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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심정토(唯心淨土) : 우리 마음이 극락정토이다. p.491
번뇌 즉 보리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예토(穢土)가 정토(淨土)’라는 사상이 있습니다. 크게는 유심정토(唯心淨土) 사상의 일종입니다. 정토가 우주 공간 지구에서 아주 멀리 수백 광년 떨어져 있는 (깨끗한) 외계행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일견 더러운) 마음이 정토라는 사상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말합니다, “바람 한 번 잘못 피웠다가 지옥에 다녀왔다”라고. 거꾸로 누구나 선행을 하고 난 뒤에 느끼는, 더없이 가볍고 수승(殊勝)한 행복감을 압니다. 한 사람이 두 가지 극과 극을 경험합니다. 하지만 그 둘은 다른 사람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같은 사람의 마음이 그 마음을 씀에 따라 지옥이 되기도 하고 극락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정토는 외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만약 정토가 외계에 그것도 아주 멀리 있다면 그리 가기 위해서는, 첫째 우주선을 만들어야 하며, 둘째 빛의 속도를 넘어갈 방법 즉 웜홀(worm hole) 통과 방법을 알아내야 할 것입니다. 이도 저도 불가능하면, 열심히 선행을 닦아야 합니다. 정토에 갈 수 있을 정도의 공덕을 쌓아야 합니다. 문제는 그게 언제가 될지 아무도 모른다는 점입니다. 갔다 돌아와 일러주는 자도 없고 소문만 무성하며, 자기보다 착한 자가 많아 보여 보잘것없는 자기에게까지 차례가 올지 몹시 의심스럽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중생의 마음은 자꾸 위축됩니다 : 버젓이 잘 살다가도 더 잘사는 친구 집에 다녀오면, 갑자기 남편이 못나 보이고 미워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 친구의 인물이 자기보다 못하면 증세는 더 심해집니다.
사실은 크게 문제가 될 일이 아닙니다. 단지 그 마음이 문제입니다. 우리 삶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는 대체로 평온한 삶을 삽니다. 먼저 인생의 1/3을 잠자느라 바빠 그 시간만큼은 나쁜 일을 안 하고, 사실은 못 합니다. 깨어있는 시간에는 생업에 쫓겨 정신이 없으며, 남은 시간에는 출・퇴근차 안에서 졸지 않으면 스마트폰을 뚫어져라 쳐다보거나, 텔레비전 앞에 앉아 멍청히 시간을 보냅니다. 배우들은 시청자들을 위해서, 상상이 가능한 기기묘묘한 나쁜 짓들을 막장 드라마라는 이름으로 다 대신 해줍니다. 그래서 나쁜 일에 진력이 날 지경입니다. 나쁜 짓을 좀 할라고 하다가도, 자기가 하려는 나쁜 짓이 드라마에 등장하는 나쁜 짓들에 비하면, 그 상상력이나 잔인함에 있어서, 엄청나게 모자라고 한참 초라해 보여서 그만 의지가 꺾입니다. 그러니 무슨 나쁜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대부분 사람이 을(乙)인데 무슨 나쁜 짓을 모질게 할 수 있겠습니까?
살아가면서 때때로 느끼는 보람과 행복이 있습니다. 모락모락 김이 나는 커피잔이나 녹차 잔을 앞에 두고, 따뜻한 창가에 앉아, 사색하거나 독서하거나 친지와 담소를 나누는 기쁨이 있습니다. 성인(聖人)의 가르침을 사유하는 기쁨도 있습니다.
전 세계 환경오염을 말끔히 정화할 수 있는 과학기술 발명을 상상하는 기쁨 역시 빠뜨릴 수 없습니다. 의학과 생명과학을 발전시키고, 에너지와 식량문제를 해결하여, 모든 생명체가 질병 없이 장수하며 평화롭고 평등하게 공존하는 세상을 꿈꾸는 기쁨은 잠시일지라도 가슴을 벅차게 합니다. 그런 에너지를 얻기 위해 허공을 억세게 비틀고 쥐어짜는 상상을 해보면 정말 신나는 일입니다.
