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맞이하는 고난주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의 의미를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조금이라도 동참하고자 노력하는 시간....
2014년 고난주간(4월14-19일)을 맞으며 신학교 교수들이 생각하는 고난주간의 의미는 어떤지 알아봤다.
1. 아주사퍼시픽대학교 신학대학교 한인목회학박사 프로그램 디렉터인 다니엘 뉴먼 교수
2. 풀러신학교 한인목회학박사원 원장 황진기 교수
3. ITS 한국어프로그램 디렉터 김재영 교수
4. 그리고 월드미션대학교 대학원장 신선묵 교수에게 들어본다.
황진기 교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은 사도들의 공통 케리그마다(고전15:1-11). 우리가 고난주간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특별하게 생각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의 의미와 중요성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너무 멀리 밀려나 있는 것 같다.
고난주간을 맞으며 우리는 무엇보다 가장자리로 밀어두었던 십자가를 다시금 우리 생각과 삶의 중심 자리로 되돌려 놓아야 한다. 이것은 단지 십자가 장신구를 몸에 부착하거나 십자가를 연상케 하는 상징물을 휴대한다고 가능한 일은 아니다.
십자가를 내 생각과 삶의 중심에 회복하기 위한 노력으로 십자가 대신 내 생각과 삶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것들을 비우는 노력이 필요하다. 내 마음을 온통 사로잡고 있는 TV드라마를 비워야 할 수도 있고, 젊은이들의 경우 온라인 게임을 삼가거나 줄여야 할 수도 있고, 금욕적인 절제를 통해 나를 기쁘게 하고자 하는 온갖 것들을 비우려는 노력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십자가를 삶의 중심으로 가져오기 위해서는 이런 비우려는 노력만으로는 부족하다.
십자가에 비추어 생각과 삶의 질서를 다시 잡는 또 다른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정신을 따라 다른 이의 유익을 위해 내 이권을 포기하고, 그리스도의 평화를 가정과 일터와 교회에서 확대하기 위해 미움과 다툼보다는 화해를 택하고, 정죄와 배척보다는 용서를 택하기를 한번이라도 더 의식적으로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
바울은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6:17)고 갈라디아서에서 말한 것처럼 예수의 흔적, 곧 스티그마(낙인(烙印))는 할례로 상징되는 세상적 관점에서의 자랑거리가 아닌,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 대신 저주 받으심의 극치를 보여주는 십자가에 일치된 삶이다.
바울의 경지가 나의 현실과는 너무 차이가 난다고 느낀다면, 최소한 고난주간에라도 내 생각과 삶 속에서 예수의 스티그마를 확인하려는 각고의 노력이 더욱 필요하지 않을까?
다니엘 뉴먼 교수
고난주간의 의미를 생각하면 첫째 그리스도와 연합의 연습을 들 수 있다. 예수님이 고난 당하시고 죽으셨다. 나 자신 역시 죽음의 길을 가는 연습을 해야 한다.
이 연습은 내 욕심, 이기주의적 마음, 남을 판단하는 모습 등을 죽이는 것이며 예수님처럼 종의 모습이 돼보기도 하고 내가 죽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그러므로 내 자신을 생각하지 말고 예수님께서 교회를 위해 죽으셨듯이 교회와 다른 사람, 가족을 생각하고 섬기는 존재, 사랑하는 존재, 희생하는 존재라 여기고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와 연합을 하는 것이다.
또한 부활을 체험하는 것이다. 부활체험은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고 나를 통해 그리스도가 나타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람을 섬길 때 무엇 때문에 가 아닌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 인해 하는 것이며 이를 통해 예수의 사랑을 체험하는 것이다. 부활은 옛 것은 다 벗어버리고 새것을 입혀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부활의 기쁨, 능력, 소망으로 생각한다. 고난주간 교회가 나아가는 것은 고난을 초점 하기 보다 고난의 열매를 초점 했으면 한다. 고난에만 초점을 두면 마음이 어두워지고 짐이 무거워진다. 그러나 예수님의 지신 십자가는 무겁고 어두워 보이지만, 결국 부활로 이어졌다. 부활의 열매는 새로운 삶이다. 따라서 고난의 열매는 기쁨으로 섬기고 사랑하는 것이다.
또한 누군가를 용서할 때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용서했으면 한다. 이 모든 것이 우리 안에 계신 부활하신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김재영 교수
“19세기의 독일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그의 유명해진 책 "기독교와 자본주의 발흥"에서 자본주의 시대 돌입과 함께 그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본주의의 쇠창살에 갇혀서 다람쥐 쳇바퀴 돌듯 살아가게 될 것이라는 예견을 밝혀 놓았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가 그렇다. 우리에게 교회는 존재하되 자유는 잃어버리고 잊어버린 현재를 살아간다. 출애굽 하기 전 노예 생활했던 이집트처럼 거대한 새로운 이집트 문화 가운데서 오늘날의 하나님백성들은 자기 언어를 잊어버렸다.
그들에게 주어지는 당근과 채찍으로 그들은 일당에, 주급에, 월급에, 샐러리에, 목을 맨다. 빵과 포도주가 주어지면 허겁지겁 받아먹는다.
