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문의 벽(壁)을 허무는 방법 / 윤형돈
- 세상은 덕담하는자와 악담하는 자,
두 부류로 나뉜다
소문과 루머는 사실(fact)보다 빠르게 이동하는 실체의 그림자다. 그것은 진실의 몸에서 떨어져 나온 잔상이며, 말해진 적 없는 의도를 덧입고 바이러스처럼 증식한다. 소문은 타자의 교양 없는 입을 빌려 존재하며, 책임 없는 언어의 연쇄 속에서 실체를 얻는다. 루머가 두려운 이유는 거짓이어서가 아니라, 믿음의 형태를 띠기 때문이다. 인간은 공백을 견디지 못해 이야기를 채우고, 그 빈틈에서 소문은 운명처럼, 마귀처럼 태어난다.
수원성처럼 벽돌로 쌓인 '소문의 벽'
이 있다. 흉흉한 소문은 과거의 어두운 장면, 폐기한 문장, 한 번의 말실수, 한 개인 특유의 반복적인 중독 행위에 타인의 상상과 호기심이 각색되고 와전되며 괴물로 자라난 것들이다. 특히 의문의 흑역사는 시간이 지나도 쉽게 부식되지 않고 수시로 머리를 치민다. 오히려 파묘처럼 발굴될수록 윤색되고, 맥락은 제거된 채 유령처럼 떠다니며 주홍글씨와 같은 낙인만 남는다. 그리하여 어느 날, 그는 익명의 사람들로부터 “그 사람 조심하라”는 경계의 대상이 된 사실을 뒤늦게 알고 가슴을 치게 된다. 그로부터 그는 자신도 모르게 가시 울타리에 갇혀 '위리안치' 신세가 되고 만다 소명과 해명의 기회는 이미 지나버리고, 침묵과 방임은 곧 유죄가 되었다. 죄명은 '인간 불신, 인간 혐오, 인간 실격'의 낙인과 같은 쇠사슬로 돌아왔다
이때 소문의 벽을 무너뜨리려 정면으로 돌진하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선택이다. 벽은 두꺼울수록 맞서 싸우는 자를 더 작아 보이게 만들기 때문이다. 첫 번째 해결 알고리즘은 능동적으로 인정하는 거다. 변명하지 않고, 삭제하지 않고, “그때의 나는 그랬다”고 말하는 용기다. 과거를 부정하는 순간, 소문은 진실의 옷을 입는다. 그러나 인정(acknowledge)은 소문을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하게 하는 종결어다.
두 번째는 시간의 설계다. 소문은 빠르지만 삶은 느리다. 하루 이틀의 결백으로는 벽을 허물 수 없으나, 반복되는 태도와 일관된 삶은 벽에 균열을 낸다. 오늘의 선택이 내일의 소문을 만든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그는 설명 대신 행적을 남기게 된다.
세 번째는 관계의 최소화다. 모두에게 이해받으려는 욕망을 버릴 때 비로소 숨을 쉰다. 소문은 군중 속에서 증식한다. 그러나 단 한 사람의 신뢰는 벽보다 강하다. 벽을 향해 말하지 말고, 사람을 향해 신뢰를 믿고 살아야 한다.
마지막 알고리즘은 침묵의 품격이다. 모든 침묵이 도피는 아니다. 말하지 않음으로써만 지킬 수 있는 존엄이 있다. 소문은 언젠가 다른 먹이를 찾아 떠난다. 그때 남는 것은, 벽을 허물려 애쓴 말이 아니라 벽 너머에서도 무너지지 않은 한 인간의 자세다.
소문의 벽은 무너뜨려야 할 대상이 아니라, 건너가야 할 통과의례다. 벽을 넘은 뒤에야 우리는 비로소 알게 된다. 흑역사는 그를 가두는 감옥이 아니라, 그를 증명하는 이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온갖 억측과 근거없는 비방과 힐책과 뒷말과 쑤근쑤근 파묘꾼들의 허언은 발목을 끊어 말무덤 (言塚)으로 보내야 한다.
지금도 누군가 억울한 '소문의 벽' 뒤에서 통한의 눈물을 흘리고 있다면, 그때야말로 엄숙한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