정토란 이런 기쁨을 떠나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게 유심정토 이론입니다. 우리가 우리 마음을 쓰기에 따라 기쁨도 오고 고통도 오는 것이지, 따로 극락과 지옥이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극락과 지옥은, 바로 지금, 우리 마음 안에 건립되고 경험된다는 이론입니다. 당신이 경험하는 소박한 기쁨이 바로 극락이라는 이론입니다. 우리는 흔히 가꾼 꽃만이 아름답다고 느끼며, 야생화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는 잘 모릅니다. 우리가 겪는 소박한 기쁨은 모두 야생화입니다.
극락은 멋지게 꾸민 인공 꽃일 뿐입니다. 극락의 가로수는 보석으로 만들어져있습니다. 수관, 체관으로 물과 양분이 바삐 오르내리고, 가을이면 샛노랗게 온 세상을 물들이는 살아있는 은행나무가 아닙니다. 매미가 목청이 터져라! 울어대는 참나무도 아니고, 큰 잎으로 찰랑찰랑 삼복더위를 흔들어대는 플라타너스도 아닙니다. 극락의 나무는 가지가지 보석으로 만들어진 인공물입니다.
‘극락(極樂-더할나위 없는 즐거움)은 본래 불교의 가르침과도 어긋납니다. 욕망의 불꽃이 꺼진 평온한 상태가 열반입니다. 그런데 갈 데까지 간 ‘극도의 쾌락’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열반과는 거리가 멉니다. 다시 돌아오려면 한참 시간이 걸릴 겁니다. 불교에서 말합니다. “천국에 가면 깨닫기가 힘들어진다. 오히려 인간계가 깨달음을 얻기 가장 좋은 곳이다.” 술에서 깨어야만 제정신이 돌아옵니다. 술이 만든 극락에 오래 머물수록, 깨는 데 더 시간이 걸립니다. 그리고 나이가 들수록 더 오래 걸립니다. 그래서 인간 세상에 있을 때 신속히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극락에서는 바람이 불면 보석 나무들이 삼법인(三法印) 설법을 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무한한 낙을 누리는 극락에서 무상(無常)ㆍ고(苦)ㆍ무아(無我)가 어떻게 귀에 먹히겠습니까? 쉴틈 없이 끝없이 변하는 남섬부주(수미산 남쪽에 있다는 대륙, 인간 세상)에서 고락(苦樂), 애증(愛憎), 화쟁(和爭), 승패(勝敗), 우지(愚智), 한서(寒暑), 염한(炎旱), 기포(飢飽) 등으로 롤러코스트를 타는 인간계에서 無常ㆍ苦ㆍ無我를 깨닫기 더 쉽지요. 그래서 극락은 망상입니다. 가면 절대로 깨닫지 못하는 ‘저주의 땅’입니다. 만약 당신의 최고 목표가 깨달음이라면 말입니다. 그런데 왜 이런 세계를 외계에 건립했을까요? 술꾼들이 ‘술을 매일매일 마음껏 마시고도 간경화, 위궤양, 뇌 세포손상을 입지 않는’ 술꾼들의 천국을 상상하는 것처럼, 세상 고통에 짓눌리고 절은 사람들이 온갖 낙을 누리고도 깨달음을 얻는 ‘신(新) 행성’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극락은 이율배반의 행성입니다.
우리 마음이 바뀌면 우리 마음이 바로 극락입니다. 이 마음은 번뇌를 내는 마음과 다르지 않습니다. 즉 정토(淨土)는 예토(穢土)와 다르지 않습니다. 같은 음식이 똥이 되기도 합니다. 깨끗한 음식과 더러운 똥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보는 시각(視角)과 관점(觀點)에 따라 음식이 되기도 하고 똥이 되기도 합니다.
염정(染淨 더러움과 깨끗함)은 우리 마음의 분별일 뿐, 절대적인 염정은 없읍니다. 똥은 더럽고 먹는 음식은 깨끗한 것입니까? 그럼 우리는, 깨끗한 음식을 먹고 더러운 똥을 만들어내는 존재입니까? 구더기들은 똥을 사랑합니다, 똥은 존재의 근원입니다. 개들에게는 인간의 똥은 부드럽고 따끈하고 맛있는 음식입니다. 인간은 소화・흡수율이 낮은지라 똥에 영양가도 풍부합니다. 게다가 구수한 냄새까지 납니다. 혹시 개들의 제호(醍醐-맛있는 음식)가 아닐까, 우스운 상상까지 하게 됩니다. 더불어 샛노란 거품이 이는 맥주 같은 오줌으로 목을 축이면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한 끼 식사였습니다. 예전에 강아지들은 어린아이들이 똥 싸는 것을 기다려 다 받아먹고, 디저트로 항문을 핥아서 뒤를 닦을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러다 불알까지 따먹어서 크게 문제가 되는 경우가 있기는 하였지만요. 혹시 불알을, 떨어지다 엉뚱한 곳에 낙하한 똥으로 착각한 것은 아닐까요? 하하하. 고의가 아니었으니 죄를 묻기도 힘들겠지요. 피해자에게는 미안합니다.
