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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길을 가던 사마리아인이 도착했다. 사마리아인은 피범벅이 된 채 누워 있는 유대인의 대천지원수였다. 사마리아인 역시 제사장, 레위인과 똑같은 위험을 느꼈다. 그뿐이 아니다. 그동안 그가 받은 교육과 경험에 충실하자면, 강도 만난 사람을 그저 지나치는 것이 아니라 무참히 밟고 지나가야 마땅했다! 사마리아인과 유대인은 최악의 원수지간이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에 대해 불같이 화가 났을 때 그분을 '사마리아 사람'(요 8:48)이라고 불렀다. 그것이 그들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심한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모든 압력에도 불구하고, 사마리아인은 그 사람을 '불쌍히' 여겼다(33절). 자비로운 마음이 넘쳐서 강도 만난 사람의 여러 필요를 채워주었다. 우정과 지지, 응급 의료 처치, 교통편, 넉넉한 재정을 지원했을 뿐 아니라, 다시 찾아오겠다는 약속까지 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거처와 재정, 의료, 우정이 부족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을 주라고 명령하신다. 우리에게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신다. 자신의 안전을 내놓고, 자기 일정을 깨뜨리며, 피로 손을 더럽히면서까지 다른 인종 다른 계층의 사람을 도와준 사마리아인이 가장 전형적인 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명령에 개인적으로 순종하고 있는가? 우리 교회는 이 명령에 공동체적으로 순종하고 있는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매우 도발적이다. 시작부터 반전의 함정이 있다. 율법교사는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율법을 비판하는 내용을 언급하지만, 예수님은 그에게 유대 지도자들이야말로 율법을 잘 지키지 않는 이들임을 보여주셨다. 우리 주님은, 다른 사람들의 필요에 눈을 감고 스스로를 보호하는 종교인들의 편리한 안일주의를 공격하신다. 그분 주장의 핵심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똑같이 충격을 주고, 그분의 가르침은 수많은 질문들을 불러일으킨다.
먼저,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데 자비가 꼭 필요하냐는 질문이 생긴다. 이 비유가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는 질문의 대답이라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예수님은 율법교사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선한 사마리아인의 예를 보여주신 것이다. 사마리아인은 길에 쓰러진 사람의 신체적·경제적 필요를 돌
보았다. 마가복음 10장 17절에서 예수님이 젊은 부자 관원으로부터 똑같은 질문을 받으셨던 것에 주목하라. 그때도 예수님은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21절)고 결론 내리신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들을 돌보는 것을 그리스도인 존재의 핵심으로 보신 것 같다.
*셋째, 자비 사역의 동기를 묻는 질문이 있다. 이스라엘에는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라고 명령하시는 확실한 하나님의 율법이 있었다. 하지만 예수님은 율법교사가 그 율법의 기본 목적을 무시하는 방식으로 율법을 해석했음을 보여주신다. 의무를 그저 아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성경 지식이나 윤리 원칙에 부족함이 없었고, 강도 만난 사람과 같은 민족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사마리아인에게는 이런 것들이 하나도 없었지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었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어떻게 하면 교회를 자비가 넘치는 곳으로 만들 수 있는가? 교인들에게 자신들이 '부자'라는 죄책감을 심어주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어떻게 해야 교회가 깊은 상처를 치유하고 수많은 필요를 채워주며 주변 사회를 변화시키는 능력을 갖출 수 있을까?
복음주의자들은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가 가르치는 근본적인 본질을 오랫동안 애써 외면했다. 기껏 해야 성탄절에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과일 바구니를 마련하거나, 먼 외국에 가뭄 또는 지진이 발생했을 때 구호 기관에 기부하라는 뜻으로 알아들었다. 하지만 이제는 좀 더 귀 기울여 들어야 할 때다. 이전에도 절대 '안전하지' 않았던 세상이지만 점점 더 위험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드디어 우리는, 왜 갑자기 우리가 사는 도심 길거리에 "벗기고..거의 죽은" 사람들이 이리도 많은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세계 역사를 보면 극소수만이 비교적 '안전한' 환경에서 살았다. 전쟁, 불의, 압제, 기근, 자연재해, 가족 붕괴, 질병, 정신 질환, 장애, 인종차별, 범죄, 자원 부족, 계층 갈등 같은 '사회 문제들'은 우리가 하나님과 멀어진 결과이다. 이런 것들이 인류 대부분의 삶에 깊은 슬픔과 폭력을 가져온다. 하지만 이 책을 읽는 대부분의 독자들은, 하나님의 인애로 이런 문제들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운 삶을 사는 소수 집단에 속할 것이다.
이런 상대적 평안이, 고통을 찾기 힘든 허구의 세상 안으로 우리를 고립시킬 수 있다. 하지만 고통은 늘 우리를 둘러싸고 있기에 이런 고립은 쉽게 깨진다. 우리에게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바라보는 정확한 시각이 필요하다. 어쩌면 우리는 평화로운 섬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여리고로 가는 길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직면하게 될지도 모른다.
*프랜시스 쉐퍼는, 그리스도인들이 이 과제를 완수하는 동안 때로는 좌파나 우파와 "함께 싸워야" 할 수도 있지만 동맹국은 될 수 없다고 말했다. "사회 정의가 있다면 사회 정의가 있다고 말하라. 질서가 필요하다면 질서가 필요하다고 말하라....하지만 당신이 양쪽 진영 모두에 속한 것처럼 동조하지는 말라. 당신은 어느 쪽의 동맹국도 아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좌파나 우파와는 전혀 다르다."
좌파 이데올로기는 큰 정부와 사회 개혁이 사회악을 해결해준다고 믿는 반면, 우파는 대기업과 경제성장이 사회악을 해결해준다고 믿는다. 좌파는 시민이 자신의 재산 사용을 책임질 수는 있지만, 성윤리 같은 다른 영역에서는 전적으로 자율적일 것을 기대한다. 우파는 시민이 개인 도덕의 영역에서는 법적으로 책임 있게 행동하지만, 재물 사용에서는 전적으로 자율적일 것을 기대한다. 이 두 이데올로기의 배후에 미국의 '우상'인 철저한 개인주의가 자리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양쪽 '해결책'이 모두 철저하게 인본주의적이고 지나치게 단순하다고 본다.
