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유럽 등 30개국 120개 선원 세워
현각·무량 스님 등 외국인 제자 길러
'모든 것이 禪… 생활 속 최선' 가르침
“다 걱정하지 마라! 만고광명(萬古光明)이 청산유수(靑山流水)이니라.”
한국불교의 세계화를 이끈 조계종 원로이자 화계사 조실인 숭산(崇山)스님이 30일 오후 5시15분 서울 수유리 화계사에서 제자들에게 이런 임종게를 남기고 입적했다. 세수 77세. 법랍 57세.
1927년 평남 순천에서 태어난 스님은 일제강점기 지하독립운동을 하기도 했으며 해방 후 동국대에서 국문학을 전공하다 47년 마곡사에서 불교공부를 시작했다. 스님은 이 때 금강경을 읽다 ‘범소유상 개시허망(凡所有相 皆是虛妄ㆍ무릇 모습이 있는 모든 것은 허망하다)’이라는 대목에 발심, 출가를 단행했다.
49년 수덕사에서 고봉스님을 법사로 비구계를 받고 화계사 주지, 불교신문사 초대사장, 조계종 총무부장, 중앙종회의원, 원로회의 의원 등을 지냈다. 영결법회 및 다비식은 4일 오전 10시30분 충남 예산 덕숭산 수덕사에서 조계종 원로회의장으로 치러진다.
숭산스님은 우리 불교계에서 누구보다 먼저 전등의 눈을 해외로 돌린 선각자였다. ‘세계일화(世界一花ㆍ세계는 한 떨기 꽃)’라는 법문은 당대의 본분종사로 선풍을 드날리던 만공스님이 해방직후 남긴 화두였다. 하늘과 땅, 해와 달, 공기와 물이 둘이 아닌 한뿌리라는 것이 그 사상이다. 수덕사 덕숭문중의 가풍을 이은 숭산스님은 한국불교의 미래를 함축한 이 예언을 실천하기 위한 방편으로 아무도 가지 않던 길을 걸었다.
지난 40년간 한국선불교를 세계에 알린 그의 삶은 또 다른 구도의 행각이었다. 66년 일본 도쿄(東京) 홍법원을 시작으로 해외 포교에 나서 72년 미국 보스턴 인근 프로비던스에 조계종관음선종회 재미홍법원을 열어 미국인들에게도 한국불교를 가르쳤다. 스님과 제자들이 미국, 유럽, 남미, 아프리카 등 세계 각국에 세운 선원이 30여 개국에 120여 개, 신도만 5만여명에 이른다.
외국인 제자들에게 설법하고 있는 숭산스님(왼쪽)
숭산 스님은 도미 직후 영어를 배우고 아파트 임대료를 내기 위해 미국인이 운영하는 세탁소에서 일했으며, 이 때 우연히 책에 실린 사진만으로 스님을 알고 있던 브라운대 불교학 교수의 눈에 띄게 돼 미국대학에서 한국불교를 알리게 된 것은 널리 알려진 일화이다. 당시 숭산스님은 영어를 몰라 포교에 고생이 심했다고 훗날 회고했다.
한번은 스님이 “참선이라는 것은 자성(自性)을 깨달아서 자기를 완성하고 부처가 되는 길이오”하고 2분 정도 말했더니 교수가 통역을 하는데 20분이나 걸렸다고 한다. 교수에게 “그건 당신 얘기지 내 얘기가 아니오. 그걸 해석하면 어떻게 해요”했다고 한다.
스님이 가르친 미국인 가운데는 하버드, 예일, 보스턴대 학생들이 많았고 유럽과 동구권 유학생들도 있어 이들이 귀국해 선원을 개설하자 스님도 세계를 순방하며 한국 선을 가르쳤다. ‘만행-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로 널리 알려진 미국인 현각스님(화계사 국제선원장), 미국 LA 북쪽 캘리포니아 산속에 한국식 전통사찰 ‘태고사’를 지으며 최근 자전에세이 ‘왜 사는가’를 펴낸 무량 스님, 하버드대 출신의 무상스님, 예일대의 해량스님, 보스턴대의 무심스님 등 조계종으로 출가한 제자만도 수십 명에 이른다.
