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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도끼질 잘하는 사람/ 코 끝에 발라둔 허연 분을/ 도끼를 휘둘러 깎아냈네/
장석이여 그 도끼질 다시 해보소/ 도끼야 바람을 가르며 춤출 수 있는데/
그 사람이 없어 못한다네. 코 끝에 분을 바르고 날 믿고 앉았던 그 사람이 없어
도끼질 못한다네/
장자(莊子) 서무귀(徐無鬼)에 나오는 이야기다
우리 시대에 그런 도끼질 선수가 있었던가?
바람 일으키는 도끼질 하면서 서민의 코를 다치지 않고
민생고 분가루 털어낼 장석 같은 선수가 있던가?
우리 시대에 죽어도 믿겠노라 도끼질 후려 치는데
꼼짝 없이 앉아 눈 뜨고 도끼가 날아오는 걸 바라 볼 사람은 얼마나 될까?
왜 태양을 향해 우주선 쏴대는 이 세기에
그런 도끼질 명수도 그런 명수를 믿고 바라볼 사람도 없는걸까?
♣ 고전코너 ‘고전기행 사설여행 --- 경상관찰사 홍방을 보내는 글 ’
종구 역사와 인물 속에 온고이지신을 돌아보는
‘고전기행 사설여행!’ 오늘은 ‘경상관찰사 홍방을 보내는
장유의 글‘입니다.
희은 장유라면 조선 중기 문신이고 문장가로 소문난
인물이잖아요. 이 자리에서 그 작품도 몇 차례 감상해봤구요.
종구 인조 때 우의정 벼슬까지 받은 고위직 인사였죠.
어린 시절 임진왜란 정유재란. 그리고 병자호란 까지
세차례나 국난을 겪은 세대였구요.
희은 그런 인물이 인조 때 마침내 우의정이란 고위직에
올랐군요. 홍방이란 인물은 어떤 인물인가요?
종구 인조 때 청나라 사신도 다녀오고 홍문관에서
임금에게 국정을 자문 해주면서 외교관련 일을 봤는데요.
경상도 관찰사로 내려가게 됐죠. 이때 계곡 장유가
홍방에게 편지 한 장을 전해 줍니다.
희은 요즘 같으면 도지사 집무실로 축하 화분 정도 보냈을텐데요.
종구 그 시절 신임 도지사로 내려가는 지인에게
보낸 편지 궁금하시죠. 여기 계곡 장유의 글을 보세요.
희은 (인용구) 돛단배 타고 바다 건너 대륙을 누빈 그대
오 나라 계찰처럼 그땅의 노래소리 듣고 민심도 봤잖수.
주나라 소강공처럼 이제 경상도 땅 다스리게 됐는데
그동안 험한 일 겪으면서 꿋꿋하게 이름값 하겠구료.
종구 신임 경상도 관찰사 홍방이 청나라 사신으로 가서
활약했던 업적을 말하는구절이죠. 그렇게 외교 일선에서
고생도 많았는데, 경상도 땅 다스리게 됐으니 이름값 하시게나.
희은 병자호란 이후라면 청나라 사신 다녀오는 외교 업무가
참 고단했을 때 아닌가요? 항복한 나라의 사신이었으니깐요.
종구 청나라 가는 길도 험하지만, 상황 자체 괴로운 일이었죠.
그런데 외교 업무를 잘 보고 돌아와 경상도 관찰사가 됐으니
그 명성을 그대로 경상도 땅에서도 아름다운 칭송을
이어 갔으면 좋겠다는 뜻이죠. 어떻게 해줬으면 하는가는
다음 구절에 나옵니다.
희은 (인용구) 도끼를 마음 껏 휘둘러 얼굴에 분가루 털어내면서
그 손에서 백성 살릴 바람 소리 신나게 이뤄 보시게나.
이게 무슨 소린가요. 신임 경상도 관찰사에게 도끼를 휘두르라니요?
종구 그런 구절을 잘못 이해하면 도끼들고 호령하란 뜻으로
오해하게 되거든요. 도끼를 마음껏 휘둘러 얼굴에
분가루 털어내란 말은 장자 서무귀에 나오는 이야기를
인용한 겁니다.
희은 장자 서무귀에 얼굴 분가루를 도끼로 털어낸 사람 나오나요?
종구 장자 서무귀편에 장석이란 자귀질 달인이 등장하죠.
자귀는 도끼보다는 훨씬 작은 나무를 찍어 깎아내는 연장이죠.
장석이 어찌나 자귀질을 잘 했던지. 사람 얼굴에 하얀 분가루
발라놓고 자귀로 그 얼굴에 분가루를 말끔히 털어냈다는겁니다.
희은 아하, 그럼 계곡 장유는 신임 경상관찰사 홍방에게
민심을 위로하고 민생고를 털어내는 솜씨를 장석이 자귀질로
얼굴에 분가루 털어내듯 달인의 솜씨로 해보란 말이었군요.
종구 계곡 장유는 한술 더 떠서 자귀질이 아니라 도끼를 휘둘러
서민들 얼굴에 덕지 덕지 붙은 민생고 가루를 털어봐라.
당신은 할 수 있을거다. 성공할 걸 확신한다고 했던거죠.
희은 그 시대는 도지사 축하 화분 대신에 이런 편지로 마음을 다졌군요.
‘고전기행 사설여행’ ‘장유와 홍방’ 고전 자료는, 인터넷 카페
‘상암골 상사디야’로 들어가셔서 참고해 보시기 바랍니다.
종구 좋은 자료나 담론은 ‘상사모’카페에서 계속 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도 경상북도 영덕 어디쯤 우곡愚谷이 있나 궁금하다.
윤선도가 영덕으로 귀양 갔을 때 우곡을 찾아 온 세사람은
정말 바보였을까? 윤선도는 바보 골짜기에 바보 세 사람이 찾아 왔노라
노래한다. 바보골짜기愚谷에 온 윤선도 친구 이계하와 월선이 애옥이
귀양살이 한다면 돌아도 보지 않던 싸늘한 세상 인심을 비웃으며
그들은 그날 밤 날이 새도록 노래하고 연주하며 놀고 있다.
평양가에 등장하는 월선이랑 비교 하면 여성들이 서운해 할 것이다.
경기12잡가 '평양가' 월선이는 사내들 불 지르는 기생으로 보인다.
그래서 날이면 날마다 '불났다네 월선이 집에 불이야!' 놀려 댄 모양이다.
무수히 많은 사내들이 월선이 집에서 불에 타고 또 탔으련만
불러댄다 '월선아 놀자. 나랑 대동강 나가서 놀자!' 소매를 잡아 끌어
소매 끝단이 닳아 졌을 평양 월선이.
근데 윤선도 월선이는 바보였다. 돈 많고 권세 좋은 인간들이 그리도 자주
소매 잡아 끌었을 텐데 귀양살이 온 윤선도 위로하고자 이계하를 따라
바보골짜기에 들어 선다. 내일 인심이 어찌 변할지 모를 칼날위에 선 세태임을
뻔히 알면서, 윤선도 만났다구 곤장 맞을지 모르는데, 그래도 찾아 와
밤새 노래하고 연주하며 이슬 젖은 채 돌아들 간다. 이 월선이가 정말 바보일까?
요즘도 그렇지 않은가? 무슨 권세줄 잡고 있으면 큰소리 뻥뻥 내지르면서
수표 나부랭이 쑥쑥 던지며 부어라 마셔라 노래해라 춤춰라 벗어라 받아라.
그리고 잊어라! 그 뿐인 인간들 얼마나 많은가?
옷을 벗겼으면서도 만나보지 못한 속살 속에 마음을 버리면서
허풍웃음 몇번으로 껍데기 풍류남아 인체 하는 자들이 너무 많다.
그런데 그런 작자들 눈짓에 불 질러 가는 평양 월선이도 참 흔해 빠졌다.
윤선도 귀양지 바보 골짜기를 찾아갔던 그 월선이 하룻밤이 그래서 멋지다.
그들은 속살 보다 속정으로, 껍데기 보다 위로하는 마음으로 하룻밤 보냈고
그 역사를 이리 남겼기 때문에 멋지다 할 수 밖에.....
♣ 고전코너 ‘고전기행 사설여행 ---평양가의 월선이와 윤선도 월선이’
종구 역사와 인물 속에 온고이지신을 돌아보는
‘고전기행 사설여행!’ 오늘은 ‘평양가의 월선이와
윤선도의 월선이‘ 고사입니다.
희은 ‘평양가’는 경기 12좌창에 나오는 노래 아닌가요?
종구 맞습니다. 그런데 평양가에는 평양이 없구 월선이가
돋보이거든요.
희은 제목은 분명 ‘평양가’인데 평양이 안보이다니요.
혹시 그 월선이가 평양기생 월선이였던가요?
종구 그래요. 평양기생 월선이랑 놀아 봤으면, 풍광 좋은데
나가서 같이 놀아봤으면 그런 내용이 엿 보이죠.
희은 한때 평양에 유명한 명기 월선이가 있었나 보죠.
종구 예전에 월선이란 이름을 가진 명기가 한둘이었겠어요.
경기12좌창 ‘평양가’ 에 나오는 월선이 어떤 기생인지
잠시 돌아볼까요?
희은 (가사) 월선이 집이 불이 불 붙으면 육방관속이 제가 제 일러라.
월선이 나와 소매를 잡고 가세 가세 어서 들어를 가세.
종구 보세요. 월선이 집에 불이 붙는다. 얼마나 이 사람 저 사람
불러대고 찾아 댔으면 불이 붙는다 했겠어요.
