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판돈녕부사 이정영 신도비명(判敦寧府事 李正英 神道碑銘) - 朴世堂
공은 휘는 정영(正英), 자는 자수(子修), 호는 서곡(西谷)으로 종성(宗姓) 출신이다. 정종(定宗)은 아들이 열다섯이니, 그 열 번째가 덕천군(德泉君) 후생(厚生)이다. 3세(世)를 지나 함풍군(咸豐君) 계수(繼壽)에 이르니, 이분이 공의 고조가 된다.
증조는 증(贈) 찬성(贊成) 휘는 수광(秀光)이요, 조부는 동지중추부사 휘 유간(惟侃)이요, 부친은 호조 판서 효민공(孝敏公) 휘 경직(景稷)으로 효성으로 정려(旌閭)가 섰다. 모친 보성 오씨(寶城吳氏)는 첨지중추부사 경지(景智)의 따님이다.
공은 광해 8년인 병진년(丙辰年, 1616, 광해 8) 6월 16일에 태어났다. 태어난 지 석 달 만에 모친이 돌아가니, 동향 사람 청평군(靑平君) 심론(沈惀)이 가엾게 여겨 첩실(妾室) 변씨(邊氏)로 하여금 거두어 기르게 하였고, 그 부인 윤씨(尹氏)가 또 직접 가르쳤다.
청평군이 외군(外郡)에 있는 경우가 많아 공을 데리고 가니, 12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경사로 돌아오게 되었다. 효민공이 가서 보았으나 공이 아직 부친의 얼굴을 알지 못하였다. 청평군이 말을 해 준 뒤에 알게 되어 부친에게 절을 하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비 오듯 눈물을 쏟으니, 좌객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 이때부터 가정에서 수학(受學)하였다. 조부가 아직 무양(無恙)하여 효민공 형제가 몸소 극진히 봉양하였다.
공은 닭이 울면 일어나 소세하고 머리를 빗고서 부친과 숙부를 따라서 조부의 처소에 이르러 부축해 드리고 팔다리를 주물러 드리고 가려운 곳을 긁어드리는 것을 할아버지의 뜻에 맞게 하고 한가할 때는 글 읽기를 쉬지 않으니, 계모(繼母) 이씨 부인(李氏夫人)이 가상히 여기고 칭찬해 마지않았다. 효민공이 복상(服喪) 중이었을 때에 공은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병자년(丙子年, 1636, 인조 14)에 등제하였다. 곧이어 병난(兵難)을 만나 효민공이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어가(御駕)를 호종하니, 공이 이씨 부인을 모시고 강도(江都)로 들어가 쌀을 져 나르고 땔나무를 하여 조석으로 공궤(供饋)하였다. 강도가 함락되자 모친을 모시고 나오면서 자식은 버린 채 돌아보지 않았다.
정축년(丁丑年, 1637, 인조 15)에 괴원(槐院)에 분관(分館)되었다. 무인년(戊寅年, 1638, 인조 16)에 사국(史局)으로 들어가 검열과 대교가 되었으며 주서로 옮겨졌다가 봉교에 천전되고 전적으로 승천(陞遷)하였으나 친혐(親嫌)으로 인해 조용되지 못하였다.
경진년(庚辰年, 1640, 인조 18)에 부친상을 당하여 집상(執喪)에 예를 다하였다. 임오년(壬午年, 1642, 인조 20)에 상기를 마치고 예조 좌랑이 되었으며 정언으로 천전되었다. 체차되어 병조 좌랑이 되고 다시 정언에 제수되었으며 사서에 이직되었다.
계미년(癸未年, 1643, 인조 21)에 세자를 따라 심양(瀋陽)에 가서 일에 따라 올바르게 규간(規諫)하였다. 정명수(鄭命壽)가 노적(奴賊)의 위세를 빌려 공갈하고 협박하여 뇌물을 얻고자 하였다. 세자가 걱정하자, 공이 홀로 아뢰기를, “저군(儲君)께서 여기에 계시니 또한 작은 조정입니다.
묻는 것이 있으면 당연히 스스로 답변해야 하지 어찌 멀리 있는 본조(本朝)까지 번거롭게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답을 해야 합니다.” 하였다. 이에 정명수가 기가 꺾여 감히 말을 하지 못하였다. 겨울에 세자를 따라 우리나라로 돌아와 예조 좌랑에 체배(遞拜)되었으나 일로 인해 파직되었으며 병조 좌랑에 서용되었다.
을유년(乙酉年, 1645, 인조 23)에 모친상을 당하였다.
정해년(丁亥年, 1647, 인조 25)에 상기를 마치고 병조 좌랑을 거쳐 홍문관 부수찬이 되었다.
무자년(戊子年, 1648, 인조 26)에 영동(嶺東)과 영남(嶺南)을 염문(廉問)하였고 수찬을 거쳐 교리에 천전되었으며 중간에 정언이 되었다.
기축년(己丑年, 1649, 효종 즉위년) 겨울에 장릉(長陵)의 애책문(哀冊文)을 써서 올렸는데 자급이 낮다 하여 단지 구마(廐馬)만 하사하였다. 한학 교수(漢學敎授)를 겸하였고 기내(畿內)를 염문하였다.
경인년(庚寅年, 1650, 효종 1)에 헌납과 수찬이 되었다. 일에 연루되어 파직되었으나 곧 서용되었다.
신묘년(辛卯年, 1651, 효종 2)에 교리가 되었다. 입시하여 임금 앞에서 부제학 이지항(李之恒)의 탐오함을 논핵하였는데 간관이 도리어 공을 배척하였다. 이 때문에 하옥되었으나 언관(言官)의 말에 힘입어 풀려났다.
