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돈중(金敦中)은 인종(仁宗) 때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지공거(知貢擧) 한유충(韓惟忠) 등이 처음에 2등을 주었는데, 왕이 그 아비를 위로하고자 하여 1등으로 올리고 내시(內侍)에 속하게 하였다.
젊을 때는 기운이 왕성하여 궁정에서 나례(儺禮)하는 날 저녁에 정중부(鄭仲夫)의 수염을 촛불로 태워버리니, 정중부가 이로 인해 그를 원망하였다. 의종(毅宗) 때에 여러 차례 승진하여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가 되었는데, 왕이 환자(宦者)인 정함(鄭諴)에게 합문지후(閤門祗候)의 벼슬을 주자 김돈중이 고신(告身)에 서명하지 않아 호부원외랑(戶部員外郞)으로 좌천되었다가 시랑(侍郞)으로 옮겼다.
처음에 이부시랑(吏部侍郞) 한정(韓靖)이 이원응(李元膺)과 사이가 벌어져 파직되었다. 왕이 인제원(仁濟院)에 따로 절을 지어 〈자신의〉 복을 비는 곳[祝釐所]으로 삼았는데, 마침 이원응이 죽고 한정이 복직되어 더욱 부지런히 복을 빌었다. 김돈중(金敦中)과 그의 동생 김돈시(金敦時)가 〈아버지〉 김부식(金富軾)이 지은 관란사(觀瀾寺)를 중수(重修)하여 역시 복을 비는 곳이라고 칭하였다. 왕이 김돈중·김돈시·한정에게 말하기를, “듣자하니 경등이 과인에게 복을 돌린다 하니 매우 기쁘게 여긴다. 짐이 장차 가서 볼 것이다.”라 하였다. 김돈중 등은 또 절의 북쪽 산이 초목 없는 민둥산이었으므로 근처의 민(民)을 모아서 소나무·잣나무·삼나무·전나무·진귀하고 기이한 꽃과 풀을 심었다. 단(壇)을 쌓아 어실(御室)을 만들고 금벽(金碧)으로 장식하였으며, 축대와 섬돌도 모두 괴석(怪石)을 사용하였다. 하루는 왕이 절에 행차하니 김돈중 등이 절의 서대(西臺)에서 잔치를 열었는데, 장막과 그릇이 매우 화려하고 사치스러웠으며 음식도 지극히 진기한 것들이었다. 왕이 재보(宰輔)·근신(近臣)과 함께 흥겹게 즐기고는 김돈중과 김돈시에게 백금 각 3덩이[錠], 한정에게는 백금 2덩이, 비단(羅絹) 각 10필, 단사(丹絲) 각 70근을 하사하였다.
〈의종〉 21년(1167)에 김돈중은 좌승선(左承宣)으로 임명되었다. 연등일(燃燈日) 저녁에 왕이 봉은사(奉恩寺)에 가서 밤에 돌아오다가 관풍루(觀風樓)에 이르렀다. 김돈중의 말이 평소 길들여지지 않아서 징과 북소리를 듣고는 더욱 놀라 어느 기사(騎士)와 갑자기 부딪히자, 화살통[矢房]에서 화살이 갑자기 튀어나와 임금의 수레[輦] 옆에 떨어졌다. 김돈중이 스스로 밝힐 겨를도 없이 왕이 놀라 유시(流矢)라고 여겼다. 임금의 수레를 의위(儀衛)의 산선(繖扇)으로 가리고 급히 말을 달려 궁으로 돌아와 궁성의 경계를 엄하게 하였으며, 담당 관청에 명하여 거리[街市]에 현상(懸賞)을 걸어 체포하는 방을 걸었더니 체포된 자가 매우 많았다. 왕이 대령후(大寧侯) 왕경(王暻)의 가동(家僮)인 나언(羅彦) 등이 한 것으로 의심하여 가혹하게 국문(鞫問)하였으며, 〈나언이〉 거짓으로 자백하니 마침내 그의 목을 베었다.
또 금위(禁衛)가 성실하지 않다고 하여 견룡지유(牽龍指諭)와 순검지유(巡檢指諭) 등 14명을 유배 보내었다. 그 때 왕이 연복정(延福亭)에 자주 행차하여 한뢰(韓賴), 이복기(李復基), 허홍재(許洪材) 등과 함께 연회를 베풀었다. 하루는 염현사(念賢寺)로 옮기려고 승여(乘輿)를 이미 준비하였는데, 또 배 안에서 술자리를 마련하고 서로 많이 취하여 한밤중이 되도록 돌아갈 줄을 몰랐다. 위사(衛士)가 한뢰와 이복기를 굉장히 원망하니 김돈중이 앞으로 나아가 아뢰어 왕에게 말하기를, “아침부터 밤까지 호종하는 군졸들이 모두 배고프고 피곤한데도 왕은 어찌 심하게 즐거워만 하십니까? 밤이 또 어두운 데 무엇을 관람할 것이 있어 오랫동안 여기에 머무르려 하십니까?”라 하였다. 왕이 기뻐하지 않았으나 출발하니 이미 새벽녘이 되었다. 보현원(普賢院)의 변란(變亂)에 김돈중도 역시 왕의 행차를 따라갔는데, 길에서 변란의 소식을 듣고 거짓으로 취한 척하며 말에서 떨어져 감악산(紺獄山)으로 도망쳐 들어갔다. 정중부가 묵은 원한을 갚고자 하여 매우 급하게 현상을 걸었다. 김돈중이 몰래 종자(從者)로 하여금 서울로 들어와 집의 안부를 살피게 하였는데, 종자가 큰 포상을 탐내어 고발하여 사천(沙川) 강변에서 살해당했다. 김돈중이 죽을 때 한탄하여 말하기를, “나는 한뢰나 이복기와 같은 당여(黨與)가 아니니 진실로 죄가 없다. 단지 유시(流矢)의 사변(事變)으로 인하여 화가 무고한 사람에게까지 미치게 하였으니, 오늘날 이렇게 된 것이 마땅하다.”라고 하였다. 아들은 김군수(金君綏)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