그리고 서로 월선아 나와 소매를 잡고 나랑 놀러가자.
이런 평양 월선이가 있는가 하면 남도 쪽에 윤선도랑
놀았던 월선이도 있었거든요.
희은 평양 월선이, 그리고 남도 월선이 과연 어떻게
달랐을까요? 윤선도가 남도에서 월선이란 기생과
놀았다는 이야긴가요?
종구 윤선도가 병자호란 이후 인조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해서
영덕으로 귀양 보냈거든요. 그 유배지를 찾아 온 이계하가
기생 둘을 데려 왔는데, 월선이와 애옥이였죠.
희은 윤선도가 귀양살이 하는 곳에 어떻게 기녀를 데리고
갈 수 있었을까요? 그리할 수 없는 일 아닌가요?
한양에서 알았으면 같이 간 월선이도 온전치 못했을텐데요.
종구 그때는 한양에서 영덕까지 좀 멀었습니까. 그리고
귀양살이 하는 곳을 찾아간 이계하도 남다른 정이 있었고
따라간 월선이나 애옥이도 보통 기녀가 아니었던거죠.
그날 서로 술을 들고서 얼큰했을 때 윤선도 노래 한번 보세요
희은 (낭송) 세상을 버린 바보들이 바보 골짜기 우곡에 모였구나.
친구도 바보. 친구 따라 온 월선이도 바보인데
뭐가 좋다구 그리 히히덕 거리는가?
초사흘인데 월선이 땜에 둥근 달 하며
시장 방물장수한테 있을 옥이 여기 왠일인고?
월선이 애옥이 오늘 밤 길게 늘여나 보소.
종구 윤선도가 귀양살이 하던 영덕을 찾아 온 곳이
바보 골짜기란 우곡이었고, 거기 모인 네 사람도 결국
바보들이었더란 소립니다. 바보가 아니면 어떻게
귀양살이 하는 곳을 찾아 왔겠냐. 그 뒷 구절 보세요.
희은 (낭송) 나나 친구나 월선이나 애옥이 똑 같은 바보들
여보쇼 골짜기 귀신, 한번 물어나 보세.
이런 바보들을 예전에도 보긴 봤소이까?
종구 역설로 말하고 있는 네 바보들. 따지고 보면 그렇게
정이 많았던 사람들이었죠. 억울하게 귀양살이 하는 윤선도를
위로하고자 위험을 무릅쓰고 찾아 온 정 많은 사람들
‘평양가’의 월선이도 정이 많아 집에 불이 난다 했구요.
윤선도가 노래한 월선이도 정이 많아 바보라했던겁니다.
희은 ‘고전기행 사설여행’ ‘평양가와 윤선도 월선이’ 고전 자료는, 인터넷
카페 ‘상암골 상사디야’로 들어가셔서 참고해 보시구요.
쫑구 좋은 자료나 담론은 ‘상사모’ 카페에서 계속하도록 하겠습니다.
여기도 역시 귀양살이 노래다. 다산이 포항 어름께로 귀양살이 갔을 때
경상도 농민들 고달픈 모습을 자주 봤던 모양이다. 포항 쑥대머리 할매가
등장한다. 우린 춘향의 쑥대머리 부터 생각할게다. 사랑 때문에 죽기 살기로
버티다 보니 쑥대머리가 됐던 춘향이. 헌테 포항 할매 쑥대머리는 영 다르다.
죽기 살기 심정은 똑 같은데, 누구 때문에 쑥대머리 꼴인가? 무엇 때문에
머리를 산발하고 빗질 한번 할 겨를 이 없었는가?
이런 그림을 그려보자. 나이 예순 넘은 할매가 아침엔 관에서 나온 것들이
송아지 한마리를 세금 대신 가져 간다고 코를 꿰서 끌고 나가고, 울음 끅끅
참으면서 풋보리죽을 먹구 논밭으로 나가야 했다. 죽어라 일하면서 외쳐본다.
'저 한양에 대감놈들아 풋보리죽 한 그릇 보내 줄 테니 맛 좀 보면 안되것나?'
땀인지 눈물인지 밭에다 뿌려대며 돌아와 밥 달라는 식구들 죽 쒀 주고 치우고 보니
일에 지친 영감도 어느새 코를 곤다. 산발한 머리를 누구 한테 귀염 받자구
빗질하랴 싶어 쑥대머리 채로 베틀을 잡으려는데 영감이 베틀 앞에 누워 있다.
발로 툭 차며 소리친다 '영감아 니는 꿈속에 삽질하나 저리 비키봐라!'
그런 모습을 본 다산이 엮은 포항 농부가와 포항 할매 쑥대머리 노래.
우린 왜 춘향이 쑥대머리만 기억하고 풋 보리죽 먹고 죽지 못해 살면서
그 밤에 새벽이 오도록 베를 짜야먄 했던 그 쑥대머리 할매며 아낙네들을
이리 쉽게 잊을 수 있을까?
♣ 고전코너 ‘고전기행 사설여행 --- 정약용의 포항 장기농가 ’
종구 역사와 인물 속에 온고이지신을 돌아보는
‘고전기행 사설여행!’ 오늘은 다산 정약용의 포항
‘장기농가’입니다.
희은 다산 정약용이 포항지역에서도 잠시 지냈던가 보네요.
‘장기농가’란 노래도 남긴 걸 보니깐요.
종구 지금은 포항 호미곶으로 유명하죠. 예전에 다산 정약용이
그 포항 장기곶 지역에서 귀양살이를 했거든요. 그 당시
포항 장기곶 농민들 사는 모습을 노래한 게 ‘장기농가’ 거든요.
희은 다산이 귀양시절 봤던 포항지역 농가의 모습은
과연 어떤 생활상이었는지 돌아볼 수 있겠군요.
종구 우선 다산의 ‘장기농가’ 앞 구절부터 보실까요?
희은 (인용구) 풋보리죽 한 사발을 그 누가 싸들고 가서 / 誰將一椀熬靑麨
한양 대궐 대감도 맛 좀 보라고 나눠줄까 / 分與籌司大監嘗
그땐 풋보리죽이란게 있었나봐요. 그걸 왜 한양에 보내자했을까요?
종구 얼마나 먹을게 궁했으면 다 익지도 않은 풋보리를 꺾어
죽을 쒔겠어요. 그런 농민들 사정을 한양 대궐
정승판서도 알고 있는지. 풋보리죽 먹어보라 전해주고싶단거죠.
희은 (인용구) 토실토실 떡잎난 호박, 밤 사이 넝쿨이 사립문에 얽혔네
평생 수박을 안 심는 까닭은 아전놈들 수박내놔라
시비 걸까 무서워서라네.
수박을 일부러 안 심었다는거군요. 수박 땜에 무슨 시비가 난다구?
종구 애써 기른 수박을 나도 먹자 원님도 갖다 주자.
해대면 남아나는 수박이 어디 있겠어요. 그러니 호박이나
심자. 그 호박넝쿨이 사립문까지 뒤덮더란거죠.
희은 (인용구) 잡초를 뽑아내고 어저귀 삼밭을 매니/ 쑥대머리 저 할멈
밤이 돼야 빗질 일세/ 초저녁 잠 곤한 영감을 발로 툭 차
풍로에 불 지피소. 물레도 고쳐 보소 된소리 하네.
그때는 할머니들도 잠못 자면서 해야 할 일이 물레질이었나봐요.
종구 포항 장기곶 쪽으로 귀양갔던 다산이 봤던
그 당시 농가의 표정이 세세하게 그려져 있죠.
나이든 할매가 낮에는 삼밭에 나가 허리 구부러지게
일하다 보니 쑥대머리 꼴이죠. 그걸 밤에야 겨우 한두번
빗질하고 돌아보니 영감이 초저녁부터 자고 있거든요.
‘이 영감아 물레질 해야겠다. 물레나 고쳐라’ 발로 툭 차는
모습까지 선하게 그려져 있죠.
희은 (인용구)상추쌈에 보리밥 둘둘 싸 삼키고 일해봐야/ 바다가 코앞인데
넙치 구경 어렵지/ 잡는 족족 관가로 가는 넙치들이라/
송아지라도 단단히 매두자 서편 뜰에 매놨더니/
꼭두 새벽에 송아지 코 뚫어 동래 하납배에 실었다 소리네
넙치 한 마리 맛보기도 쉽지 않고 송아지 키우기도 어려웠군요.
종구 잡는 족족 관가로 가야했던 넙치들, 거기다 농가에서
어찌어찌 키워 보려했던 송아지도 뺏긴 모습이죠.
희은 송아지 코를 뚫어 동래 하납배 실었다는건 무슨 소린가요?
종구 그땐 영남에서 생산된 곡물을 일본으로 보내주기도 했는데
그 세금징수를 하납이라구 했거든요. 이게 다산이 40대 때
포항 귀양살이 중 봤던 우리 농가의 모습이었던겁니다.
희은 그래도 밤잠을 자지 않고 물레질 하겠다고 영감을 깨워
물레 손질이나 해달라는 그 할머니 모습도 돌아보게되구요.
‘고전기행 사설여행’ ‘다산의 장기농가’ 고전 자료는, 인터넷 카페
‘상암골 상사디야’로 들어가셔서 참고해 보시구요.
쫑구 좋은 자료나 담론은 ‘상사모’ 카페에서 계속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다산이다. 여긴 간단하다. 밥 파는 주막 아줌마가
다산 앞에서 '양성평등'을 주장한 이야기다. 과감할 사 조선 여인네여
다산이 누구라고 그 앞에서 남녀 평등이라니. 그런데 다산은 들어준다.