염정(染淨)은 같은 것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염정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번뇌 즉 보리라는 말은 바로 이 말입니다. 우리 마음을 떠나서는 따로 보리라는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다른 식으로 설명하자면 칼은 칼일 뿐입니다. 그 칼이 사람을 살리는 주방용 칼이 되느냐 아니면 사람을 죽이는 흉기가 되느냐 하는 것은, 칼에 달린 문제가 아니라 우리 마음에 달린 문제입니다. 칼에는 살기(殺氣)도 자비심도 없습니다. 이 둘은 우리 마음에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극락과 지옥은 우리 마음의 문제입니다. 이것이 바로 ‘번뇌 즉 보리’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무생물이라면 보리는 얻을 수 없습니다. 지성이 없는 돌멩이에 무슨 반야지혜가 있겠습니까? 우리에게 생각하는 능력이 있기에 번뇌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생각하는 힘’이 동시에 반야지혜의 근원입니다. 그래서 이 ‘생각하는 힘’을 번뇌에서 보리로 바꾸기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소위 전식득지(轉識得智)입니다. 흔히 오해하듯이 아예 생각을 없애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면 고사목(枯死木)이나 돌멩이밖에 더 되겠습니까? 그게 맘에 안 들면 중력(重力)이나 전자기력(電磁氣力)이 되시던지요.
평상심시도: 깨달음은 인식의 전환이다. p.496
아무튼 번뇌는 보리입니다. 보리는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우리 마음에 있습니다. 단지 번뇌ㆍ망상을 멈추기만 하면 됩니다. 그리고 그런다고 신비로운 초월적인 마음을 획득하는 것도 아닙니다. 밥 먹고 똥 싸는 평범한 마음일 뿐입니다, 소위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입니다. 휘황찬란한 천인(天人 하늘나라 사람)들이 영접하고, 아미타 삼존불이 영접하고, 비로자나불이 만다라 궁으로 인도하고, 과거ㆍ현재ㆍ미래의 삼세불이 관정(灌頂)을 베풀어 인가해 주는, 그런 깨달음의 세계는 없습니다. 그런 증상이 나타나는 분들은 사실상,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정신병동으로 직행한 것입니다, 자기가 만든 환ㆍ망ㆍ공ㆍ상(幻想ㆍ妄想ㆍ空想ㆍ想像)적인 깨달음의 세계라는 우주적 규모의 정신병원으로.
번뇌와 보리는 같은 바탕 위에 건립됩니다. 번뇌와 보리는 같은 마음을 어떻게 쓰느냐에 달린 문제입니다. 같은 공장을, 전쟁 용품 생산시설에서 생활용품 생산시설로 전환하는 것입니다. 생존경쟁 전쟁터에서의 ‘개체적이고 이기적이고 투쟁적인 번뇌’를 ‘집단적이고 이타적인 평화의 반야 지혜’로 바꾸는 것입니다. 앞의 두 공장은 같은 공장입니다. 같은 대지 위에 건립된 같은 건물을 사용하는 시설입니다. 마찬가지로 번뇌와 보리가 건립되는 땅과 구조물은, 동일한 심전(心田)과 심택(心宅)입니다.
상ㆍ락ㆍ아(常ㆍ樂ㆍ我)로 보던 것을 무상(無常)ㆍ고(苦)ㆍ무아(無我)로 보는 것입니다. 대상이 변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보는 시각이 달라진 것뿐입니다. 일체가 본래 無常ㆍ苦ㆍ無我였음에도, 그동안 常ㆍ樂ㆍ我로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경우도 보는 마음은 같은 마음입니다. 번뇌를 내는 마음이나 지혜를 내는 마음이나 같은 마음입니다. 그래서 ‘번뇌 즉 보리(煩惱卽菩提)’입니다.
