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 경주이공(慶州李公) 묘비문
공의 이름은 문환(文煥, 1418-1489), 자는 요장(堯粧)으로 조선 문종임금 신유년(辛酉年, 1441)에 사마시에 합격되었고 단종1년 계유년(癸酉年,1453)에 문과에 올라 깨끗한 벼슬을 지냈다. 내직으로는 특별히 은대(銀臺)에 올라 동부승지와 부제학을 지내어 대사성과 대사관, 이조, 호조, 예조참의 등을 차례로 맞았으며, 외직으로는 경상도 안렴사를 지내어 강원도 관찰사를 맞았으니 이는 공의 벼슬살이 이력이다.
공은 태어나면서부터 영민하여 뛰어난 재주로 일찍이 가정교훈을 받아 책 읽기를 좋아하였다. 돈독하고 진실한 공부가 있어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였으며 일평생 받은바 학문은 가정에 들어오면 어버이께 효도를 하고 나가면 어른께 공손하는 한편, 알아주지 아니하여도 화를 내지 않았다.
마음가짐을 구차히 하지 않고 청백한 정신으로 자신을 지키며 의론이 늠름하여 비록 선생과 어른의 말씀일지라도 마음에 의심이 가면 힘써 복종하려 하지 않고 반드시 분명한 해석을 얻은뒤에 멈추었다. 남에게 착한 일이 있는 것을 보면 자기에게 착한 일이 있는 것 같이 하였으며 남의 착하지 못한 일을 보면 장차 자기의 몸이 더러워질 것 같이 하였으니 그 몸은 간직한 것이 이처럼 견고하고 확실하여 옛분들에게 비유를 하여도 부끄럼이 없으니 가히 가정 전통을 떨어뜨리지 않고 후세에게까지 전하였다고 할 것이다.
그 당시 지면이 있는 현명한 사대부들이 그 효도에 감동하였고 절의를 고상히 여겼으며 엄격함을 두려워 하였고 청렴함을 사랑하여 서로 더불어 천거를 하였으니 이는 공께서 세상을 살아오신 방법이었다. 무진년에 아버지(청호공 희)께서 경상감사에 부임한 뒤 지방 순찰차 안동에 도착하여 갑작스런 질병으로 영호관(朠湖館)에서 세상을 마치셨다.
아버지의 운명을 지켜보지 못하였다 하여 슬픔을 거두지 못하고 일생동안 애통하였으니 공의 효심이요. 형제끼리도 우애가 지극하였으니 공의 우애가 독실하였다. 정부인(貞夫人) 우봉이씨(牛峰李氏)는 부사(府使)인 근완(根完)의 따님으로 얌전한 부덕(婦德)이 있었고 천수(天壽)를 누리다가 삶을 마치니 공의 묘소 곁에 부장(祔葬) 하였으니 공의 배위(처)이다.
개풍군 흥교면 조문리 임좌 원은 공의 묘소이다.
6남 3녀를 낳았으니 큰 아들 전(詮)의 벼슬은 판관(判官)이고, 둘째 흔(訢)은 대사성(大司成)이며, 셋째 겸(謙)은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넷째 혜(譓)는 현감(縣監)인데 큰아버지 참판공의 뒤를 이었으며, 다섯째 인(認)도 현감이며, 여섯째 상(詳)은 예빈부정(禮賓副正)이다.
큰딸은 벼슬이 정랑(正朗)인 강리적(姜利績)에게 시집을 갔으며, 둘째딸은 군수(郡守)인 박보경(朴普卿)에게 시집을 가고, 셋째딸은 부사(府使)인 권신진(權伸禛)에게 시집을 갔다. 공의 손자들도 모두 벼슬길에 올랐다.
옛 묘지문이 누차 병란을 겪으면서 누락되어 전하지 않은 것은 후손들의 민첩하지 못한 탓이다. 이리하여 내가 감히 야사 및 본가에서 전해 온 것 가운데 가히 살펴볼만한 것 가운데 사실만 간추려 돌에 새겨 묘소 앞에 표석을 세웠으니 삼가 내용을 기록한자는 후손 원우(元雨)이고, 비석을 세우는 해는 갑신(甲申)1944년 한가위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