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남송의 수도 항주 그리고 금나라
2월 11일, 항주에 고려사 절이 있다고 고백이 알려 주었다. 하지만 불교에 대해서는 국법이 엄한지라 최부는 단호하게 말을 했다.
<지금 우리 조선에서는 이단을 물리치고, 유교를 존숭하여, 사람들이 모두 (집에) 들어가서는 효도하며, (밖에) 나가서는 공경하며, 임금께 충성하고, 벗을 믿는 것을 본분으로 삼고 있습니다. 만약 머리를 자른 사람이 있다면 모두 충군시킵니다. 사람들은 모두 사당을 만들어서 조상에게 제사를 올리니, 마땅히 섬겨야 할 귀신을 섬김이요, 음사(淫祀)를 제사지내는 것을 숭상하지 않습니다.>
고려의 대각(大覺·1055∼1101)국사가 중창한 고려사는 본래 이름이 혜인사(惠因寺)로 927년 오월국 시절에 세워졌다. 대각국사는 고려 문종의 넷째 왕자로 11세 때 출가, 고려 불교에서 천태교학(天台敎學)을 대성한 고승이다. 그는 고려와 송의 불교문화교류를 위해 불멸의 업적을 남겼다. 혜인사 즉 고려사가 그 빛나는 가교이다. 혜인사와의 만남은 1085년 송나라의 구도유학 길에 항저우로 와서 혜인사의 징위엔(淨源)을 사사하면서 비롯된다. 국사는 귀국 후 1087년 징위엔 스님을 흠모한 나머지 고려 특유의 아름다운 화엄사경(감지, 쪽빛 종이에 금물로 쓴 것) 170권(50권본, 80권본, 40권본)을 기증했다. 징위엔이 열반하자 1087년 추모사업으로 금탑 두개를 보냈고 1099년에 고려가 보낸 화엄경의 장경각(藏經閣)건립비를 희사했다. 이렇게 국사와 고려왕실의 도움으로 혜인사는 항저우 굴지의 거찰로 발전했고 사실살 고려의 절이므로 고려사로 불려진 것이다.
그 다음 날인 2월12일, 고백이 공문 한 장을 최부에게 보여주었다. 가야 할 각부, 헌,역에 호송을 통지하는 공문이었다. 내용이란 게 그간 벌어진 상황을 설명한 것인데 끝 부분에 지휘첨사 (정4품) 양왕을 차출하여 북경으로 호송하는 데 파견관원의 늠급(봉급) 참선(운수용 선박)과 아울러 호송 군여및 최부의 구량(식량), 홍선(운수용 선박) ,각력(운반비)을 지급하게 하고 앞길의 관사에도 이첩하여 모든 것을 제공하라고 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아마 최부는 이쯤부터서 마음을 놓았을 것이다. 최부는 그날 고마움의 표시로 고백에게 한유와 태전선사의 예를 들며 앞서 언급하였지만 남은 옷 한 벌을 건넨다. 그쯤 항주가 어떤 곳인지 귀가 솔깃해 고백에게 들은 내용을 최부가 그대로 옮겨 놓았다.
< 절강포정사는 동남으로는 바다에 이르고 남으로는 복건의 경계에 이르며 11개의 부·주를 관할하며 76개의 현을 통솔한다. 그 중에 항주가 제 1로, 오대 때에는 오월국(907~978)이었고 송나라 고종(1127~62)이 남쪽으로 양자강을 건너 천도했던 땅으로 소위 임안부입니다. 부치와 인화(仁和)·전당의 두 현치 및 진수부·도사·포정사·염운사(鹽運司)·안찰원·염법찰원(鹽法察院)·중찰원(中察院)·부학·인화학·무림역은 모두 성안에 있었습니다.>
송나라 고종이 천도하여 항주가 송나라 수도가 되었다는 대목이 나오는데 정확히는 남송의 수도였다. 이 역사 이야기는 나로선 꼭 해야만 한다. 금나라는 내가 보기에 우리의 또 다른 선조이기 때문이다. 1126년 중원에 일대 격변이 일어났다.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가 송나라를 강남까지 밀어내고, 당시 송을 다스리던 흠종과 그의 아비인 휘종을 포로로 잡아간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흠종의 연호가 정강이라 이 사건을 정강의 변(靖康之變)이라 부른다. 송나라는 당나라 말기 절도사의 난립을 보고 무를 억제하고 문을 숭상하는 정책을 펼쳤다. 이로 인해 송의 국방력은 취약해져 거란과 서하의 침략에 시달렸다. 결국 송은 거란과 서하에 은, 비단, 차를 비롯한 막대한 세폐를 바침으로써 그들의 침략을 방지하였다.
