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天上天下 唯我獨尊 三界皆苦 我當安之"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
'하늘 위와 하늘 아래에서 오직 나 자신이 가장 고귀하구나.
중생들이 사는 세계에 괴로움으로 가득하니 내가 마땅히 편안하게 하리라.'』
부처님께서 이 땅에 오시자마자 선언(宣言)하셨다는 내용이다.
참고로 말하자면, 부처님은 어머니 마야부인의 옆구리에서 태어나시고는 곧바로 동서남북
사방(四方)으로 일곱 걸음을 걸으시고는 위와 같은 탄생게(誕生偈)를 읊으셨다고 한다.
그런데 과연 옆구리에서 사람이 태어나고, 태어나자 바로 걸으면서 말까지 할 수 있을까?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태어나서 곧바로 걸으시고, 읊으셨다는 이러한 설화적(說話的)인 표현은 범상(凡常)하지 않은
인물의 태어남을 남다르게 묘사하려는 당시 인도에서의 관행(慣行)이었다.
(당시 인도는 네 가지의 신분계급이 뚜렷했고 신분에 따라 태어나는 방식을 다르게 표현하였다.)
왕족(王族) 출신이었던 부처님의 탄생 과정도 당시의 관행대로 범상(凡常)치 않게 묘사되었던
것이다.
특히 태어나자마자 곧바로 읊으셨다는 그 짧은 탄생게(誕生偈)에는
부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와 ‘오셔서 무엇을 가르쳐 줄 것인지’에 대한 해답이 명쾌하게
들어있다고 볼 수 있는, 상징성(象徵性)의 표현치고는 아주 멋지다 할 수 있다.
그 멋진 표현을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누어서 살펴보자.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 :
하늘 위와 하늘 아래에서 오직 나 자신이 가장 고귀하다.
‘하늘 위와 하늘 아래에서’라는 말은 존재하는 모든 세상을 말하는 것이다.
‘오직 나 자신이...’에서의 '나'는 부처님 자신만을 지칭하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누구나 각자의 자기 자신을 의미하는 일반적인 대명사이다.
생명(마음)을 가진 존재들 개개(個個)의 자기 자신이다.
이러한 개개의 자기 자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존재라는 말씀이시다.
예외 없이 누구나 자신의 입장에서는 자기 자신이 가장 귀할 수밖에 없다.
당연한 사실임에도 우리들은 망각(忘却)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제 세상에서 가장 귀(貴)하고 값진 것은 바로 ‘그대 자신’이라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그 이유를 두 가지 측면에서 언급해 보자.
① 모든 중생에게는 불성이 있다(一切衆生 皆有佛性).
② 이 세상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지어내는 것이다(一切唯心造).
먼저, ‘모든 중생에게는 불성(佛性)이 있다(一切衆生 皆有佛性).’
부처님께서 보리수(菩提樹) 아래에서 큰 깨달음을 이루시고, 독백(獨白)처럼 읊으셨던 말씀이
있었다.
『참으로 묘하고 묘하구나.
모든 것이 다 내 안에 구족되어 있구나.
삶과 우주에 대한 진리를 여실(如實)히 볼 수 있는 지혜광명(智慧光明)이 내 안에 있구나.
또한 모든 억압(抑壓)과 속박(束縛)에서 벗어나 존재하는 모든 것에 걸림이 없이 자유자재하게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이 내 안에 있구나.
본래(本來)부터 모든 사람들에게 이러한 지혜와 능력이 다 갖추어져 있구나.
그렇지만 욕망으로 인한 번뇌 망상 때문에 이러한 본래의 자기모습을 보지 못하고 있구나.』
본래의 자기모습을 부처의 성품, 즉 불성(佛性)이라고 한다.
이러한 불성을 마음(정신)을 가지고 있는 생명체는 누구나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누누이 강조하셨다.
‘자기 자신의 참된 모습, 즉 불성을 깨우쳐라(발견하라)’라고.
그런데 자기의 본래 모습을 보기 위해서는 번뇌망상(煩惱妄想)을 걷어내야 한다.
마치 구름이 해를 가리고 있는 것처럼, 내 속의 번뇌가 참된 마음(모습)을 가리고 있다고
하셨다.
이를 중생(衆生)이라고 한다.
번뇌가 걷어내어 졌을 때, 이를 부처(깨달은 사람)라고 한다.
중생과 부처의 차이는 번뇌의 유무(有無)에 있는 것이다.
번뇌에 물들지 않은 본래의 마음,
즉 불성이 있다는 것은, 그것도 부처님과 같이 특별한 존재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고
모든 중생이 본래부터 지니고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우리가 수행을 하는 근거가 여기에 있다.