그렇지만 오랫동안 파산(罷散) 상태로 있었다. 뒤에 이지항이 실각하자 특별히 서용되어 다시 수찬이 되었고 사서를 겸하였다. 그러나 일로 인해 파직되었다가 교리로 서용되었다. 이조 좌랑이 되었으나 고과를 중(中)으로 맞아 또 해직되었다가 다시 수찬에 배수되었고 이조 정랑에 천전되고 문학을 겸하였다. 조석윤(趙錫胤), 박장원(朴長遠)이 일을 말하다가 찬적(竄謫)되자 공이 상소로 간하였는데 임금의 뜻에 거슬려 정사(呈辭)하여 체차되었다.
갑오년(甲午年, 1654, 효종 5)에 부응교로 천전되었다. 홍우원(洪宇遠)이 간언으로 인해 죄를 입었는데 대각이 이미 명을 환수하기를 청해 놓고 곧바로 정지하였다. 옥당이 언관을 논박하여 체차하기를 청하니, 상이 노하여 모두 출척하여 보외(補外)하였다. 그래서 공이 가산 현감(嘉山縣監)이 되었다.
가산(嘉山: 평안북도 박천지역의 옛지명) 은 작은 고을로 대로(大路) 변에 위치해 있고 또 무인(武人)이 수령이다 보니 그 백성들이 곤궁하고 피폐하였다. 공은 부임하여 지친 자를 쉬게 하고 파리한 자를 소생시키고 아픈 곳을 어루만져 주었으며, 미염(米鹽)과 재물을 부서(簿書)에 정연하게 기록하니 아전의 간사한 행위가 용납될 수 없었으며, 교량과 관우(館宇) 및 응접에 소용되는 기구 등 빈려(賓旅)를 맞이하기 위한 것들을 모두 부족하거나 결여되지 않게 하였으며, 향약(鄕約)을 정비하고 좋은 스승을 골라 고을의 자제를 가르치고 몸소 권면하고 힘쓰니, 2년 사이에 민풍(民風)이 크게 변하였다.
관서(關西)는 호강(豪强)과 무단(武斷)의 풍속이 많았다. 고을에 교활한 아전이 있었는데 감영의 위세를 믿고서 관리를 능멸하고 백성의 재물을 빼앗았다. 심지어 매질까지 해가며 곤궁하고 약한 자들을 사사로이 위협하자 공이 그 죄를 다스리고 빼앗은 재물을 돌려주었다.
서리가 또 앙갚음하려고 계책을 꾸미자 공이 그 정황을 알고 순사(巡使)에게 말하여 그 죄를 끝까지 처벌할 것을 청하였으나 순사가 이미 승낙해 놓고 다시 태도를 바꾸었다. 공이 마침내 이 서리를 장살(杖殺)하니, 백성들이 매우 기뻐하였다. 그렇지만 공 역시 함부로 죽인 것으로 인해 체포되었다.
혹자가 공에게 사실대로 대답하지 말도록 권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그리하여 춘천(春川)으로 귀양 갔다가 특별히 강서(江西)로 이배(移配)되었다. 가산의 백성들이 공이 백성을 위하다가 죄를 입은 것을 원통해하여 위로하고 음식을 주는 발길이 이어졌고 도로에서 보호하였으며, 인근 고을에서도 온 자가 많았다.
고을의 선비와 백성들이 각각 공을 위해 비문을 세워 덕정을 칭송하였다. 이듬해에 풀려나 돌아왔다. 정유년(丁酉年, 1657, 효종 8)에 종부시 정에 서용되었다. 상의원 정으로 옮겼으며, 사인으로 이배(移拜)되었고 필선과 보덕을 겸하였다. 세 차례 사간이 되어 이민구(李敏求)를 서용하라는 명을 환수하게 하였다. 연이어 응교, 부응교가 되었다.
7월에 동부승지로 승진하고 좌승지에 이르러 체차되었다. 형조 참의와 참지를 역임하였다. 기해년(己亥年, 1659, 효종 10)에 은대(銀臺)로 돌아왔고 체차되어 참지가 되었으며 다시 좌승지가 되었다. 대행왕(大行王)의 명정(銘旌)을 써서 올려 자급이 올랐다.
경자년(庚子年, 1660, 현종 1)에 부총관(副摠管)이 되었으며, 병조 참판에 옮겨 제수되었다. 대사간에 배수되어 정사의 잘못과 백성의 폐막에 대해 논하였으며, 체차되어 지신사(知申事)가 되었다. 신축년(辛丑年, 1661, 현종 2)에 연경(燕京)에 사신을 갔고 돌아와 우윤이 되었으며 동지의금부사를 겸하였다. 다시 대사간이 되어 조형(趙珩)을 국문(鞫問)하는 것에 대해 간쟁하니, 상이 노하여 관작을 삭탈하였다.
갑진년(甲辰年, 1664, 현종 5)에 서용되어 평안도 관찰사가 되었다. 공은 민력의 피폐가 관향곡(管餉穀)을 마구 거두는 데에서 기인한 것임을 익히 알고 있는지라 번다하고 가혹한 것을 모두 견감해 주고 오직 절약하여 비용을 줄이는 것으로 근본을 삼으니, 창고에 쌓인 곡식이 전보다 몇 배가 늘게 되었다.
