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골목길 산책... 서촌
2013년 7월호 서울사랑 매거진에서...
글 이정은
궁궐 옆 서쪽 동네에서 500년 된 길과 골목을 만나다.
서울 도심에 조선 시대의 지적도와 가장 근접한 지적도를 가진 곳이 있다. 바로 서촌이다. 청와대 때문에 개발되지
못했지만, 그래서 더 사람 냄새 나는 곳. 서촌의 골목은 깊은 역사만큼이나 다양한 모습을 품고 있다.
영화 <은밀하게 위대하게>를 보며 흐뭇했습니다. ‘후덜덜’ 섹시한 주인공들 때문에? 아니요, 영화의 배경이 된 동네
때문이었습니다. 키 작은 집들이 오밀조밀 모여 있는 동네, 예전에 우리가 살던 그 집, 그 골목이 거기에 있었거든요.
오래된 철문과 낡은 기와를 인 허름한 양옥집, 아이들이 숨바꼭질과 다방구를 하던 골목, 빨래 날리던 장독대,
여름이면 할머니들이 평상에 나와 이야기를 나누고 겨울이면 흰 연탄재가 수북이 쌓이던 곳….
간첩이자 슈퍼마켓 배달원인 주인공은 골목골목을 누비며 동네 사람들을 살핍니다. 그런데 간첩이라는 자신의 신분을
늘 상기하며 그들을 애써 외면하려 하지만, 어느새 그들과 동화되고 정이 들어버린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거칠지만
속 정 깊은 사람들이 사는 달동네이기에 그런 설정이 가능했을 거예요.
영화 촬영지는 인천 섭정동이라는 동네인데, 서울에도 그런 곳이 몇 곳 남아 있습니다.
반듯반듯 길을 낸 아파트 단지가 서울의 대부분을 차지하지만, 찬찬히 둘러보면 의외로 우리 가까운 곳에 예전의
그 골목과 집들이 있답니다. 서울의 숨은 골목을 찾아갑니다. 사람 냄새 가득한 서울 골목길 기행 첫 번째 여행지는
경복궁 옆 서쪽 동네, 서촌입니다.
서촌을 아시나요?
경복궁 서문 영추문에서 인왕산 사이에 자리한 청운효자동, 통인동, 체부동, 옥인동, 사직동 등을 서촌이라고 부른다.
권세 높은 양반들이 모여 살던 북촌과 달리 이곳은 역관이나 의관 등 전문직에 종사하는 중인들이 모여 살던 곳이었다. 근대에 들어서도 윤동주, 노천명,
이상, 박노수, 이상범 등 문인과 예술가들이 서촌에 머물며 예술 활동을 펼쳤다.
청와대 옆이라 개발 제한, 고도 제한에 묶여 개발하지 못한 탓에 아직까지도 그들이 살던 집터나 예전의 골목을 많이
간직하고 있다. 요즘 서촌이 뜨는 이유이기도 하다. 개발이 덜 돼 불편한 점도 많지만 덕분에 서촌은 또 다른 문화를 형성하고 있다. 옛 동네의 매력에 빠진 예술가와 젊은이들이 이곳에 둥지를 틀면서 미술관도 생기고, 개성 있는 카페와 가게도 생겨나고 있다. 그런데 새로 짓는 것이 아니라 내·외부 수리만 하는 까닭에 서촌의 수십 년 된 집들과 서로 어긋나지
않고 잘 어우러진다. 옛것과 새것이 서로 소통하며 서촌만의 문화를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여행의 시작은 통인동 미술관들. 트렌드를 앞서가는 젊은 기획전을 여는 대림미술관, 과거 서정주·이중섭 등이 장기
투숙한 여관을 전시 공간으로 활용하는 보안여관, 한옥에서 사진을 전시하는 류가헌, 통의동의 터줏대감 진화랑 등이다.
통의동에서 자하문대로를 건너면 삼계탕으로 유명한 토속촌이 나온다. 대통령들이 즐겨 찾았다고 해서 유명해진 곳인데, 걸쭉한 국물맛이 일품이다. 내국인은 물론 일본인 관광객도 많아 평일에도 30분 이상 기다려야 한다.