지금은 번뇌로 인해 불안정한 상태이지만, 번뇌를 정화함으로써 원래의 안정된 상태로
되돌아 갈 수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수행의 필요성을 일깨워 주는 것이며, 희망을 갖게 해 주는 일이다.
내 속에 보물과 같은 불성(佛性)이 있다는 것...
그 불성은 깨달음에 의해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니고, 깨달음에 의해 '발견되어지는 것'이라는 것...
그리하여 나도 부처님과 같이 대자유인이 되어 진다는 것...
귀한 나 자신일 수밖에 없다.
다음,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지어내는 것이다(一切唯心造).’
여기 ‘나’라는 존재가 있고, ‘세상’이라는 존재가 있다.
이 두 존재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인식(認識)을 떠나서는 이 둘 사이에 어떤 연관성을 찾을 수가 없다.
나는 인식하는 주체(主體)이고, 세상은 인식되어지는 객체(客體)이다.
인식하는 주체가 없이는 인식되어지는 대상도 없다.
인식하는 주체인 내가 있음으로써 인식되어지는 모든 것들, 즉 세상도 있게 되어 진다.
나는 육체와 마음(정신)이 결합되어 있는 상태인데, 육체는 마음이 이끄는 대로 움직여 나가는
하인(下人)과 같고, 마음은 육신을 움직이는 주인(主人)과 같다.
따라서 인식하는 주체의 주인공은 ‘마음(정신)’이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이 마음에 의해서 인식되어지고 받아들여져서 있게 된다.
세상이 있어도 세상이 있는 줄을 어떻게 아는가?
세상을 인식할 줄 아는 마음이 있어서 알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내게 들어와 있는 세상은 내 마음이 비춰낸 세상이다.
내 마음에 의해 인식되어진 세상이다.
그런데 사람들마다 마음의 상태가 똑같지 못하다.
마음에 끼어 있는 때(번뇌)의 상태가 같지 않기 때문이다.
때문에 받아들인 세상도 같은 세상이 아니고 저마다의 제각각 세상이다.
어쨌든 인식하는 주체인 내가 없다면, 인식되어질 그 어떤 것도 있지 않게 된다.
내게 비춰진 모든 것은 다 내가 있음으로써 있는 것이기에 나는 나의 모든 것을 있게 만드는
근원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나는 세상에서 가장 귀한 존재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제 후반부의 구절(句節)에 대해 살펴보자.
“삼계개고 아당안지(三界皆苦 我當安之)” :
중생들이 사는 세계에 괴로움으로 가득하니 내가 마땅히 편안하게 하리라.
삼계(三界)는 뭇 생명체들이 사는 세계를 그 정신적 수준에 따라 분류한 세 가지 세계를 말한다.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가 그것으로 그에 관한 설명은 생략하겠다.
부처님이 세상을 보니 그 속에서 중생들이 힘들고 괴롭게들 살아가고 있다.
그 모습들이 하도 딱해서 평안(平安)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시고자 한다.
여기서의 ‘나’는 불성(佛性)을 깨달아 그 기능을 온전히 회복한 상태에 있는 존재를 말한다.
즉, 마음의 눈을 뜨신 분을 말한다.
석가모니 부처님 당신 자신이 그런 분이기에, 뭇 중생들에게 본래 그대로의 마음을 잘 알아
그 기능을 회복하게 함으로써 평안을 얻도록 해 주시겠다는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신 이유를 말씀하신 것이다.
불성(佛性)을 알든 모르든 상관없이 불성이 있는 이상, 누구나 다 그 자체로 고귀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
다만, 중생은 자기 속에 보물이 있음에도 있는 줄을 알지 못하고 있는 존재이고,
부처는 그 보물을 꺼내어 자유자재로 활용하고 있는 존재일 뿐이다.
아는 분[부처]은 알지 못하고 있는 이[중생]들에게 알려주고자 하는 것이다.
애써 왜 그렇게 하시려는 것일까?
대자대비(大慈大悲)의 마음 때문이다.
자기 속에 보물이 있음에도 있는 줄 알지 못하고, 늘 자신은 가난하다고 허덕이며 살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면 알고 있는 사람의 입장에선 얼마나 안타깝고 답답한 심정이겠는가...
아마 부처님이 삼계(三界)의 중생들을 보는 마음이 이렇지 않을까 싶다.
부처님의 탄생(誕生) 과정이 설화적(說話的)인 내용이라고 치부하여
가볍게 보아 넘기기보다는 그 내용이 던져주는 상징성의 큰 의미를
불자(佛子)들은 두고두고 곱씹어 보았으면 한다.
- 日行千里 -
첫댓글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니.... ...()...
...()()()...
두고 두고 새겨 기억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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