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隨筆]
어느 계절을 좋아하십니까
이향아
나는 여름을 싫어했었다.
여름은 무방비 상태로 터놓고 지내는 노숙의 야영장 같아서, 나는 아마 그래서 여름을 싫어했을 것이다. 껍데기를 벗듯 집을 버리고 사람들이 모두 어디론가 떠나갈 궁리만을 하는 여름. 옷을 벗어재치듯 바람나서 집을 버리고 어디론가 도망치려고 하는 여름. 옷들만이 아니라 예절조차도 쉽게 벗어던지고, 네니 내니 터 놓고 살자고 하는 여름. 나는 이런 것들이 무질서하게 보여서 여름이 싫었을 것이다.
맨발로 종횡무진 질겅거리며 다닌다. 사람들이 육체의 노출과 함께 정신의 무한정한 노출도 허용이 된 듯 상스럽게 펄럭거리면서 쏘다니는, 경계가 불분명한 여름, 그 혼돈의 와중이 나는 싫었다.
내 마음만은 귀족처럼 살고 싶으니까. 나를 함부로 내놓아 아무데서나 섞이게 하고 싶지 않으니까, 나까지 덩달아 여름의 노천에 섞여 값싸게 뒹굴고 싶지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취향이 결국은 나를 구속하여 자꾸 불편해 질지라도 나는 그것을 고고하게 즐기고 싶어 하였다. 나의 피 속에 있는 이런 고집이 한사코 여름을 피하여 서늘한 가을에 누울 자리를 펴고 있었나 보다.
'어느 계절을 좋아하십니까'라고 누가 내게 물으면 나는 별 깊은 생각에 잠길 것도 없이 '가을을 좋아해요'라고 버릇처럼 말하곤 했었다.
그리하여 나는 여름을 제대로 예찬할 수 없었다. 그 억척스러운 신진대사가 막굴러 먹은 무법자 같아서 싫었다. 여름은 무엇보다도 고독이 없어서 싫었다. 온갖 벌레며 곤충들까지도 마구 번식하고, 전염병 식중독이 만연하는 여름, 나는 여름의 혼탁이 싫었다.
그러나 나는 요즈음 내게 여름을 읊은 시들이 많다는 것을 발견하고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참 이상한 일이다.
일년 사계절 중 여름을 사랑한다는 생각은 꿈에도 해본 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왜 여름을 많이 담아냈을까? 사랑이 없어도 시가 나오는 것인가?
그해 여름 울울하던 풀밭길에는
짚신벌레, 반딧불, 소금쟁이가 살았다‥‥
먹으면 몽롱히 눈이 감기고
죽어도 한 사흘 뿐,
아주 죽지는 않는
풀밭에는 숨어 피는
아편꽃이 있었다.
라고 시작하는 시를 쓴 적이 있다. 풀밭에 숨어 있는 아편꽃을 먹은 듯 몽롱하게 취할 수 있는 나의 여름, 울울하던 풀밭길을 헤치고 다니면서 생명력을 만끽하는 여름.
내가 여름을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여름의 시를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은 여름의 추억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내 은밀한 기억의 창고에는 수평선이 보이는 여름 바다와 깃털처럼 가볍던 구름자락이 있다. 모깃불을 펴놓고 부채질을 하면 별이 쏟아질 듯 가깝던 대나무 평상과 울타리보다 높이 솟아올랐던 단수숫대의 여윈 그림자가 있다. 매미와 잠자리와 물풍뎅이와 반딧불의 그림이 있고, 연방죽과 수박밭과 원두막의 추억이 있다. 내가 여름을 좋아하느냐 싫어하느냐와는 아무 관계없이 여름의 추억이 나로 하여금 시를 쓰게 하나 보다.
여름에 매력이 있다면 풍요일 것이다. 사람을 압도하는 짙푸른 녹음, 강열한 주장처럼 나를 권유하는 그 푸름. 여름의 풍요는 왕성한 생명력의 표현이다. 그리고 왕성한 생명력은 화려하다. 나는 아마 여름을 싫어한 것이 아니라 여름의 힘에 눌려 그 힘을 두려워했던 게 아닐까?
여름 산을 바라보고 있으면
죽는다는 것이 하나도 두렵지 않다.