요즘 처럼 민심을 들어주네. 소통을 해본 척 함네. 귀를 기울여준 척 하는게
아니라. 그 남존여비에 삿대질 하는 밥푸는 아줌마 이야길 기록해서 남긴다.
다산의 가슴이 얼마나 넓은지 느껴지는 장면이다.
밥 푸는 아낙은 말한다. 씨가 그리도 중요한가? 씨를 키운 밭이 없으면
낳고 자라고 열매 맺을 수 있는가? 씨 종자 자랑질 그만해라.
남자고 여자고 다 하늘의 씨들이니. 다산은 그 아낙 말에 깨쳤다고 한다.
200년도 전에 이런 큰 사람 있었거늘, 요즘 주둥이로 다산 다산 하면서
다산 보다 200년 후진 인간들이 항아리 깨지는 목소리로 미래를 외쳐댄다.
하는 일 없이 국민의 땀과 눈물 뺏어다 금뱃지나 닦고 있는 종자들.
되는 일 없이 국고나 축내면서 어깨에 완장 차고 설치는 종자들.
볼만한 구석도 없는 것들이 감투자랑이나 하고 자기 앉을 의자가
몇번째인가 세어보며 백성을 잊는 것들에게 묻고 싶다.
'여긴 지구다 넌 어떤 별에서 온 종자냐?'
♣ 고전코너 ‘고전기행 사설여행 --- 밥파는 주모와 다산 정약용 ’
종구 역사와 인물 속에 온고이지신을 돌아보는
‘고전기행 사설여행!’ 오늘은 ‘밥 파는 주모와 다산선생’입니다.
희은 주모와 다산 선생이 어떤 이야기를 나눴는지
돌아보자는 거군요.
종구 놀랍게도 다산은 주모에게도 양성평등을 배웠노라.
남성만 우월하게 여기는 생각을 바꿔야 한다는 걸
주모에게 듣고 깨쳤다는 말을 합니다.
희은 아니 그 시절에 밥 파는 주모가 양성평등을 주장했다구요.
그 말을 다산 정약용 선생이 받아 들였다는건가요?
종구 다산문집 중 ‘중씨에게 보내는 편지’에 드러난 일화인데요.
밥 파는 주모 이야기를 자세히 기록한 것도 놀랍구요.
그 주모의 말을 받아 들이는 것두 당시로선 쉽지 않은
일일텐데 순순히 수긍했던거죠. 이 ‘중씨에게 보내는 글’ 보세요
희은 (인용구) 어느 날 저녁 밥을 파는 주모가 말하기를
‘선생은 글을 많이 보셨다니 내 말 좀 들어 보시지요.
부모의 은혜는 다 같지만 어머니는 더욱 수고가 많습니다.
그런데 성인 말씀은 아버지는 중하게 여기고 어머니는 가볍게
여겨, 성씨는 아버지를 따르게 하고 장례 때 복을 입는 것도
어머니는 낮추게 했는가 하면, 아버지 집안 보다
어머니 집안을 도외시하니, 너무 치우친 게 아닙니까?’
놀랍군요. 다산 시대에 밥 파는 주모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다니요.
종구 이걸 보면 다산 정약용 선생은 시장터 주변에 밥을 파는
주모의 말도 허술하게 듣지 않았다는 그 태도가 남다르잖아요.
그리고 주모도 당대의 학자인 다산에게 이런 주장을
서슴없이 내 놨다는 것두 그만치 서로 흉허물 없었단 거구요.
이렇게 신분을 넘어 대화 했다는 그 부분도 놀랍죠.
희은 주모의 말은 아버지만 우선시 하고 아버지 은혜만 더
중하게 여길 수 있느냐? 어머니 은혜도 똑 같이 소중한 거
아니냐? 그거잖아요.
종구 그렇죠. 이때 다산은 일단 당시 선비들 생각을 대변해
말하기를 ‘옛날 책에도 아버지는 자기를 낳아 준 시초라했소.
어머니 은혜가 깊지만 하늘이 만물을 내는 것과 같이
생명의 시초를 귀하게 여기고 그래서 아버지 은혜를 우선
말했던 것입니다. ’ 이렇게 말을 했는데 밥 파는 주모는
굽히지 않고 거듭 그 말에 반박합니다. 보세요.
희은 (인용구) ‘그 말씀 아직 미진합니다요. 풀과 나무로 치면 아버지는
종자 씨앗이요. 어머니는 토양 아니겠습니까. 땅에 뿌린
종자 보다 길러내는 흙이 못 났다 하겠습니까?
밤톨은 밤이 되고 벼의 씨앗은 벼가 되는 걸 보면 종자가
중요하지만, 길러주는 흙의 공을 어찌 가벼이 볼 수 있겠습니까?
종구 이 구절에 와서 다산은 황연히 깨달았노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천지간에 지극히 정밀하고 미묘한 이치를 밥 파는 노파에게서
들었노라며 형님에게 그 전후 이야길 전하고 있습니다.
희은 우리 시대에 서민의 말을 이처럼 귀 기울여 듣고 있는지
돌아보게 되는군요.
종구 밥 파는 주모에게도 얻어 들을 말이 있더라. 비록 성인의 말씀이
지극하다고 하나. 밥 파는 노파의 말에 깨닫는 일이 있더라.
자, 오늘도 시장통에 그냥 손이나 잡고 다니는 분들 걸음을
멈추고 말을 한번 들어 보셨으면 합니다. 다산처럼 말이죠.
희은 ‘고전기행 사설여행’ ‘밥파는 주모와 다산’ 고전 자료는, 인터넷 카페
‘상암골 상사디야’로 들어가셔서 참고해 보시구요.
쫑구 좋은 자료나 담론은 ‘상사모’ 카페에서 계속하도록 하겠습니다
♣ 고전코너 ‘고전기행 사설여행 --- 악성 박연의 피리와 석경 고사 ’
종구 역사와 인물 속에 온고이지신을 돌아보는 ‘고전기행 사설여행’
오늘은 ‘악성 박연의 피리와 석경고사’ 입니다
희은 박연하면 세종 시대 악성으로 알려진 난계 박연을
말하는거죠?
종구 그렇죠. 영동출신이라. 지금도 해마다 영동에서는
‘난계국악축제’며 ‘난계국악대경연대회’가 열리고 있구요.
조선 초기 음악정비에 앞장섰고 특히 우리음악의
표준음을 잡는 율관제작과 석경제작에 심혈을 기우렸구요.
여 그 당시 음악을 전문으로 공부할 짬이 별로 없었을텐데
언제 음악공부를 했던걸까요?
종구 과거공부와 음악공부를 동시에 했다는 기록이
성현이 남긴 ‘용재총화’이 구절을 보면 당시 청소년 시절
박연이 음악에 대한 열정이 어느정도였는지 나오는데요.
여기 이 구절 보세요.
희은 (인용구) 영동의 유생이었던 박연이 어렸을 적 향교에서
유학 경전을 공부할 때, 이웃에 피리를 잘 부는 사람이
있었는데 공부하는 틈틈이 피리를 배우자 주변 사람들이
공부도 잘 하고 피리도 잘 한다 칭찬을 했다. 과거보려고
한양에 왔을 때 한양에 소문난 피리 명인을 찾아가
그간 배운 피리가락을 교정 받는데, 한양 명인이 들어보고
시골 가락이 굳어져서 틀을 고치기 어렵다 거절했다.
종구 이 구절을 보면 박연은 과거시험 보려구 한양에 왔을 때
피리 명인을 찾아가 교정을 받을 만치 음악에 대한
집념이 대단했던 걸 엿볼 수 있죠. 그런데 한양 명인은
시골 가락이 굳어졌으니 고칠 도리가 없다. 이때 박연은
어떻게 했을까요? 보세요.
희은 (낭송) 그래도 박연이 가르침 받기를 사정하니. 그 명인이 일단
받아 들였는데 며칠 사이에 박연의 피리를 들어보고
‘가르칠만 하다’ 했다가, 다시 며칠 후엔 깜짝 놀라더니
‘선배는 가르칠만 하오’ 그리고 또 며칠 후에 박연의
피리를 들어 보더니 ‘규범이 이뤄졌으니 장차 대성하겠소’
그리고 또 며칠 지나 박연의 피리를 듣고 무릎을 치면서
(감탄) 나는 도저히 당할 수 없소이다.
종구 악성 박연의 음악적 재주가 그 정도였던겁니다 훗날
세종임금이 박연을 관습도감 제조로 명하고 우리음악
율관과 석경을 만들게 했는데, 박연이 석경을 두둘기고 말하길
박연 (남-) 아무개 율은 1푼이 높고, 아무개 율은 1푼이 낮으니
기본음에 못 미치거나 넘친 것이옵니다.
희은 이에 세종이 석경을 자세히 조사해 보게 했는데
높은 음에 진흙 찌꺼기가 묻어 있어, 그걸 떼어내서
낮은 음에 붙이고 박연에게 들려줬더니
박연 (남-반기며) 이제 석경의 음률이 고르게 조화를 이뤘습니다.
종구 자, 박연이 얼마나 음률에 정통했는지 알만하죠. 그런 박연이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 때 세조가 계유정난을 일으켰고,
박연 아들이 단종편에 섯다해서 죽임을 당했는데 박연은
3대 임금을 모신 원로라 해서 살려줬던겁니다
희은 자식은 죽임을 당했고, 팔순을 바라보는 박연은 영동으로
내려가게 됐고, 그 심정이 오죽했을까요?