악화되는 사회 문제들의 원인은 우파나 좌파의 세속주의자들이 이해하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상대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나라에서 큰 부를 가진 사람들과 슬프게도 복음주의 교회 안에서도)이 저지르는 사회 불의, 곧 인종 편견과 탐욕을 목격했다. 동시에 가족과 국가의 도덕 질서도 전반적으로 무너지고 있다. 혼전 (성관계와 미혼모)가 늘어나고, 이혼과 아동 방치와 학대, 범죄도 늘어난다. 단순한 부의 재분배나 경제성장으로는 깨진 가정을 회복할 수 없다. 그런 것들이 미숙련자 어머니들을 기술자로 둔갑시킬 수도 없다.
교회의 사역과 수많은 '작은 교회'(그리스도인 가정)만이 사회 문제의 뿌리를 공격할 수 있다. 교회만이 전인격을 섬길 수 있다. 죄가 개개인과 사회를 망가뜨렸다는 것을 복음으로써만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사람을 (자본주의자들처럼) 개인으로만 보거나 (공산주의자들처럼) 공동체로만 보아서는 안 되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보아야 한다.
말씀과 영으로 무장하고, 하나님나라와 그리스도의 의를 전하기 위해 계획하고 실천하는 그리스도인들만이 깨진 마음과 이웃과 나라를 바꿀 수 있다.
*율법교사는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즉 그분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찾아왔다(눅 10:25). 아마도 그는 예수님으로 하여금 율법에 대해 부정적으로 발언하거나 구원에 있어서 율법의 역할을 축소하게 만들려는 심산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히려 율법교사에게 덫을 놓으신다. 하지만 그것은 사랑의 덫이다.
주님은 그에게 율법의 내용을 물으셨고, 그는 많은 유대인 서기관과 선생들이 믿는 내용, 곧 모든 율법은 두 가지 원리에 달려 있다는 점을 확실하게 말했다. 첫째, 율법은 마음과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 한 분께만 복종하고 집중하라고 요구한다(신 6:5). 둘째, 율법은 우리가 스스로의 필요를 위해 일할 때와 같은 속도와 열의와 힘과 기쁨으로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어야 한다고 말한다(레
19:18). 이 원리들은 얼마나 충격적인가! 이 원리들은 하나님의 거룩하심, 그리고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신 분께 우리가 얼마나 근원적인 빚을 지고 있는지 보여준다. 우리의 모든 소유를 그분이 주셨기에, 우리의 존재 전부를 그분께 드려야 한다.
율법교사가 온전한 사랑과 의라고 요약하여 답하자 예수님은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전략은 무엇이었는가? 왜 예수님은 "나를 네 구세주로 받아들여라"라고 말씀하시거나 그와 비슷한 말씀을 하시지 않았을까? 정말 그분은 율법교사에게 선행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일까? 물론, 그렇지 않다.
오히려 예수님은 불리한 형국을 역전하셨다. 구약성경의 규율들을 하나씩 살펴보면, 그중 많은 것을 우리가 지킬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구체적인 규율들 이면의 원리와 율법이 정말로 추구하는 삶이 어떤 삶인지 알게 되면, 우리가 그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은 율법교사에게 율법이 요구하는 온전한 의를 보여주심으로써 그가 율법을 성취할 수 없는 연약한 존재임을, 자신의 죄를 깨닫게 하시려 했다.
*율법교사도 그렇게 반응했어야 했다. 그가 "그렇군요! 그러면 사
람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의로워질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다면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해주셨을 것이다. 하나님의 자비로만 가능하네.” 하나님의 자비는 단순하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가난하고 영적 파산 상태임을 아는 것이다(마 5:3). 하나님을 위해 도덕적으로 최선을 다했을 때조차 우리는 더러운 옷을 입은 거지 같은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사 64:6).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의를 허락하셨다(롬 3:21-22). 이는 우리가 그 의를 받을 수 있도록 고난과 죽음을 통해 스스로 가난해지신 하나님의 아들로부터 흘러나온 부요함이다(고후 8:9).
존 버니언은 자신의 회심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는데, 그보다 더 이것을 확실히 이해한 사람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네 의는 하늘에 있느니라"는 음성이 마음에 울려 퍼졌다. 그러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우편에 계신 것이 영혼의 눈으로 보였다. 내가 어떤 처지에 있든 무엇을 하든, 하나님께서는 내게 의가 부족하다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 의는 항상 하나님께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기분이 유쾌하거나 평안하다고 해서 내 의가 더 많아지는 것도, 우울하고 고뇌에 빠져 있다고 해서 의가 적어지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의 의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셨기 때문이다. 이제는 정말로 내 발목에서 사슬이 벗겨졌다...온종일 '아, 그리스도가 이런 분이시구나' 하고 감탄했고,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제는 나 자신으로부터 눈을 돌려 그리스도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이 내게 지금 입혀주신 이 은혜는 아주 작은 것에 불과하다. 마치 집 금궤 안에 황금을 갖고 있는 부자들이 지갑에는 갈라진 은화와 동전들만 갖고 다니는 것처럼. 아, 나는 내 금들이 내 집의 금궤 안에, 즉 나의 주이시며 구주이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을 보았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나의 전부가 되셨다. 그분이 나의 모든 의요 나의 모든 거룩함이요 나의 모든 구속이시다.
*이 비유는 강도당한 사람을 우연히 만난 사마리아인 이야기이다. 그는 강도 만난 사람의 몸을 보호하고(또 다른 공격을 받지 않도록) 의료조치를 하고 교통편과 재정을 제공했다. 간단히 말해, 사마리아인은 그 사람의 신체적·경제적 필요 전반을 채워줬다. 율법교사는 이 모든 행위를 가리켜 "자비" 사역이라고 했다(37절). 우리는 이 이야기의 목적을 염두에 두어야만 이야기의 효과를 제대로 느낄 수 있다. 이 비유는 이웃을 향한 그리스도인의 사랑을 묘사하기 위해 기록되었다. 예수님은 오늘날 '사회 복지'라고 불리는 일을 실천한 사람을 보여주시려고 이 말씀을 하신다.
요즘 그리스도인들도 어렵고 아픈 사람들을 돕는 일에 반대하지 않는다. 하지만 '사회 구호 활동'은 흔히 부차적인 의무로 여긴다. 교육과 전도 사역 등을 충분히 한 후에, 게다가 시간과 예산에 여유가 있을 때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사마리아인 비유는 이 우선순위를 무너뜨린다. 예수님은 자비 사역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 관계에 요구하시는 의의 정수를 보여주신다. 이것은 누가복음 10장에만 딱 한 번 등장하는 예가 아니다. 야고보서 2장 15-16절과 요한일서 3장 17-18절은 형제자매의 신체적·경제적 필요를 채우라고 권면한다. 이것은 선택 사항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이라 공언하는 이들이 그리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한다 할 수 있겠는가? 자비 사역이 그리스도인 됨의 근본이라는 것은 확실한 진리다.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 3:17-18).”