깨달음은 사회적인 현상이다. p.496
부처님 당시는 석가족의 나라 카필라국 등 부족 국가들이, 코살라국 등 대국으로 통합되는 시기였습니다. 그 후 수백 년에 걸쳐서 페르시아제국, 알렉산더 대왕의 제국, 아소카왕의 통일 인도제국이 탄생하였으며 인간은 더 도시화하였습니다. 대규모로 모여 살게 되어 인간 의식이 발전하였습니다. 인간의 사회적 특성이 발현되고 발전했습니다. 타인의 마음이 자기 마음 안에 들어와 의식이 복잡해졌습니다. 인간 의식이 단세포(單細胞)에서 진핵(眞核)세포로 그리고 다시 다핵세포(多核細胞)로 진화하는, 캄브리아기(期) 같은 대폭발이 일어났습니다. 가히 심(心) 캄브리아기라 불릴 만한 이 기간에, 인간 의식(意識)에 대한 고찰(考察)과 복잡한 마음에 대한 정치(精緻)한 고찰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대승불교가 탄생한 것입니다. 대승불교는 인간 마음에 대한 전문적이고 학술적인 연구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과거 단순한 시절보다 더 세밀(細密)한 이론이 필요해진 것입니다. 사회가 변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사회화, 대도시화, 대국화, 제국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대승불교는 일어나지 못했고 ‘번뇌 즉 보리’라는 말도 생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번뇌 즉 보리’라는 ‘복잡한’ 말이 생기기에는 소규모의 시골 사람들의 마음이 너무 ‘단순하기’ 때문입니다. 번뇌가 보리가 되는 데는 이런 배경이 있습니다.
깨달음은 우리와 같이 산다. p.497
깨달음이란 신비하고 초월적인 불생불멸(不生不滅), 상주불변(常住不變), 영생불멸(永生不滅)하는 참나(진아 眞我)를 찾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당신은 천불(千佛)이 출세해도 깨달음을 얻을 수 없습니다. 깨달음은 당신의 일상생활에서 당신의 평범한 마음에 찾아오는 것이지, 당신의 참나를 찾아 당신의 마음을 떠나 어딘가로 떠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육조 스님은 “어찌 자성이 본래 스스로 갖추어짐을 알았으리까? 라고 영탄(詠歎)하는 것입니다.
깨달음은 과학적 지식을 제공하지 않는다, p.498
흔히 사람들은 깨달음을 얻으면 모든 지식을 얻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문자 그대로 모든 지식을! 하지만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신비주의적이고 신화적인 ‘한탕주의’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런 견해는 ‘전지전능한 신’을 ‘깨달음’으로 바꿔치기한 것에 불과합니다. 냉엄한 진실은 이렇습니다. 깨달음을 얻어도, 배운 적이 없는 자연과학과 인문・사회과학에 대해서는 여전히 무지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진화론을 전면적으로 부인하는 진제 종정은 깨달음을 얻은 것이 아닙니다: 가섭을 초조(初祖)로 하는 유구한 전등(傳燈) 역사상의 제79조(祖)도 아닙니다. 그런 지식은 따로 긴 시간을 투자해 체계적으로 배워야만 습득할 수 있습니다.
깨달음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깨달아도 당신은 여전히 다른 사람들의 도움으로 살아갑니다. 당신의 의식주와 생필품은 거의 다 타인들이, 즉 깨닫지 못한 자들이 제공합니다. 함부로 말하자면 귀뚜라미 보일러가 없으면 도인도 얼어 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충치가 생기면 치과에도 가야 하고 암에 걸리면 입원도 해야 함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를 부인하는 것은 궤변에 지나지 않습니다. 말로는 ‘마실 가듯 도솔천궁을 드나든다’라고 하지만, 일상생활은 하나에서 열까지 속인들에게 의지해 삽니다. 화려한 말에 속지 말고 그 행을 보아야 합니다.