백성들의 질고(疾苦)를 조사하여 역말로 조정에 보고하여 혁파하였으며, 변새(邊塞)의 성루(城壘)는 멀고 외진 곳이라 종전에는 이르는 경우가 드물었는데 모두 몸소 일일이 순시하였으며, 그곳 자제들을 모아서 각각 그 기예를 시험하고 곤궁한 자와 늙은 자를 불쌍히 여겨 옷감을 마련해 주고 효자와 열부를 포상하여 정문(旌門)을 세워주었으며, 행차가 그 집에 이르면 후히 무휼(撫恤)하였다. 그리하여 변방의 백성들이 뛸 듯이 기뻐하였으니, 난생 처음 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병오년(丙午年, 1666, 현종 7) 봄에 임기가 차 예조 참판이 되었는데 포로가 도망하여 돌아온 일이 발각되어 우리 조정에 힐문하려고 사신이 나오게 되자 공으로 하여금 머물러 대응하게 하였다. 이에 공이 만상(灣上)으로 달려가니, 청나라 사신이 끝까지 캐묻고 통관(通官)이 따라서 위협하였다.
그렇지만 공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날마다 빈사(賓使 김좌명(金佐命) )와 더불어 투호(投壺)를 하고 활쏘기를 하였다. 조정이 뇌물을 주는 것을 허락하였지만 공은 내켜하지 않고 아뢰기를, “통관은 본디 힘을 쓸 수 없으니, 일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하였다.
그러나 마침내 대간의 탄핵을 당하고 말았으니, 뇌물을 지나치게 썼다는 이유였다. 서용되어 형조 참판에 배수되었고 병조 참판으로 옮겨 제수되었다. 지신사가 되었으며 체차되어 좌윤이 되었다. 무신년(戊申年, 1668, 현종 9)에 지신사, 형조 참판, 대사간을 역임하였고 이조 참판이 되었다가 탄핵을 당하였으며 호조 참판이 되었다.
절사(節使)가 되어 다녀온 공으로 자급이 오르고 판윤이 되었으나 또다시 관서 때의 일로 탄핵을 받아 새로 받은 자급을 환수당하였다. 조정이 처음에는 민폐(民弊)를 염려하여 관향(管餉)의 조곡(糶穀)을 줄이고 포(布)를 거두었으나 이내 다시 중지하였다.
공이 아뢰기를, “이익을 다투다가 믿음을 잃는 것은 불가합니다.” 하여 상이 공에게 편의에 따라 수량을 채워 넣는 것을 허락하였는데 그 보충하고 바꾼 내역이 문부(文簿)에 갖추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정만화(鄭萬和)가 공의 후임이 되어 공이 값을 줄이고 뒤섞어 기록했다고 지목하였고, 내직으로 들어와 간장(諫長)이 되어서는 은밀히 동료를 사주하여 공을 논핵하게 하니, 박공 장원(朴公長遠)이 “공은 청렴과 근실함으로 자신을 지켰으니, 어찌 그런 일이 있었겠는가.” 하면서 소장을 올려 공을 변호하였다. 공은 이로부터 가솔을 모두 이끌고 해도(海島)로 들어가서는 소명(召命)에도 나오지 않았다.
신해년(辛亥年, 1671, 현종 12)에 개성 유수(開城留守)에 배수되었다. 기근과 역병이 계속 이어졌는데 공이 마음을 다해 구휼한 덕에 목숨을 건진 자가 매우 많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형조 판서에 발탁되고 판윤으로 이배되었으며, 빈사(賓使)가 되었다. 겨울에 절사(節使)에 충차(充差)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사은(謝恩)을 겸하게 되어 부사(副使)가 되었다.
전후로 연경에 사신을 다녀올 때에 보따리에 든 것은 서적뿐이었다. 돌아와 지중추부사가 되었으며 공조 판서로 옮겼다. 계축년(癸丑年, 1673, 현종 14)에 천릉(遷陵)하는 역사를 감동(監董)하여 정헌대부(正憲大夫)로 자급이 올랐다. 중간에 일로 인해 하옥되어 파직되었으나 서용되어 지의금부사가 되었다.
갑인년(甲寅年, 1674, 현종 15)에 또 공조 판서를 맡았고 산릉(山陵)의 역사를 감동하여 자급이 숭정대부(崇政大夫)로 올랐다. 가을에 또 숭릉(崇陵)의 역사를 감동하였다. 일을 마치고 나서 자급이 숭록대부(崇祿大夫)로 오르고 이조 판서가 되었으나 또다시 탄핵을 당해 체차되고 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소명에 나오지 않은 일로 파직되었다가 판윤에 서용되었다.
윤휴(尹鑴)가 금송(禁松)을 작벌(斫伐)하자 공이 해직을 청하면서 이를 논하니, 군소배(群小輩)들이 더욱 공을 미워하였다. 윤휴가 비로소 중용되어 온 세상이 그에게로 쏠렸으나 유독 공만이 윤휴를 두고 마음가짐이 바르지 않다고 하였는데 윤휴가 실각하게 되자 사람들이 모두 공의 선견지명을 인정하였다.
일에 연루되어 해직(解職)되어 판중추부사가 되었고 형조 판서를 맡았으며 체차되어 다시 판윤이 되었다. 병진년(丙辰年, 1676, 숙종 2)에 대비(大妃)에게 존호(尊號)를 올리는 일로 부사(副使)가 되어 사신을 다녀온 공으로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로 자급이 올랐고 지중추부사가 되었으며 판윤을 겸하였다.
