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 즉 꽹과리, 징, 북, 장고에 대한 정보를 검색해보니 아래와 같습니다. 참고가 되면 고맙겠고---. 불교에서의 사물인 “목어, 운판, 법고, 범종”과는 어떻게 다른 것인지, 아니면 같은 것인지는 공부를 좀 해보야 되겠습니다. 누구 아시는 분있으면 가르쳐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꽹과리는 천둥을 의미하고, 징은 바람, 북은 구름, 장고는 비를 의미한다. 음양을 나누어 구분하면 가죽으로 만든 북과 장구는 땅의 소리를 나타내고, 쇠로 만든 징과 꽹과리는 하늘의 소리를 나타낸다. 꽹과리는 덩치가 가장 작으면서 소리는 가장 도도라져서 사물놀이에서 지휘자의 역할을 맡는다. 징은 천을 뭉툭하게 감은 채로 치기 때문에 소리가 여운이 길고 푸짐하다. 사물들 중에서 어머니의 역할을 한다고도 한다. 장단의 머리박에 한 번씩 쳐주어 전체 가락을 푸근하게 감싼다. 장고는 양손에 채를 들고 치는데 높은 음이 나는 쪽을 열편 혹은 채편이라 부르고, 낮은 음이 나는 쪽을 궁편 혹은 궁글편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각각의 채를 열채, 궁채라고 한다. 사물놀이에서는 괭과리가 지휘를 맡지만 이를 제외하면 사실 박자의 빠르기나 시작, 그리고 끝을 나타내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북은 괭과리와 장고가 집을 지을 수 있도록 터를 만들어 주고, 든든한 기둥을 세우는 역할을 한다. <永雲>
그리고 지식검색을 보니---
사물놀이의 역사
건축가 김수근이 1977년에 지은 '공간사랑'이라는 건물이 있다. 이 곳은 그가 문화의 터전을 일구기 위한 장소로써 마련한 곳이었으며 많은 예인들이 즐겨 찾곤 했다. 사물놀이의 탄생도 이곳에서 비롯된다.
늠름한 모습의 청년들이 스스로 '남사당의 후예'임을 자처하며 첫 사물놀이 공연을 가진 것은 1978년 2월 28일 소극장 공간사랑에서 열렸던 '제1회 공간 전통음악의 밤'에서였다. 이 무대에서 김용배(쇠), 김덕수(장고), 최태현(북), 이종대(징) 등 젊은 타악 국악인 4명은 '웃다리풍물[경기.충청]가락'을 발표했고 그날 공연에 참석했던 사람들은 이들이 보여준 진기하고도 신명나는 연주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사물놀이라는 명칭을 갖지 않은 채 가진 이날의 공연은 사물놀이 탄생의 서주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첫 공연 2개월 후 같은 장소에서 사물놀이의 성립을 알리는 제2회 연주('영남풍물 12차 36가락')가 있었으며, 이날 공연이 끝났을 때 민속학자 심우성 씨 등 지기들은 이들의 성공적인 공연을 축하하며 '사물(四物)놀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이어서 1979년 5월에 1978년의 작업을 종합적으로 발표하는 기회를 갖게 되는데, 이는 사물놀이의 희망찬 앞날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사물놀이'는 자신들을 그냥 사물놀이라고 부르지만, 사물놀이단체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지금, 밖의 사람들은 그들을 다른 단체와 구별하기 위해 '김덕수패 사물놀이'라고 흔히 부른다.
창단멤버였던 김용배, 김덕수, 최태현, 이종대는 곧바로 김덕수, 김용배, 최종실, 최종석으로 새로운 팀을 구성했다가 1979년에 최종석이 이광수로 교체되었다.
이 무렵은 그들이 눈부신 활동이 국내외에서 호평을 받기 시작한 때였는데, 1983년 들어 꽹과리를 치던 김용배가 음악적인 견해차이를 이유로 탈퇴, 국립국악원 사물놀이를 창단했으나 1986년 복잡한 추측을 남긴채 자살하고 말았다. 사물놀이는 김용배 대신 강민석을 영입하여 이광수(쇠), 김덕수(장고), 최종실(북), 강민석(징)으로 자리바꿈한 채 이어오다가 1990년대 들어 이광수와 최종실이 떠나고 지금은 김덕수와 강민석이 사단법인 사물놀이 '한울림'을 창단(1993)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김덕수, 이광수, 최종실, 김용배는 모두 자유와 無를 사랑하던 유랑집단 남사당과 함께 어린시절을 보냈다. 이들은 경기.충청지방의 웃다리풍물을 했는데 최종실은 경남지역에서 영남풍물을 한 탓에 가장 늦게, 국악고등학교 시절 서울에 올라와 모두와 만났고 그후로도 교류를 계속했다. 떠돌다가 서로 만나고 다시 헤어지는 것이 옛 남사당예인들의 운명이었지만 훗날 만나 10년 이상을 함께 지낼 수 있었던 것은 시대의 변화 탓일 것이다.
시대의 변화는 이들에게 종래와 같은 형태의 야외에서 하는 난장이나 걸립은 더 이상 지속키 어렵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고, 새로운 형태의 실내공연을 위한 레퍼토리가 필요하다는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김용배와 김덕수는 새로운 남사당 예술의 창조와 사명에 대해 오랫동안 얘기했고, 어려서부터 외국공연을 하면서 느꼈던 '우리 전통음악의 타악기가 외국의 타악기와 비교할 때 결코 뒤지지 않는다'는 세계적 보편성과 자부심에 공감하고 사물만으로 구성된 연주를 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먼저 어린시절을 보냈던 걸립패의 가락을 정리하기 위해 선배예인들이나 노인들을 찾아다니며 자신들이 기억하고 있는 풍물.무속음악 등의 가락들을 보다 완벽한 형태로 다듬고 연주했다
첫댓글 맞네 ㅋㅋㅋ 그 썬글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