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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5:21-24, 35-43. 주신 능력, 달리다굼입니다. 2015. 12. 6
오늘이 대강절 두 번째 주일입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은혜를 대강절을 보내면서 많은 사람들과 나누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여러분,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에 여러 가지 희로애락을 겪습니다. 그런데 좋은 일보다 힘들고 어려운 일들을 더 많이 겪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절망을 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의 아픔과 고통을 들어보면 몸과 마음이 극도의 위기감에 사로잡혀 절망감에 빠진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면 사람이 가장 큰 절망을 느낄 때가 언제일까요? 가장 큰 낙심을 할 때가 언제 일까요? 권세와 명예를 잃을 때? 가지고, 누리고 있던 재산이 날아 갈 때? 사랑하는 이와 이 땅 가운데서 이별할 때? 통계에 의하면 무엇보다 건강을 잃을 때라고 합니다. 60-70퍼센트 이상이 건강을 잃을 때 나는 이제 끝났구나! 생각을 한데요. 그러면서 왜 하필 나입니까? 하고 억울해 합니다. 이 경우를 절망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절망이라는 말은 바라는 것이 끊어졌고, 더 이상의 삶에 소망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 생각에 사람들이 우울증에 걸리고, 극단적인 행동으로 삶을 마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때에 주님의 이름으로 위로를 받고 치유의 감격을 경험할 때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오늘 날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 것이 무엇일까요? 많은 것이 있겠지만 위로와 치유 아닙니까? 오늘 본문의 내용이 바로 이 위로와 치유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예수님께서 치유 사역이 계속 되던 어느 날 갈릴리 바닷가에서 일어 난 일입니다. 한 사람이 안타까운 심정으로 말씀과 위로와 치유 사역으로 바쁜 주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지역 유지이고, 존경받는 회당장입니다. 경건한 사람이요, 믿음의 사람이요, 타인으로부터 존경을 받는 사람입니다. 회당장이 주님께 다가 와서 주님의 발아래 엎드려 간청을 했습니다.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오셔서 내 딸에게 손을 얹어 구원을 얻어 살게 하여 주옵소서” 그런데 주님은 그의 간청에 그의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웬일입니까? 도중에 지체 되는 일로 인해서 야이로라 하는 회당장의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주위 사람들이 훤화하면서 이미 죽었는데 예수님인들 어쩌랴 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괴롭히지 말라고 하기도 하고 죽은 딸에 대한 동정심으로 안타까워하기도 했습니다. 바로 그 때에 예수님은 그 상황에서 아주 조용히 야이로에게 말씀을 합니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고 야이로의 집으로 들어가서 죽은 소녀의 손을 잡아 일으키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달리다굼! 소녀야 일어나라! 그 순간 소녀가 일어나서 걷게 되었습니다. 다시 살아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이 달리다굼의 축복과 기적이 저와 여러분에게 오늘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1. 먼저 모든 위로입니다. 회당장에게 주님은 위로의 주님이십니다. 회당장이 주님께 왔습니다. 그리고 사정을 간청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회당장을 위로합니다. 여러분, 위로가 무엇입니까? 고후1:3에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는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여기서 모든 은 완전하다는 뜻도 있지만 그보다는 풍부하고 충분하다는 의미입니다. 위로(παρακλήσεως, 파라클레세오스)라는 말은 “충고”, “위안”, “위로”, “간청”이란 뜻으로, 하나님의 내적 속성인 긍휼과 자비가 외적 행위로 구체화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위로가 무엇입니까? 단지 심리적인 것입니까? 심리적인 것뿐만 아니라 환란으로부터 실제적인 구출을 받는 것을 말씀합니다. 그래서 고후 1:4-5절,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도다. 고 했습니다. 여기서 환란이란 말은 “억압”, “상처받은”, “고뇌”, “핍박”, “환란”, “고통”인데, 고린도후서에 아홉 차례나 이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인의 실존이 환난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말씀합니다. 