판돈녕부사로 이배되었으며 판의금부사를 겸하였다. 숭릉의 사초(莎草)에 관한 일로 하옥되어 파직되었다가 판돈녕부사에 서용되었으며 형조 판서를 겸하였다. 정사년(丁巳年, 1677, 숙종 3)에 또 시제(試題)가 기휘(忌諱)를 범한 일로 하옥되어 철원(鐵原)으로 귀양 갔다.
무오년(戊午年, 1678, 현종 4)에 용서를 받고 해도에 있는 집으로 돌아왔다. 판돈녕부사에 서용되었으며 형조 판서를 겸하였다. 체차되어 판윤에 배수되었다. 투서(投書)에 연루되어 해직되었으나 이내 다시 판윤이 되었다. 특별히 좌찬성에 제수되었으나 탄핵을 받고 사직하였다. 체차되어 다시 판돈녕부사가 되었으며 판윤을 겸하였다.
경신년(庚申年, 1680, 숙종 6)에 허견(許堅)과 이남(李柟)의 역옥(逆獄)이 일어나자 한밤중에 판의금부사에 배수되어 유문(留門)한 상태에서 부름을 받고 들어가 국문에 참여하였으나 작은 일로 인해 해직되었다. 공조 판서를 겸하였고 예조 판서에 옮겨 제수되었으며 빈사(賓使)가 되어 서도(西道)에 나갔다.
임술년(壬戌年, 1682, 숙종 8)에 형조 판서에 배수되었다.
계해년(癸亥年, 1683, 숙종 9)에 또다시 판의금부사를 겸하였다.
갑자년(甲子年, 1684, 숙종 10)에 경사(慶事)로 인해 음식을 하사하자 모두 족당(族黨)에게 나누어 주었으니, 하사를 영예로 여긴 것이다.
을축년(乙丑年, 1685, 숙종 11)에 나이를 이유로 치사(致仕)하였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였다. 기사(耆社)에 참여하였다.
병인년(丙寅年, 1686, 숙종 12)에 병이 심해져 또다시 치사하니, 어의(御醫)를 보내 병세를 살피게 하고 약물을 하사하였다. 공은 병이 이미 손을 써 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부축을 받고 일어나 앉아 손수 소장을 써서 사은하였고, 사후(死後)의 일을 빠짐없이 세세히 일러주었는데, 염습과 장례는 검소함을 따르고 제사는 간소하고 정갈하게 하는 데에 힘쓰며 시호를 청하지 말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부인을 물리치고 가까이 있지 못하게 하였고, 임종 때에 정신이 맑지 못하였으나 친척과 문병 온 사람들과 작별하고 평온히 서거하니, 병인년(丙寅年, 1686, 숙종 12) 4월 2일의 일이요, 향년 71세였다. 부음이 전해지자 철조시(轍朝市)하였고, 조제(弔祭)와 치부(致賻)를 예법대로 하였다.
이달 윤5월 3일에 과천(果川) 북쪽 작현(鵲峴) 유좌(酉坐)의 언덕에 장사 지내니, 효민공의 묘소와 5리(里) 떨어진 곳이다. 관서의 선비와 백성들이 서로 부의를 전하는 것이 마치 명령에 달려가는 것 같았다. 공은 효성과 우애를 타고났고 가정의 훈도를 받아 품행이 남보다 뛰어났다.
일찍 오씨 부인을 여읜 것을 지극한 통한으로 여겨 어미젖을 먹고 있는 아이를 보면 문득 슬픔에 젖어 눈물을 흘렸고 매번 기일(忌日)이 되면 시종일관 애통해하였다. 임종 때에 자식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살아생전에 어머니의 얼굴을 모른다. 죽어서 만약 지각이 있다면 돌아가 슬하에서 모실 것이니, 나를 어머니의 무덤 발치에 묻어주면 다행이겠다.” 하였다.
효민공이 거상(居喪) 중에 너무 슬퍼한 나머지 몸이 야위자 온 힘을 다해 보살펴드렸고 부친이 옷을 입지 않으면 감히 먼저 방한복을 입지 않았다. 청평군 내외를 부모처럼 섬겨서 청평군이 돌아가자 복만 입지 않았을 뿐 아비를 잃은 듯이 하였으며, 변씨가 죽자 신주를 세우고 제사하였다.
항상 자식들에게 눈물을 흘리며 이르기를, “지난날에 심씨(沈氏)가 아니었다면 내 어찌 오늘날이 있었겠는가.” 하였다. 계부(季父) 백헌공(白軒公 이경석(李景奭) )을 부모처럼 섬겨 큰일이건 작은 일이건 모두 여쭈었고 가르침을 행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관서(關西)에 있을 때에 색다른 음식이 생기면 감히 먼저 맛을 보지 않았으며, 계부가 돌아가자 궤연(几筵)을 떠나지 않았고 1주기가 지난 뒤에야 평상시의 침소로 돌아와 거처하였다. 형제와 자매를 대할 때에 우애가 지극하였으니, 중형(仲兄)이 매우 곤궁하여 공에게 의지하여 끼니를 이었고 자녀들을 성취시킬 때에도 공의 도움이 꼭 필요하였으며, 중형이 죽자 어린 조카들을 거두어 양육하였다.
그 막내가 와서 공부하게 되자 울면서 회초리를 치며 말하기를, “이렇게 하지 않고서도 사람이 될 수 있다면 내가 어찌 차마 이리 하겠는가.” 하였는데 그 조카가 급제하였을 때에 공이 또 울면서 말하기를, “이제야 우리 형님을 지하에서 뵐 수 있겠구나.” 하였다.