숭산스님과 수제자인 현각스님의 만남은 실로 기연이었다. 90년 2월 어느날, 하버드대 신학대학원에 재학중이던 현각스님은 숭산스님의 강연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미국과 독일의 유명대학에서도 찾지 못했던 삶의 의문에 대한 해답이 숭산스님의 어눌하고 짧은 영어강연 속에 있을 줄이야. 현각스님은 그날로 숭산스님에게 귀의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지구를 반 바퀴나 돌아 한국을 찾아 ‘구도의 길’을 시작했다.
숭산스님은 국제 포교활동으로 명성을 얻어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와 평화운동으로 유명한 베트남 출신의 틱낫한 스님과도 친분을 나누었다. 스님은 평소 “행주좌와(行住座臥) 어묵동정(語默動靜), 모든 것이 선이 아닌 것이 없다. 생활 속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선”이라고 가르쳤다. 제자들과 일대일 인故訝?통해 지도하는 ‘독참’(獨參ㆍ선문답)은 스님의 독특한 지도방식이다. 외국인 제자들이 한국에서 불교를 배울 수 있도록 화계사에 국제선원을 세웠으며, 계룡산에도 국제선원 무상사를 개원했다.
스님은 불교계가 어려움에 처했던 62년 비구ㆍ대처 통합종단의 비상종회 의장, 조계종 재무부장 등을 지내기도 했으나 종단 정치에 철저하게 무심했다. 자신의 깨달음의 세계를 전하는‘오직 모를 뿐’ ‘선의 나침반’ ‘허공의 뼈’등의 저서를 남겼으며, 제자들이 출간한 ‘부처님께 재를 털면’등의 법문집이 있다.
[숭산스님 입적]해외포교 한평생… 세계 4대 生佛 꼽혀 <동아일보 A26>
30일 입적한 숭산(崇山) 스님은 한국 불교의 해외 포교를 위해 자신의 생애 절반을 바쳤던 인물이다.
1970, 80년대 미국에서 포교할 때는 주말마다 각 도시를 돌며 법문을 했고 1년에 지구를 세 바퀴 돌 정도로 세계 각국을 돌아다녔다. 도올 김용옥은 이런 그를 보고 “인간세의 원(願)을 행(行)하고 다니는 장정(長征)이란 신라승려 혜초의 왕오천축국 기행보다 더 방대한 것이요, 마오쩌둥(毛澤東)의 장정보다 더 처절한 측면이 있다”고 표현했다.
이런 노력 덕분에 ‘만행-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의 저자인 미국인 현각(玄覺) 스님이나 미국 캘리포니아 주에 한국식 절 태고사를 10년째 짓고 있는 미국인 무량(無量) 스님 등 50여명의 외국 지식인들을 출가시켰고, 1000여명의 외국 불제자(佛弟子)들을 길러냈다.
그는 또 뛰어난 선승(禪僧)이었다. 1996년 영국 케임브리지대 종교학과 교수팀이 세계의 불교 전통에 관해 출간한 ‘부처와 비전’이라는 책은 티베트 불교지도자 달라이 라마, 베트남 승려 틱 낫 한, 캄보디아의 마하 거사난다와 함께 그를 4대 생불(生佛)로 꼽았다.
그는 또한 자신을 낮추는 하심(下心)을 실천한 스님이기도 했다.