바울 사도는 “우리”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바울 자신을 비롯하여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환란을 당할 때가 있음을 말씀합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이 부분을 요15;19-20에서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상에서 택하여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셨기 때문에 이제는 더 이상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소속은 그 사람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기본적인 규정입니다. 때문에 어디에 속했는가는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에게 속했느냐? 하나님께 속했느냐? 세상에 속했느냐?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했느냐에 따라 삶의 질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처럼 환란과 핍박을 당할 때가 있지만, 그러나 염려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근심할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환난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위로하심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위로하사는 가까이서 부르다, 초청하다, 안위하다, 위로하다. 라는 뜻의 현재 분사형으로, 하나님의 위로하심이 중단 없이 계속됨을 가리킵니다. 신앙인에게 환난이 연속될 것이지만 그에 상응하여 하나님의 위로하심 또한 계속될 것입니다. 어려움이 있을 것이지만 또한 그 것보다 더욱 큰 은혜의 위로하심이 계속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은 예수 그리스도인의 실제적 삶 속에서 일상적인 일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증거 하다가 여러 차례 극심한 환난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하나님의 위로와 함께 하심을 체험했습니다. 때문에 바울은 고후 12;10에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약할 때 강함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약할 때 주님의 위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을 환난 가운데서 위로하시는 중요한 목적은 무엇입니까?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할 뿐만 아니라 위로받은 자가 환난에 처한 또 다른 사람을 위로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하기 위함입니다. 갖기 위함입니다. 이것은 벧전4;10에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사가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섬기고 교회의 덕을 위하여 사용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위로를 체험했던 바울은 고후1:5절은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란 말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수고하는 사람이 받는 고난입니다. 여러분, 모든 고난이 다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 믿는 것 때문에 받는 고난이 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고난일 때 의미가 있고 위로가 주어집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잘못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 아닙니다. 무고한 고난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고난의 결과 또한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메시야적 고난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고 있는 한 이런 고난은 필연적인 것이라 생각을 했습니다. 그는 이것을,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신의 육체에 채우는 것이라 했고(골 1:8),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기 위하여 당연히 받아야 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롬 8:17). 실제로 바울은 이러한 고난을 셀 수 없을 만큼 당했습니다. 복음 때문에 바울은 루스드라에서 유대인들에게 돌로 맞아 거의 죽을 지경까지 갔었고, 빌립보에서는 귀신들린 여종을 낫게 해주었다가 도리어 고소를 당해 매를 맞고 투옥되기도 했으며, 유대인 자객 단에 의해 살해당할 위험도 겪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러한 고난에 비할 수 없는 하나님의 위로를 받았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고통을 당하는 회당장에게 위로 하십니다. 주님은 찾아온 회당장의 요청을 뿌리치지 않고 따라 갑니다. 위로의 주님이십니다. 그러면 어떤 위로입니까?