이로 인해 송의 재정은 나날이 갈수록 피폐해지고, 그 타개책으로 왕안석의 개혁을 통해 수많은 개혁정치를 실행하였지만, 보수파 관료들의 반발에 부딪혀 투쟁이 격화되고, 피폐한 농민들에 의해 ‘방랍의 난’ 같은 농민의 반란이 잇달았다. 이런 상황에서 즉위한 8대 황제 휘종은 정치에 관심이 없었다. 그는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는 일에 소질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정치는 채경, 동관과 같은 간신배에게 맡기고 자기 자신은 서화나 골동품에 심취하거나 미녀의 품에 안기는 등 '풍류천자'의 생활을 하였다. 황제가 정치에 손을 떼자 간신배들이 득세하여 백성들을 마구 착취하였다. 이로 인해 송의 국력은 탕진되었고, 정치와 경제 재정상태는 빈사 직전이 되었다.
이때 동북 만주에서는 대 영웅이 출현했다. 여진족을 통합한 아골타는 1115년 독립을 선언하며 금을 건국, 요나라에 대해 공세를 취했다. 이에 송 조정은 해상에서 금에게 요에 바치던 세폐 전액을 바칠테니 함께 협공하여 과거 중원의 영토였던 연운 16주는 송이 차지하기로 금과 맹약을 맺고 거란의 요를 협공하기로 했다. 하지만 송은 취약한 군사력으로 인해 금과의 맹약을 이행하지 못했고, 이로 인해 금이 요를 공격하여 연운 16주를 차지했다. 그러자 송은 금이 연운16주를 차지한데 분개하여 거란과 협력하여 금을 치고자 했으나, 요나라 황제 천조제가 사로잡힘으로써 송과 거란의 맹약이 드러났다. 이에 분개한 금은 송의 수도 개봉을 공격하였다. 황제였던 휘종은 금의 공세에 놀라 재빨리 아들에게 양위를 하였다. 이가 바로 흠종이다.
흠종은 수도를 포위한 금군과 협상을 벌여 영토의 할양과 배상금 지불 등을 논의하는 굴욕적인 내용의 강화를 맺게 된다. 그러나, 한세충을 비롯한 주전파는 그 강화에 반발하였고, 끝내 강화 맺은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이것으로 인해 금나라는 다시 총공격이 시작된다. 40일간을 치열한 공방전 끝에 1126년 11월 수도 카이펑이 함락되고 만다. 그 해가 정강 원년이었다. 금나라는 황제였던 흠종과 그의 아비 휘종, 그리고 수많은 왕족과 관료 수천 명을 포로로 잡아갔다. 서진 황제 회제와 민제가 흉노족이 세운 한의 유총, 유요에 포로로 잡힌 이후 두 번째로 중국의 황제가 이민족에게 포로로 끌려가게 되었다. 금나라는 도교에 심취해 국정을 소홀히 했다며, 정신이 혼미하다는 의미로 흠종에게 혼덕공(昏德公), 휘종에게는 중혼후(重昏候)이라는 모멸적인 칭호를 붙였다.