죽는다는 것은
호사스런 저 산자락을 베고 눕는 일
갈증에 울먹이던 저잣거리
두 발목 잡아 끄는 수렁을 지나
연기처럼 구둘장을 벗어나는 일
연기처럼 긴 머릿채 헤뜨리고서
벙어리, 저 들녘을 내려다 보는 일
삐비새, 원추리꽃, 훨휠한 구름,
산난초, 패랭이꽃 덮고 누워서
비로소 나도
무념의 한 칸 마루
정자를 짓는 일.
멀리 여름 산,
고매한 눈길을 쫓아가노라면
죽는다는 것이 하나도 두렵지 않다.
- <여름 산을 바라보고 있으면> 전문
죽는다는 것이 하나도 억울하지 않다면 달리 또 무엇이 억울할 게 있을 것인가? 죽음은 최후의 비유이며 막판의 담판이므로 아마 나는 여름 산의 위용을 바라보면서 아무 것도 더 원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었나 보다. 산난초, 원추리, 패랭이꽃이 쉬임 없이 피고 지는 여름 산에 묻히는 화려함, 나는 여름 산에 안기는 것을 황후의 영광으로 생각하였나보다. 나는 여름으로부터 헤라크레스처럼 압도하는 커다란 에너지를 느낀다. 여름은 사람들을 부유하게 한다.
칠월 저녁나절 길거리로 나도는 바람,
그 바람 마주치듯 만나라도 봤으면
이라고 시작하는 시도 있다.
개방의 여름에나 비로소 나도 여유를 만나는 것일까?
며칠 동안 휴가를 얻어 고향에 가면 그 풍성한 여름 과일 속에서 나의 감정도 본연의 원시적 모습을 허락 받은 것일까? 옛날 사람들을 그리워하면서 오랫만에 소식이라고 듣고 싶어 동네의 장거리로 어슬렁거릴 수가 있는 것이다. 팔짱을 끼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면서 바람 쐬러 나온 여름 저녁의 산책, 거리도 많이 변하고 사람들도 이제는 거의 옛날의 그 자리에 있지 않다.
모두들 어디론가 갔다. 더러는 비명에 죽기도 하고 더러는 엄청나게 성공하여 옛날의 모습을 잃었다. 나는 너무나 오래 그들을 잊어버리고 살았던 것에 놀란다. 울타리를 터놓고 사는 여름을 무질서라고 하던 나는 그 무질서 속에서 비로소 인정을 회복하고 있는 것이다.
아, 얼마만인가 나는 겨우 이제야 이런 여유를 갖다니, 나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었는가? 도대체 내가 추구하고 있는 인생은 무엇인가? 나는 이런 저런 일을 생각하면서 자꾸만 쓸쓸해진다.
나는 여름의 위대성을 경외한다. 경외함은 사랑과는 다르지만 그 위력을 인정한다는 뜻이므로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감정이다.
내가 지금까지 '가을을 좋아합니다'라고 했던 것은 사실 나만의 독특한 개성에서 우러나온 유별난 대답은 아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고 남들도 모두 다 사랑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이미 개성이 될 수 없으니까. 또 혹시 '겨울을 좋아해요' '봄을 사랑해요'라고 대답한 적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일시의 감동에서 나온 말일 수 있다. 나는 지독하게 추위에 약하고 조금이라도 추위를 느낄 때면 그것이 바로 불행이라고 생각하므로 겨울이 나의 낙원이 될 수는 없다. 또 혼바람 날리는 봄이면 나는 늘 슬픈 생각에 젖어 있고, 그것은 아마 봄을 좋아하는 감정이 아니라 봄이면 찾아 오는 정처 없는 비애요, 막연한 그리움일 것이니까 봄 역시 나의 안식처는 아니다.
함부로 무엇을 좋아한다느니 싫어한다느니 말하지 않아야겠다.
레닌그라드에서는 옛날 러시아의 고풍스러움과 투명함을 볼 수 있지만 바리하인에서는 남국 특유의 원숙한 향기와 타오르는 열정을 볼 수 있지 않겠는가? 가볍게 분별하고 고집스러운 취향을 내세우는 대신, 내 앞에 머물러 있는 감격스러운 하루를 성실히 살아내야겠다. 당도해 있는 계절, 그것은 결코 놓쳐서는 안 되는 가장 값진, 가장 의미 있는 시간이니까. 그리하여 내 기억의 한 칸 띳집, 은밀한 창고에 빛나는 시가 될 수 있는 아름다운 추억을 계속 쌓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