2. 달리다굼의 위로입니다. ‘달리다굼’이란 말은 원문이 Ταλιθα κουμ 탈리다 쿰인데, 이 말은 예수님 당시에 팔레스틴에서 통용되던 아람어 ‘탈리다 쿰’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탈리다는 연약한 것, 불쌍한 것, 미천한 것을 뜻하는 단어인데 여기에서는 ‘소녀야’입니다. ‘쿰’은 ‘일어나라’는 말인데 이 말의 합성어가 ‘달리다굼’입니다. 영적으로 ‘달리다굼’은 엄청난 역사를 일으키는 메시지가 있는 용어입니다. 달리다굼은 일어나라는 멧세지입니다. 여호수아 7:10에서는 여호수아가 아이성 공략에 실패하여 좌절감에 빠져 주저앉아 있을 때 여호와께서 연약한 자여, 일어나라 어찌하여 이렇게 엎드렸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사야 60:1절에서는 하나님이 이사야에게 말씀하시기를 이사야야! 이스라엘 백성들아!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7:14절에서는 나인성 과부의 아들이 죽어 관에 메어 나갈 때 과부를 불쌍히 여겨 관에 손을 대시고 말씀하시기를 “청년아 일어나라”고 명령하여 죽은 청년을 살리셨습니다. 사도행전 12:7절에서는 옥중에 지쳐 쓰러져 있는 베드로에게 주의 사자가 나타나 베드로야, 일어나라! 그 때에 쇠사슬이 그 손에서 벗어지면서 베드로는 구출되었습니다. 에베소서 5:14절에는 바울을 통하여 하나님은 장차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성도들에게 이르시는 말씀이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 잠자는 자가 일어나고, 죽은 자가 일어나고, 낙심한 자가 일어나고 청년이 일어나고, 여호수가 일어나고, 이사야가 일어나고 하나 같이 달리다굼 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12살 먹은 소녀가 다시 살아나는 부활의 기적의 드라마입니다. 죽었습니다. 나이 많은 사람뿐만 아니라 죽음은 청년도 삼키고 죽음은 어린 아이도 삼킵니다. 그런데 12살 먹은 소녀, 죽은 그 곁에 예수님께서 다가 오셨습니다. 그리고 한마디 말씀을 하십니다. 달리다굼, 소녀야 일어나라! 이것은 본래 상당히 많이 쓰이던 보편적인 말입니다. 이 ‘달리다굼’은 당시의 가정에서 일상화 된 용어입니다. 어린아이들을 깨울 때 사용한 단어로서 애정이 담긴 가정의 상용어가 ‘달리다굼’입니다. 아침이 되면, 날이 밝아 오면, 야, 너 일어나. 그럴 때 쓰는 말입니다. 달리다는 아주 작은 것 미천 한 , 불쌍한 것 연약한 것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Little child, 작은 아이입니다. 그리고 굼은 일어나라입니다. 나의 사랑하는 작은 아이야, 일어나라. 그런데 주님의 이 말씀과 함께 이 소녀가 벌떡 일어납니다.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순간입니다. 일어 날 수 없는 사람이 일어나는 기적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절망의 시대입니다. 다시 일어설 기력이 없이 주저앉아 버린 인생, 주변에서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이런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 달리다굼 기적입니다. 단순한 도덕이 아니라, 사회적 갱신이 아니라 그들에게 필요 한 기적, 달리다굼입니다. 생명의 기적이 필요합니다. 그들이 들어야 할 것, 그것은 예수의 음성, 달리다굼. 사랑하는 아이야 일어나라 이 음성입니다. 연약한 사람아 일어나라! 병든 사람아 일어나라! 죽은 자야 일어나라! 그런 면에서 오늘 주님 앞에 예배를 드리는 저와여러분이 ‘탈리다’이며 그러기에 언제나 일어나는 ‘쿰’의 은혜가 있습니다. 이 시간에 달리다쿰이 들려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3. 그러면 이 달리다굼의 은혜는 어떻게 임하는가? 첫째로,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 앞에 나와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사건의 시작은 22절, 23절입니다. 회당장 중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아래 엎드리어 많이 간구하여 가로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얻어 살게 하소서 하거늘 이 소녀 의 아버지는 회당장입니다. 회당장은 그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높은 지위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회당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시나고개, 이 회당이 단순한 종교적 기능을 발휘하는 곳이 아닙니다. 이 회당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의 한복판에, 중심에 있었던 그런 기관입니다. 이것은 종교적 기능도 수행되었지만 더 많은 사회적 기능들이 수행됩니다. 당시의 회당장은 회당에서 가장 높은 직위의 사람으로서 집회를 인도하고 회당 건물의 유지 운용 보존을 책임질 뿐만 아니라, 예배 질서와 신성함을 유지하는 책임을 맡고 있었으며 또한 율법의 낭독이나 설교 등을 할당해 줄 권리를 갖고 있었습니다. 이런 회당장 아래 ‘핫잔’(Hazzan)이라는 회당의 서열 2위가 있었고, 그리고 랍비들이 있어서 율법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사역이 시행되었습니다. 회당은 학교역할과 재판소 역할을 했습니다. 문제를 가지고 나오는 사람들에게 마지막 판결을 내리는 재판관과 비슷한 역할까지 회당장은 겸하고 있었습니다. 사회적 명예와 사회적 존경이 있습니다. 그의 인품은 훌륭하고 랍비로 평가받는 인물입니다. "야이로"의 실명을 거론한 것은 실제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렸다는 것은 최고의 겸손을 의미합니다. 즉 문제가 있으면 주님께 고하고 겸손해야 합니다. 주님 앞에 나와야 합니다.