1972년 한국 불교를 알리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가 로드아일랜드 주 프로비던스 시에 머물 때 그는 낮에는 세탁기 수리공으로 일하며 2년여를 살았다. 한국에서는 조계종 종회 의장을 지내던 그였다. 스님은 언어에 구애받지 않는 빼어난 강연자였다. 그의 1대 제자라고 할 수 있는 미국인 무상(無上) 스님은 1975년 예일대 법대에서 그의 법문을 처음 들었을 때의 감동에 대해 “큰스님의 가르침 방식은 완전히 소크라테스 문답식이었다. 그의 언어는 살아 있는 것이었다”고 회상했다. 주어와 술어가 도치되고, 형용사와 명사가 혼동되는 ‘콩글리시’였지만 그의 법문에는 듣는 사람을 끌어들이는 마력이 있었다.
30일 오후 서울 강북구 수유동 화계사에서 그가 입적하려고 하자 제자들이 “스님, 열반하시면 저희는 어떻게 합니까”라고 물었다. 이때 그는 “다 걱정하지 마라! 만고광명(萬古光明)이 청산유수(靑山流水)니라”라고 말한 뒤 눈을 감았다.
제자들은 평소 “자신을 드러내지 말라”고 가르쳐 온 스님의 뜻을 받들어 4일 다비장(茶毘葬)이 끝난 뒤에도 사리를 수습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30일 입적한 숭산(崇山)스님은 무엇보다도 세계에 한국 불교를 전파한 공로를 높이 평가받는 큰 스님이다. 1966년 일본 홍법원 건립 이후 40년 가까이 세계를 돌며 30여개국에 120여개의 선원을 세운 공로로 미국.유럽 등지에서 외려 더 이름이 높았다.
때문에 10여년 전부터 서구에서는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 등과 함께 세계 4대 생불(生佛)로 숭앙받아왔다. 지구촌에서 가장 존경받는 '구루'(영적 스승)로 손꼽힌 것이다. 막상 본인은 생불이라는 추앙에 대해 "서양인들의 과장된 표현에 불과하다"고 손사래를 쳐왔다.
숭산 스님의 업적은 20세기 중반 이후 서구의 불교 붐과도 무관하지 않다. 달라이 라마가 뉴욕 센트럴파크에서 법회를 열 때 수만 청중이 모여들고, 프랑스 플럼빌리지에서 활동 중인 베트남의 틱낫한 스님을 따르는 해외 불자들이 확산되는 등의 현상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제자 스님들에 따르면 숭산 스님의 입적 모습도 편안함 그 자체였다. 성광(화계사 주지)스님에 따르면 최근 몇년새 노환으로 고생했던 숭산 스님은 열반 직전인 30일 오후에는 컨디션이 잠시 좋은 것으로 보였다.
다만 입적 직전 "나, 잠시 눕겠다"고 말한 것이 이상한 징후였을 뿐이다. 이 때 제자들이 "스님, 이제 우리는 어찌 해야 합니까?"라고 묻자 "다 걱정 말라"면서 짧은 열반송을 남겼다. 열반송은 "만고(萬苦)가 광명(光明)하니 청산유수(靑山流水)라(만고가 밝으니, 산은 푸르고 물은 흘러간다)"였다.
숭산 스님의 해외포교는 그의 은사 스님인 고봉 선사의 가르침 덕분이다. 고봉은 숭산 스님에게 "너는 불교의 세계화에 힘을 써라"고 하명했고, 숭산 스님은 일본 홍법원에 이어 1972년 이후 미국에 건너가 세탁소 생활을 거쳐 하버드대학에서 정식으로 영어를 익혔다.
그의 해외포교는 미국뿐만 아니라 캐나다(74년 이후), 폴란드 등 동유럽(78년 이후), 영국(80년 이후)으로 확장됐다. 해외 제자들은 700여명으로 꼽힌다. '만행'의 저자로 유명한 현각, 미국 태고사의 주지 무량 외에 무심(화계사 국제선원장).대광(미국 동부 프로비던스 홍법원장).대각.대봉.대긍.대성 스님이 그들이다. 국내 제자들로는 성광.도관.정수.오륜.담오 스님 등이 있다.
숭산 스님은 평소 "온 세상은 한 송이 꽃"이란 말을 자주했다. 불교가 전세계를 감싸안을 대 안 종교임을 암시한 말로, 절 집안에서 할아버지 스승인 만공(만공) 스님이 강조했던 '세계일화(世界一花)'의 정신을 이어받은 것이다.