오늘날 역시 하나님백성인 교회에서 잊혀지고 잃어버린 언어가 있다. 그것은 십자가의 언어다. 부활의 언어다. 우리에게 십자가에 달리셨고 부활하셨던 그리스도는 희미해졌다. 그 사건의 의미도 소실되었다.
우리 앞에는 텔레비전과 컴퓨터 화면과 멀티비전에서 쏘아지는 제사장 같은 목회자들이 서 있고, 그들은 우리를 위로하고 격려하며 자기 연민에 빠지게 하고 우리를 마비시킨다.
양심을 깨우지 않으며 의식을 일깨우지 않으며 예속을 방치하며 예수가 아니라 거대 철창의 예속 가운데서 편안함을 느끼도록 만들어준다. 불안하고 불편한 자기 상태와의 화해가 이루어지도록 감정과 정신을 주물러준다.
그러나 다행히도 아직은 매년 고난주간이 기념되고 있다. 혹 어떤 교회 전통은 고난주간을 포함시켜서 사순절도 기념한다. 나는 이 고난주간 동안에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의 기억을 되살려 우리를 지금 당장 옥죄어오는 이집트의 요구, 물질문명의 요구, 제국의 질기며 급박하게 달려드는 위협과 대결시켜야 한다고 본다. 이 대결은 시급하고 화급하다. 그리고 이 기억을 아주 찐하게 떠올려야 한다. 어쩌면 옷을 찢고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해야 할지 모르겠다.
기억을 떠올리는 일은 우리 각자에게 맡겨졌다.
각자 자기 삶에서 결단해야 한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의 신앙공동체들이 결단해야 한다.
진짜 십자가의 언어, 진정한 부활의 소망과 기쁨을 되찾아서 자유의 단맛을 느끼며 자발적으로 주님의 노예로 봉사하고 섬기도록 하나님백성의 무리가 노력해야 한다.
이 일은 부르짖는 데서 시작한다. 이집트의 예속으로부터의 해방이 그 백성들이 고난 중에서 부르짖음에서, 그리고 그 부르짖음을 야훼 하나님께서 들으심에서 시작했듯이, 고난주간에 부르짖자.
그리하여 대속의 기억을 쌩쌩하게 되살려서 우리의 실존을 억누르는 현대 물질문명 이집트의 요구에 맞불을 놓자.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십자가를 깊이 묵상할 일이다. 십자가는 죽음이며 그 죽음은 죄의 죽음이며 생명의 열림이다. 그래서 영원의 창(窓)이 된다. 십자가라는 창문을 통해서 영원을 바라보자.
그대들의 마음을 열고 입을 열어 부르짖을 때에 그 일은 시작되리라.
신선묵 교수
구유에 누이신 성육신 하신 예수님을 기억하지 않는 성탄절은 의미가 없듯이 주님의 십자가를 기억하지 않는 고난주간은 의미가 없을 것이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으로써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구체적으로 기억하는 것이 바로 고난주간의 참다운 의미이다.
우리 성도들은 1년 내내 주님의 십자가 그늘 밑에 살아야 하지만 그런 신앙인의 정체성을 새로이 하는 것이 고난주간의 의미다.
주님의 십자가 그늘 밑에 산다는 것은 첫째는 우리를 용서하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 앞에서 우리의 죄를 죄로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죄를 인정하기보다는 우리의 죄를 합리화하려고 하지만 그것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우리의 죄를 인정하는 데서 비로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이 의미로 다가오게 되고 우리가 죄의 형벌로부터 자유 함을 얻게 된다.
둘째는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서 우리의 정욕을 못 박을 수가 있다. 우리의 삶 가운데 있는 죄라는 것은 보다 근원적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영을 따라 살지 않고 우리의 정욕에 따라 살기 때문에 발생한 결과이다.
그런데 우리의 삶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늘 정욕에 이끌리는 삶을 살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정욕에 이끌려 살 뿐이지 이것을 어떻게 할 수가 없다. 그러나 주님의 십자가 앞에 나아오면 주님께서 깨닫게 해 주시고 우리의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을 수 있는 힘을 주신다.
셋째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서 우리의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의 대한 대답을 찾는다.
인생의 진정한 목적은 주님을 따라서 사랑과 희생을 삶을 사는데 있다. 물론 그것이 우리의 삶 가운데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나지만 분명한 것은 주님 가신 길, 사랑의 희생과 섬김의 길이 참 인생의 길이라는 것이다.
주님의 대속의 십자가의 은혜로 죄로부터의 자유 함을 누리고 주님의 십자가의 한 모퉁이를 함께 지고 사는 삶, 그것이 십자가 그늘 밑에 거하는 삶이 아닐까?
신학자 라일은 “만일 당신이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성경 전체의 기초임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면 당신은 지금까지 시간 낭비를 한 것이다. 당신의 종교는 태양 없는 하늘이요, 태엽이나 추가 없는 시계며, 기름 없는 등불이다…나는 다시 말한다. 십자가가 없는 종교를 조심하라”고 했다.
이번 고난주간은 다시 한 번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돌아가 신앙인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주간이 되면 어떨까?
첫댓글 첫사랑을 회복하는 것이 살 길이겠지요 감사합니다
아멘!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