이런 정도의 신분을 누리는 사람이라면 예수를 찾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 당시 예수는 젊은 예언자, 아직 사회적으로 공인되지 못한 사람, 교주처럼 취급될 수도 있었던 그 분. 그러나 그 예수 앞에 와서 회당장이 엎드립니다. 그 것도 주님 발아래 엎드렸습니다. 발아래 엎드렸다는 말은 최대의 존경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발아래에 엎드렸다. 이것이 쉬운 일 이 아니지요. 이 정도의 사회적 신분을 가진 사람이 예수 앞에 엎드리는 것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에게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딸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별 별 노력을 다 했습니다. 그러나 살릴 길이 없습니다. 이제 마지막 소망을 예수께 걸고 그는 예수 앞에 엎드린 것입니다. 그리고 보면 사랑하시는 여러분, 인생을 살면서 우리가 경험하는 고통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이 회당장에게 사랑하는 딸로 말미암은 고통의 딜레마 그것이 없었다면 이 회당장이 예수 앞에 나왔겠습니까? 고통 받지 않는다면, 인생의 역경이 없었더라면, 비바람과 폭풍우가 없었더라면 예수 앞에 나올 수 없었던 사람, 참으로 많습니다. 그래서 옛날 청교도들은 고통이나 역경을 가리켜서 변장 된 축복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고통이, 이 역경이 이 회당장을 겸손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지식과 자기가 가지고 있는 사회적 신분과 지위에도 불구하고 그는 겸허하게 나사렛 예수 앞에 엎드립니다. 엎드려서 어떻게 합니까? 23절에 많이 간구하여 한 번만 호소한 것이 아닙니다. 선생님 살려 주세요. 내 딸 살려 주세요. 부탁입니다. 제발 살려주십시오. 이 소리치고 부르짖는 이 사람 의 모습을 보십시오. 여러분, 체면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어느 때는 명분보다 체면이 앞설 때가 있습니다. 예수 앞 에 나오지 못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지 못하게 만드는 구도의 가장 커다란 장애물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체면입니다. 한국 사람과 일본 사람,들은 체면에 민감합니다. 자기 얼굴의식, 자기체면 때문에. 내가 뭐 이 나이에. 이런 사람들. 체면 때문에 깊은 은혜를 받지 못합니다. 여러분, 언어를 잘 살펴보면 유달리 발달된 언어 가운데 하나가 얼굴과 관련된 단어입니다. 체면이란 말이 얼굴이라는 말이잖아요. 뵐 낯이 없습니다. 면목이 서지 않습니다. 얼굴을 들 수가 없습니다. 그 사람 얼굴 한번 넓다. 그 사람 얼굴이면 통하지 않는 것이 없다. 내 얼굴에 먹칠을 하지 말아 다오. 제 얼굴을 봐서 선생님 한 번만 한번만 부탁을 드립니다. 이 얼굴에 대한 단어들이 얼마나 발달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사람들을 체면 때문에 오늘도 인생의 절박한 문제를 안고 있어도, 해결될 수 없는 인생의 딜레마를 안고 있어도 주 앞에 나오지를 못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절망이 무엇입니까? 딜레마가 무엇입니까? 갈등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고통이 무엇입니까? 문제가 무엇입니까? 내 인생 속에 주님의 부활의 능력, 그리고 부활의 소망을 체험하기를 원하십니까? 오늘 문제를 가지고 나사렛 예수 앞에 나와 주 앞에 엎드리면, 내 인생에 마지막 소망, 최후의 소망을 걸고 주 앞에 엎드리면, 그때 부활의 기적은 시작이 됩니다. 달리다쿰의 은혜가 있게 됩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내 인생 속에 부활의 능력 이 필요하다고 느끼십니까? 문제 가지고 주 앞에 엎드리시고, 아직 문제가 해결 되지 않았어도 예수님과 함께 걸어 가셔야 합니다. 오늘 회당장, 야이로는 주님과 함께 걸어갑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요?
3-1. 문제 앞에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노라면 다양한 문제를 맞게 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문제를 맞게 되면 당황하게 되고 문제를 더욱 큰 문제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어떤 상황에서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문제를 해결하실 분이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9:23절에서 주님은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빌립보서 4:13절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오늘 여러분이 이 믿음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 21~24절까지의 내용을 보면 회당장 야이로의 가정에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곧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12살 된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경건하게 살아도, 믿음으로 살아도 인생의 삶에는 문제가 일어납니다. 이것이 인생사입니다. 그런데 회당장 야이로의 문제에 대처하는 자세를 보면, 22~23절 회당장 중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아래 엎드리어 많이 간구하여 가로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얻어 살게 하소서. 이 말씀 안에는 문제의 복음이 있습니다. 문제 해결의 3가지가 디 있습니다. 야이로는 기도를 했습니다. 문제에 걸 맞는 기도를 했습니다. 기도가 해결의 실마리입니다.
3-2. 둘째는 많이 간구하였습니다. ‘기도’가 주님을 향한 마음 자세라고 한다면 ‘간구’란 필요한 것을 주님께 아뢰는 것을 뜻합니다. 회당장은 딸이 죽게 된 문제를 가지고 주님 앞에 엎드려서 딸을 살려달라고 간절하게 아뢰었습니다.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았던 여인의 간절함, 소경 거지 바디메오의 간절함, 수로보니게 여인의 간절함, 문둥병자의 간절함, 삭개오의 간절함은 하나 같이 문제 앞에서 주님이 해결해 주시기를 소망하는 낮은 자리에서의 바램입니다. 야고보 4:2절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마태복음 7:7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라” 간구하는 것입니다. 이 간구 안에 문제의 해답이 있습니다. 간구를 많이 했습니다. 반복하고 반복을 했습니다. 잠시가 아닙니다. 지금까지 간구를 했습니다. 끝까지 간구를 했습니다. 이루어 질 때까지 간구를 했습니다.