또 그는 '오직 모를 뿐'이란 말을 외국인 선 수행자에게 자주 던졌다. '자신의 본성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본래의 상태로 돌아가라'는 가르침이었다. 숭산 스님은 1996년 조계종 총무원의 감사패를 받았다. 저서로는 '큰 스님과의 대화''산은 푸르고 물은 흘러간다''온 세상은 한 송이 꽃'등 20여권이 있다.
숭산(崇山) 스님은 30일 임종 직전 “스님께서 가시면 저희는 어떻게 합니까?”라며 안타까워하는 성광 스님(화계사 주지) 등 제자들에게 이 한 마디를 남겼다고 한다. “Only don’t know”(오직 모를 뿐)란 한 마디로 미국과 유럽 대륙뿐 아니라 이스라엘에 이르기까지, 숱한 벽안(碧眼)의 지식인들을 구도(求道)의 길로 이끈 스승다운 깔끔한 마무리였다.
스님을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만나 출가한 제자 현각 스님(화계사 국제선원장)은 이날 스승의 입적 소식을 전하며 “스님은 마지막까지도 ‘너희들 조심해라. 몸도 믿을 수 없고, 마음도 믿을 수 없다. 오직 모를 뿐이란 사실을 새겨라’라고 말씀하셨다”고 전했다.
38년에 이르는 스님의 해외포교는 어쩌면 우연한 인연(因緣)으로 시작됐다. 1960년대 초 스님이 조계종 총무부장으로 있을 때, 동국대 기숙사를 짓기 위해 공사를 하던 중 지하에서 일본인 유골이 무더기로 발굴됐다. 스님은 유골을 화계사에 안치했고 이 소식이 일본에 알려지면서 일본 불교계 초청으로 도쿄를 방문했다. 그때 도쿄에 홍법원을 개설한 뒤, 1969년 홍콩, 1972년 미국에 홍법원을 열고 본격적인 해외포교에 나섰다.
스님은 “당시 미국 등 서구에는 형식에 치우친 일본선(禪)이 선풍을 일으키고 있었다”며 “초기불교의 좋은 전통을 간직한 우리 선불교를 알려야겠다는 사명감이 들었다”고 생전의 인터뷰에서 밝혔다. 1970년대 이후 스님은 1년에 지구를 두 바퀴씩 도는 일정을 강행군하며 세계에 한국의 선불교를 알리는 데 힘썼다.
스님의 영어 실력은 유창하지 않았다. 때로는 문법도 파괴했다. 그러나 “Who are you?”(당신은 누구입니까?) “Why alive?”(왜 삽니까?) 등 의표를 찌르는 그만의 독특한 화법과 솔선수범하는 수행은 숱한 서구 지식인들을 감화시켰다.
스님이 세계를 돌며 강조한 정신은 ‘세계일화(世界一花)’, 세계는 한 송이 꽃이라는 말이었다. 세계가 보편적 진리에 의해 하나로 연결될 때 비로소 인간은 제 모습을 찾을 수 있다는 뜻이다. 스님은 지난 2001년 해외포교 35주년을 기념해 나온 책 ‘世界一花’ 머리말에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인데/ 산은 푸르고, 물은 흘러가네./ 동서남북/ 지구촌을 돌고 돌아 35년./ 올바른 생활을 보여주기 위하여 하루도 쉬지 않고/ 달리고 달리고 또 달렸네”라고 회고했다.
전세계에 한국불교 전파한 숭산스님 입적 <서울신문 29>
▲ 숭산스님
불교 조계종 원로의원이자 화계사 조실인 숭산 스님이 30일 오후 5시15분 서울 수유리 화계사에서 입적했다. 세수 77세. 법랍 57세.