진짜 사랑은 말뿐 아니라 행동으로도 표현된다. 야고보는 자비 행위를 동반하지 않는 믿음의 고백은 '죽은' 믿음이라고, 진정한 믿음과는 거리가 멀다고 결론 내린다.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자체가 죽은 것이라(약 2:13-17).”
잠언 14장 31절과 19장 17절은, 가난한 사람의 필요를 무시하면 여호와께 죄를 짓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들은 우리에게 테스트가 된다. 우리가 그들에게 보이는 반응이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진정성을 시험한다.
마태복음 25장 31-46절은 이 점을 가장 확실히 보여주는 본문이다. 이 본문은 예수님이 최후의 심판 날에 인류를 평가하시는 장면을 묘사한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열매, 곧 가난한 사람과 노숙자, 병든 자와 갇힌 자에 대한 그들의 관심을 보시고 진정한 믿음을 가
진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구분하신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는 예수님 말씀은 잠언 19장 17절(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드리는 것이니)을 확장하고 계신 것이다. 또한 그분은 궁핍한 자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삶과 민감한 사회적 양심은 진정한 믿음의 불가피한 결과이자 표시라고 말씀하신다. 야고보와 요한과 이사야(참고. 사 1:10-17)에 동의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행동들을 통해 진정한 사랑인지, 립 서비스인지 판단하실 수 있다.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눅 6:35-36).”
우리는 예수님과 선지자들의 말씀이 초대교회의 가르침과 실천에 반영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손을 내밀어 도왔다(참고. 요일 3:16-17: 신 15:7-8). 재물도 넉넉하게 나누어져 교회 안에서 부자와 가난한 자의 경제적 격차가 거의 사라진다(참고. 고후 8:13-15: 레 25장). 야고보(2:1-23)는 선지자들과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서 진정한 믿음은 자비로운 행위로 드러낼 수밖에 없다고 가르친다(사 1:10-17).
그리스도인들은 가난한 사람들(갈 2:10)과 과부와 고아들(약 1:27)을 기억하고, 손님을 극진히 대접하며(히 13:2), 물질주의를 비난해야 한다(딤전 6:17-19). 믿는 이들은 교회 안의 궁핍한 자들을 가장 먼저 적극적으로 도와야 하지만, 자비 사역은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한다(갈 6:10). 이 모든 가르침은 구약성경의 계시를 그대로 드러낸다. 그리스도인 모두에게 이런 책임이 있지만, 교회의 자비 사역을 관장하기 위해서는 집사처럼 특별한 직책을 세워야 한다. 자비 사역은 말씀 사역이나 징계 사역과 마찬가지로 교회가 위임한 사역이다(참고 롬 15:23-29).
*어떻게 하면 자비 사역과 관련된 성경의 모든 가르침을 집약해서 볼 수 있을까? 예수 그리스도를 보면 된다! 우선, 예수님은 모든 창조세계를 하나님께 복종시키신(히 2:5-8: 엡 1:10) 진정한 아담이시다(롬 5:14-21). 둘째, 예수님은 도움이 필요한 모든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실 수 있는 진정한 대제사장이시다(히 4:1-16). 셋째,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들과 자신을 동일시하시고(고후 8:9) 값비싼 섬김에 자신을 던지신(막 10:45) 위대한 종이시다(롬 15:8).
그리스도와 연합한 우리는 모두 다 겸손하게 다른 사람들의 발을 씻겨주는 종이다(마 20:26-28: 갈 6:10). 모든 그리스도인은 자비 사역을 포함한 희생 제물을 하나님께 바치는 거룩한 제사장이기도 하다(히13:13-16). 또한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창조세계를 주님께 복종시키는 "새로운 아담"이다(마 28:18-20: 고후 10:5).
*어느 청교도는 "은혜는 인간의 공로와 관련이 있지만, 자비는 인간의 비참함과 관련이 있다"라고 썼다. 신학자들은 자비(그리스어 '엘레오스eleos)를 고통과 비참함을 덜어주려는 하나님의 본성의 한 측면으로 파악했다. 우리는 '자비'라는 충동 때문에 타인의 상처와 부족함에 민감해지고, 그것들을 덜어주고자 한다. 이런 "상처나 부족함"을 필요라고 한다.
인간의 필요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필요는 의존이다. 모든 인간은 의존적인 존재로 창조되었다. 우리는 자립하지 못하고, 하나님 안에 있을 때만 충분함을 느낀다. 우리가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유지한다고 해도, 필요는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우리의 모든 필요가 그분 안에서 즉시, 꾸준히 채워졌기 때문에 고통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과 분리된 우리는 저주 아래 있고, 채워지지 못한 필요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공허감과 좌절, 고통을 불러일으킨다. 인간의 필요를 알려면 모든 비참함의 뿌리인 인간의 타락을 자세히 들여다봐야 한다.
*“모세가 이르되 원하건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 또 이르시되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출 33:18. 20).”
하나님으로부터의 소외를 이해하는 한 가지 방법은 태양계를 떠올리는 것이다. 행성들이 모두 태양을 중심으로 돌기 때문에 조화를 이루고 있지만, 각 행성이 서로 다른 중심을 두고 궤도를 돈다면 엄청난 충돌이 발생할 것이다. 하나님의 '중심'은 그분의 영광이다.
하나님은 의롭고 거룩하고 온전하신 본성에 따라 만사를 행하신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의 편리와 행복에 '중심'을 두고, 자신의 영광을 위해 산다. 따라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충돌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인간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존재에 충격을 받으면서도 거기에 적대적이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과 교제하도록 지음 받은 존재다. 하나님과 함께 살 수 없으면서도, 그분 없이는 못 산다. 인간의 형편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그렇다. 우리의 모든 문제는 거기에서 비롯되기에, 이를 제쳐두고는 아무 문제도 이해할 수 없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만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다.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 모세에게는 금하셨던 안전한 친밀감을 얻는다고 말한다.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같이 아니 하노라...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13-14. 18).”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후 4:6)
*둘째로, 우리는 자신과 분리되었다.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 3:10). 원래 인간의 영혼은 통합되고 조화로운 완전체였는데, 이제 분열이 생겼다. 평안이 있던 자리에 수치심과 두려움, 고통스러운 자의식("내가 벗었으므로)이 자리잡는다. 불행, 죄책감, 두려움, 정체성 상실, 우울, 걱정, 약물 남용, 자살, 성 문제를 포함한 모든 문제는 인간이 하나님과의 교제를 잃어버린 데서 비롯된다.
