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긴밤
고영미
문밖에 목소리 커지는
엄마 아빠가 있다.
말려 볼까 하다
아빠와 엄마 사이
화해하는 마음
풍선껌처럼 부풀길 바라며
고양이 걸음으로 방안을 맴돈다.
숨도 크게 못 쉬고
귀만 문밖을 기웃거리는데
눈치 없이 배꼽시계 울린다.
-《어린이와 문학》 (2022 봄호)
운수 좋은 날
권영욱
찾았다
찾았어
행운!
하지만
네잎클로버에겐
참
운 없는 날
- 동시집 『불씨를 얻다』 (2021 브로콜리숲)
머슴둘레
김미영
짓밟히면서도
등불을 들고 있다
*머슴둘레: 민들레
-《동시 먹는 달팽이》 (2022 가을호)
중심을 위해
문성란
정류장에는
동네 이름이 나란히
어깨동무하고 있다
시청ㅡ>서울역ㅡ>용산
지나온 길과
가야 할 길 사이
중심은 돋을새김*
양편 어깨동무는
조금 작아졌다
조금 낮아졌다
*돋을새김 : 조각에서, 평범한 면에 무늬나 모양이 도드라지게 새기는 기법.
-《동시발전소》 (2022 가을호)
불가사리
박경용
별자리를 더듬으며
산호 숲을 떠올린다.
저 별만큼 많고 많은
바다의 별, 불가사리.
산호 숲,
별자리를 헤엄치며
바다별을 줍는다.
-《시조21》 (2022 여름호)
안녕, 나는 플라타너스야
박선영
어느 날
담장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있는 아이를 만났어
눈이 작고 조용한 아이였지
말없이 울고 있길래
팔랑 잎사귀 한 장 떨어뜨렸어
그 아이가 잎사귀를 집어 들었어
눈믈을 닦으며 잎사귀를 봤어
우수수수
잎사귀를 떨어뜨리자
그 아이가 나를 올려다보면서 말했어
“안녕?”
우리는 눈을 맞췄어.
- 동시집 『우리 집이 변신한다면』 (2022 브로콜리숲)
가을 새 학기
성명진
해바라기는
그동안 충분히 뽐냈으니
고개를 수그리게 하고
어린 구절초는
고개를 들게 했다
꽃 피워야 하니까
엄하면서도 다정한
선생님이 새로 오셨다
-《열린아동문학》 (2022 가을호)
변신
손인선
빗물이
아스팔트 위 움푹 패인 물웅덩이에
둥지를 틀었어요
자동차가 물웅덩이를
꾸욱 밟고 지나갈 때가
빗물이 변신하는 순간인가 봐요
보이지 않던 날개가 활짝 펴졌거든요
하얀 깃털이 길 양옆으로
수없이 날렸거든요
-《사이펀》 (2020 가을호)
배춧잎 한 장
이묘신
달팽이에게 준
배춧잎 한 장은
먹이가 되었다가
놀이터가 되었다가
포근한 이불이 되었다
먹고 놀고 자고
또 먹고 놀고 자는 동안
점
작아졌다
쪼그라들었다
-《동시마중》 (2022 5‧6월호)
크으크으
조기호
늦은 밤,
조심조심
컵라면에 물을 붓고
뽀글뽀글 면발이 부풀어 오르기를
기다리며 웃는다
크크크
아주 활짝,
그러나
동생 몰래 누나와 둘이서만
숨죽이며 주고받는
후루루룩,
젓가락에 감기는
통통한 면발보다
더 맛있는 웃음소리다.
출처: 한국동시문학회공식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박선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