1927년 평안남도 순천에서 태어난 숭산 스님은 47년 마곡사에서 출가 득도,49년 수덕사에서 고봉 선사를 법사로 비구계를 수지했다. 화계사 주지, 불교신문사 초대 사장, 조계종 비상종회의장 등을 역임한 숭산 스님은 특히 전세계에 한국 불교를 전파하는 데 일생을 바쳤다.
스님은 한창 때는 1년에 지구를 두 바퀴나 돌기도 했으며, 열반에 들기 전까지도 1년에 서너 차례씩 미국, 홍콩, 말레이시아, 유럽 등지의 해외선원을 순방하는 등 노익장을 과시했다.
저서로는 ‘큰 스님과의 대화’‘산은 푸르고 물은 흘러간다’‘온 세상은 한 송이 꽃’‘천강에 비친 달’등이 있다. 영결식은 4일 오전 10시30분 충남 예산 덕숭산 수덕사에서 조계종 원로회의장으로 봉행될 예정이다.
서양에 한국 불교의 선을 전한 숭산 스님이 30일 오후 5시15분, 조실로 있는 서울 수유동 화계사에서 입적했다. 세수 77, 법랍 57.
숭산 스님은 평안남도 순천에서 태어나 1947년 출가해 화계사 주지, 불교신문사 초대 사장, 조계종 비상종회 의장 등을 지냈다. 고인은 특히 1966년 일본 홍법원을 시작으로 40년 가까이 세계를 돌며 32개국에 130여개의 선원을 세워, 서양에서만 5만여명의 제자를 길러냈다.
대한불교 조계종 원로의원인 고인의 장례식은 4일 오전 10시30분 충남 예산 수덕사에서 원로회의장으로 봉행되며, 다비식이 이어진다. 조연현 기자 cho@hani.co.kr
“걱정마라, 만고광명이 청산유수니라”
△ ‘부처님 오신날’ 외국인 제자들과 함께 한 숭산 스님(앞줄 오른쪽에서 4번째).
“큰스님, 스님이 가시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다 걱정 마라. 만고광명이 청산유수니라.”
30일 오후 5시15분. 선불교의 큰 별 숭산 스님은 화계사의 주지 성광 스님과 국제선원장 현각 스님 등 수십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제자의 물음에 이렇듯 한마디만 남기고 열반에 들었다. 제자의 ‘애타는 심정’마저 선사의 심검으로 베어버렸다. 숭산 스님은 ‘왜 선을 수행하는지’에 대해 “자신의 참모습을 아는 일”이라고 분명히 했다.
“모두 놓아 버려라. 그 다음엔 우리의 견해나 조건, 상황을 모두 놓아 버리고 다만 행할 뿐.”
평소 그의 이런 설법은 생사의 경계에서도 일관됐다. ‘오직 할 뿐’이었다.
일제 식민시대에 태어난 스님은 어릴 시절부터 시대를 고민하는 젊은이였다. 17살 때 독립운동에 가담해 일본 헌병대에 체포, 수감돼 감방에서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숭산 스님은 1946년 동국대학교 국문학과에 입학했으나 정치 운동이나 학문으로는 사회에 도움이 되기 어렵다고 보고 4대 독자의 몸으로 출가의 길을 선택했다. 47년 10월이었다.
그는 깊은 암자에 들어가 불교 기도문인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외며 백일기도를 해 힘을 얻은 뒤 경허-만공 스님으로부터 이어온 법맥을 이어받은 고봉 스님의 가르침에 따라 참선을 시작했다.
충남 예산 수덕사에서 동안거(음력 10월 보름부터 정월 보름까지 승려들이 바깥출입을 삼가고 수행에 힘쓰는 일)를 마친 그는 누더기를 걸친 채 소주 한 병과 오징어 한 마리를 들고 고봉 스님을 찾아가 법거량(불가의 스승이 제자의 수행 정도를 문답으로 점검하는 것) 끝에 깨달음의 징표인 법인가를 받았다. 22살의 새파란 나이였다. 60년 세랍 33살에 불교신문사 초대 사장을 지낸 스님은 66년 일본에 홍법원을 세워 외국 포교를 떠나며 인생의 전기를 맞게 된다.