이런 상태가 되는 것은, 우리가 본래는 예배하도록 지음 받고 그런 마음을 받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존재의 모든 차원에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창조되었다. 우리 삶에 의미나 목적이 있으려면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사랑하려면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인간의 '관계적' 차원). 자존감을 가지려면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잡아야 한다(인간의 '양심').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을 의미와 안전과 가치의 유일한 근원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한다. 죄 때문이다. 하나님을 거부하면 우리 마음은 끊임없이 우상, 예를 들면 우리에게 만족을 주리라 믿는 사람, 관계, 물건, 조건들을 만들어내야 한다. 우리는 이런 물건이나 조건 등이 우리가 간절히 바라는 의미와 안전과 가치를 가져다줄 거라고 믿는다. 이 가짜 목표들을 향한 동기와 추진력이 얼마나 강한지 거의 숭배라고 할 만하다! 이런 우상들이 없으면 죽을지도 모른다고 느낄 정도다. 성경은 이런 추진력을 "육신의 정욕"이라고 부른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롬 1:2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골 3:5).”
그러나 어떤 우상도 우리 마음속 공간을 채워주지는 못한다. 하나님과의 관계만이 우리를 채울 수 있기 때문에 모든 우상숭배는 우리 영혼에 더 큰 공허함만 안겨줄 뿐이다. 어떤 사람들은 좀 더 손에 넣기 쉬운 우상을 고르기도 한다. 그리고 처음에는 안도감을 느끼지만, 얼마 안 있어 지루함과 공허함과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란" 느낌이 찾아온다. 얼마 안 되는 버터를 수많은 빵에 펴 발라야 하는 경우처럼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우상숭배 같은 목표에 도달하기는커녕 의미 상실, 불안감, 자존감 결핍 같은 심각한 고통을 경험한다. 이 모두는 우리 삶에 드러난 하나님의 진노다.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이 불가피한 심리적 분열을 피할 수 있다.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골 3:10).”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4).”
*셋째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분리되었다.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창 3:7). 아담과 하와에게 갑작스레 사생활이 필요해진 것은 자연스런 일이 아니었다. 하나님께 반항한 이들은 그분을 피해 숨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도 피한다. 그러고는 책임 전가와 험담으로 얼룩진 인류 최초의 부부 싸움이 이어진다(창 3:12-13). 자기 안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똘똘 뭉친 자기중심적인 인간들은 이제 다른 사람들과 충돌한다(약 4:1-3).
C. S. 루이스는 심리적 분열이 어떻게 사회적 분열을 낳는지 이렇게 설명한다.
“인간이라는 기계는 두 가지 방식으로 잘못될 수 있습니다. 하나는 개인들이 각기 따로 놀거나 충돌함으로써 서로에게 해를 입히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각 개인의 내부에 무언가 문제가 생기는 경우, 즉 한 개인을 이루고 있는 서로 다른 부분들(각기 다른 기능과 욕구 등)이 각기 따로 놀거나 충돌하는 경우입니다. 사실 이 두 가지 경우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넷째로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그들이 자연으로부터 차단될 것이라고 선언하신다. 인간의 지배 아래 한때는 '친구'였던 자연계가. 이제는 우리에게 적대적이다.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 3:17. 19).
바울도 자연의 비정상 상태를 언급한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롬 8:19-21).“
화학제품, 화장품, 냉장 기술 등으로 잠시 그 사실을 숨길 수 있을지는 몰라도, 자연은 이미 분열과 부패에 시달리고 있다. 오늘 예쁘게 핀 꽃도 내일이면 퇴비 더미에 놓인다. 자연재해, 기근, 질병, 부패, 정신장애와 신체장애, 노화, 죽음이 그 결과이다. 우리 보기에 아름답기 그지없는 이 세상도, 죄 없는 세상의 온전한 모습을 희미하게 보여주는 정도에 불과하다. 영국인 순교자 존 브래드퍼드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원수들에게(이 세상 대부분이 그렇습니다) 당신의 풍성함을 이 땅에서 이토록 많이 허락해주신다면, 당신이 그곳에 친구들을 위해 쌓아두신 것은 얼마나 더 멋질까요?"라고 기도했다.
자연은 부패할 뿐 아니라, 더 이상 타락 이전처럼 '우리 아래' 있지 않다. 저주의 핵심은 '땅'이 그 풍성한 소산의 일부만을 마지못해 내주리라는 점이다. 인간은 안간힘을 다해야 물질세계와 어울려 사는 법을 배울 수 있다. 그렇게 해서 간신히 살아갈 수 있게 되더라도, 결국에는 땅이 이길 것이다. 우리가 그리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평생 땅과 싸우다가 그 아래 묻힐 것이다. 위대한 설교자 조지 휫필드는 이 점을 강조하려고 청중에게 이렇게 묻곤 했다. "야생동물이 여러분을 보고 무서워서 으르렁대고 짖어대는 이유를 아십니까? 여러분이 자기들 주인과 싸우고 있다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나라는 두 단계에 걸쳐서 온다. 물론 그리스도의 재림 때 완전하게 임하지만, 그분의 초림 때 부분적으로나마 이미 임했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0-21).”
하나님나라는 회개와 믿음, 곧 새로운 탄생을 통해 지금 임한다. 성령이 능력으로 임재하신 곳에 하나님나라가 임한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5).”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17).”
하나님나라는 죄의 모든 저주를 치유하는 능력, 하나님의 통치하시는 능력이다. 그 능력이 하나님의 백성을 움직여, 저주가 있는 곳에 하나님나라의 복을 전하고 정신적·사회적·신체적 필요를 채우게 한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 12:28).”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배낭을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둑도 가까이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눅 12:32-33).”
프랜시스 쉐퍼는 하나님나라가 완전하지는 않지만 부분적으로 임했기 때문에, 삶의 모든 영역에서 '전적 치유는 아닐지라도 '상당한 치유를 기대할 수 있다고 했다. 하나님이 말씀과 영으로 통치를 행사하시는 곳에서 죄의 영향력이 사라진다. 그래서 하나님나라는 큰 잔치와 같고(마 22:2), 온전한 성취 또는 '복'을 받은 상태다(마5:3.10). 이 치유는 늘 부분적인데, 아직 하나님나라가 온전하게 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하나님나라가 이미 임했기에 이 치유는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상당하다.