손위 누이와 옆집에 살았는데 조석으로 가서 살펴보고 적은 음식이라도 반드시 나누어 먹었다. 형의 딸이 역병에 걸리자 몸소 구완하여 자제가 반복하여 말렸는데도 듣지 않았다. 곤궁한 친족을 두루 보살펴 혼인과 상사에 돌보아 주고 도움을 줄 때에 반드시 그 힘을 다하였다.
자식을 가르칠 때에는 엄하게 하였으니, 자식들이 종일토록 시좌(侍坐)하고 있으면서 공이 묻지 않으면 감히 말을 하지 못하였고, 자식들의 잘못은 반드시 준엄하게 책망하여 용서하지 않았다. 항상 《자경편(自警編)》을 책상 위에 놓아두고 사군(事君)과 처신(處身)의 준칙으로 삼았다. 심양에 있을 때부터 영릉(寧陵)의 지우를 입었는데 어찰(御札)과 어제(御製)를 상자에 간직해 가보로 전하였고 이따금 깨끗이 손을 씻고 엄숙하게 낭송하면서 서럽게 울곤 하였다.
작은 일을 들추어내어 곧다는 이름을 얻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봉공(奉公)하여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더욱이 온실(溫室)의 경계를 본받아 일찍이 사람들에게 공무에 관해 말한 적이 없었으니, 옥사(獄事)를 다스릴 때에는 사람들이 옥사의 상황에 대해서 물으면 벌써 잊었다는 말로 답하였다.
궐정(闕庭)에 출입할 때에 행동거지에 법도가 있었고 겸손하고 성실하며 온화하고 관후하여 사람들을 대할 때에 급하게 말하거나 서두르는 기색이 없었으며 한가로이 있을 때에 지루해하는 마음과 게으른 모습이 전혀 없었다. 방을 깨끗이 소제하고 궤안을 반드시 정돈하고서 온종일 바른 자세로 앉아 있었는데 말을 하거나 웃는 경우가 매우 드물었다.
김공 좌명(金公佐命)과 박공 장원(朴公長遠)이 모두 당대의 빼어난 명류(名流)였는데 이들과 모두 마음을 허여해 벗으로 사귀었다.
늘 한 창려(韓昌黎 한유(韓愈) )의 “사람들이 추구하는 바는 내가 하찮게 여기는 바이다.”라는 구절을 암송하면서 말하기를, “말속(末俗)을 경계할 수 있다.” 하였으니, 세상이 공을 훌륭하게 여기는 것도 이 때문이고 공을 노여워하는 것도 이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공은 재물에 초연하였다. 심양에 다녀올 때 여장(旅裝)이 갖추어지지 않자 노복 하나가 백금(百金)을 주고 자신의 노비 문서를 샀는데 그 반만 받고 나머지는 돌려주었고, 돌아올 때에 자루에 남은 노자가 있자 모두 동행했던 의원(醫員)에게 나누어 주었다. 일찍이 어떤 사람이 공에게 제방을 쌓아 밭을 만들 것을 요구하였으나 공은 거절하고 그렇게 하지 않았다.
누차 사송(詞訟)을 담당하는 아문의 장(長)을 맡았으나 뜰에는 사사로이 청탁하러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으며 지위가 삼공(三公)의 반열에 있었으나 대문이 쓸쓸하여 참새 그물을 칠 수 있을 정도였다. 일찍부터 필연(筆硯)에 종사하여 전주(篆籒)에 두루 통하였으니, 위로 전각의 편액(扁額)으로부터 아래로 진신(搢紳)의 비갈(碑碣)에 이르기까지 공의 손에서 나온 것이 많았다.
투호와 활쏘기를 좋아하였으며, 일찍부터 술을 가까이하여 이따금 술로 인한 실수가 있었는데 관서(關西)에 부임하게 되었을 때에 백헌공이 글을 써서 경계하니, 종신토록 다시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 만년에 서교(西郊) 밖에 집을 짓고 동산을 가꾸고 도서(圖書)를 모았는데 ‘보만(保晩)’이란 편액을 걸고서 여생을 보냈다.
전 부인 청송 심씨(靑松沈氏)는 부사(府使) 장세(長世)의 따님으로 공보다 47년 먼저 별세하였다. 처음에 오씨 부인의 묘 아래에 장사 지냈다가 뒤에 공의 무덤에 부장(祔葬)하였다. 1남 1녀를 두었으니, 아들 만성(晩成)은 목사이고, 딸은 참판 송광연(宋光淵)에게 시집갔다.
후 부인 문화 유씨(文化柳氏)는 학생(學生) 기선(基善)의 따님으로 학문에 두루 통달하고 지식이 해박하였다. 공보다 5년 뒤에 별세하여 역시 공의 무덤에 부장하였는데 묘혈(墓穴)은 같이 쓰고 묘실(墓室)은 달리하였다. 1남 6녀를 두었으니, 아들 대성(大成)은 지평이고 딸은 현감 김창국(金昌國), 학생 홍치상(洪致祥), 승지 윤지인(尹趾仁), 진사 조하언(曺夏彦), 부사 심정보(沈廷輔), 사인(士人) 임사원(任士元)에게 시집갔다.
만성은 아들이 없어 아우의 아들 진유(眞儒)를 데려와 후사로 삼았다. 대성은 5남 2녀를 두었으니, 맏이는 바로 진유이고 그다음은 진검(眞儉), 진휴(眞休), 진급(眞伋), 진위(眞偉)이다. 송광연, 김창국, 심정보는 모두 아들이 없다. 홍치상은 1남을 두었으니, 태유(泰猷)이다.