3-3. 셋째는 구원을 얻어 살게 하소서입니다. 궁극적인 문제에 대한 답을 아는 것입니다. 오늘 문제에 구원이 어디로 오는 것인가를 회당장은 그의 고백을 통하여 확인합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문제의 해결이 주님께로부터 라는 확신 있는 믿음에서 해결될 수 있습니다. 자꾸만 다른 곳에 눈길을 돌리고 엉뚱한 곳에 마음을 두는 사람은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자세가 아니라 더욱 큰 문제를 만들어 가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문제 해결은 주님이 하십니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36절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12년 혈루증 여인을 치료하고 가는 길에 회당장의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신 주님은 회당장에게 말씀 하셨습니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그런데 사실은 이 말씀이 마음에 믿음으로 확신되기가 그리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주님은 데살로니가 후서 3:2절에서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님이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은 어둠을 통과하는 빛입니다. 절망을 이기는 희망입니다. 죽음을 극복하는 생명입니다. 좌절감에서 일어나는 힘입니다. 이것이 달리다굼의 은혜입니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이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주어지는 주님의 축복 메시지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는 이 말씀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35절 말씀에 딸이 죽었다는 절망의 소식이 회당장에게 왔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주님의 말씀이, 바로 “믿기만 하라”는 것입니다. 38절 말씀에, 집안에 들어서니 이미 죽은 상황이라 통곡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주님은 믿기만 하라 입니다. 40절 말씀에 예수님이 야이로의 딸이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했을 때 군중들은 비웃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주님은 믿기만 하라 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인간의 모든 범사에 일어나는 어떤 절박한 상황일지라도 주님이 함께 하시면 문제는 해결됩니다. 여러분, 죽음을 해결하시는 주님이 무엇을 못하시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믿으라”는 것입니다. 물론 모든 문제를 주님 앞에 내어 놓고 간구하지만 문제가 악화된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낙심하고 좌절감에 빠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도 주님의 말씀은 한결 같습니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입니다. 이사야 55:8~9절에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여러분,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자기 생각의 한계 안에서 살아가지만 믿음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살아갑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자기가 보는 한계 안에서 살아가지만 믿음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이 보시는 능력 안에서 살아갑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언제나 현실만 바라보지만 믿음이 있는 사람은 언제나 보이지 않는 주님의 창조적인 미래를 바라봅니다. 믿음이 없는 백성들은 사막에서 물이 없어 죽는다고 아우성을 치지만, 믿음이 있는 모세는 사막에서 샘과 강을 내시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믿음이 없는 백성들은 홍해 앞에서 이젠 끝이라고 절망했지만 믿음이 있는 모세는 바다에서도 길을 내시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믿음이 없는 데마는 세상의 것을 보고 갔지만 믿음이 있는 바울은 하늘의 것을 보고 갔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큰 바위를 보고서 걸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조각가, 백지를 보고도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작품을 그려내는 화가, 사막에서도 지하수를 볼 수 있는 사람, 전쟁 중에 진퇴양난의 상황에서도 출구를 보는 지휘관, 역사는 이와 같은 사람들의 몫입니다. 이것이 믿음이 있는 사람들의 삶이며 오늘도 현재 진행형으로 역사합니다. 칠 배를 뜨겁게 한 풀무 가운데 던짐을 받으면서도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믿음의 사람입니다.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원수들을 용서하고 기도하면서 숨을 거둔 스데반은 믿음의 사람입니다. 돌로 맞고, 톱에 켜임을 당하고, 칼에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으면서도 믿음을 지켰던 히브리서 11장에 기록된 선진들의 삶은 믿음이 없이는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와 같은 사람들에 대하여 “세상이 감당치 못할 자”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힘이 드십니까? 오늘을 살아가는 삶의 현실이 힘들고 어렵고 눈물겨운 아픔과 환난이 있을지라도 우리는 믿음으로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 주님은 우리에게 변함없이 말씀하십니다. 달리다굼, 아들아 딸아 일어나라, 절망에 주눅 든 자들아 일어나라하십니다. 우리는 어려움을 당하면 생활적인 현상을 봅니다. 그런데 여러분, 현상은 언제든지 바뀌는 것입니다. 가변성입니다. 현상을 보지 않으려면, 영혼이 살아나야 합니다. 절망하지 않으려면, 달리다쿰의 은혜를 체험하려면, 믿음이 살아나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여러분의 사업도, 건강도, 가정도, 우리 교회도, 달리다굼의 은혜가 넘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달리다쿰의 복이 저와 여러분에게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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