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교천[揷橋川]
정의
충청남도 홍성군 장곡면 오서산(烏棲山, 791m)에서 발원한 후, 북류하여 아산만으로 흘러드는 하천.
내용
길이는 61㎞, 유역면적은 1,619㎢이다. 주요 지류로는 청양군 화성면에서 발원하는 무한천(無限川), 천안시 광덕면에서 발원하는 곡교천(曲橋川), 당진시 면천면에서 발원하는 남원천(南院川) 등이 있다. 삽교천 주변에는 넓은 충적지(沖積地)가 발달하여 예당평야의 주요부를 이룬다. 삽교천지구 대단위 농업종합개발사업(1975~1983)의 핵심 사업으로 삽교천방조제가 건설됨에 따라 충청남도 홍성·예산·당진·아산 등 4개 시군 22개 읍·면에 걸친 2만 4700ha의 농토는 전천후 농토로 탈바꿈하였다. 과거 삽교천 유역은 충분한 농업용수를 확보하지 못하여 가뭄과 홍수를 자주 겪어왔으며, 하구(河口)로 흘러드는 바닷물로 인하여 염해(鹽害)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이 같은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하여 1979년에 삽교천방조제가 건설되었고, 이에 따라 저수량 8400만 톤의 거대한 인공호수가 조성되었다. ㅡ서해안고속도로가 완공되고 수도권과 접근성이 개선되면서 삽교천 유역은 더욱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다. '삽교' 는 여러 고지도에 나타난다. 『조선지도』뿐만 아니라 『대동여지도』에도 덕산현 인근에 기재되어 있다. 『1872년 지방지도』에는 다리와 함께 삽교점이 그려져 있다.
참고문헌
『한국지리: 우리 국토의 자연과 인문』(권혁재, 법문사, 2003)
『한국관광자원총람』(한국관광공사, 1985)
『한국지리』지방편Ⅱ(건설부국립지리원, 1984)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소들강문 [-江門]
정의
충청남도 당진시 우강면에 있는 평야.
명칭 유래
소들강문은 소들과 강문이 합쳐져 지명이 된 경우이다. '소들'의 어원은 철종 때 김정호가 제작한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서 '우평(牛坪)'이라는 말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내포 지방의 방언인 솟뜰이란 말의 어원과 일치한다. 솟뜰이란 입술의 인중과 같이 조수 간만의 차가 심한 서해 바다에서 퇴적의 결과 생겨난 섬과 같은 작은 돌출구를 가리키는 말이다. 소들은 솟뜰에서 시작하여 자연스럽게 간척의 과정을 통해 논이 되었고, 소들이라는 지명으로 발전된 경우이다. 또한 강문(江門)이란 말의 어원도 삽교천이라는 강의 입구를 뜻하는 말로 지금의 당진시 우강면 강문리 사발 포구 지역을 말한다. 즉, 사발포를 통해 해상 운송을 하던 시기에 사발포를 삽교천의 강 입구로 인식하여 강의 입구를 뜻하는 ‘강문’이라 불렀던 것이다. 이로써 소들과 강문을 합쳐 부르던 소들강문이 일반화되면서 우평강문이 되었고, 우강면의 지명으로까지 발전하였던 것이다.
형성 및 변천
소들강문은 예로부터 토질이 비옥한 넓은 평야로 서울에 가깝고 조운이 발달하여 해상 교통을 이용한 운송이 편리하다는 이유로 재경 부재 지주(在京不在地主)들인 양반 사족(兩班士族)이 많은 토지를 소유하였던 곳이다. 이런 특징으로 소들강문에는 넓은 평야 만큼이나 양반 사족에 의한 농민 착취와 수탈의 역사와 이에 저항하는 투쟁의 역사가 동시에 깃들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위치 비정/행정 구역상의 구분
충청남도 서북부를 흐르는 삽교천 유역을 따라 펼쳐져 있는 예당평야는 전국에서 김제 만경평야 다음으로 넓은 평야이다. 예당평야는 삽교천을 따라 예산 고덕면 구만리에서 시작하여 당진시 합덕읍과 우강면을 지나 신평면까지 이르는데, 예산 고덕면 평야를 황금들이라 칭했고, 합덕읍 평야를 검은들이라 했으며, 우강면 일대의 평야를 우평강문(牛平江門), 즉 소들강문이라 불렀다. 소들강문은 예당평야 중 가장 넓은 평야 지역으로 가장 중심에 위치한 곳이다. 소들강문이 있는 당진시 우강면은 원래 범천면(泛川面)이라 불렸는데 장마에 삽교천이 범람하는 일이 잦아 소들강문에서 뜻을 따라 1942년부터 우강면이라 부르게 되었다.