*교회와 하나님나라는 어떤 관계인가? 한편으로 교회는, 하나님나라의 '파일럿 플랜트'(pilot plant. 일종의 시험 공장으로, 새로운 공법이나 신제품을 도입하기 전에 시험적으로 만드는 소규모 설비를 말한다-편집자)이다. 교회는 단순히 용서받은 개인들이 모인 곳이 아니라, "거룩한 나라”(벧전 2:9), 다시 말해 반체제이다. 교회는 새로운 사회가 되어야 하고, 그 새로운 사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왕 되심 아래서 가족 관계와 사업, 인종 관계를 비롯한 삶의 모든 영역이 어떻게 변할 수 있는지를 세상에 보여주어야 한다. 하나님은 죄의 모든 영향력, 곧 심리적· 사회적·신체적 영향력을 고치길 원하신다.
다른 한편 교회는 하나님나라의 대리인이 되어야 한다. 교회는 하나님의 치유하시는 다스림의 본보기가 되어야 할 뿐 아니라, 그 다스림을 전파해야 한다. "너희는⋯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
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나라의 증인으로 세상에 나아가야 한다(행1:6-8). 하나님나라를 전파하는 것은 단순히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것보다 더 큰 일이다. 개인과 가족, 관계, 국가의 치유를 위해 일하는 것이다. 자비로운 행동을 하고 정의를 추구하는 것이다. 하나님나라의 복을 불러오기 위해 하나님의 권위에 따라 삶과 관계와 기관과 공동체들을 정비하는 것이다.
*신약성경에 수록된 영적 은사들을 연구해보면 두 가지 기본 범주가 있다. 주로 언어로 실천하는 '말씀 은사'와 주로 행동으로 실천하는 '행위 은사'다. 예수님은 말씀과 행동에 다 능하셨다(눅 24:19). 마찬가지로 교회도 양면 사역을 펼쳐야 한다.
행위 사역을 가리키는 신약성경의 핵심 단어는 '디아코니아diakonia'인데, 성경에서 대개 '섬김(봉사)'으로 번역한다. 이 단어의 근본 의미는 식탁 옆에서 수종을 들며 사람을 먹인다는 뜻이다. 마르다가 예수님을 위해 식사를 준비하는 누가복음 10장 40절이 그 예이다. 예수님과 제자들을 따라다니면서 음식을 비롯한 신체적 필요들을 제공하는 여제자들이 있었는데, 이 사역을 '디아코니아'라고 한다(마 27:55: 눅 8:3). 초대교회에서 과부들의 일용할 필요를 제공한 사역도 '디아코니아'라고 한다(행 6:2).
행위 사역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본문으로는, 누가복음 22장 24-27절과 요한일서 3장 17-18절이 있다. 누가복음 22장에서 예수님은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디아코니아] 자가 크냐" 하고 물으신다. 당시 그리스 문화에서는 누군가를 섬기는 일을 굉장히 천한 일로 간주했기에 이 질문은 굉장히 놀라운 것이다. 플라톤은 “다른 사람을 섬겨야 하는 사람이 어떻게 행복할 수 있는가?"라고 말했다. 그런데 예수님은 기독교가 말하는 큰 자는 세상의 큰 자와는 정반대라는 충격적인 말씀을 하신다. "나는 섬기는[디아코니아]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디아코니아! 온갖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는 사람! 이것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큰 자요, 그리스도가 하신 사역의 특징이다. 예수님은 가장 천하고 기본적인 섬김을 위해 오셨다. 그런데 하나님나라에 있는 우리는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말과 행동을 하고 싶어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 교회의 가장 중요한 사역은 가장 '하찮은' 섬김을 통해 가장 기본적인 신체적 필요를 채워주는 행위 사역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대소변 받아내는 것을 '하찮은' 섬김으로 여기는가? 그것은 세속적인 생각이다.
요한일서 3장 17-18절은 이렇게 말한다.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예수님의 목적은 스스로 영적 부자라고 믿는 율법교사가 사실은 영적 파산 상태임을 보여주시는 것이었다. 영적 파산이란 자신이 진 빚을 자기 힘으로 갚을 수 없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얼마나 절박한 형편인가!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들에게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다른 누구의 것이 아니라) 그들의 것임이요"(마 5:3). 마틴 로이드 존스는 이 팔복을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설명한다.
“이것은 자존심이 완전히 사라지고, 자기 확신과 자기 의존이 전혀 없다는 뜻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님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생산할 수 있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고, 우리 스스로 할 수 있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을 마주 대할 때 우리의 철저한 무능함을 생생하게 깨닫는 것이다. 이것이 심령이 가난하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진정한 목표는, 율법교사가 자신의 가난함을 깨닫고 하나님의 자비 가운데 있는 영적 풍성함을 찾게 되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사야는 우리가 최선을 다해 의로운 행동을 한다 해도 "더러운 옷과 같다고 말한다.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우리는 "부정한 자 같으며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는 거리의 나환자 신세다(사 64:6). 누더기를 걸치고 거리를 배회하는, 보기 흉하고 냄새 나고 늙은 노숙자를 상상해보라. 제정신이 아닌 데다 자산도 하나 없다. 내세울 만한 것이 전혀 없다. 이사야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바로 그런 상태라고 말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율법교사를 길거리에서 거의 죽게 된 사람에 비유하면서 그의 무능력함을 보여주려 하셨던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율법교사에게 말씀하고 계신 복음은 무엇인가? 우리는 모두 영적 파산 상태로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데,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영적 부요함을 주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 아들을 가난하게 하심으로, 그를 믿는 사람들에게 그분의 영적 부요함과 의를 허락하셨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 21절에서 이 복음의 거래에 대해 말한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나중에는 이 개념을 경제 용어로 다시 설명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8:9). 은혜로우신 하나님은 똥 무더기에 앉아 있던 우리에게 왕의 예복을 입히시고 왕의 잔치 자리에 앉히셨다.
그러면 은혜의 복음이란 무엇인가? 가난한 우리가 하나님의 자비로 부요해졌다는 뜻이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빌 2:3-4).”
바울은 우리가 “다툼이나 허영" (3절상)을 물리칠 때에만 그런 삶을 살 수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복음을 받아야 가능하다고 말한다. 자의식(열등감)이나 자신감(우월감)의 형태를 띤 자만심으로는 성육신적 생활 방식이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복음에서, 스스로 믿는 것보다 훨씬 더 악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기대하는 것 이상으로 큰 사랑을 받은 것을 발견한다. 그리스도인이 해방된 것은 자의식이나 자신감을 갖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를 잊을 정도로 헌신하기 위해서이다. 바울은 다른 곳에서 그리스도인의 독특한 자아상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고전 4:3-4).”
