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를 찾아서] 죽음보다 깊은 잠을 뚫고 크게 일어선 신비로운 나무
○ 모레 《나무강좌》에서는 좋은 '선물'을 나눠드립니다 ○
은행나무 노란 잎이 길 위에 차곡차곡 쌓였습니다. 십일월이니까요. 이달 들어 띄우는 첫번째 《나무편지》입니다만, 이번 주는 벌써 둘째 주입니다. 그래서 둘째 주 수요일인 내일 모레 8일에는 다시 부천 시립 상동도서관의 《나무강좌》가 열립니다. 십일월 강좌에는 아주 특별한 이야기를 준비했습니다. 제목은 〈나무를 본다는 것〉으로 했습니다만, 단순히 ‘나무를 본다는 것’의 뜻을 짚어보는 데에 그치지 않을 겁니다. 나무의 참 알갱이를 만나기 애면글면했던 아주 특별한 체험을 보여드리려 합니다. 물론 어느 강좌라 해서 허수로이 준비하는 건 아니지만, 이번 강좌만큼은 올 한햇동안 이어온 《나무강좌》 가운데에 가장 중요한 강좌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아, 참! 이번 강좌에서는 지난 시월 강좌에서 예고해 드렸듯이 〈좋은 가을 선물〉도 마련했습니다. 이 가을의 《나무강좌》에 매우 알맞춤한 선물이지 싶어서 많은 분들께 드리려고 준비했습니다. 많은 관심과 참여 부탁드립니다.
○ 가을을 보내며 못다 한 은행나무 이야기 하나 ○
낙엽되어 길 위에 쌓이는 은행 잎의 새싹을 만나려면 한 계절을 더 보내야 하겠지요. 몇 차례에 걸쳐 《나무편지》에서 은행나무 이야기를 들려드렸습니다만, 이 계절에 찾아본 여러 은행나무 가운데에 미처 못 다 들려드리지 못한 은행나무 이야기가 있습니다. 두어 주 전 쯤에 띄운 편지에서 간단히만 말씀드리고 자세한 이야기를 다음으로 미루었던 나무, 바로 〈오산 궐리사 은행나무〉 이야기입니다. 은행나무 잎이 우리 곁에서 다 스러지기 전에 오늘 《나무편지》에서는 바로 그 은행나무의 절절하고도 신비로운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오산 궐리사 은행나무〉의 사연을 이야기하려면 먼저 오산 궐리사와 이 마을부터 이야기해야 합니다. 오산 궐리사가 있는 경기도 오산 궐동입니다. 지금의 행정구역명이 궐동이기는 하지만, 궐동이라는 이름은 나중에 그러니까 ‘궐리사’ 이후로 봐야 합니다. 조선 시대에 이 마을은 공자의 후손들이 터잡고 살던 마을이었습니다. 그들 가운데에 공자의 64대손인 공서린(孔瑞麟, 1483~1541)선생이 있었지요. 그는 조선 중종 때의 풍운아인 조광조(趙光祖, 1482∼1519)와 뜻을 같이 하며, 승지와 대사헌을 지낸 덕망 높은 선비였습니다. 기묘사화가 일어난 1519년에는 그가 좌승지를 지내던 때였지요. 그러나 그가 기묘사화의 주역인 조광조와 연루됐다는 이유로 사림파 인물들과 함께 투옥됐습니다. 길지 않은 투옥 생활을 마치고 공서린은 고향에 돌아왔습니다.
○ 공자의 후손들이 이룬 마을의 상징으로 우뚝 서 ○
공서린은 고향인 오산 궐동 지역으로 돌아와 훗날을 도모하며 후학을 양성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그는 곧바로 고향 마을에 서당을 짓고 마을의 아이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그와 함께 서당 앞마당에는 학업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북을 걸 나무 한 그루를 심었습니다. 당시 유학자들은 은행나무를 공자의 가르침을 상징하는 나무로 여겼기 때문에 그가 은행나무를 선택한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지요. 우리의 〈오산 궐리사 은행나무〉가 바로 그때의 그 나무입니다. 사연은 이제 시작입니다. 공서린은 서당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잘 지냈지만, 예순도 되지 않은 나이에 죽음에 들었어요. 하기야 당시 평균 수명으로 치면 환갑 넘기기가 어려웠으니, 공서린의 죽음을 특별한 일이라 할 수는 없을 겁니다.