그 위급한 때 휘종의 9번째 아들 조구가 극적으로 탈출하여 강남 임안에 남송을 건국하여 송은 명맥을 이어가게 된다. 이쯤 나타나는 것이 악비 장군이다. 중국에서 관우와 함께 무신으로 추앙받는 남송(南宋)의 명장 악비가 향년 39세의 나이로 독살되었다. 아들 악운(岳雲)과 부장 장헌(張憲)도 함께 화를 입었다. 악비는 금나라 최정예 철기병과의 전투를 비롯해 126차례의 전투에서 한 번도 패하지 않아 ‘상승장군(常勝將軍)’으로 불리었다. 금(金)나라는 화의를 제의한 송나라 재상 진회(秦檜)에게 ‘먼저 악비를 죽이고 화의를 논하자’고 했고 진회는 황제를 부추겨 진군하던 악비를 철군하도록 하고 악비가 모반을 꾀했다고 모함해 투옥시킨 뒤 독살을 했다. 이 때 파죽지세로 휘몰아쳤던 금군은 고구려 조의선인(皁衣仙人)들의 상징인 검은 옷을 입고 진군하였는데 공자교를 개량 발전시킨 주자학(朱子學)의 교주 ‘주자(朱子)’는 이 검은 옷을 입고 진군하는 금군이 자신의 황제를 생포하는 것을 목도하였고 이 후 검은 색만 보면 경기를 일으킬 정도로 치를 떨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때부터‘까마귀’를 증오하기 시작하였고 이러한 전통은 차이나족을 어버이로 모시고‘소중화’, 작은 중국을 자청한 이성계의 조선정권이 받들어 우리나라에도 오늘날 까지‘까마귀’라고 불리며 흉조(凶鳥)로 인식되고 있다. 그런데 금사 본기 제일 세기 기록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금의 시조는 이름이 ‘함보’였다. 원래 그는 고려에서 왔다. 그가 고려를 떠날 때 60대였다. 그의 형 아고는 불교를 숭상했는데 그와 함께 고려를 떠나기를 거절하면서 말하기를, “우리 후손들이 다시 돌아와서 만날 곳이 필요하다. 나는 갈 수 없다.”
청나라 건륭제의 칙명으로 편찬된 ‘만주원류고’의 기록에는 “(아골타가 세운 나라를) 신라왕의 성을 따라 국호를 금이라 한다.”로 또한 적고 있다. 고려는 서기1107.12.에 윤관장군의 고려군 17만명으로 북만주의 여진족을 토벌하고 함경북도 종성에서 북쪽으로 700백리 떨어진 공험진이라는 곳에 9개성을 쌓고 돌아온다. 나중에 금나라 태조 아골타의 형, 오야속이 ‘자신들은 고려가 부모나라고 우리는 거기서 왔으니 9성을 돌려주면 부모나라로 섬기고 고려 쪽을 향해 기왓장 한 장도 던지지 않겠다.’고 하였다. 한족의 문헌과 금사 그리고 고려사 등의 수많은 사료에서도 있지만 분명히 금나라와 청나라는 고구려의 후예들로 예맥족임이 분명하다고 나는 믿는다. 나라의 풍속과 전통에서도 그들이 우리와 다르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국사책은 이들 나라를 한족의 역사로 보고 우리 국사책에 담아놓지 않고 있다. 한족은 이에 화답이라도 하듯이 이 금나라, 청나라 역사를 자신들의 역사로 편입시켜 버렸다. 이를 위해서 그들의 민족영웅이라고 하는 ‘악비’ 장군조차 더 이상 민족영웅이 아니라고 한다. 이들은 자기 조상을 부정하면서 까지 정치적 패권을 달성하려고 하고 있다. 지구상에 오랑캐가 있다면 폐륜을 서슴지 않는 중국 공산당정권이라고 할 것이다. 이들은 이미 ‘문화대혁명’이라는 전력(前歷)을 갖고 있다. 공산주의 사상에 반대된다는 이유로 ‘홍위병’을 앞세워 전통역사문화유적과 유산을 무자비하게 파괴하고 훼손하였던 사람들이다. 그래놓고 이제는 역사공정을 하면서 중화민족의 위대함을 과시하려는 전략에 따라 파괴 훼손한 유물과 유적 유산을 천문학적인 재정을 투입하여 다시 복구시키고 있다.
이들이야 말로 지구상에 존재하는 가장 파렴치한 오랑캐들이 아닐까. 역사는 단순한 과거가 아니다.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독도침탈에서 보듯이 지금도 살아남느냐 도태되어 사라지느냐의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역사는 개인에게도 ‘나’자신으로서 살아가게 하는 정체성을 심어준다. 해외로 입양된 아이가 커서 기어이 자기를 낳아준 부모가 누구인지 이억 만리를 마다하지 않고 모국을 찾아 뜬 눈으로 밤을 보낸다. 이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본능적인 몸부림이다. 하물며 그 부모를 있게 한 역사가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어떻겠는가, 여기에 왜 우리가 우리의 바른 역사를 알아야 하는지 그 이유가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