종구 그때 박연은 한강나루터에서 배에 올라 피리를 꺼내 세곡을
독주하고 떠나니 주변 사람들이 다 눈물을 흘렸다고합니다.
희은 ‘고전기행 사설여행’ ‘박연과 피리, 석경’ 고전 자료는, 인터넷 카페
‘상암골 상사디야’로 들어가셔서 참고해 보시구요.
쫑구 좋은 자료나 담론은 ‘상사모’ 카페에서 계속하도록 하겠습니다
♣ 고전코너 ‘고전기행 사설여행 --- 세조와 신숙주, 비빙가’
종구 역사와 인물 속에 온고이지신을 돌아보는
‘고전기행 사설여행!’ 오늘은 세조가 신숙주에게
줬다는 ‘비빙가’ 고사입니다.
희은 세조가 신숙주에게 노래를 지어 건넸다는 건가요.
‘비빙가’라고 하니깐 노래 가사처럼 느껴지는데요.
종구 그렇죠. 예전에 궁중에선 첫눈이 내릴 때 ‘비빙연’이란
잔치를 열었거든요. 그 비빙연 자리에서 세조가
신숙주에게 ‘비빙가’를 지어 보여줬던겁니다.
희은 첫눈 내린 날 잔치를 한다. 지금은 첫눈 내릴 때
소원을 빌기도 하잖아요. 그때는 잔치를 열었군요.
‘비빙가’는 그럼 ‘첫눈을 노래하다’ 그런 뜻인가요?
종구 겉으로 드러난 건 ‘첫눈이 휘날려 노래하다’ 그런 뜻이지만
속으로는 ‘첫눈이 휘날리는데 그대는 잠들어 있을 것인가?’
희은 그렇다면 세조의 ‘비빙가’는 잠을 깨라는 말이기도 하네요.
종구 첫눈이 내렸다. 춥다고 이부자리 속으로 파고 들건가?
첫눈이 쌓인다. 나라일을 몰라라 집에만 누워 있을 것인가?
이런 뜻이 담긴 노래이기도 하죠. 최근 교황이 남긴
한구절이 생각나지 않나요?
희은 아! ‘젊은이여 깨어 있으라 잠든 사람은 춤 출 수 없다’
이 말씀 말이죠.
종구 그겁니다. 세조도 역시 그런 뜻으로 ‘비빙가’를 지어
물었던겁니다. 여기 비빙가 한구절 보세요.
희은 (낭송) 꿈에서 깨어난 자는 나랏일 보기에 바쁜데
원안 같은 사람이여 골방에 아직 잠들어 있는가?
종구 (성독조) ♬몽교 기 경영혼데/ 수자 와 심방인가?
(夢覺起經營, 睡者臥深房--覺을 깰교자로 읽음)
누군가는 꿈에서 일찍 깨어 나랏일 보기에 바쁜데
누군가는 원안처럼 눈이 쌓여도 골방에 잠들어 있더란 말인가?
희은 그렇다면 여기서 일찍 꿈에 깨어 나랏일 보기에 바쁜
사람은 세조 자신이란 말 아닌가요?
종구 그렇죠. 나 자신은 첫눈이 내린 날이거나 아니거나
닭울음 소리보다 일찍 잠에서 깨어 나랏일 보느라
고심한다. 헌데 그대는 누구인가? 과인이 새벽에 일어나
국사를 걱정하는데 원안처럼 눈 쌓인 날 깊은 골방에
누워 잠들어 있는 사람은 아닌가?
희은 예전에 원안 이란 사람은 눈이 쌓이는데도 골방에서
잠들어 있었던 모양이군요.
종구 ‘원안 와설’이란 고사가 있죠. 중국 후한시대 원안이란
사람은 폭설이 내려 동네가 고립됐을 때 굶주려 죽는
이웃이 많았는데, 나 대신 누군가 밥 한끼라도 더 먹게
해야겠다며 방안에 그냥 누워 있었던겁니다.
희은 남을 생각한다면서 원안처럼 눈 쌓인 그 어려운 지경에 모른척
누워만 있을 것이냐? 그런 뜻도 담겨 있군요.
종구 교황의 말씀이나 세조의 비빙가나 똑 같이 묻는 것은
‘깨어 일어나라. 춤추는 세상을 위해 박차고 나오라!’는겁니다.
희은 인재들이여 춤 추는 세상을 위해 잠을 깨자! 그런 뜻으로
받아 들일 수 있겠군요.
종구 그때 세조의 ‘비빙가’를 본 신숙주는 화답의 시를 올렸는데요.
(인용구) 깨어나 첫눈 보며 미천한 사람 일깨우는 하늘 소리에
몽롱한 꿈을 깨며 감격의 눈물 적신다!
희은 ‘고전기행 사설여행’ ‘세조와 신숙주 비빙가’ 고전 자료는, 인터넷 카페
‘상암골 상사디야’로 들어가셔서 참고해 보시기 바랍니다.
종구 좋은 자료나 담론은 ‘상사모’카페에서 계속 하도록 하겠습니다
♣ 고전코너 ‘고전기행 사설여행 --- 적벽대전과 선조, 그리고 기대승 ’
종구 역사와 인물 속에 온고이지신을 돌아보는
‘고전기행 사설여행!’ 오늘은 ‘적벽대전과 선조, 그리고
기대승‘ 고사입니다.
희은 판소리 적벽가에 나오는 적벽대전 장면이 생각나는데요.
선조대왕과 기대승이 이 부분에 어떤 대화를 나눴던
모양이군요.
종구 선조가 왕위에 오른지 2년된 시점이 1569년이었거든요.
그해 6월에 고봉 기대승은 경연관으로 임금과 함께
학문을 강론하는 일을 봤구요. 그때 선조대왕 나이가
열 여덟살이었으니 고교생 시절이라 봐야겠죠.
희은 고등학교 2학년 정도 나이였군요. 그때 선조와 기대승이
적벽대전을 주제로 이야길 나눴나요?
종구 열여덟 선조가 묻습니다. ‘삼국지 연의를 보니 장비가
한번 고함을 치자 일만 군사가 도망을 쳤다. 이게 사실인가?’
희은 장비의 고함 한번에 일만명 적군이 도망을 쳤다.
정말 그런 일이 있긴 있었나요?
종구 지금도 우린 장비의 용감무쌍한 모습을 그렇게 상상하고
있었거든요. 이 선조의 질문에 고봉 기대승이 말하기를
‘전하 삼국지 정사에는 있지도 않은 일입니다. 훗날
이야기 만들기를 좋아하는 자들이 억지로 꾸며서 재미있게
만든 구절일 뿐입니다. 요즘 전하께서 그 ‘삼국지연의’를
읽고 계신다 들었습니다. 허탄한 이야기가 많으니 믿어선
안될 것입니다 전하!’
희은 장비가 고함으로 일만 적병을 물리쳤다는 기록은
삼국지란 정사에 없다. 그러면서 선조에게
소설 ‘삼국지연의’를 읽고 게십니까 경계해야 합니다.
했던거군요.
종구 그렇죠. 소설의 재미에 빠지지 말고. 역사의 진실을
기록한 정사를 봐야 한다는 걸 역설하고 있는데요.
거듭해서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적벽대전 장면도
진실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기대승이 문제 삼는 장면을 볼까요
희은 (인용구) 주유가 적벽대전을 앞두고 쓰러지자 제갈공명이 찾아갔는데
공명이 동남풍을 말하며 조조군을 칠 뜻을 비추자.
주유와 제갈공명이 서로 손바닥에다 적을 칠 방법을 써서
마주 보였는데 불로 치자는 화공이란 글자였다.
종구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바로 그 대목이 우리 판소리 적벽가
에도 등장하는데요. 고봉 기대승은 이런 소설 같은 대목에
재미를 붙여 빠져서는 안된다며 직언을 하고 있죠.
희은 이야기로 보자면 참 재밋는 대목이잖아요. 판소리 적벽가 뿐
아니라 영화로 만들어진 적벽대전도 다 그런 흥미 위주로
전개되고 있는데, 고봉 기대승이 한사코 그 장면을 믿지 말라고
말렸군요.
종구 역사의 진실을 기록한게 정사인데. 한 순간이라도 진실을
기록한 역사를 공부해야지. 소설 같은 흥미로운 이야기에
빠져서 그걸 또 진실인 듯 믿어서도 안된다는 거지요.
정사엔 치란과 흥망의 진실이 있다. 그 진실을 보자.
희은 혹시 열여덟 왕이 재미있는 소설 같은데 빠져서 학문을
탐구하는데 방해가 될까싶어 말린 부분도 있지 않을까요?
종구 바로 그런 점도 걱정했던거죠. 하지만 일반 대중들이
좋아한 것은 영웅들이 펼치는 흥미로운 모험과 도전, 승리
같은 거거든요. 그래서 지금도 적벽대전 이야기 좋아하잖아요.
희은 ‘고전기행 사설여행’ ‘적벽대전과 선조, 그리고 기대승’고전 자료는,
인터넷 카페 ‘상암골 상사디야’로 들어가셔서 참고해 보시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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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전코너 ‘고전기행 사설여행 --- 소춘향가의 지척동방 천리 ’
종구 역사와 인물 속에 온고이지신을 돌아보는
‘고전기행 사설여행!’ 오늘은 경기 12좌창 가운데
‘소춘향가 지척동방 천리’ 편입니다.