어떤 이들은 볼멘소리로 “그럼, 도대체 깨달음이란 뭐냐?”라고 묻습니다. 깨달음은 모든 생명과 현상이 무아(無我)이고 그 작동원리는 연기법(緣起法)이라는 것을(諸法無我緣起), 그리고 ‘나’라는 것은 독립체가 아니라 사회와 자연 속에서의 연기체(緣起體)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我者卽緣起體). 그래서 나라는 것은 얼마든지 커질 수 있고, 반대로 얼마든지 작아질 수도 있습니다. 무언가, 불생불멸(不生不滅)하고, 상주불변(常住不變)하는, 신비롭고 초월적인 주체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연기체(緣起體)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깨달음을 얻더라도 그것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결코 끝이 아닙니다. 그다음은 열심히 세상 이치를 공부해서 생명계와 자연계에 유익한 행동을 해야 합니다. 그걸 불교에서는 회향(回向)이라고 부릅니다. 이런 사람들이 많아질 때 이 땅은 불국토로 변할 것입니다. 번뇌가 비옥한 흙이라면 보리는 아름다운 꽃입니다. 연꽃은 진흙을 떠나 살 수 없기에, 번뇌 즉 보리이지, 저 멀리 오색구름 위에 보리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으면 35억년 인류 역사는 의미가 없는 헛수고로 전락하고 맙니다.
깨달음이란 사회적 현상이다. p.500
아동은 없었다. 오늘날 우리가 그렇게 사랑하고, 아끼고, 걱정하는 우리의 아이들은 철저하게 문화적인 구성물이다. 원래부터 있던 게 아니라 어느 날 갑자기 편집되었다. 근대 이전의 가내수공업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에서 가족이란 사랑의 공동체가 아니라 재화의 생산을 위한 경제단위일 뿐이었다<필립이이레스>
소파 방정환이 '어린이날'을 만든 이유는 조선인들이 하도 아이들을 때리니, 제발 아이들을 사랑해 주라고 만든 것이라고 한다.
많은 사람들은 도를 닦으려면 심산유곡(深山幽谷)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토굴이나 동굴에 홀로 살며 티베트의 밀라레빠처럼 도를 닦아야 깨달음을 얻는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당신이 무인도에 표류해 혼자 산다고 해봅시다. 당신이 미워할 사람도 좋아할 사람도 없읍니다. 당신이 화를 낼 상대도 기분이 좋을 상대도 없습니다. 혹시 사랑과 미움의 감정이 일어난다면, 그건 옛일이 떠올라서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당신이 갓난아이 시절부터 무인도에 홀로 산다면 어떨까요? 불경을 읽은들 도를 닦을 마음이 날까요? 사랑, 미움, 질투, 시기, 거짓말, 음모, 분노 등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
감정은 타인으로 인(因)하여 일어납니다. 즉 사회로 인하여 일어납니다. 번뇌도 그러합니다. (정확하게는, 나와 타인 사이의 연기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깨달음은 다른 사람들로 인하여 일어납니다. 깨달음이란 궁극적으로 나와 타인의 관계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번뇌는 사회적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깨달음은 결코 개인적인 일이 아닙니다. 태어나서부터 홀로 사는 사람에게 죽음의 공포가 있을까요? 아마 없을 겁니다. 있다고 해도, 사회 속에 사는 사람보다는 훨씬 적을 것입니다. 죽은 사람을 본 적이 없어, 자기 죽음을 예측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마 ‘죽음’이라는 개념조차 없을 겁니다.
병에 걸린 동물은 육체적인 고통을 느낄 뿐이지, 자기가 죽을지 모른다는 죽음에 대한 공포는 없습니다. 공격을 당하는 동물은 죽음에 대한 공포가 아니라, 폭력에 대한 공포를 느끼는 것입니다. 어릴 때부터 무인도에 혼자 사는 사람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이 사람은 아마 죽을 때 죽음에 대한 공포가 전혀 없을 것입니다. 자기가 죽는 줄도 모를 터인데 죽음에 대한 공포가 있을 턱이 없습니다.
아프리카의, 수렵채집을 하는 소규모 원시 종족인, 부시맨은 죽음에 대한 공포가 없습니다. 이 사실은 죽음에 대한 공포가 본능이 아니라 문화적인 현상임을 암시합니다.