공서린의 서당은 폐허로 변했고, 서당 앞의 주인 잃은 은행나무도 따라서 생명활동을 중단했다고 합니다. 그게 1541년 즈음의 일입니다. 겨울 지나고 온 마을에 화창한 새 봄볕이 내리 쬐어도 폐허가 된 서당 앞의 은행나무에서는 새싹이 트지 않았습니다. 무정한 세월은 그렇게 흘렀습니다. 그로부터 250년 쯤 흐른 1792년 즈음에 이 은행나무에 믿기 어려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죽음에 들었던 은행나무가 소생의 기운으로 꿈틀거리기 시작한 거죠. 게다가 기적처럼 다시 살아난 은행나무는 여느 어린 나무와 달리 빠르게 부쩍부쩍 제 줄기를 하늘로 솟구치며 아름드리로 자라났다고 합니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은 아무래도 이 마을과 나무를 심은 공서린의 후손들에게 좋은 일이 벌어질 상서로운 조짐이라고 했지요.
○ 화성 행궁에 나선 정조의 생각으로 세운 공자의 성묘 ○
마을 사람들의 예감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당시 조선의 임금은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였고, 공서린의 은행나무가 소생한 때는 정조가 즉위한 지 16년 째 되는 해였습니다. 정조는 잘 아시다시피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묘를 모신 화성을 자주 찾았지요. 이른바 ‘화성행궁’입니다. 한양의 궁궐에서 화성까지 행차하려면 정조 일행은 공씨 집성촌인 이 마을을 통해야만 했습니다. 당연히 폐허가 된 공서린의 서당 터를 지나칠 수밖에요. 정조는 이 길에서 신하들을 통해 마을의 유래와 이곳에 서당을 세우고 후학을 양성했던 공서린의 이야기를 듣게 됐어요. 더구나 그 마을의 신비로운 은행나무가 죽었다가 250년 만에 새싹을 틔웠다는 신비로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러자 정조는 신하들에게 일러, 공서린의 서당 터에 공자의 성묘(聖廟)를 지으라고 했습니다.
성묘가 완공되자 정조는 공자의 후손들이 살아가는 이 마을을 아예 '궐리'로, 성묘는 '궐리사'로 이름하라면서 손수 사액을 내렸습니다. 궐리는 공자가 태어난 마을인 중국 곡부현의 마을 이름 ‘궐리’를 그대로 따온 겁니다. 궐리사라는 이름은 그때 그렇게 얻게 됐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건물이 모두 정조 때의 건물은 아닙니다. 공자를 배향하는 제사를 올리던 화성궐리사는 이후 여느 서원이나 향교와 마찬가지로 후학을 가르치는 교육 기능을 갖게 되었는데, 그게 바로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철거될 실마리가 됐습니다.
○ 사람이 이룬 과학만으로 풀기 어려운 천년 생명의 신비 ○
궐리사는 다시 폐허에 들었고, 되살아난 은행나무만 홀로 제 자리를 꿋꿋이 지켰습니다. 다시 또 한참의 세월이 지난 뒤인 1892년에 마을 선비들은 뜻을 모아 새 건물을 지었습니다. 궐리사라는 이름으로 남은 지금의 모든 건물들은 바로 그때 새로 지은 건물들입니다. 그 뒤로 마을의 원로들은 엣 선비 공서린의 뜻을 이어 어린 학생들과 부녀자들을 대상으로 다도(茶道), 서예(書藝), 예절 교육을 비롯하여, 유학과 관련한 교육을 이어갑니다. 그게 지금까지 계속 이어지며 오산 지역 유학 관련 교육의 중심으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돌아보면 〈오산 궐리사 은행나무〉는 이백오십 년이라는 긴 세월을 죽음보다 깊은 잠에 들었다가 새 시대를 상징하는 기운으로 모든 암울을 떨치고 새싹을 틔운 놀라운 나무입니다. 이백오십 년의 깊은 잠을 과학 상식으로는 도무지 해석할 수 없겠지요. 그러나 생명의 신비, 더구나 사람보다 백 배 천 배의 긴 생명을 살아가는 나무의 신비를 사람이 이룬 과학으로 완벽하게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없지 싶습니다. 우리 곁의 큰 나무 한 그루에 담긴 신묘함이 더 절절하게 스미는 가을 아침입니다.
○ 겨울 불러오는 차가운 바람 맞으며 함께 할 나무 이야기 ○
주말에는 기온이 뚝 떨어져 겨울 날씨 못잖게 추웠습니다. 오늘 조금 풀린다는 예보가 있긴 합니다만, 그래봐야 겨울은 우리 앞에 더 가까이 다가오겠지요. 긴 겨울, 더 따뜻하게 나실 수 있도록 몸과 마음 잘 챙기시기 바랍니다. 상동도서관의 《나무강좌》가 있는 수요일 오전에는 비가 온다는 기상청의 날씨 예보도 있습니다. 그래도 많이 참석하셔서 쉽잖게 준비한 가을 선물, 받아가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