희은 경기12잡가라고도 했잖아요. 12좌창에 나오는 ‘소춘향가’
가운데 나오는 사설 한구절이군요.
‘지척동방 천리로다’
종구 경기 12좌창 속에도 춘향가 이야기며 적벽가 이야기
흥보가 이야기가 단편적이지만 구성돼 있거든요.
‘소춘향가’ 는 춘향가 전편이 아니라 간추린 한 대목 춘향가.
그렇게 볼 수 도 있다는거죠. 여기 소춘향가 가사 보세요.
희은 (인용구) 일월 무정 덧 없도다 옥빈홍안이 공로로다
우는 눈물 받아 내면 배도 타고 가련마는, 지척동방
천리로다. 바라를 보니 눈에 암암.
종구 여기 ‘소춘향가’ 이야기는 춘향이를 보고 싶고
만나지 못해 안달이 난 이도령 심사를 말하는 구절이
나오는데요. 바로 이 한구절에 이도령 마음이 다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겁니다.
(인용구) 너는 어떤 계집 아희관데 장부 간장을 다 녹이느냐
희은 그럼 소춘향가는 춘향이 보구 싶어 안달이 난
이도령 모습을 묘사한 구절이 많다는거군요. 그 가운데
‘지척동방 천리로다’ 구절도 나오구요.
종구 한마디로 ‘가까운 곳에 살면서도 사람을 못 보니
천리나 멀리 느껴진다’ 사람 안 보고 못 보고 살면
지척에 있어도 천리나 먼 먼 사이가 된다. 그런 거죠.
여기 소동파의 시 한구절 보세요.
희은 ‘영주 초별자유’란 소동파 시에서 지척 천리 구절이
나오는군요.
(낭송) 그대를 지척에 두고 만나지 못하니/
천리나 멀리 떨어진 것이나 똑 같지 않은가?
종구(성독)♬지척 불상견 하니 실여 천리동이라.[咫尺不相見 實如千里同]
그럼 우리나라 선비들은 ‘지척천리’ 이 구절을
어떻게 노래했을까요. 먼저 조선 후기 문신 백호 윤휴가
말한 지척동방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희은 (낭송) 내 손으로 베를 짜서 열발 장막이라도 치고
가까운 친척들 지척에 모여, 머리만 들면
산이고 강이 보이듯 보고 살어야지요.
종구 그게 백호 윤휴가 ‘기 십륙’편에서 말했던
친지들과 지척에 모여사는 세상을 꿈꿨노란 구절이죠.
부모형제 뿐 아니라 친지들과도 지척에 모여 살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죠. 여기 고려말 목은 이색 글을 보세요.
희은 목은 이색의 ‘함창음’이란 노래인데요
(인용구) 코 앞에 산대도 못 보면 천리나 마찬가지
천지간에 따로 그저 늙어갈 뿐이고
어느날에나 만날꼬/ 같이 과거 올랐던 동문들아
앉아서 손이라도 꼽아 보시게
종구 이색이 보고 싶다고 말한 ‘지척 천리’ 사람들은 젊은시절
동기들이었죠. 과거에 같이 오른 급제 동기들을
보고 싶은데, 지척에 살면서도 천리나 멀리 따로 늙어가더라.
자, 이래서 보고 사는 것과 안보고 사는 차이가 천리란거지요.
희은 ‘고전기행 사설여행’ ‘지척동방천리’ 고전 자료는, 인터넷 카페
‘상암골 상사디야’로 들어가셔서 참고해 보시구요.
쫑구 좋은 자료나 담론은 ‘상사모’ 카페에서 계속하도록 하겠습니다
♣ 고전코너 ‘고전기행 사설여행 --- 선정을 베푼 고사, 최치원 계원필경 ’
종구 역사와 인물 속에 온고이지신을 돌아보는
‘고전기행 사설여행!’ 오늘은 선정을 베푼 고사입니다.
희은 ‘선정’이란 지역 행정과 살림을 맡은 관찰사나 군수
사또가 일을 잘 해서 백성들에게 칭송을 받은 거 아닌가요?
종구 임금이 선정을 베풀었다는 건, 나랏일을 잘 봐서
온 나라 백성들이 잘 살게 됐노라며 찬탄하는 것이고
지방 수령들이 선정을 베풀었다는 건 그 맡은 지역을
잘 다스려 주민들에게 칭송을 받은 걸 말하기도 하죠.
희은 그렇게 선정을 베풀고 떠나는 고을 원님이나 사또를 막고서
우리를 버리고 가면 이제 누굴 의지해 삽니까. 하면서
붙들기도 했다면서요.
종구 또 있죠. 청백리 비석을 세우거나, 선정비를 세워서
두고 두고 칭송하기도 했었죠. 타루비도 선정과 관련있거든요.
희은 타루비 하니깐 심청가에 ‘타루비’ 대목이 생각나는데요.
그때는 온 마을 사람들이 효녀 심청을 눈물로 칭송하며
세운 비석이었잖아요.
종구 선정을 베풀고 떠난 인물을 잊지 말자며 고을 백성들이
돈을 모아 세우고서 그 비석에 새겨진 훌륭한 행적을
돌아보며 눈물을 떨궜다 해서 청백리를 기리는 ‘타루비’도
있었던거죠. 그럼 역사 속에 선정을 베푼 몇가지 사례를 볼까요
희은 이 기록은 통일신라 때 당나라에서 벼슬을 했던
고운 최치원의 ‘여주 자사 허경을 임명하며’라는 글이군요.
(인용구) 지난 4년 동안 고을에는 개가 짖는 일이 없었고 경내에는
메뚜기 황충이 날아오는 일이 끊어졌다. 밖으로는 마을을
편안하게 하고 안으로는 집안을 화목하게 하였으므로,
정치를 잘한다는 소문이 사람들의 노래로 전해지고,
인자하다는 칭송이 날개가 없어도 사방으로 퍼졌다.
종구 최치원이 당나라에서 벼슬할 때 쓴 ‘여주자사 허경을 임명하며’
글을 보면 선정을 베푼 증거로 ‘고을에 개 짖는 소리가
그쳤고, 메뚜기 메뚜기가 날아오지 않았다.’ 했죠.
희은 고을에 개짖는 소리가 그쳤다는 건 어떤 일이 생겼다는건가요?
종구 못된 원님이나 사또들은 밤 늦게 이 고을 저 고을
들 쑤시고 다니면서 잔치판을 열거나 죄 없는 사람 끌어내
형벌을 주고하니 동네 개들도 놀래서 밤새 짖어댔다. 이건
고을 원님노릇 아주 못되게 표독하게 했다는 말이거든요.
희은 그렇다면 동네 개들이 짖는 소리가 조용하다는 건
그만큼 주민들 들볶는 일 없고 사람들 깜짝 놀랄 일이
없었다는 뜻이 되는군요. 메뚜기 메뚜기가 없다는 건 뭔가요?
종구 최치원은 계원필경에서 선정을 베푼 관리를 ‘삼이의 명성을
드날렸다.’는 칭송의 글을 쓰기도 했는데요. 세 가지
기이한 일이 생긴 걸 뜻하는데요. 뭐가 ‘삼이’ 인지 여기보세요.
희은 (인용구) 후한시대 노공이 덕으로 정치를 하면서 형벌이 줄어들자.
세 가지 기이한 일이 생겼으니, 메뚜기 메뚜기가 날아들지
않았고, 꿩이 아이 옆으로 날아와도 아이가 잡지 않았다.
그 아이 하는 말이 ‘꿩이 새끼를 기를 때인데 어찌 잡겠느냐’
그리하여 사람의 선정이 조수와 동물에게도 영향을 미쳤으니
이걸 선정에 의한 세가지 기이한 일 ‘삼이의 명성’이라했다.
종구 무서운 형벌을 없애고 선정을 베풀자. 메뚜기가 날아오지
않았다. 꿩이 애들 옆에 날아와 놀았다. 소년들도 새끼 기른
꿩을 보살필 줄 알았다. 이 정도 돼야 선정을 베풀었다했던거죠
희은 ‘고전기행 사설여행’ ‘최치원이 말한 선정’ 고전 자료는, 인터넷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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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전코너 ‘고전기행 사설여행 ---황희정승과 반구정 ’
종구 역사와 인물 속에 온고이지신을 돌아보는
‘고전기행 사설여행!’ 오늘은 ‘황희정승과 반구정’ 고사입니다.
희은 ‘반구정’, 경기도 파주에 있는 정자 아닌가요?
가본 적이 있거든요.
종구 조선 초기 명재상으로 알려진 황희정승이 만년에
물러나 조용히 자연을 관조하며 지냈던 곳이 반구정이죠.
희은 ‘반구정’이라 이름했던 뜻이 있겠죠?
종구 별스런 욕심 없이 갈매기랑 친구 삼아 보내겠노란
반구정인데요. 90세가 넘은 황희정승이 그 정자에서
갈매기를 벗하면서 보낸 모습을 떠올려 보세요.
희은 그러고 보니 경기 선소리 산타령 가운데 뒷산타령에
이 반구정 구절이 나오죠. (가사) 돈의문 밖 썩 내달아
무악재를 얼른 넘어 반구정에 올라 보니 개성 송악이
분명하다~~
종구 기억하시는군요. 뒷산타령에 나오는 사설인데, 한양
북쪽 무악재 넘고 파주 반구정 올라서서 개성 송악을
바라다 보는 부분인데요. 파주엔 율곡선생 화석정도 있는데
경기 선소리 ‘뒷산타령’에선 황희정승 반구정을 꼽고 있죠.