사회를, 적어도 가족을 이루고 살아야 죽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감정도 알게 됩니다. 대승불교는 왜 인간의 의식에 천착했을까요? 함께 살았기 때문입니다. 대승은 자신들을 사회로부터 분리하지 않고 사람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물리적으로도 그랬고 정신적으로도 그랬습니다. 그들은 ‘사회란, 밖에만 존재하는 것이라, 안에도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혼자 살아도, 자기 안에 있는 여러 마음이 만들어내는 (내적인) 사회에서 유리될 수 없다는 점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리고 고립된 개인의 깨달음은 의미가 없다는 점을 깨달은 것입니다.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야생 과일과 뿌리식물을 먹으며 혼자 외로이 살다가 道를 이루고 아무도 모르게 죽은들, 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무(無)입니다. 이름 없는 단년생 들꽃이 봄에 심산(深山)에서 꽃을 피웠지만, 씨를 남기지 않고 가을에 사라지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사회 속의,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고립된 깨달음도 무용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번뇌 속에서 일어난 깨달음만이 번뇌 속으로 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홀로 바람에 날려 사막에 떨어져, 가까스로 한 점 흙 위에서, 아침에 꽃을 피웠다가 저녁에 사라지는 꽃은 자신을 퍼뜨릴 수 없습니다.
‘번뇌 속에서 깨달음을 이룬다’는 말은 사회 속에서 깨달음을 얻는다는 말입니다. ‘번뇌는 사회로부터 온다’는 말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아(我)는 독립아(獨立我)가 아니라 연기아(緣起我)이기 때문입니다) 숲이나 동굴에서 홀로 정진하는 수행자에게 일어나는 번뇌는 그들이 속세에 있을 때 사회적으로 경험한, 즉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형성된, 경험이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번뇌는 기본적으로 사회적인 것입니다. 마음이 진화하여 여러 마음으로 분화하지 않으면, 즉 다수의 마음이 사회를 이루지 않으면, (대부분의) 번뇌는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승려들이 더 큰 집단을 이루고, 속인들과 더 자주 접촉함으로써 인간 간의 관계를 통해서 인간 의식에 대해서 더 많은 경험을 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고립하여 은거 생활을 하는 소승들에게는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마음의 일은 기본적으로 집단의 일입니다. 한 마음은 “하라” 하고, 다른 마음은 “하지 말라”고 합니다. 자기 마음 안에 있는 여러 마음은 서로 경쟁합니다. 그래서 마음은 이미 ‘마을’입니다. 마음이 있는 이에게나 깨달음이 가능한 것은, 깨달음이 사회적인 현상이고 마음이 집단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통해서, 그리고 다른 사람의 마음에 비친 자기 마음을 보게 됨으로써, 우리는 마음의 다자아성(多自我性)을 깨닫게 됩니다. 아직 마음이 복잡하게 발달하지 못한 생물에게 깨달음은 불가능합니다. 아직 마음이 충분히 큰 마을이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지옥과 천국 등 통속적 의미의 윤회가 없이는 불법(佛法)의 기반이 무너진다고 생각합니다. 불법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윤리와 도덕의 근거가 무너진다고 생각합니다. 불교 수행의 동기를 박탈한다고 생각합니다. 불교가 윤회를 탈출하는 방법을 가르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깨달음이 사회적인 현상이라면, 윤회에 대한 생각 역시 사회적인 현상입니다. 윤회의 의미, 즉 윤회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사회적인 현상입니다. 유신론적인 타종교인들조차 천국과 지옥은, 특히 지옥은, 안 믿는 경향이 있습니다. 불교인들도 아마 그럴 겁니다. 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우주를 보는 눈이 같이 발달하기 때문입니다.
무인도에서 갓난아기 때부터 홀로 사는 사람이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나고 싶다고 생각할지 의문입니다. 태어나는 것을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무인도에 짐승이 없다면 말입니다.
이 점에서 성인들은 세상을 혼란에 빠뜨렸습니다. 아무런 문제 없이 잘들 살고 있는데, 누군가 나타나, “당신들 잘못 살고 있어, 그렇게 사는 게 아니야. 내가 가르쳐주는 대로 살아야 해!”하고 꾸짖은 꼴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성인들 말이 서로 크게 어긋났으므로, 특히 사후세계에 대한 가르침이 극과 극으로 달랐으므로, 세상에 혼란은 가중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서로 지지하는 성인이 달랐으므로 서로 말다툼하다가,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면 흉측한 무기를 동원해서 상대방을 죽이면서도, 성인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고 대 망상을 피웠습니다)
동굴에서 홀로 도를 닦는 것은, 무인도에 태어나 홀로 사는 사람이 되자는 것입니까? “무지개는 왜 생길까?” 또는 “천둥은 왜 칠까?” 등의, “저건 왜 그럴까?” 하는 자연현상에 대한 의문은 사회적인 현상이 아닙니다. 이런 의문은 홀로 살건 사회를 이루고 살건 일어납니다. 오히려 사회를 이루고 살면 적게 일어납니다. 그 이유는 사회적인 현상에 대한 의문이 더 많이 일어나기 때문이며, 사랑, 미움, 협력, 분열, 평화, 싸움 등의 사회적인 관계가 온통 사람의 마음을 차지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위대한 과학자들 가운데 많은 수가 자폐적인, 즉 비사회적인 성향을 나타냅니다.