관련 기록
1930년대 『조선 환여 승람(朝鮮寰輿勝覽)』 8쪽에 우평(牛坪)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군의 동남쪽 40리에 있으니 지금으로부터 350여 년 전 토정 이지함이 아산을 다스릴 때 한진 앞바다가 크게 터져 육지가 바다가 된 이후 근 100년간에 걸쳐 점차적으로 간사지가 되어 육지와 연결되었다. 토착민이 둑을 쌓아 논을 만들어서 큰 들이 되었는데, 우평이란 지명을 붙인 뜻은 소 모양의 돌 두 개가 바다 섬 중에 돌출했다가 자연스럽게 매몰되었다. 들의 동쪽에 대각리가 있는데 속칭 이르기를 두 소 뿔 사이에 만인이 살 수 있다고 말을 했다.”라는 기록이 그것이다.
참고문헌
『조선 환여 승람』당진군 편(당진 문화원, 2014)
『당나루의 맥락』12-전설 편(당진 문화원, 1993)
당진군지 편찬 위원회, 『당진군지』(당진군, 1997)
우강면지 편찬 위원회, 『우강면지』(우강면, 2003)
출처:(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소들섬 이야기
현재 우강면 내 어업활동이 이뤄지고 있는 곳은 삽교호 내수면이 유일하다. 우강·합덕·순성지역의 모든 포구와 나루는 삽교천방조제 건설 이후, 그 역할과 기능을 상실했다. 삽교천이 막히고 난 이후에도 그 규모는 크지 않지만 일부 어민들이 삽교호 내수면에서 개막과 정치망 등을 이용한 어업활동을 계속해왔다. 그러다 2010년 삽교호내수면어업계가 조직되었다. 삽교호내수면어업계가 사용하고 있는 선착장은 그 이전부터 삽교천 내 섬에 조성된 농장을 오가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삽교천 내에는 아산시 인주면에 속한 솟벌섬과 우강면 신촌리에 속한 소들섬이 있다.
소들섬은 17만㎡(약 5만 평) 규모로 지난 1973년 삽교천지구 대단위사업 이후 모래가 쌓이면서 생겼다. 소들섬은 오랜 세월동안 별다른 이름 없이 지역주민들로부터 무명섬으로 불려왔다. 그러다 2016년 우강면주민자치회를 중심으로 삽교천 수질개선 사업과 연계한 관광자원화 방안이 모색되면서 무명섬 이름 짓기 운동이 진행되었고, 이때 ‘소들섬’이라 명명됐다. 한편 솟벌섬에는 1970년대 말 백승철·전경수 씨가 만든 두 농장이 있었다. 두 사람은 간척사업으로 제방을 쌓고 농사를 지어왔다. 솟벌섬 내 농장에서는 최근까지 쌀을 생산해오다, 지난 2000년경 삽교천 우강지구 하천환경정리사업의 일환으로 사업지구 내 경작이 금지되면서 중단되었다. 우강면 주민들은 솟벌섬을 비롯해 우강면 신흥리와 내경리를 중심으로 한 삽교천의 하천부지의 국유토지를 1956년 하천점용허가를 받아 농지로 개발, 사용해 왔다. 하천 내 경작이 금지되자, 농민들은 “피땀 흘려 경작한 농지를 계속 사용할 수 있도록 해줄 것”을 요구했으나, 이뤄지지 않았다.
우현선 작가
출처 : 당진시대(http://www.djtimes.co.kr)
당진솔뫼마을 김대건신부 유적[唐津 솔뫼마을 金大建神父 遺蹟]
당진 솔뫼마을 김대건신부 유적은 조선 최초의 천주교 사제인 김대건 신부를 비롯하여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 김진후 비오, 작은할아버지 김종한 안드레아, 아버지 김제준 이냐시오 등 4대에 걸친 순교자가 살았던 곳이다. 천주교 박해, 천주교인의 신앙심과 삶을 보여주고 있어 종교사 뿐만 아니라 정치, 사회, 사상적 변천을 증거하는 유적이다. 2014년 9월 26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정의
충청남도 당진시 우강면에 있는 조선 최초의 천주교 사제인 김대건 신부 관련 유적.
