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로 보는 중동 이야기] 제2장 고대 오리엔트 국가의 흥망 - 바빌론 유수와 페르시아의 출현
솔로몬과 계약의 성궤
모세가 죽은 뒤, 이스라엘 민족은 여호수아를 앞세워 드디어 가나안 땅에 들어간다. 이들은 느보 산에서 바라본 사해의 반대편인 예리코를 시작으로 차츰 정복지를 늘려 가나안 전역을 차지한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열두 부족은 신 앞에 ‘결속의 맹서(세겜의 계약)’를 한 뒤 기원전 1250년경 통일왕국의 기초를 세우게 된다.
그 후 200-250년에 걸친 부족연합의 시대를 거쳐 이스라엘 민족은 사울을 초대 왕으로 추대했으나, 그는 취임 2년 만에 왕위에서 물러났다.
이 무렵 이스라엘 민족은 바닷사람으로 알려진 블레셋인의 공격을 받지만 소년 다윗의 기지로 이 위기를 넘긴다. 서른 살에 남이스라엘(유대족)의 왕이 된 다윗은 북쪽의 10개 부족을 통합해 사상 최초의 통일 이스라엘 왕국을 세우는데, 이때가 기원전 993년이었다. 그는 28년간 이스라엘을 통치하며 예루살렘을 도읍으로 정하고 ‘계약의 성궤’를 이곳에 안치했다. 영토도 북쪽은 시리아, 남쪽은 에돔, 동쪽은 암몬, 모아브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사상 최대의 제국을 실현했다. 당시 이스라엘의 영토는 유프라테스 강에서 아카바까지 달했다.
다윗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솔로몬 왕 통치 시절, 이스라엘은 최고의 번영기를 구가했다. 솔로몬과 시바 여왕의 이야기는 오페라로도 만들어져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지만, 솔로몬의 이름을 세상에 떨치게 한 것은 바로 신전 거립이었다. 그전까지 야훼는 방랑생활을 해온 이스라엘 민족과 함께 막사에 살았고, 막사와 함께 이동했다. ‘열왕기’는 솔로몬이 신전 건립에 얼마나 주력했는지를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특히 강조한 부분이 레바논 삼나무다.
솔로몬은 페니키아에서 으뜸가는 도시 티루스(지금의 레바논 남부 도시 티레) 왕 히람의 도움으로 신전 건설에 쓸 삼나무를 레바논에서 수할 수 있었다. 삼나무 벌채를 위해 어른 장정 3만 명을 징용해 1만 명씩 한달간 레바논에 파견했다 또 짐을 실어 나를 노동자 7만 명, 산에서 돌을 자를 노동자 8만 명, 그리고 공사 책임자 3300명의 지휘하에 신전 건설을 위한 목재와 석재를 마련했다. 솔로몬 왕은 길이 30미터, 넓이 10미터, 높이 15미터의 신전을 만들어 레바논 삼나무로 장식했다.
“그는 신전의 안쪽 벽을 바닥에서 지붕 안쪽의 들보에 이르기까지 송백나무 널빤지로 붙였다. 신전의 바닥은 전나무 널빤지로 깔았다. 또 이십 척이나 되는 신전의 뒤쪽은 바닥에서 들보까지 송백나무 널빤지로 지었는데 그 내부를 밀실 곧 지성소로 지었고 이 밀실 앞쪽에 있는 본전은 길이가 사십 척인데 신전의 안에 있는 송백나무에는 호리병과 여러 가지 꽃 모양이 새겨져 있었다. 모두가 송백나무이며 돌은 눈에 띄지 않았다”(열왕기상 6:15-18).
지성소에는 ‘계약의 성궤’가 안치돼 있다. 솔로몬은 또 길이 50미터, 넓이 25미터, 높이 15미터에 달하는 자신의 궁전을 지었는데, “네 줄로 된 삼나무 기둥 위에 삼나무 기둥머리를 얹었다”고 열왕기상 7장 2-3절은 기록하고 있다. ‘레바논의 수풀궁’으로 불릴 정도였다.
솔로몬은 왜 이렇게까지 레바논의 삼나무에 집착했던 것일까. 잘 알려진대로 페니키아 인은 당시 레바논을 중심으로 막강한 도시국가를 건설, 지중해를 제패했다. 페니키아인이 지중해 교역을 독점할 수 있었던 것은 뛰어난 항해술 덕분이기도 했지만 레바논 삼나무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페니키아인들은 레바논 삼나무로 만든 거대한 선박 덕분에 상업민족으로서의 지위를 확보할 수 있었다. 당시에는 선박이라고 하면 바악이 평평한 평저선이 대부분이었고, 멀리까지 항해를 할 수 있는 함선(용골선)의 존재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레바논 삼나무는 나무의 강도가 일정해 거대한 함선을 만드는 데 적당했다.
또한 레바논 삼나무는 이 지대에서 자라는 거의 유일한 목재 공급원이었다. 시리아, 팔레스타인은 말할 것도 없이 고대 이집트의 테베 신전을 비롯해 멀리는 이란(페르시아)의 페르세폴리스에 이르기까지 삼나무가 널리 쓰였다. 당시에는 양질의 석재를 구하기보다 양질의 목재를 구하기가 더 어려웠다.
그래서 5000년에 걸쳐 마구잡이 벌목이 이루어졌고, 오늘날 레바논에서 삼나무는 찾아보기 힘든 나무가 됐다. 레바논 산맥의 북부 산중에 시다라는 레바논 삼나무의 명소가 있는데 접근하기가 쉽지 않다. 그리고 베이루트에서 남쪽으로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슈프라는 산악지대가 있다. 이곳은 이슬람교의 독특한 종파인 드루즈파의 본거지로 유명한데, 이곳에 몇 그루의 레바논 삼나무가 남아 있을 뿐이다.
처음 레바논 삼나무를 봤을 때 일이 생각난다. 삼나무는 원래 곧게 자라는 걸로만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나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레바논 삼나무는 1000년 이상 사는 거대한 소나무나 벚나무처럼 수많은 가지가 뒤엉켜 있었다. 히말라야 삼나무 등과 잎 모양이 비슷해 삼나무로 불리고 있지만, 사실 삼나무과 식물이 아니다. 레바논 삼나무는 소나무과다.
높이는 40미터, 나무 둘레는 4미터에 달하고, 오래 사는 것은 수령이 3000년이나 된다. 가지는 이상한 모양으로 휘어지는데, 잎은 탑의 지붕 모양을 하고 있다. 레바논 국기에 있는 나무 그림이 바로 이 레바논 삼나무다. 로마 시대의 백과전서 학자인 플리니우스의 <박물지>에는 “이 수액을 바르면 사체를 보존할 수 있다”고 기록돼 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미라의 부식 방지에 삼나무의 기름을 이용했다고 한다. 이렇게 레바논 삼나무는 당시에도 쓰임이 많은 귀한 물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