토속촌에서 통인시장 쪽으로 올라오다 우리은행 골목으로 들어서면 천재 시인 이상의 집 일부를 개조한 제비다방이 나온다. 이곳에서는 문학, 음악, 영화 등이 어우러진 문화 행사를 개최하기도 한다. 제비다방 맞은편에는 다양한 타르트와 벨기에 차, 프랑스 와인을 맛볼 수 있는 오 쁘띠 베르가 있다. 타르트를 굽는 박준우 셰프는 케이블TV <마스터셰프 코리아 시즌 1>에서 준우승을 한 실력자이기도 하다.
50년은 돼야 터줏대감 노릇 하지
오 쁘띠 베르에서 자하문로 9길을 건너가면 서촌 명물인 대오서점이 나온다. 권오남 할머니가 60년 동안 운영하는 한옥 헌책방으로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면 한옥 현관과 집 곳곳에 헌책이 빽빽이 꽂혀 있다. 최근에는 드라마 <상어>를 촬영하기도 했다. 대오서점에서 효자동 쪽으로 계속 올라가면 50년 전통을 자랑하는 터줏대감 중국집 영화루, 아버지들의 사랑방인 효자동이발소, 아씨고전의상실 등이 예전 모습 그대로 있어 과거로 돌아간 듯한 느낌마저 든다.
영화루에서 효자동 쪽으로 더 올라가면 유명한 효자베이커리와 통인시장 입구가 나온다.
효자베이커리는 빵을 옛날 방식 그대로 구워내는 동네 빵집. 26년간 청와대에 빵을 납품하며 입소문이 났다.
통인시장이 유명해진 것은 기름떡볶이 때문. 최근에는 쿠폰을 구입해 시장 반찬 가게에서 반찬을 골라 담는
도시락 카페도 명성을 얻고 있다.
서촌에는 통인시장 말고도 재래시장이 하나 더 있다. 경복궁역 2번 출구 가까이 있는 금천교시장. 이곳에는 진짜 원조 기름떡볶이 할머니가 있다. 시장 입구에 비닐 천막을 치고 철판 하나 놓고 떡볶이를 파는 김정연 할머니가 주인공이다.
개성의 부잣집 딸로 태어나 결혼해서 아이 3명을 낳고 행복하게 살던 김정연 할머니는 밀린 외상값 받으러 홀로 서울에 왔다가 전쟁 통에 발이 묶이고 말았다. 혼자 살면서 50년 전부터 개성식 떡볶음을 만들어 팔았는데, 그것이 지금의 기름떡볶이다. 간장과 고춧가루를 넣고 기름에 볶은 떡볶이는 짭조름하면서 개운하며, 특히 할머니가 직접 쌀을 담가 뽑는
떡은 씹으면 씹을수록 고소하다. 김정연 할머니는 50년 동안 떡볶이를 팔아서 번 돈을 모두 사회에 기부했으며, 70대에
신체 전부도 기증했다. 그리고 100세가 가까운 지금도 여전히 한 평짜리 가게에 앉아 떡을 볶으신다.
골목에서 위로받고 치유된다
이제 필운대로를 건너 사직동으로 향한다. 20세기 초 서양 건축의 특징을 잘 간직하고 있는 배화여고 생활관은 물론,
백사 이항복의 집터인 필운대를 만날 수 있다. 배화여고로 가는 언덕배기 중간에는 티베트 난민을 지원하는 사직동
그 가게가 있다. 티베트의 독립을 지지하는 비정부기구 ‘록빠’에서 운영하는 이곳은 인도식 밀크 티 ‘짜이’와 커리를
제대로 맛볼 수 있다. 현지 여성들이 직접 제작한 수공예품과 식음료를 팔아 후원금으로 보내고 있다.
바로 옆에 있는 커피 한잔은 숯불로 커피콩을 볶는 것으로 유명한 카페다.
“서촌은 힐링 플레이스(healing place)다.
서촌에는 지친 마음을 달래주고 치유하는 힘이 있다. 그리고 힐링 플레이스의 근원은 바로 골목길이라고 생각한다.
이 길에서 우리는 모진 풍파를 견디고 버티며 힘겹게 살아왔던 시간 동안 잊고 지낸, 이제는 다 사라졌을 거라고 생각
했던 추억과 순수함이 남아 있음을 발견하고, 그것에 정화되는 것이 아닐까?” 서촌 토박이 설재우 씨는 <서촌 방향>
(이덴슬리벨 펴냄)에서 고백한 것처럼 서촌 골목길을 걸으며 위로받고 치유한다고 한다. 거미줄처럼 얽힌 서촌 골목에는 사람 냄새 살가운 풍경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