바울은 다른 사람의 평가나 기준에 괘념치 않는다. 그렇다고 자기만의 기준을 세우지도 않는다. 그는 "자신에게 충실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평가를 의지할 뿐이다. 그는 예수님 안에서 자신이 용납된 것을 안다. 진정한 겸손은 자신을 낮춰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생각을 덜 하는 것이다. 진정한 용기, 부드러운 용기는 가능하다. 은혜의 복음이 그런 용기를 가능하게 한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관심사' 곧 원수의 필요까지 볼 수 있어야 한다. 교회는 세상을 향해 "우리에게 와서 우리 언어를 배우세요. 우리를 도와서 우리의 필요를 채울 수 있습니다”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세상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려 애써야 한다. 그들에게 성경의 진리를 전달 하면서 정의와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
벤저민 워필드는 "성육신 본받기"라는 제목의 빌립보서 2장 설교에서 그리스도의 본을 따른다는 것의 의미를 아주 분명하게 설명해 준다.
“그리스도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사랑에 이끌려 세상에 오셨고,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위해 자신을 잊어버리셨다.…자기희생은 우리 시대와 동료들에 무심하지 않다는 뜻이다. 그들에게 몰입한다는 뜻이다. 타인 가운데서 자아를 잊어버린다는 뜻이다. 모든 사람의 희망과 두려움, 갈망과 절망 속으로 들어간다는 뜻이다. 영혼에 여러 측면이 있고, 행동에 여러 형태가 있고, 연민에 다양한 모습이 있다는 뜻이다. 풍성한 성장이 있다는 뜻이다. 우리가 한 사람의 삶을 살지 않고 수많은 삶을 산다는 뜻이다. 사랑의 연민이라는 가느다란 선으로 수많은 영혼과 우리 자신을 연결하여 그들의 삶이 우리 삶이 되는 것이다.”
* 자비 사역에는 큰 대가가 따른다. "나는 이미 기부했어요"라고 말하는 사람은 기독교의 자비 정신과는 거리가 먼 형식주의를 드러낼 뿐이다. 성경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단순히 주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반복해서 말한다. 아낌없이 주어야 한다. 신명기 15장 7-8절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주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쥐지 말고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라고 말한다. 킹제임스 성경은 "그대의 손을 활짝 펴서 그 사람의 필요에 넉넉하게" 라고 말한다. 바울은 인색하게 조금만 드리는 보는 그냥 인색한 것이 아니라 탐욕스러운 것임을 암시한다
(고후 9:5).
하나님은 우리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물질만 많이 나눠주기를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다. 우리 마음과 생각도 나눠줄 수 있어야 한다. 시편 41편 1절은 "복되어라, 딱하고 가난한 사람 알아주는 이여"(공동번역)라고 말한다. 어느 해설자는 "알아주다'라는 단어는 대개 실무자의 실용적 지혜를 묘사한다는 점에서 놀랍다. 따라서 이는 상대방에게 형식적 도움이 아니라 그의 상황에 알맞은 세심한 생각을 전달하는 것을 암시한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의 형편을 깊이 헤아리고 그들이 자급자족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러려면 시간은 물론이고 지적·정서적 에너지를 투자해야 한다. 하나님은 궁핍한 사람들을 아낌없이 돕는 자발적이고 넉넉한 마음을 찾으신다. 그런 마음 없이 우리 손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받지 않으신다(고후 9:7).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자는 궁핍하지 아니하려니와" (잠 28:27). … 가난한 사람들은 당신의 (소생인) 자녀들처럼 당신 재산의 일부분에 대해 권리가 있습니다. 비록 그처럼 큰 부분은 아니더라도 말입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의 영은, 부자가 나누어줘도 하등 지장이 없는 재산의 일부를 가난한 사람이 당연히 받아야 할 '몫'으로 요구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네 손이 선을 베풀 힘이 있거든 마땅히 받을 자에게 베풀기를 아끼지 말며 "(잠 3:27)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대 교부 바실리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 찬장에서 썩어가는 빵은 굶주린 자들의 빵이요, 당신 방에 입지 않고 걸려 있는 옷은 헐벗은 자들의 옷이요, 당신 서랍에서 녹슬고 있는 금은 가난한 자들의 금이다." 그러니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일은 하면 좋고 안 해도 그만인 자비의 행동일 뿐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할 의무가 있는 정의의 행동이기도 합니다.
정의! 요약하자면,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단순한' 삶이 아니라 '정의로운 삶'을 요청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단순한 삶'은 유용한 용어이지만, 그런 생활 방식이 선택 사항인 것처럼 들린다. 또한 자기 부인의 추상적 실천, 곧 직접적인 사역이라는 목적에 대한 수단보다는 목적 그 자체가 되기 쉽다.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일은 자비의 행동일 뿐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할 의무가 있는 정의의 행동이기도 하다.
*세상의 가난한 자들에게도 자비를 베풀어야 하는 네 번째 이유는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자비 때문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받을 자격 없는, 하나님의 원수들에게도 임한다(롬 3:9-18). 바울은 가장 흉악한 죄인인 자신이 그 구원을 입어서 그리스도의 무한하신 인내를 증거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신약성경이 신체적 필요를 돌보는 사역을 '자비' 사역이라고도 칭할 때, 우리는 우리의 자비가 하나님의 자비와는 전혀 다른 원리로 움직인다고 믿어야 하는가? 또는, 우리는 믿지 않는 사람들과 원수들에게는 자비를 베풀지 말아야 하는 것인가?
하나님이 반역자들에게도 자비를 베푸셔서 그들을 책임 있고 온전한 존재로 만드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그런 목적을 염두에 두고 도와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친구와 친척에게만 자비를 베풀어야 하는가? 하나님의 자비는 그렇지 않다. 또한 하나님 은혜의 본보기는 우리가 수동적으로 가만히 앉아서 어려운 사람들이 구걸할 때까지 기다려서는 안 된다고 암시한다. 오히려 인간의 기본 필요들을 연구하고 발견하고 충족해주어야 한다. 그리스도는 하늘에 앉으셔서 우리가 그분의 자비를 구걸할 때까지 기다리고 계셨는가? 아니다. 그분은 친히 우리를 찾아오셨다.
