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대한 제 발언입니다. 세상은 제 목숨을 사랑하고 나는 나의 목숨을 미워하고 주님께 맡겨 십자가에서 장사되므로 새 생명을 얻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니 세상에 속한 유대인의 목숨인 자존감을 여지없이 뭉개 버리십니다. 결국 미움을 받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심지어 강도인 바라바보다 세상의 선호도가 나빴습니다. 인간의 목숨인 자존감을 건드리는 것은 강도보다 더 미운 일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으로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이 볼 때 아주 밉상입니다. 주님이 그렇게 될 거라고 예언하셨습니다. 생명의 냄새를 좋아할 사망은 없습니다. 생명의 냄새가 참 좋은데 세상은 속이 뒤집혀 미워합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15:19) 당연합니다. 만일 세상의 미움을 받지 않고 박해가 없다면 생명의 사람이 아닐 수도 있죠. 한 동안 테스형이라고 부른 가수가 세상에 바람을 일으켰습니다. 저는 소크라테스가 왜 형이냐 나는 영원한 생명나무이기에 비록 기원 전 470년에 그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고 해서 형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너 자신을 알라 하는 그의 말에 저의 대답은 ‘나는 나를 모른다 난 주 예수그리스도만 안다 그래서 나는 나를 안다’ 이렇게 대답하겠습니다.
그는 나 보다 훨씬 못한 사람입니다. 나는 영원한 생명의 사람인데 그는 한 순간의 세상을 살다간 인간이었을 뿐입니다. 그 보다 100년 정도 먼저 태어난 석가도 저것이 열반이라 하므로 자신이 열반의 길이 아니었음을 고백했답니다. 그렇지만 저는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대속의 은총을 입고 진리의 성령 안에서 새 생명을 얻어 영원한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었으니 석가나 소크라테스를 흠모할 수가 없죠. 그 가수의 열풍에 휩쓸리는 그리스도인이 있다면 불어라 열풍아 하고 그 앞에서 그와 함께 합창을 해야겠지요. 웃기는 일입니다. 나와 철학자 소크라테스를 비교하는 것은 주님의 희생에 대한 큰 모독입니다.
그래 세상아, 너는 날 미워하겠지. 스피릿이 다르니 몹시 거북하겠지. 미워서 죽겠지. 세상아 사실 나도 널 싫어해. 죽은 것을 좋아할 수는 없지. 사망이 좋아서 주께서 저들의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말라 하신 건 아니지.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 주시고 자신의 몸과 피를 주시므로 영생을 얻도록 하기 위해 오래 참으시는 사랑이지. 나는 사망이 싫어 육신의 스피릿은 정말 싫어. 그러나 구원의 가능성이 있기에 싫지만 주의 이름을 부르며 꾹 참는 거야. 넌 내가 생명의 냄새와 생명의 스피릿을 발산하는 것이 엄청 밉겠지? 그래 세상아. 나도 이 사망의 바다를 빨리 떠나고 싶어. 그때가 언제일지 가보자. 넌 미워하고 난 싫어하면서 싸우며 가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