하지만 사회적인 현상은 사회 속에서 발생하고, 사회 속에서만 의미가 있읍니다. 예를 들어, 무인도에 홀로 사는 사람은 고백해야 할 죄도 짓지 않을 것입니다. 죄의 대상인 타인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계(五戒)인 살인, 절도, 음행, 망어는 모두 타인에 대한 죄입니다. 타인이 있어야 가능한 것들입니다. 따라서 죄는 사회적인 것임을, 즉 사회로부터 발생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회는 무아(無我)입니다. 구성원들의 연기적 관계로 생성ㆍ유지ㆍ소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어디에도 시공을 통해서 상주불변(常住不變)하는 주재자(主宰者)는 없습니다. 사회자체는 유동적입니다. 끝없이 구성원이 증감하고 구조도 변형을 거듭합니다. 외적인 사회도 그렇고, 내적인 사회인 우리 마음도 그렇습니다. 뇌도 그렇습니다. 구성원인 1,000억 개 뇌세포에 증감이 일어나고, 뇌 세포들 간의 연결도로인 500조 개 (축색ㆍ수상) 돌기들에 생성ㆍ소멸과 구조변형이 일어납니다. 본래 실체(實體)가 없던 것이 (나처럼 보이게 하는 인연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 무아(無我)입니다. 인간은 단세포 생물에서, 외계와 자연이라는 사회를 통해서 관계를 맺으며, 100조 개 다세포 동물로 진화를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몸과 뇌의 수많은 세포들 사이에, 폭발적인 의식ㆍ지능ㆍ기능의 발전을 가능하게 한, 분업이 이루어졌습니다. 아담 스미스가 경제적인 분업을 제안하기 이전에, 즉 수십만 년 전에 이미 생물학적인 분업이 일어난 것입니다. 인간은 그 구조가 이미 육체적으로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사회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몸으로나 마음으로나 무아입니다.
분업은 번뇌를 만들고 키웠습니다. 번뇌는 우리 몸과 뇌(마음)에 발생한 내적인 분업의 결과로 생겼으며(이 점은 아메바ㆍ달팽이ㆍ지렁이ㆍ짚신벌레처럼 원시적인 동물은 번뇌가 없다는 점에서 명확한 사실입니다. 불교적으로는, 제7식 말나식의 등장으로 생긴 것입니다), 외적인 분업인 사회적 분업과 더불어 양적ㆍ질적으로 증가했습니다(이 점 역시, 수많은 동물 가운데서, 오직 인간만이 해탈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명백한 사실입니다). 아마 ‘번뇌의 양과 질’은 ‘분업의 양과 질’에 정비례할 겁니다. 기하급수적으로 비례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우리의 의식과 번뇌가 우리와 내적ㆍ외적 사회 사이의 연기 관계로 발생하므로, 우리의 깨달음은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사회적 현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회 속에서 사회를 이루고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내적ㆍ외적 사회의 모습이 깨달음의 모습이지, 따로 (어딘가 초월적이고 신비로운 형태로) 깨달음의 모습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참나(진아-眞我-진짜 아트만 true atman)’는 그릇된 이론입니다. 몹시 그릇된 이론입니다. 참나는 우주가 생기기 전에도 존재했고 우주가 없어져도 여전히 존재할, 또 그 어떤 것에도 영향을 받지 않고 자기 정체성을 변함없이 유지하는, 비-연기적이고 초월적인 영원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참나는 불생불멸(不生不滅)하고 상주불변(常住不變)하는 비-연기적(非緣起的)이고 초월적인 영원한 실체이기 때문입니다.
출처 : 강병균 교수 역저. 어느 수학자가 본 기이한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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