세상의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자비를 베풀라고 권면하는 다섯 번째 이유는 사랑의 의미 때문이다. 성경은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라고 명령한다(살전 3:12). 사랑은 말로만 해서는 안되고 늘 사랑의 행위를 수반해야 한다(요일 3:17-19). 물론 요한은 독자들에게 그리스도인 형제들을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안 믿는 이들의 신체적·경제적 필요를 채워주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진실함으로" 사랑하여 그들을 사랑할 수 있다고 전제해야 하는가? 믿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은 믿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는 전혀 다른 개념으로 생각해야 하는가? 아니다. 모든 사람을 사랑하라는 말씀은 그들을 말과 행동으로 사랑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자비 행위도 새 하늘과 새 땅의 약속을 가리켜야 한다.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이 부어져서 하나님나라의 약속이 이미 성취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교도소를 방문할 때는(마 25:36), 그리스도가 주의 은혜의 해를 임하게 하신다는 자유를 갇힌 자들에게 선포해야 한다(눅 4:18). 하나님의 희년이라는 마지막 날은 아직 오지 않았다. 그러나 성령의 은사를 통해 자비 행위로 나타난 그리스도의 구원 능력 가운데 그 나라는 이미 임했다. 교회는 하나님나라의 대리인으로서 세상 속으로 들어간다(행 8:12. 14:22. 28:23). 교회가 기적 같은 행위 사역을 일상적으로 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여전히 행위로 세상에 하나님나라를 보여주어야 한다.
예수님이 사람들을 고치시고 먹이신 행동들은 하나님나라의 초자연적 표지였다. 그러나 그 동기는 인간의 기본적 필요를 해결해 주시려는 바람이었다는 점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가 4천 명을 먹이실 때, 그 기적을 통해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증명하려 하셨다는 언급은 없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조차 몰랐던 것 같다.) 예수님이 사람들을 먹이신 이유는 따로 있다.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마 15:32). 그분은 무리(모두 다 믿는 이들은 아니었다)가 위기에 처한 것을 보시고 그들을 먹이셨다. 이것이 자비 사역이다.
우리도 주님을 따라야 한다. 자비 사역은 단순히 우리의 가르침을 검증하는 방법이 아니다. 행위 사역은 긍휼이 동기가 되어야 한다. 초자연적 능력이 없더라도 긍휼히 여기는 마음에서 사람들의 신체적 필요를 채워줄 때, 우리는 하나님나라의 새롭게 하는 능력을 드러내게 된다.
*그리스도인이 자비를 베풀어야 할 첫 번째 대상은 언약 안에 있는 형제자매들이다. 궁핍한 그리스도인들의 필요에 최우선 순위를 두어야 한다. 그런 도움은 그리스도가 그 자녀들에게 베푸신 치유의 축복이 된다.
다른 한편으로 그리스도인은 말과 행동의 복음을 들고 세상으로 들어가야 한다. 우리가 믿지 않는 사람들을 도와야 하느냐는 질문은 자칫 위험할 수 있는데, 그런 질문은 바리새주의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이미 그 답을 주셨다. 그분은 레위기 19장 18절에 대해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놀랄 만한 해석을 내놓으신다.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모든 형제, 모든 이웃, 모든 나그네, 모든 원수가 다 내 이웃이다. 그들의 가장 인간적인 기본 필요들을 찾아서 채워주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다.
*우리는 '조건 없는 자비의 성경적 근거를 이미 여러 측면에서 살펴보았다.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가 원수를 도와야 한다고 가르친다는 점도 보았다. 예수님이 큰 무리 앞에서 말씀과 행동으로 사역하신 것도 보았다. 그분은 이스라엘 공동체에 우선순위가 있다고 말씀하셨지만(마 15:26 이하), 이스라엘 안팎의 사람들 모두에게 말씀을 전하시고 병든 자를 고치셨다.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도 선대하고, 보상을 바라지 말고 주라는 예수님 말씀도 살펴보았다(눅 6:32-35).4 마지막으로, 우리의 자비 사역이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자비를 닮아야 한다는 것도 보았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무슨 일을 했기 때문에 그분이 우리에게 오신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분을 위해 일할 의향조차 없는 존재였다(롬 5:10). 그렇다면 우리의 자비는 하나님의 자비와 전적으로 다른 원리에 따라 작용하는 것인가? 행위 사역은 말씀 사역과 마찬가지로, 상대방의 조건과 상관없이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해야 한다.
그럼 어떤 결론에 도달하는가? 첫째, 성경을 근거로 '자격 있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 말하는 것은 상당히 어렵다. 우리가 베푸는 도움은 보상이 아니라 자비다. 자비를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과연 그것이 자비일까? 둘째, 자비나 행위 사역은 구체적인 목적. 곧 하나님나라를 전한다는 목적이 있어야 한다. 이 말은 우리가 말로 할 때처럼 행동으로도 하나님께 마음을 열고, 반항하려는 의지를 그분의 주되심 아래 복종시켜야 한다는 뜻이다. 그럼, 우리는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마음이 의로워질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가? 아니다. 바로 지금 우리는 화해의 사역자들이다(고후 5:20).
그렇다면 우리의 자비 사역은 하나님의 자비를 닮아야 한다. 하나님의 자비에는 조건이 없다.
*그러면 어떻게 성경의 이 두 가르침이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 은혜를 모르는 악한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자비를 베풀면서도,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는 교훈을 존중할 수 있을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바라볼 때만 우리의 의무를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가 맨 처음 올 때는 우리의 자격과 상관없이 무조건적으로 온다. 그 자비는 "무한하셔서 "우리가 아직 원수일 때, 그분께 아무런 관심이나 욕구를 보이지 않을 때에도 우리를 복음으로 부르신다(롬 3:9-18). 그러나, 하나님의 자비는 이렇게 아무 조건 없이 오지만 조건 없이 진척되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성화 과정에서 우리의 협조를 요구하신다. 왜일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거룩해야만 행복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처음 발견하셨을 때의 상태로 우리를 내버려두시지 않는다. 그분의 자비에 협조하라고 하신다. 우리는 성경 연구, 하나님과의 교제, 진리의 실천에 힘써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성장은 없다.