윤지인은 4남을 두었으니, 맏이는 심(審)이고 나머지는 어리다. 조하언은 4남을 두었으니, 맏이는 명종(命宗)이고 나머지는 어리다. 임사원은 5남을 두었으니, 모두 어리다. 진유는 2남 1녀를 두었으니, 어리다. 대성이 송 참판(宋參判)이 지은 행장을 가지고 와서 신도비명을 부탁하였다.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삼가 행장에 의거하여 공적과 행적을 차례로 기술하고 그 끝에 시를 붙인다. 시는 다음과 같다.
석문공과 백헌공에 대해서는 / 石門白軒
세상이 그 어짊을 허여하였나니 / 世歸其賢
그 효성과 그 충성을 / 惟孝惟忠
뉘라서 필적하겠는가 / 誰與齊肩
공은 선대의 명성을 이어 / 有嗣厥聲
선대보다 게을리 하지 않았으니 / 勿懈于先
독실하게 실천하여 / 執行醇實
절조를 굳게 지켰다네 / 載貞以堅
분경(奔競)의 풍조를 누를 만하였으니 / 可鎭躁競
곱게 보지 않음은 당연한 일 / 宜莫我姸
공은 우뚝하게 지위에 있다가 / 公孤有位
나이 일흔에 기로소에 들었고 / 耆耋有筵
옥관자에 서각대를 두르고서 / 戴玉垂犀
단아한 모습으로 진퇴하였네 / 進退躚躚
빗돌에 명문을 새기니 / 刻銘山石
그 내용 틀림이 없다네 / 陳辭不愆
후세 사람들이 이를 믿고서 / 來之信之
천년만년 제사를 받들리라 / 歷祀萬千
---------------------------------------------------------------------------------------------------------------------------------------------------
[각주]
[주01] 자경편(自警編) :
송나라의 종실 조선료(趙善璙)가《언행록(言行錄)》의 체재를 본받아 송대의 명신(名臣)과 대유(大儒)의 아름다운 말과 착한 행
실을 기록한 책이다. 세종이 이 책에 매우 감명을 받아《치평요람(治平要覽)》을 편찬하게 하였고, 성종(成宗) 때에는 양성지(梁誠
之)의 상소로 이 책을 간행한 바 있다.《欽定四庫全書摠目》《世宗實錄》《成宗實錄》
[주02] 온실(溫室)의 경계 :
공무와 궁중의 일에 대해서는 함부로 외부에 누설하지 않는 가르침을 말한다. 온실은 한(漢)나라의 장락궁(長樂宮) 안에 있는 전각
의 이름으로, 한나라 성제(成帝) 때 공광(孔光)이 상서(尙書) 벼슬을 하면서 공무상의 일을 가족에게 일체 말하지 않았는데, 심지어
가족들이 “온실전 안에는 무슨 나무가 심어져 있습니까?”라고 물었으나, 공광이 거기에는 대답을 하지 않고 다른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漢書 卷81 孔光傳》
[주03] 대문이……정도였다 :
청탁하러 집에 찾아오는 손님이 드물다는 말이다.《사기(史記)》권120〈급정열전(汲鄭列傳)〉의 태사공왈(太史公曰)에 나오는
적공(翟公)의 고사에서 비롯된 말로, 한(漢)나라 적공이 정위(廷尉)가 되었을 때에는 손님들이 문에 가득하더니, 정위에서 파면되고
나자 오는 손님은 없고 문전에 참새만 모여들어 새 그물을 칠 만하였다고 한다.
[주04] 석문공(石門公) :
이정영의 부친 이경직(李景稷)으로 그의 호가 석문(石門)이다.《晩靜堂集 卷18 判敦寧李公謚狀, 韓國文集叢刊 163輯》
ⓒ 한국고전번역원 | 김낙철 (역) | 2007
-------------------------------------------------------------------------------------------------------------------------------------------------
[原文]
判敦寧府事 李公 神道碑銘 - 朴世堂
公諱正英, 字子修, 號西谷, 出宗姓。 定宗十五子, 其十德泉君厚生。 三世至咸豐君繼壽, 爲高祖。 曾祖贈贊成諱秀光, 大父同知諱惟侃。 父戶曹判書、孝敏公諱景稷, 以孝旌閭。 母寶城吳氏, 僉知景智女。