희은 오랜 세월 정승 벼슬에 있으면서 세종 같은 성군을 도와
태평성대를 이루는데 공이 큰 황희를 추앙하는 마음이
선소리 산타령 가사에도 드러난 게 아닌가 싶네요.
종구 황희정승과 관련된 일화는 야사에서도 많이 전해 오는데요.
청파극담에 전하는 황희의 소탈한 일상 생활 면모를
잠시 돌아볼까요.
희은 (인용구) 정언 이석형이 황희정승 집을 찾아가자 ‘강목과’ ‘통감’
책 제목을 쓰게 하였다. 조금 있다 차림새가 때국물 흐르는
여종이 와서 황희의 의자에 기대 서서 붓글씨를 쓰는
이석형을 내려다 보더니. ‘술상 지금 올려요?’ 하자
황희가 고개를 저으며 ‘아니다 조금 있거라’ 기다리던
여종이 이번엔 짜증을 내서 ‘술상 올려요 말어요. 왜들 이리
꾸물댄데요?’ 소리에 이석형이 깜짝 놀라 바라보자.
황희가 웃으며 ‘아 그럼 가져 오너라’ 술상이 오자
여기 저기서 어린 아이들이 오며 가며 안주도 집어먹고
시끄러운데 알고보니 다 노비자식 들이었다. 아이들 중엔
황희 정승 수염을 잡고 늘어지기도 했는데 껄껄 웃고 있었다
이런 구절은 믿기 힘든데요., 어떻게 노비 자식들이 정승한테
종구 수염잡고 놀 수 있었겠느냐. 당대 학자 중에 한 사람이고
재상반열에 오른 이석형이 직접 보고 남긴 글인데요.
황희의 소탈하고 위 아래 귀천을 안가린 면모가 보이죠.
여기 이 사례는 황희의 엄격함이 보이는 일화인데 보세요.
희은 (인용구) 김종서가 공조판서를 할 때 정승들 점심을 챙겨
모시자, 황희정승이 호통을 치며 ‘예빈시에서 주는 밥이면
됐지 어떻게 공조에서 밥시중을 드느냐. 김종서 대신
김종서의 종을 들여라 곤장으로 다스리겠다. ’
종구 사소한 일인 듯 싶었지만 김종서란 인물을 곧고 강직하게
기르기 위해 황희는 유독 김종서에게 모질게 했던겁니다.
부드러울 땐 노비자식들이 수염을 잡고 놀아도 웃었고
엄격할 땐 판서 벼슬의 김종서를 공개적으로 꾸짖었던 황희.
희은 파주 ‘반구정’에 가면 만년에 모든 욕심을 내려놓고
갈매기랑 친구하며 지냈던 황희정승 자취를 만나볼수 있겠군요
‘고전기행 사설여행’ ‘황희와 반구정’에 대한 고전 자료는, 인터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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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구 좋은 자료나 담론은 ‘상사모’ 카페에서 계속하도록 하겠습니다
♣ 고전코너 ‘고전기행 사설여행 --- 석모와 백포 고사 (席帽白袍) ’
종구 역사와 인물 속에 온고이지신을 돌아보는
‘고전기행 사설여행!’ 오늘은 ‘석모 백포’ 고사입니다.
예전엔 ‘석모. 백포’ 소리가 나오면 바로 과거 준비하는
서생이란 말로 받아 들였죠.
희은 그럼 요즘 입시생이나 고시생들도 ‘석모 백포’라 하겠군요
그냥 ‘석모’ ‘백포’하니깐 무슨 뜻인지 감이 안잡히네요.
종구 석모는 햇볕을 가리는 모자라구 보면 되는데요.
고급스런 모자가 아니라. 등나무를 얼기설기 엮어서
햇볕이 들지 말라구 천을 덮어 둔 모양이었죠.
희은 우리네 보릿대 모자보다 나아 보이는 걸까요?
종구 석모는 우선 고급스런 소재로 잘 다듬어진 모자가
아니라 그냥 햇볕 가릴 정도로 쓰고 다니던 전립 정도로 보면
되는데요. 이게 또 신분을 나타내는 뜻으로 쓰기도 한거죠.
희은 과거 준비생이 썼던 거라구 했으니깐.
아직 선택 받지 못한 젊은 서생으로 봐야겠군요.
종구 그렇죠. 일테면 과거에 급제하면 벼슬에 따라
모자를 썼으니, 그 모자를 보고 관복을 보면 대충
어떤 직책이다 알아 봤던거죠.
희은 석모는 등나무로 만든 햇볕 가리개 모자다. 그렇다면
백포는 어떤 건가요?
종구 그냥 흰옷입은 서생으로 보면되는데요. 과거 준비생일 경우
색깔을 넣거나 관직을 표시하는 옷을 입을 수 없으니
허연 옷 입은 젊은이는 ‘아직도 과거 준비생 수험생이다’
희은 ‘석모와 백포’ 그럼 일단 수험생으로 봐야한다는거군요.
종구 ‘석모’는 우리나라 선비들이 자주 쓴 말이긴 합니다만
원래 중국 송나라 때 나온 말이거든요.
희은 석모의 유래가 중국 송나라였군요. 어떤 사연이 있었을까요?
종구 송나라에 이손이란 사람이 과거를 볼 때마다 낙방을 해서.
늘상 석모를 쓰고 다녔죠. 그러자 고향 사람들이 이손을 보고
탄식하며 하는 말이 “이손의 머리에 저 석모를 언제나 벗을까?‘
희은 그말은 곧 언제나 과거에 붙어서 머리에 그럴싸한
벼슬감투 모자를 쓰고 다닐꼬? 그런 말이기도 했겠네요.
종구 그렇죠. 떨어지고 떨어지고 또 과거에 낙방하던 이손을 향해
고을 사람들은 하두 딱하니깐. ‘이손이 머리에 석모가
언제나 벗겨질꼬?’ 비웃기도 했던겁니다. 그런데 그 이손이
마을 사람들에게 글 한수 지어 줍니다. 뭐라구 했을까요?
희은 (인용구) 마을 사람들 보시오. 친척들도 보시오.
내 머리에 아직도 석모가 있소?’
이건 어찌된 일인가요?
종구 마을 사람들 앞에 큰소리 치고 나타난 이손. 그의 머리엔
지긋지긋하게 달라 붙었던 등나무 전립, 석모가 사라지고
대신 관직 감투가 올려져 있더라죠. 마침내 과거급제 한겁니다
희은 이손이 자신있게 물었던 한마디. ‘아직도 내 머리에 석모가
씌워져 있소?’ 마침내 수험생 탈출. 과거시험 탈출했군요.
종구 그래서 후세에 ‘석모이신’ 이라고 했던겁니다.
‘마침내 석모를 벗어제꼈다!’ 출세 했다는 뜻도 되는거구요.
희은 허연 옷만 입어야 했던 백면서생이 석모를 벗어 던지고
청포 홍포를 입고 나타난다. 참 신나는 일이었겠군요.
종구 소동파는 그날을 위해 이런 충고를 했다고 합니다.
‘이 사람아 촛불을 더 태워야 하네. 흰옷입은 서생들이
줄 서서 기다리고 있으니, 공부를 더해야 하고 말고’
희은 가을엔 우리 입시생들이 마음고생 몸 고생 심해지는 날이죠.
좋은성적으로 수험생 석모를 멋지게 벗어 던지기 바랍니다.
‘고전기행 사설여행’ ‘석모 백포’ 고전 자료는, 인터넷 카페
‘상암골 상사디야’로 들어가셔서 참고해 보시구요.
쫑구 좋은 자료나 담론은 ‘상사모’ 카페에서 계속하도록 하겠습니다
♣ 고전코너 ‘고전기행 사설여행 --- 윤선도와 농부가 ’
종구 역사와 인물 속에 온고이지신을 돌아보는
‘고전기행 사설여행!’ 오늘은 ‘고산 윤선도와 농부가’입니다
희은 ‘농부가’하면 남도민요 ‘농부가’도 있고
판소리 춘향가에 나오는 ‘농부가’도 생각나는데요.
고산 윤선도와 농부가는 그 보다 오래 전 일이겠군요.
종구 이런 그림을 상상해 보세요. 완도며 보길도에서
귀양살이 했던 윤선도가 해남 대둔산 일대에서
친구들과 모여 주변 경관을 둘러 보고 있다.
산이며 바다 들판을 보다 논밭에서 일하며 노래하는 농부들을
보고 있다. 그들이 부른 노래를 들으며 시를 짓는다.
희은 그럼 오늘 이야기는 윤선도가 해남 대둔산 쪽에서 잠시
친구들과 만나 시를 짓고 풍류를 즐길 때 모습이겠군요.
종구 그렇죠.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에 있는 대둔산은
명승지로 사적지로 알려진 곳인데요. 산과 바다와
들판이 한데 어우러진 고장이기도 하죠.
바로 그곳에서 350여년 전 고산 윤선도가 들은 농부가는
무슨 노래였을까요? 여기 ‘대둔산 송붕팔경’ 중 한곡 보세요.
희은 고산 윤선도가 남긴 ‘전교농가’란 시인데요.
(낭송) 저 멀리 호미들고 김매는 농부들/ 밭두렁에 주고 받는
농부가 소리 들고난다/ 강아지풀 잡초를 미워하는 뜻을 뉘 알까
저 농부들 노래를, 남풍가 부를 한양 님에게 어찌 전할꼬/
종구 그때 해남 대둔산 근처 논밭에서는 농부들이
김을 매고 일하고 있었던거죠. 어느 사이엔가 논두렁
밭두렁에 노래소리가 들려 옵니다. 주거니 받거니 하는
농부들 노래 듣다보니 논밭에 잡초들이 미워질 수 밖에요.