*성경이 말하는 가난의 원인을 구별하는 것은 전체 논의에서 매우 중요하다. 성경은 가난의 원인을 어떻게 말하는가? 세 가지를 제시한다. 한 가지 원인은 "압제나 불의이다. 구약성경에서 흔히 "가난”으로 번역되는 히브리어 단어 중에 가장 핵심 단어는 '아니ani인데, "부당하게 빼앗겼다"는 뜻이다. 압제는 사람들을 가난하게 만드는 사회적 조건이나 불공평한 대우를 총칭한다(시 82:1-8, 잠 14:31. 출 22:21-27을 보라). 임금 체불(신 24:15)이나 터무니없이 낮은 급여(엡 6:8-9), 돈 많고 세력 있는 자들의 편에 서는 법정과 정부(레 19:15), 고리대금(출 22:25-27)은 모두 압제의 예이다. 가난의 두 번째 원인은 자연재해나 불운이다. 흉작, 장애를 초래한 부상, 범죄자의 공격, 홍수, 폭풍우, 화재 등 성경에는 그 예가 많이 등장한다. 요셉의 기아 구제 프로그램(창 47장)은 기근으로 가난해진 사람들을 도왔다. 하나님의 사회 법률은 “가난하게 되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꾸준히 계속 생겨날 것을 전제한다(레 25:25. 39. 47). 이 본문들은 환경에 의한 이런 종류의 가난을 염두에 둔 것 같다.
셋째, 개인의 죄가 가난을 낳는다. 게으르고(잠 6:6-7) 무절제한(잠 23:21) 사람은 가난해질 수 있다. 고급 취향과 사치품을 찾는 성향도 경제 문제를 자초하는 이유가 될 수 있다(잠 21:17). 이 세 원인을 구별하는 것이 왜 중요한지 이제 알겠는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유주의'나 '보수주의' 이데올로기를 무비판적으로 덮어씌우지 않으려면, 이런 구분이 중요하다. '자유주의자들'은 가난하다고 하면 무조건 억압받는 사람으로 보는 경향이 있어서, 자비 사역을 할 때 조건의 중요성을 보지 않으려 한다. 16 반대로 '보수주의자들'은 가난하다고 하면 무조건 무책임한 사람으로 보는 경향이 있어서, 자비 사역을 할 때 조건을 지나치게 강조한다. 17 양쪽 모두 가난의 복잡한 원인을 단순화하는 경향이 있다.
적절한 도움을 주려면 이 세 원인을 구분하여 일차원적 분석이 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일하라"는 훈계만이 아니라, 상담과 교육, 다양한 종류의 지원, 존중과 애정 어린 관심이 동반되어야만 가난의 뿌리를 다룰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는 어떤 결론을 내릴 수 있을까? 경험에 따르면, 가난의 세 원인이 공존할 때가 많다. 그런 경우에는, 본인도 죄를 짓고 남이 저지른 죄를 당하기도 하고 자연재해의 피해자이기도 하다. 따라서 경제적 도움이 필요한 많은 가족의 경우, 자격이 있다거나 없다거나, 책임감이 있다거나 무책임하다거나 하는 부류로 확실히 구분할 수 없다. (그 비율이 어느 정도라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런 가정들은 둘 다에 해당한다.
"은혜는 거저이지만, 값싸지 않다"는 말은 자비 사역에도 해당한다. 은혜는 자격 없는 사람들에게 주어지지만, 그 목적은 자기 파괴적 행위를 막는 것이다. 진심으로 전도에 힘쓰는 교회라면 아낌없이 복음을 전하는 만큼이나 담대하게 비그리스도인들에게 자비 사역도 베풀 것이다. 우리의 사랑은 감상에 그치지 않는다. 그 사랑은 활동적이어서 예수님의 왕되심 아래 상대방의 인생이 치유 받고 변화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런 사랑만이 그 삶에 만족을 줄 것이다.
*자비는 영향을 미친다. 사람들의 마음을 녹인다. 반대를 없앤다. 복음에 적대적인 사람들에게서도 존중을 이끌어낸다. 우리의 착한 행실은 세상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마 5:16). 서로를 향한 구체적인 사랑의 행위는 기독교 신앙의 타당성을 변증한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5).
기독교 공동체 내의 자비 사역은, 서로를 향한 우리의 사랑을 가장 놀랍고도 눈에 띄는 모습으로 드러내준다. 이것이 곧 사도행전 4장 32-33절에 나타난 상황 배후에 있던 원동력일 것이다.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이러한 방식이 공산주의의 형태가 아니었음을 많은 사람들이 지적한다. 32절은, 어느 그리스도인이라도 궁지에 빠지면 다른 형제들이 신속하고 관대하게 반응했다고 말한다. 아무도 자기 소유에 대해 맘대로 사용할 수 있는 자기 것인 양 행동하지 않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 경제적 나눔은 외부인들에게도 확연히 드러났고 그들의 눈에는 놀라울 따름이었다. 확실히 이런 모습 덕분에 사도들의 가르침이 더 힘을 받았던 것 같다.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다른지를 온 세상이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영적 관심은 물질적/자연적/눈에 보이는/세속적인 것들에 대한 반대로 비물질적/초자연적/눈에 보이지 않는거룩한 것에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다. 영적인 것에 관심이 있다는 것은 성령의 치유하시는 손길이 닿은 삶의 모든 측면에 관심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 우리가 "자연의 절반이나 실재"라고 부르는 것을 언약의 증인으로 높이신다(시 19:1이하, 롬 1:20 이하). 이들은 하나님의 동산(겔 28:13)-거기서 창조주는 피조물과 만나 교제하신다 -인 땅이 어떤 의도로 창조되었는지를 알려주는 증인이다. 아담과 하나님의 교제는 이 땅에서 그의 물리적 행위, 곧 자연을 다스리는 행위에 드러난다(창 1:28). 이것이 참된 영성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어느 관점에서는 말씀 사역이 가장 근본적이라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이게 무슨 뜻인가? '근본적radical'이라는 말은 흔히 '극단적'이라는 뜻으로 사용하지만, 그것이 이 단어의 기본 뜻은 아니다. 라틴어 '라딕스radix'는 '뿌리'를 뜻한다. 따라서 '근본적'이라는 말은 어떤 대상의 뿌리까지 들어간다는 뜻이다. 앞서 우리가 "정죄" 받은 상태(롬 8:1-2), 곧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된 상태에서 모든 비극이 비롯된다고 말한 바 있다. 심리적 불안, 사회적 불의, 심지어 신체적 붕괴까지도 하나님과의 전쟁으로 인한 것이다.
따라서 인간을 향한 더 근본적인 사역은 믿음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다(롬 10:8-13). 말로 전달하는 복음 메시지보다 더 근본적으로 죄와 죽음의 뿌리를 차단할 수 있는 수단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