公生光海八年丙辰六月十六日, 生三月而母沒。 同里靑平君沈惀憐之, 使妾邊氏收鞠, 其夫人尹氏又親自提誨。 靑平多在外郡, 携公以行。 年十二, 始還京, 孝敏往視, 公猶未識嚴顔。 靑平語之而後知, 拜跪於前, 涕泣滂沱, 坐客皆揮淚。 自是受學家庭。 大父尙無恙, 孝敏兄弟躬奉志養。 公鷄鳴盥櫛, 從詣大父所, 扶持抑搔, 甚宜尊公意, 暇則讀書不輟, 繼母李夫人嘉歎不已。 孝敏在憂服, 公不應公車。 丙子, 登第, 旋遭兵難, 孝敏公扈駕南漢。 公侍李夫人入江都, 負米採薪, 以供朝夕。 及江都陷, 奉母出走, 棄子不顧。 丁丑, 補槐院。 戊寅, 入史局, 爲檢閱、待敎, 移注書, 轉奉敎, 遷典籍, 因親嫌不調。 庚辰, 遭外憂, 執喪盡禮。 壬午, 制除, 爲禮曹佐郞, 遷正言, 褫爲兵郞, 還正言, 移司書。 癸未, 從世子瀋中, 隨事規諫。 鄭命壽假威恫喝, 欲以索賂, 世子憂之, 公獨言: “儲君在此, 亦小朝廷, 有問自當對辨, 何必遠煩本朝? 宜以此申論。” 命壽氣沮不敢言。 冬, 從世子東還, 褫拜禮郞, 坐罷, 敍兵郞。 乙酉, 遭內憂。 丁亥, 制除, 由兵郞爲弘文副修撰。 戊子, 廉問嶺東、南, 由修撰轉校理, 間爲正言。 己丑冬, 寫進長陵哀冊, 以資淺, 但賜廏馬。 兼漢學敎授, 廉問畿內。 庚寅, 爲獻納、修撰, 坐罷旋敍。 辛卯, 爲校理, 入侍面論副提學李之恒貪汚, 諫官反斥公。 以是當下吏, 賴言者得釋, 然罷閑者久。 後之恒敗, 特敍還修撰、兼司書, 坐罷, 敍校理。 爲吏曹佐郞, 又考中解官, 復拜修撰, 轉吏曹正郞、兼文學。 趙錫胤、朴長遠言事竄謫, 公疏諫, 忤旨辭褫。 甲午, 遷副應敎。 洪宇遠以言被罪, 臺閣旣請收還旋停。 玉堂駁褫言官, 上怒竝黜補外。 公爲嘉山縣監, 嘉山小縣, 當孔道, 又武人爲宰, 其民困疲。 公至, 息勞蘇瘠, 撫摩疾痾。 米鹽、財賄, 簿書井井, 吏不容奸。 橋梁、館宇、饔餼之具, 賓旅所待, 咸無乏闕。 申鄕約, 擇良師, 以敎子弟, 親自勸勵。 二年之間, 民風丕變。 關西俗多豪强武斷。 邑有黠胥, 倚使府凌官吏奪民産, 至爲榜楚, 私脅窮弱。 公治其罪, 而還其所奪。 胥又計逞怨毒, 公知狀以言巡使, 請究其罪。 旣諾中改, 公竟杖殺此胥。 小民歌舞, 公亦以
擅殺被逮。 或勸公無以實對, 不從, 配春川, 特移江西。 嘉山民冤公爲民而被罪, 問遺相續, 防護道路, 傍邑亦多來者。 鄕士與民各爲公立碑以頌治。 明年放還。
丁酉, 敍宗簿正, 移尙衣正, 改舍人、兼弼善・輔德。 三爲司諫, 還收李敏求收敍。 連爲應敎、副應敎。 七月, 進同副承旨, 轉至左而褫。 歷刑議、參知。 己亥, 還銀臺, 褫爲參知, 還左承旨。 書進大行銘旌, 進階。 庚子, 爲副摠管, 移兵曹參判。 拜大司諫, 論政疵、民瘼, 褫爲知申。 辛丑, 使燕, 還爲右尹、兼同義禁。 還大諫, 爭趙珩鞠問, 上怒削官。 甲辰, 敍觀察關西, 公習知民力凋弊源於管餉掊剋, 悉蠲煩苛, 唯以節縮爲本, 倉庾所積倍蓰於舊。 詢民疾苦, 驛聞罷行。 邊塞城壘, 遐僻之地, 從前罕到, 無不躬歷, 聚其子弟, 各試以藝。 恤窮愍老, 資其衣絮, 嘉孝褒烈, 表厥宅閭。 行至其家, 厚加存撫, 邊氓鼓舞, 有生初見。 丙午春, 秩滿爲禮曹參判, 有俘逃回, 事覺來問, 朝廷留公使對。 馳至灣上, 淸使究詰, 通官從而脅持。 公不爲之動, 日與儐使投壺、射帿。 朝廷許行賂, 公不肯, 曰: “通官固不能爲力, 無益於事。” 然竟遭臺參, 謂用賂過。 敍拜刑參, 移兵參, 爲知申, 褫爲左尹。 戊申, 歷知申、刑參、大諫, 爲亞銓, 被彈爲戶參。 以節使進階爲判尹, 又以關西時事被劾, 收新資。 朝廷初念民弊, 減餉糶而收布, 旋又寢。 公謂: “爭利失信不可。” 上聽公隨便塡額, 其補換文簿具在。 鄭萬和代公, 指爲減價混錄, 入爲諫長, 陰嗾同僚。 朴公長遠謂: “公淸謹自守, 寧有是事?” 陳疏訟公。 公自是捲入海島, 不就召命。