발굴 경위 및 결과
천주교 역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최초의 천주교 사제인 김대건(1821~1846) 안드레아 신부를 비롯하여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 김진후 비오(1743~1804), 작은할아버지 김종한 안드레아(1764~1824), 아버지 김제준 이냐시오(1795~1839) 등 4대에 걸친 순교자가 살았던 곳이다. 증조부 김진후는 하급관리였으며 1791년(정조 15) 신해박해와 1801년(순조 원년) 신유박해를 거치며 해미읍성에서 옥살이를 하던 중에 1814년에 옥사하였다. 작은할아버지 김종한은 1816년 대구감영에서, 아버지 김제준은 1839년(헌종 5) 기해박해 때 순교했으며, 김대건 신부는 1846년 9월 16일 서울의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건립 경위
김대건 신부는 7살 때 고향을 떠나 가족과 함께 경기도 용인의 골배마실에서 생활하다 파리외방선교회 피에르 모방(Pierre P. Maubant, 나백다록[羅伯多祿], 1803~1839)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신학생으로 발탁된 김대건은 서울에서 라틴어 등 신학의 기초를 공부한 후 김대건의 집안 내력을 들은 정하상과 모방 신부의 권유를 받고 마카오신학교에서 유학하였다. 1844년 12월 가톨릭 부제서품을 받고 1845년 10월 조선에 돌아온 김대건은 서울과 경기도 일대에서 사목활동을 하다 1846년 6월 5일 체포되었다. 세계지리에 밝고 박학다식한 김대건에 우호적인 대신도 있었으나 서양 세력에 의한 중국의 몰락을 목격한 정부의 쇄국정책으로 김대건 신부는 참수형을 선고받고 같은 해 9월 16일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1925년 7월 5일 김대건 신부는 복자(福者)로 선포되었으며, 1984년 5월 6일 천주교 전래 200주년을 기해 성인(聖人)으로 추대되었다. 현재 한국 천주교회의 성직자들의 수호성인으로 모셔지고 있다.
변천
김대건 신부의 출생지인 '충청도 면천 솔뫼’는 현재 충청남도 당진시 우강면 송산리다. ‘솔뫼’는 ‘소나무 숲이 우거진 산[松山]’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이곳은 김대건 신부 순교 100주년을 맞이하여 1946년 세운 순교복자비가 위치하며 2004년 김대건 신부 생가가 복원되었다.
형태와 특징
주변에는 김대건 신부 동상과 기념관, 야외 성당 등이 조성되어 있어 김대건 신부의 발자취와 생애를 한눈에 확인할 수 있다.
의의 및 평가
솔뫼성지는 조선 후기에서 근대사회로의 이행기에 발생한 천주교 전래와 박해 그리고 박해를 이겨낸 천주교인의 신앙심과 삶을 집약적으로 보여주고 있어 종교사적으로뿐만 아니라 정치, 사회, 사상적 변천을 증거하는 유적이라고 평가된다. 2014년 9월 26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참고문헌
솔뫼성지(http://www.solmoe.or.kr/)
「문화재청공고 제2014-213호」(2014년 7월)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당진합덕제 [唐津合德堤]
정의
충청남도 당진시 합덕읍 성동리에 있는 합덕평야에 관개용수를 조달하던 저수지. 시도기념물.
내용
1989년 충청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소들강문(牛坪江門, 예당평야)의 관개를 위한 저수지이다. 합덕방죽 또는 합덕연지, 연호·연지·하호·연제 등으로 불린다. 합덕방죽에 연꽃이 만발하였을 때의 아름다움에서 유래한 것이다. 평지에 축조된 거대한 제방은 높이가 7∼8m가 넘으며 원래는 토축으로 만들어졌던 것 같으나 석축으로 보수된 부분이 적지 않다. 김제의 벽골제는 제방이 일직선으로 축조되었는데 합덕제의 제방은 곡선을 이루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 길이가 1,771m이고 저수 면적이 102ha나 된다. 수리시설의 혜택을 받는 면적, 즉 몽리면적이 720ha의 관개용 저수지 터이나 지금은 논으로 되어 있다. 합덕읍 합덕리 즉 성동리로 들어가는 마을 입구에 8기의 합덕방죽과 관련된 비석이 서 있다. 2기는 비석 상단에 지붕을 석재로 만들어 올렸고 나머지 6기는 비석의 상단을 반원형의 모양으로 만들었다. 그 중 최고의 것은 1767년(영조 43)에 세운 연제중수비(높이 136.5㎝, 너비 49.7㎝, 두께 22㎝)이다.1800년(정조 24)에 건립한 연제중수비(높이 88.5㎝, 넓이 43.5㎝, 두께 34.2㎝)와 1824년(순조 24)에 중수한(높이 113.5㎝, 너비 52.2㎝, 두께 15㎝) 것 등이 있다. 축조 시기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후백제 견훤(甄萱)이 왕건(王建)과의 전투를 위해 군마용으로 우물을 파 놓았다는 설과 다른 하나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면천(沔川) 산천조에 나오는 벽골지가 합덕지라는 것으로 삼한 또는 삼국시대에 축조되었을 것이라는 설이다. 아무튼 이 제방은 고려시대 이전으로 그 축조 시기가 올라가는 것은 확실하며 벽골제의 예로 보아 백제시대까지 소급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2017년 10월 멕시코에서 열린 국제관개배수위원회(ICID) 제68차 집행위원회에서 ‘세계 관개시설물 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참고문헌
『당진의 재발견』(당진문화원, 1996)
『문화재대관』(충청남도, 1996)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꽃이 필 때를 상상하며!
2023-11-29 작성자 명사십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