그는 한국 불교에 대해선 전혀 아는 것이 없던 서양에 한국의 선을 알려 69년부터 미국, 캐나다, 브라질, 프랑스에 선원을 지어 선풍을 드날렸다.
“유 애스크, 아 앤서. 디스 이스 러브.”(네가 묻는데, 내가 대답하는 것. 이것이 바로 사랑이다.) 미국 하버드대학 강연에서 한 학생이 “사랑이 무엇이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늦은 나이에 영어를 익혀 오직 간결하고 선적이었던 그의 문답은 복잡한 지식에 식상한 서양인들을 매료시켰다.
그는 동양의 선불교에 무지한 서양인들을 위해 일본 선 방식으로 공안(화두)을 하나하나 타파해 나가도록 지도했다.
돈오점수를 인정하지 않는 국내 전통 선가에서는 단계적인 깨달음으로 이끄는 그의 이런 지도 방식 때문에 “일본 선의 아류”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계룡산 국제선원 무상사 조실 대봉 스님, <만행―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의 저자로 화계사 국제선원장인 현각 스님, <왜 사느냐>의 저자인 미국 캘리포니아 태고사 주지 무량 스님 등 수많은 외국 제자들을 길러냈다.
그래서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의 교재에선 티베트의 정신지도자 달라이라마, 베트남 출신 프랑스 플럼빌리지의 틱낫한 스님, 캄보디아의 종정 마하 고사난다와 함께 세계 4대 생불로 소개되기도 했다.
그는 늘 “세상의 복잡한 문제를 달리 풀려고 하지 말고, 자신을 돌아보는 것으로부터 출발하라”고 가르쳤다. 화계사 (02)902-2663. 조연현 기자 cho@hani.co.kr
조계종 원로의원 숭산스님 입적 <경향신문 14면>
대한불교 조계종 원로의원이자 화계사 조실인 숭산 스님이 30일 오후 서울 화계사에서 원적했다. 세수 77세. 법랍 57세.
평안남도 순천 출신인 숭산 스님은 1947년 마곡사에서 출가해, 49년 수덕사에서 고봉 선사를 법사로 비구계를 수지했다. 58년 화계사 주지, 60년 불교신문사 초대 사장 등을 역임했다.
숭산 스님은 60년대 초 군승제도의 시행과 비구대처 통합종단 비상종회 초대 의장으로 감찰제도를 도입하는 등 종단기강 확립에 기여했지만 무엇보다 한국불교 국제화에 일생을 바쳤다. 숭산 스님이 해외포교에 원을 세운 것은 만공 스님의 가르침이 밑바탕이 됐다. 만공 스님의 세계일화(世界一花·세계는 한송이 꽃)라는 가르침이 해외포교에 나서는 자극제가 됐다.
숭산 스님이 해외포교에 나선 것은 66년 일본에 홍법원을 세우면서부터다. 한·일 국교정상화 이후 최초로 일본에 사찰을 건립한 스님은 이후 홍콩과 미국, 캐나다에 홍법원을 세우면서 한국불교의 세계화에 진력하기 시작했다. 구미 쪽으로 포교의 폭을 넓혀가던 스님은 동구권과 유럽권으로도 진출해 한국불교를 알렸다. 80년 영국 런던을 필두로 81년 스페인에 국제선원을 세웠고 남미 브라질에도 한국불교의 씨앗을 뿌렸다. 87년에는 국내 선지식으로는 최초로 남아프리카공화국 포교활동에 들어갔고 94년에는 베트남에도 한국불교를 알리는 데 앞장섰다.
해외포교 활동과 더불어 늘어나는 외국인 제자들을 위한 선원을 국내에도 개설했다. 90년 화계사에 국제선원을 세웠고 이어 계룡산 무상사를 개설, 자신의 가르침을 받고 출가한 외국인 승려들에게 한국불교의 진면목을 알렸다.