辛亥, 拜開城留守, 飢疫相仍, 盡心賙救, 全活甚衆。 未幾, 擢授刑曹判書, 改判尹, 爲儐使。 冬, 充節使, 俄兼謝恩爲副。 前後赴燕, 橐中只書籍而已。 還爲知樞, 遷冬官。 癸丑, 董役遷陵, 進階正憲。 間下吏坐罷, 敍爲知義禁。 甲寅, 又長冬官, 董役山陵, 進崇政。 秋, 又董崇陵之役。 事竣, 進崇祿, 爲吏曹判書。 又遭彈, 褫爲知樞, 以不赴召坐罷, 敍判尹。 尹鑴斫取禁松, 公因乞解論之, 群小媢嫉益甚。 鑴始被嚮用, 一時靡然, 獨公謂“鑴操心不端”。 及鑴敗, 人皆許公先見。 坐事解職, 爲判中樞、長秋官, 褫還判尹。 丙辰, 上大妃尊號, 爲副使, 進輔國, 爲知樞、兼判尹, 移判敦寧、兼判義禁。 坐崇陵莎草事, 下吏罷, 敍判敦寧、兼長秋官。 丁巳, 又坐試題犯忌, 下吏配鐵原。 戊午, 宥歸海莊, 敍判敦寧、兼秋官。 褫拜判尹, 坐飛書解職, 旋還判尹。 特授左贊成, 被劾去位, 褫還敦寧、兼判尹。 庚申, 堅、柟獄起, 夜拜判義禁, 留門召入參鞠, 以微事解。 兼長冬官, 移春官, 充儐使西出。 壬戌, 拜秋官。 癸亥, 又兼判義禁。 甲子, 因慶賜食物, 盡分之族黨, 榮賜。
乙丑, 引年乞致仕, 不許, 參耆社。 丙寅, 疾劇, 又請休致, 遣醫視疾, 賜藥物。 公疾已不可爲, 扶坐手草疏以謝, 戒身後事纖悉, 斂葬從儉素, 祭祀務簡潔, 勿請諡, 屛婦人不近。 臨絶, 精神不爽, 親戚來問人與爲訣, 悠然長逝, 歲丙寅四月二日, 年七十一。 訃聞, 輟朝市、弔祭、致賻如禮。 是月有閏五月三日, 葬于果川北鵲峴負酉之原, 去孝敏公墳隴五里而近。 關西士民相與致賻如趨令。
公孝友天得, 濡染庭訓, 質行過人。 以不逮吳夫人爲至痛, 見子母乳哺, 輒怛然悲泣, 每當諱日, 無異初終。 臨沒, 謂諸子曰: “吾生不識慈顔, 死若有知, 當歸侍膝下, 葬我於山足幸矣。” 孝敏公居憂毁瘠, 竭力扶護, 親未受衣, 不敢先寒服。 事靑平內外如父母, 卒若喪父而無服, 邊氏死, 立主以祀。 常泣謂諸子曰: “向非沈氏, 吾安能有今日?” 事季父白軒公如父母, 事無大小皆稟, 所敎無不行。 在關西得異味, 不敢先嘗。 旣卒, 不離喪側, 朞而後復寢。 待兄弟姊妹, 盡其友愛。 仲兄貧甚, 待公擧火, 子女嫁娶, 須公資送。 及沒, 收鞠幼稚。 其季子就學, 泣施楚撻, 曰: “不如此而能成人, 吾何忍也?” 及其擢第, 公又泣曰: “今可以見吾兄於地下矣。” 與姊接屋, 朝夕往省, 味少必分。 兄女染癘, 親自救護, 子弟更諫, 不聽。 周恤窮族, 顧助婚喪, 必殫其力。 敎子嚴, 侍坐終日, 非問不敢言, 過必峻責不恕。 常置《自警編》案上, 事君行己, 視爲準則。
自在瀋中, 受知寧陵, 御札、宸章, 留藏箱篋, 傳爲家寶, 有時盥手莊誦, 悲泣不已。 不喜抉摘細故, 以沽直名, 一心奉公, 夙夜匪懈。 尤謹溫室之戒, 未嘗語人, 當按獄而人問獄情, 則曰: “已忘之。” 出入闕庭, 進止有常, 謙恭和厚, 接人無疾言遽色, 宴處絶倦意惰容。 淨掃一室, 几案必整, 終日危坐, 言笑甚罕。 金公佐明、朴公長遠俱一時勝流, 皆與許心相友。 每誦昌黎“人之所趨, 僕之所傲”, 曰: “可以警末俗。” 世之多公以此, 而怒公亦由此。 脫略財賄, 遼、瀋之行, 裝齎未具, 一奴以百金自買, 受其半而還之。 及東歸, 橐有餘資, 悉與同行醫。 嘗有人要公築坊爲田, 謝不肯。 屢長詞訟, 庭無私謁; 位班三事, 門可張羅。 早事筆硏, 旁通篆籒, 上自殿宇扁額, 下至搢紳碑碣, 多出公手。 喜投壺、射帿, 早近杯觴, 時有酒失。 及赴關西, 白軒作書戒之, 終身不復飮。 晩歲築室西郭外, 拓園林聚圖書, 扁曰保晩, 以終餘年。
前夫人靑松沈氏, 府使長世女, 卒先公四十七年。 初葬吳夫人墓下, 後祔公。 一男一女: 男晩成, 牧使。 女適參判宋光淵。 後夫人文化柳氏, 學生基善女。 通達博洽。 後公五年卒, 亦祔公, 同穴異室。 一男六女: 男大成, 持平。 女適縣監金昌國、學生洪致祥、承旨尹趾仁、進士曺夏彦、府使沈廷輔、士人任士元。 晩成無子, 取弟子眞儒爲後。 大成五男二女: 長卽眞儒, 次眞儉、眞休、眞伋、眞偉。 光淵、昌國、廷輔皆無子。 洪致祥一男泰猷。 尹趾仁四男: 長審, 餘幼。 曺夏彦四男: 長命宗, 餘幼。 任士元五男, 皆幼。 眞儒二男一女, 幼。
大成以宋參判所爲狀, 來求墓刻之銘, 辭不獲, 謹据狀敍次功行, 系之以詩曰:
石門、白軒, 世歸其賢。 惟孝惟忠, 誰與齊肩 有嗣厥聲, 勿懈于先。 執行醇實, 載貞以堅。 可鎭躁競, 宜莫我姸。 公孤有位, 耆耋有筵。 戴玉垂犀, 進退躚躚。 刻銘山石, 陳辭不愆。 來之信之, 歷祀萬千。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