희은 그 잡초들만 아니면 농부들이 저 고생을 안할텐데
그런 심정이었군요.
종구 서로 공감하는 대목이죠. 시인은 차마 같이 달려들어
잡초를 뽑아낼 수 없지만 그 농부들이 흥얼흥얼 불러대는
끝없는 노래에 취해 있구요.
희은 윤선도 자기만 듣기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나보죠.
그 농부가를 한양의 님에게 보내고 싶다고 한건가요?
종구 논두렁 밭두렁에 일하며 부르고 있는 농부가를
한양에서 남풍가 부를 사람에게 전하고 싶다.
누굴까요. 남풍가를 부르고 있을 한양의 님이란.
여기 고대 순임금이 불렀다는 ‘남풍가’ 다시 볼까요?
희은 (인용구) 남풍아 훈훈하게 불어와 우리 백성 근심 좀 풀어주소/
때 맞춰 부는 남풍이여 우리 백성 살림살이 펴 주소서/
종구 오경 중 예기 악기 주소에 전하는 순임금 남풍가인데요.
자연재해 없이 순풍에 비오고 농사 잘 되길 바라는
지도자의 간절한 축원이 담겨있죠.
희은 그럼 윤선도가 바랬던 것이 백성을 그리 걱정한다는
임금이시어. 여기 해남 논두렁 밭두렁에 잡초 뽑으며
부르는 농부가 소리가 들리십니까. 이 소린가요?
종구 그렇죠. 농부는 먹고 살자고 잡초를 뽑는데, 임금은 백성
살리자고 무슨 잡초를 뽑고 있습니까. 저 논두렁 밭두렁
농부가 들립니까? 묻고 있죠.
희은 ‘고전기행 사설여행’ ‘윤선도와 농부가’ 고전 자료는, 인터넷 카페
‘상암골 상사디야’로 들어가셔서 참고해 보시구요.
쫑구 좋은 자료나 담론은 ‘상사모’ 카페에서 계속하도록 하겠습니다
♣ 고전코너 ‘고전기행 사설여행 ---엮음 수심가 세거에 인두백하고 ’
종구 역사와 인물 속에 온고이지신을 돌아보는
‘고전기행 사설여행!’ 오늘은 서도창 ‘역음 수심가’ 중
‘세거에 인두백’ 구절입니다.
희은 ‘엮음 수심가’에 꽤 여러편의 가사가 있는데
그 가운데 ‘세거에 인두백이요.’ 구절이군요.
종구 그렇죠. ‘엮음 수심가’로 가면 꽤 긴 사설이
수심 많은 사연들을 주섬 주섬 엮어서 전해 주고 있죠.
그 가운데 ‘세거에 인두백이요’ 가사 한번 볼까요?
희은 (인용구) 추래하니 목엽황이라/ 가을이 장차 돌아오면 나뭇잎은
모두다 단풍이 지고/ 해가 가며는 사람의 머리가 백발이로구나/
청춘은 부재래 하니 백일을 막허도 하라/
애달픈 청춘이 갈 줄을 알았으면/ 청사 홍사로 결박이나 지을걸
원수 백발이 올 줄 알았으면/ 십리 밖에다 가시성이나 쌓을걸
종구 구절 구절이 세월이 흘러 어느새 백발이 되고
그 좋은 시절들은 꿈결처럼 가버렸구나. 그런 탄식이
깃들어 있구요. ‘해가 가며는 사람의 머리가 백발이로구나~~ ’
희은 그게 바로 ‘세거에 인두백이요’를 풀어주는 사설이군요.
세월은 가고 백발은 오고, 그래서 생긴 수심들이
줄줄이 엮어져 나오는 ‘엮음 수심가’군요.
종구 여기서 ‘세거 인두백’ 구절을 잠깐 보면요. 구한말
순국지사요 문장가였던 매천 황현 있죠.
희은 일본이 강제로 합방을 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매천 황현 말씀이죠.
종구 일본의 침략을 막아야 한다. 외치다. 마침내 강제로
합방이 되는 걸 보다 못해 순국한 그때가 황현의 나이
55세였거든요.
희은 요즘으로 치면 한창 일할 나이인데, 순국의 길을 택했군요.
그 매천 황현이 ‘인두백’과 관련된 글을 남겼나 보죠?
종구 매천의 ‘숙토동’이란 글에 ‘인두백’이란 구절이
나오는데요. 그의 나이 43세 때 지은 글입니다
여기서도 매천의 깊고 푸른 고뇌가 느껴지는데요. 보세요.
희은 (낭송) 골짜기 물 졸졸 흘러 각자 근원을 이뤘네
밭 옆으로 나뭇길은 사립문으로 이어졌고
검은 구름 언제 걷힐꼬 초겨울인데
썰렁한 집 어두운 등불아래 말없이 깊은 상념들
친구야 머리 희었구나 노래했던 기억에
내 머리 돌아보니/ 천권의 책 다 쓸데 없구나.
저 골짜기 바깥은 팔방이 죄다 깜깜하다.
종구 매천 황현이 43세 때 동학일 일어나고 민비는 시해되고
일본 세력은 거침없이 궁중 안에서 팔도로 번지고 있을 때
매천의 깊은 고뇌와 수심이 느껴지는 노래이죠.
(인용구) 친구야 머리 희었구나 했는데 내 머리 돌아볼세
천권의 책 다 쓸데 없구나. 저 골짜기 밖은 팔방이 컴컴하다.
희은 천권의 책을 읽고 준비했던 게 다 필요 없더란 절망이
깊은 수심으로 느껴지는 구절이군요. 친구 머리 희다고
노래했더니 정작 자신의 머리는 허연지 검은지 분간못할
시커먼 암흑 속에 갇힌 모습도 느껴지구요.
종구 매천 황현의 노래에 비하면 서도 ‘역음 수심가’의 ‘세거에
인두백이요.’ 구절은 허연지 검은지 분간이라도 할 시절이라
나은 편 아닌가요?
희은 우리네 이루 다 말할 수 없이 많은 수심 가운데
‘세월가니 사람 머리만 희어지더란’ 구절. 머리는 하애지고
가슴은 시컴해 지는 건 아닌지 돌아보게 됩니다.
‘고전기행 사설여행’ ‘엮음수심가 인두백’ 고전 자료는, 인터넷
카페 ‘상암골 상사디야’로 들어가셔서 참고해 보시구요.
종구 좋은 자료나 담론은 ‘상사모’ 카페에서 계속하도록 하겠습니다.
♣ 고전코너 ‘고전기행 사설여행 ---계곡 선생 장유의 귀향노래 ’
종구 역사와 인물 속에 온고이지신을 돌아보는
‘고전기행 사설여행!’ 오늘은 ‘계곡 장유의 귀향꿈’입니다.
희은 고향을 향한 향수를 느낄 수 있는 작품이겠군요.
계곡선생 장유는 조선 중기 문신 아닌가요?
종구 맞아요. 당대의 문장가를 대표하는 인물이기도 했구요.
그 시대에 명절이라고 지금처럼 며칠간 고향 다녀 올
짬이 없었던 공직자들이 많았죠.
희은 누군가는 고향을 향해 갈 것이고, 또 누군가는
그 빈자리를 지키면서 공직 업무를 수행해야 했으니
명절 때라고 다들 고향 가는 건 아니었군요.
종구 계곡 장유도 추석명절 무렵 고향을 갈 수 없어서
‘객회’라는 작품을 남기기도 했거든요.
‘나그네 회포’와 ‘향수’가 엇갈린 이 작품 몇구절
음미해 볼까요.
희은 (인용구) 산에 해 저물면 고라니 노루도 내려오고 /
팔월이라 서풍에 떨어지는 벼꽃들 /
명절 찾아 갔던가? 텅 빈 객관 저녁 연기에 찬바람 들어온다 /
가을비 내린 작은 시내 모래 언덕 넘치누나 /
종구 주변 분위기가 대충 그려지고 있죠.
해가 저물면 산에서 고라니도 내려오고
찬 바람이 객관 방문 틈새로 들어오는 때인데
명절 때문에 고향 찾아 간 것인가 여관에
사람 자취도 없이 썰렁하더란 거죠.
희은 거기다 밤이면 나그네 방으로 불어 오는 한기가
더나 쌀쌀하고, 그러니 고향 생각이 또
절절하게 샘솟아 나겠지요.
종구 공무를 봐야 했기에, 타관 생활을 할 수 밖에 없고
변경에도 왔다 갔다 해야 하고, 어느 해는 사신 일행으로
중국 대륙 땅도 다녀 와야 했고, 그래서 나그네 설움이
쌓일 수 밖에 없는 장유의 가을날 고독이 느껴지는
구절로 이어지는데요. 그 다음 보실까요.
희은 (인용구) 답답해라 막다른 팔자 나그네 신세 여전한 몸/
아득하구나. 몇 번이나 고향가는 꿈에 젖었던가?
이리 저리 떠 다니며 허리띠도 헐렁 헐렁/
제 홀로 부르는 고달픈 노래 가락에 또 한해를
보내야 하겠구나.
종구 명절에도 고향을 못가는 신세. 나라일이 먼저이니
주어진 임무에 충실해야 했으니 명절이 무슨 상관이냐
그런 팔자가 됐더란 거죠. 계곡 장유가 타향살이
고생이 심했다는 걸 엿 볼 수 있는 구절.
