카들이었다. 배돈병원에서는 진료만이 아니라 간호사 양성에도 힘을 썼는데 처음에는 간호사는 여성들에게 적절한 직업이 아니라는 오해 때문에 지원자를 얻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처음에는 과부와 문맹자를 간호사로 교육시켰고, 1930년대부터는 지원자가 늘어 자격을 갖춘 여성을 교육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1939년에는 간호사 손양과 이양을 호주 멜보른에 유학을 보냈는데 귀국후 손양은 세브란스에서 이양은 배돈 병원에서 근무했다고 한다.
이 병원 원장으로는 커를(1915년까지), 멕크라렌(1915-1923), 테일러(Dr.W.Taylor,1923-1938),데이비스(Dr.J.Davies,1938-1941)가 봉사하였다. 배돈병원은 경남 유일의 병원으로서의 이 지방 의료선교의 중심지였다.
④ 교육사업
커를의사 부부는 이곳에서 의료사업의 시작과 함께 교육사업을 시작하였는데, 그 노력의 결과로 설립된 학교가 이 지방 최초의 근대학교인 시원 여학교(The Nellie R.Scholes Memorial School)였다. 이 학교는 커를의사가 진주에 도착한 그 이듬해 그의 집에서 진료소를 열고 집 정원에서 인접한 지역 아이들을 모아 초등교육과정을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600년의 역사를 지닌 고도 진주에 세워진 첫 근대학교의 시작이었다. 1907년에는 교육학을 전공한 스콜스 양(Miss Nellie R.Scholes 柴校長)이 진주에 파견되었는데, 그녀는 이 지역 교육책임자로서 1919년 4월 사망시까지 값진 봉사를 하였다. 커를 의사 부인에 의해 시작된 이 학교를 시원 여학교라고 명명한 것도 1907년 이래 12년간 교장으로 봉사한 스콜스 선교사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이 학교에서 일한 선교사로는 캄벨(Miss A.M.Campbell,甘梅義) 커(Miss. E.Kerr,巨怡得), 클레크(Miss F.L.Clerke.可佛蘭西)등이었다.
이 학교는 1921년 당시 재학생이 250여명에 이를 만큼 크게 성장하였고 이 지역 유일한 여학교로 명망을 얻었으나 역시 신사참배 거부이유로 일제에 의해 학교 폐쇄령이 내려져 1939년 폐교되고 말았다.
진주지방에는 시원여학교와 더불어 남학생을 위한 광림학교 역시 호주선교부에 의해 운영되고 있었다. 노진현목사, 한상동목사는 목사가 되기 전 이 학교에서 교사로 봉직한 바 있다. 호주선교부가 운영하는 남자 학교는 일정기간이 지난 후 한국인 교회에 운영을 위임한다는 정책을 견지하였지만 광림학교만은 호주선교부 예산으로 유지되어 왔다. 당시로서는 진주의 한국인 교회가 광림학교를 운영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호주선교부는 세계 대공항의 여파로 광림학교 운영에 필요한 선교비 충당에 어려움이 있어 1929년 광립학교를 폐교하기로 하였다. 이것은 매우 불행한 결정이었으나 진주의 배돈병원 운영이 보다 시급하였기 때문에 호주선교부로서는 불가피한 결정이었다. 광림학교가 폐교된 이후 학교건물은 경남성경학교가 인수하여 사용하였다.
** 그리고 진주에서 1905년부터 여성 사역을 했다는 여성 미혼 호주 사역자의 글을 보고 놀랐습니다. 아마 커를 뒤에 있는 켈리(Miss Kelly,1907-1911)를 이야기 하겠죠
저는 이것을 부산 KBS특집 자료에서 보았습니다. 그 자료를 드립니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여기 동영상알 보시다 매혜란 매혜영의 어머니로 소개되는 부분에 오머니 매리 켈리가 니오는데 그는1912년 호주 선교사 맥켄지와 결혼했는데 그는 이미 진주에 와 그녀 혼자 여성 사역을 했다고 KBS는 전하고 있습니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1905년이면 커를의 선교와 동시기입니다 할렐루야
여성들은 이 분을 통해 큰 비젼 받으시길 원합니다. 의학 공부 내용도 있으니 한 시간 정도 동영상을 병원을 보며 꼭 관람하세요 할렐루야
샬롬shalom
Hallelujah
* 아래 방송에 나오는 매혜란, 매혜영은 맥켄지(호주 선교사)와 결혼한 호주 여 선교사 매리 켈리의 딸들입니다. 의사들은 꼭 보시고 사랑 담은 우리가 되도록 노력해요. 그리고 미스 캘리(매리 캘리)는 미혼 시절 진주에서 1905년부터 여성 사역을 했다고 방송에 나옵니다. 역사에 없는 부분입니다. 한 번 보시죠. http://busan.kbs.co.kr/asx.php?title=메켄지가의사람들한국에서의%20생명사랑100년&url=2002$special$2002mctuk 먼저 부산 KBS방속국에 가입하셔야 서비스 이용이 가능합니다. 강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