숭산 스님은 해외에서 항상 ‘오직 모를 뿐’이라는 화두로 외국 엘리트들의 마음을 움직였고 부처의 길로 이끌었다. 숭산 스님이 뿌린 해외포교의 씨앗은 현재 35개국 120여개의 국제선원으로 자라났고 제자들만 5만여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 캘리포니아 모하비사막에 전통적인 한국사찰 ‘태고사’를 건립하고 ‘왜 사는가’라는 책을 펴낸 무량 스님, 현재 화계사 국제선원장으로 숭산 스님을 지근거리에서 모셨던 무심 스님, 베트남 전쟁 세대로 반전운동을 하다 숭산 스님의 설법을 듣고 출가해 계룡산 무상사 조실로 있는 대봉 스님 등이 숭산 스님의 제자들이다. 또 만행 ‘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의 저자인 현각 스님도 숭산 스님의 가르침을 평생 화두로 삼아 출가한 대표적인 수제자다. 장례식은 오는 4일 수덕사에서 원로회의장으로 치러진다.
〈배병문기자〉
'세계 4대 生佛' 화계사 조실 崇山스님 입적 <한국경제>
조계종 원로의원이자 한국불교를 세계에 알린 선구자로 손꼽히는 숭산(崇山·서울 화계사 조실)스님이 30일 오후 5시 20분 서울 수유리 화계사에서 입적했다.
세수 77세.법랍 57세.
평남 순천에서 기독교 집안의 4대 독자로 태어난 숭산 스님은 평안공업학교와 동국대를 나왔다.
광복 전에는 일제의 횡포와 만행에 대항해 독립운동을 벌이다 옥고를 치렀으며 광복후 좌우익의 극한적인 충돌에 회의를 느끼고 지난 47년 마곡사에서 수해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이후 숭산 스님은 고봉선사로부터 받은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뜰앞의 잣나무)'를 화두로 삼아 수덕사 선방에서 치열하게 정진한 끝에 고봉선사의 전법제자로 인가받았다.
고인은 지난 66년 일본 신주쿠에 홍법원을 개설한 것을 시작으로 해외포교에 나서 한국불교를 세계에 알리는 데 매진,달라이라마 등과 함께 세계 4대 생불(生佛)로 추앙받고 있다.
지난 72년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홍법원을 열었고 캐나다 폴란드 영국 브라질 프랑스 등 세계 32개국 1백20여곳에 국제선원을 개설해 외국인 제자를 길러냈다.
'만행-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의 저자 현각 스님,미국 캘리포니아에 한국 절을 짓고 있는 무량 스님 등이 모두 그의 제자다.
불교 조계종 제21교구 송광사 말사인 자운사에서 고려시대 불교 경전인 다라니경(陀羅尼經)과 금강경 해석서인 주금강경(注金剛經) 등 보물급 유물 6점이 발견됐다.
중앙대 송일기(50·서지학) 교수는 지난 5월 광주 동구 지산동 소재 자운사의 아미타좌불상 복장(腹藏) 유물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불교 경전인 다라니경 등의 유물을 발견했다고 30일 밝혔다.
여기에서는 복장조성기 2점과 밀교사상이 배태된 만다라의 기묘한 도상을 배치한 범어 다리니 2점, 깨알 같은 글씨로 적은 묘법연화경(일명 법화경) 1점, 주금강반야바라밀경 1점 등 총 6점이 발견됐다.
이 중 고려 중원부(충주 지방)에서 대정 20년(1184)에 제작된 ‘만다라’ 다라니는 중앙에 비로자나불을 안치하고, 그 주위를 범어로 된 대수구다라니를 19겹 원으로 둘러 기록했다. 석가탑에서 출토된 무구정광다라니경과 개성 총지사 탑에서 출토된 보현인다라니경에 이어 국내에서 세번째로 오래된데다, 문양이 독특해 이 분야 연구의 획기적 자료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