‘헐렁해진 허리띠!’ 이 한마디로 고생이 어느정도인지 알만하죠
희은 그래서 꿈이라도 자주 고향가는 걸 꾸고 또 꿨나봐요.
몇 번이나 고향 꿈을 꿨던가 셀 수도 없다는 거잖아요.
종구 그래서 명절에 고향가지 못하고 홀로 부른
고달픈 노래 한곡조로 결국 올해도 이렇게
저물어 가는가 보다. 탄식하고 있는 계곡 장유.
희은 그래도 오늘 고향으로 가고 또 가는 행열을 보면서
잠시 고생은 되겠지만. 고향에 갈수 있다는 그 자체가
행복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듭니다
종구 고향에 못가 허리띠 헐렁해 졌다는 장유 보다는
열배 백배 낫구 말구요.
희은 ‘고전기행 사설여행’ ‘계곡 장유 귀향꿈’ 고전 자료는, 인터넷
카페 ‘상암골 상사디야’로 들어가셔서 참고해 보시구요.
종구 좋은 자료나 담론은 ‘상사모’ 카페에서 계속하도록 하겠습니다
♣ 고전코너 ‘고전기행 사설여행 --- 택당 이식과 죽순선물 ’
종구 역사와 인물 속에 온고이지신을 돌아보는
‘고전기행 사설여행!’ 오늘은 ‘택당 이식과 죽순선물’입니다.
희은 추석명절 보내면서 선물 때문에 꽤나 신경 쓰이고
부담도 되고 그랬을텐데요. 택당 이식과 죽순 선물이라면
언제 적 이야긴가요?
종구 택당 이식이 활동했던 때가 광해군에서 인조 때였거든요.
청나라가 침략해 왔을 땐 목숨바쳐 적을 무찌르고
이 강토를 지키자 했던 척화파 였구요. 청나라 끌려가
죽을뻔 했다 탈출했던 당시 정부요인이기도 했죠.
희은 청나라와 병자호란 이후 국난을 수습하는데 힘 썼던
조정 중신이었군요.
종구 대사헌에 형조판서 이조판서를 지냈던 택당 이식이
저 호남 땅 동복에 원님을 지내던 안절이 선물을 보냈는데
의례 부채를 보내던 사람이 죽순을 보내서 이를 받구서
고맙다는 편지를 썼는데, 흥미로운 구절이 있거든요. 보세요.
희은 (인용구) 여보게 친구, 자네 손안에 진짜 보물을 놔두고
대바구니에 죽순만 캐서 보냈구만
그저 세상살이 험해도 오장육부에 맑은 바람 불면 그만이지.
옷에 달라 붙는 먼지까지 털고 살게 뭐냐? 그런 뜻인가?
죽순선물 받은 사람이 조금 맘이 덜 든다는 느낌인가요?
종구 실은 그 사람 손에 있는 부채가 탐이 났더란건데요.
대바구니에 죽순을 담아 보냈으니, 선물 보낸 사람뜻이
세상에서 불어오는 먼지 바람까지 부채질 할거 없고
오장육부가 맑아서 썩지 않으면 됐지 않느냐?
희은 그 전에는 부채를 선물했던 사람이 이젠 부채를 접어두고
죽순을 선물했다. 헌데 죽순 선물을 받아 든
택당 이식은 상대방 손에 있는 부채가 보물이라고 보는데
왜 죽순이냐?
종구 그러면서 바로 부채를 관두고 죽순 보낸 걸 이해 하는 척 하죠.
아, 부채를 주지 않은 이유를 알겠다. 세상 먼지 더 이상
털고 말 것도 없고, 오장육부에 맑은 바람 일어나면
그만 아니냐? 선물 준 사람은 택당을 향해 당신은 이제
부채가 필요 없는 사람 아니오. 그러니 죽순을 보내는겁니다.
희은 부채로 날려 버려야 할 게 실은 무더위 아닌가요?
헌데 여기선 세상에 먼지들을 날려 버릴 부채가 필요하다.
당신 손에 그 부채면 되겠는데 왜 그 부채를 주지
죽순을 잘라 보내는 것인가? 그렇게 물은 셈이군요.
종구 그렇죠. 헌데 세상의 먼지를 부채질로 어떻게 다 막아내겠냐.
그저 세상 먼지가 어떻든 내 뱃속, 내 오장육부에서
맑은 바람 일어나면 그만 아니냐? 한마디로 세상이 혼탁해도
내 일신이 맑고 깨끗하다면 세상 먼지 덮쳐도 걱정없다는거죠.
택당 이식은 그래놓구도 뼈 있는 농담 한마디 하죠. 보세요.
희은(인용구) 여보게, 이래뵈도 내 뜨거운 감투 위세가 자네손을 화끈 델
정도인데, 그 부채를 건네주지. 죽순이라니. 이렇게 해마다
죽순을 잘라내면 어느 세월에 올곧은 청죽이 자라겠나?
자네, 대나무들 미리 다 잡아먹을셈인가?
종구 부채를 주지 않은거 이해한다. 헌데 죽순을 이렇게 잘라내면
어느 세월에 올곧은 청죽을 키우겠느냐? 대나무로 키워야
부채를 만들거나 갓을 만들거나 죽물용품 만들어 쓸거 아니냐?
희은 죽순 선물도 고맙지만 사양하겠다는 뜻도 담겨 있군요.
추석명절이 가면서 돌아 본 택당 이식의 죽순 선물고사인데요.
‘고전기행 사설여행’ ‘택당이식과 죽순선물’ 고전 자료는, 인터넷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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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전코너 ‘고전기행 사설여행 ---편할 때 위기를 잊지 말자 안불망위 安不忘危 ’
종구 역사와 인물 속에 온고이지신을 돌아보는
‘고전기행 사설여행!’ 오늘은 ‘안불망위’ 고사입니다.
희은 글자를 보니깐 ‘편안할 안에 아니불에 잊을 망, 위태할 위’
네 글자군요.
종구 말 그대로 ‘편안할 때 위기를 잊지 말자’는 구절이죠.
희은 ‘안불망위’가 예전에 자주 이야기 됐던 구절 같은데요.
종구 조정 대신들이 이 ‘안불망위’를 가지고 글을 지어 올리는
행사가 이어져 오기도 했거든요. 여기 조선 중종 29년
8월 기사 한줄 보세요.
희은 (인용구) 전하께서 칠덕정에 나아가 군대를 사열했다. 조정대신
들에게 안불망위 란 제목으로 시를 지어 올릴 것을 명하였다
종구 보세요. 중종이 칠덕정에 나가서 군대를 사열 한 후
대신들에게 ‘안불망위’란 제목으로 시를 지어 올리게 했죠.
희은 ‘평안할 때 위기를 잊지 말라’는 그 한구절이 가진
뜻이 의미심장하게 느껴지는데요. 원래 이 구절이
어디서 유래된 건가요?
종구 오경 가운데 주역있죠. 거기 계사전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시대를 걱정하는 군사 선비는 편안할 때에도
위기를 잊지 않는다!’
(성독조) ♬시고 군자 안이 불망위라. (是故君子安而不忘危)
희은 ‘안불망위’란 구절이 주역 계사전에서 나왔군요.
그래서 역대 임금들도 그 구절을 거울삼아
‘평화로울 때도 위기를 잊지 말자’ 했던거구요.
종구 그 다음 구절도 새겨뒀으면 하는데요.
(성독조) ♬존이 불망망하고 치이 불망란이니
시이 신안이 국가 가보야라
(存而不忘亡 治而不忘亂 是以身安而國家可保也)
희은 (해설구) 군자 선비는 편할 때 위태로움을 잊지 않고,
보존될 때에도 망해 없어지는 일을 잊지 않고,
잘 다스려 질 때에도 어지러운 혼란기를 잊지 않으니
이런 까닭에 그 일신이 안전해질 뿐 아니라
국가가 보존될 수 있는 것이다!’
종구 자고로 무수히 많은 그 시대의 지도자와 선비며
우국지사들이 귀를 기우렸던 구절이기도 합니다.
편할 때 안일함에 빠지지 말자는 소리구요.
괜찮어 잘 됐어 하면서 자만에 빠져 대사를 망치지 말자.
잘 되구 있어. 이만하면 됐지 뭐. 하며 방심하는 사이에
혼란 스런 일이 닥칠 수 있으니 이런 걸 미리 방비하고
대비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희은 그런 뜻이 있기 때문에 임금이 평화로운 때에도
군대를 사열하고 기강을 바로 잡으면서 대신들에게
‘안불망위’ 글을 지어 올려라 했던거군요.
종구 그래서 다산은 말 했었죠. ‘편안해도 위대함을 잊지 말자
그 공력보다 더 큰 공이 없을 것이다’ 했었잖아요.
희은 지금 우리는 편안할까요? 약간의 평온 속에 혹시
까마득히 잊어 버리고 있는 게 뭔지 돌아봤으면 싶구요.
종구 괜찮아 괜찮아 서로 다둑이면서 방심한 일들이 뭔지도
눈길을 줬으면 싶은 날입니다.
희은 ‘고전기행 사설여행’ ‘안불망위’ 자료는, 인터넷 카페
‘상암골 상사디야’로 들어가셔서 참고해 보시구요.
쫑구 좋은 자료나 담론은 ‘상사모’ 카페에서 계속하도록 하겠습니다
첫댓글 지금같은 세상에 윤선도 같은 분이 많이 계시면 좋겠습니다. 좋은 글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