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과 이희호는 서대문구 동교동에 자리를 잡았다.
1963년 4월 국회의원 출마를 앞두고 찾는 손님이 많아지자 셋방살이를 청산하고 동교동 국민주택 한 채를 전세 내어 입주하였다. 1년 뒤 은행 융자를 보태어 이 집을 구입하여 김대중의 ‘동교동’(집)이 되었다.
이희호 여사와 신혼 초기
당시 이 지역은 “아내보다 장화가 더 필요하다”는 말이 나올 만큼 도로포장이 안된 변두리였다.
김포공항이 생기고 제2한강대교가 개통되면서 도로가 포장되면서 마을같은 마을이 되었다.
이 동교동 집은 김대중 부부가 한 때의 경기도 일산과 청와대 시절을 빼고는 40여년 동안 살아온 ‘보금자리’가 되고 김영삼의 상도동과 더불어 한국 야당, 나아가서 한국 정치의 한 축이 되었다. 군사독재의 광기가 넘칠 때는 ‘불온’의 딱지가 붙고, 정가에서는 야당의 한 계보 사령부처럼 인식되었다.
집수리를 마치고 남편이 상경해서 처음으로 자신의 집에 문패를 달 때의 일이다.
어느 날 국회에서 귀가한 남편은 2개의 문패를 내놓았다.
‘金大中’, ‘李姬鎬’.
영문을 모르는 나는 어리둥절할 수 밖에 없었다.
“우리 대문에 당신과 내 문패를 나란히 답시다.”
“…”
“가정은 부부가 함께 이뤄나가는 거 아닙니까?”
“그거야 그렇지만….”
“부부는 동등하다는 걸 우리가 먼저 모범을 보입시다.”
자신의 문패를 주문하다가 문득 내 생각이 났다는 것이다. 남녀가 유별하고 남편을 하늘이라 믿고 따르라고 가르치던 그 시대에, 더욱이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면서 며느리 문패를 단다는 것은 가히 혁명적인 발상이었다. (주석 1) 1960년대 초, 국민주택에 부부의 명패를 나란히 단 김대중은 일찍부터 부부평등의 인식을 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같은 인식은 정치지도자로 성장하면서 여권신장과 남녀평등의 사상으로 발전하여 정책으로 채택되었다. 그리고 집권자가 되어서는 여성부 신설, 남녀평등고용법 제정 등으로 구현되었다.
대통령선거에서 쿠데타 주역에게 대권을 빼앗긴 야권은 분열된 채 이 해(1963년) 11월 26일 실시되는 제6대 국회의원 총선에 대비하였다. 군정 2년 9개월에 이어 민선 대통령에 당선된 박정희나 집권여당이 된 공화당은 기세가 등등한 반면 야권은 풀이 죽어 의기소침한 상태에서 총선을 맞았다.
야권은 민정당ㆍ민주당을 비롯하여 군소야당까지 11개로 분열하여 각자도생하고 있었다. 야권의 단일 후보로도 공화당과 대결이 쉽지 않은 터에 분열된 상태로는 처음부터 승리를 바라기는 불가능한 구도였다.
김대중은 강원도 인제에서 선거구를 목포로 옮겼다.
목포는 학교를 다녔던 고장이고 제3대 총선에 나섰다가 석패한, 제2 고향과 같은 곳이었다. 앞으로 정치적으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낯선 타지 인제보다 목포가 여러가지로 유리할 것으로 인식되었다. 박순천 총재를 비롯하여 당 간부들도 이를 권유하였다. 마음을 움직이게 한 것은 무엇보다 목포의 지지자들이었다. 그동안 김대중의 활약을 지켜봐 온 지지자들은 다시 타향에서 국회의원에 출마하면 목포의 체면이 서지 않는다면서 집단적으로 목포출마를 권유하였다.
1954년 처음 출마하여 기껏 4~5위 기록한 뒤 10여 년 만의 귀향이었다.
나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감회가 컸다. 고향 사람들도 내가 내려와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중앙정치 무대에서 내가 활약하는 모습들을 충분히 알기 때문이었다. 어찌보면 김대중이는 자기 땅에서 핍박받고 떠나간 뒤 타향 땅 객지에서 혈혈단신으로 몸을 일으켜 세웠다는 안쓰런 느낌을 그들에게 주었는지도 모른다. (주석 2) 김대중은 민주당 공천으로 목포에서 입후보하였다. 당시 공화당은 대선에서 승리한 여세를 몰아 4대 의혹사건 등으로 마련한 엄청난 자금을 살포하면서 선거전을 펴나갔다. 당시 호남인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박정희를 당선시켰다는 생각이어서 공화당을 일방적으로 선호하고 있었다.
다행히 목포에서는 공화당의 차문석 후보와 1대 1의 경쟁이었다.
그러나 관권의 배경과 물량공세로 선거는 쉽지 않았다. 목포선거에서는 목포여고 영어교사이던 권노갑과 인제 보궐선거 때부터 도왔던 엄창록이 적극 참여하여 선거운동을 지원하였다. 권노갑은 이때부터 김대중의 분신처럼 그의 곁에서 보좌하며 대선 승리에까지 고난의 길을 함께 하였다. 인제에서 보온약방을 경영하던 엄창록은 민주당 인제지구당 조직부장을 맡으면서 김대중과 인연을 맺고 선거참모 역할을 충실히 하였다.
김대중이 6대 국회에 이어 박정희 대통령이 수단방법을 동원하여 막으려 했던 7대 국회의원에 당선되고, 이어서 신민당 대통령 후보에 선출되는 등 경이적인 도약에는 엄창록의 놀라운 조직 비법이 작용한다는 설이 나돌게 되고, 중앙정보부는 결국 1971년 대통령선거 와중에 엄창록을 회유ㆍ위협하여 김대중 곁에서 떼어냈다. 이후 엄창록은 공식적인 위치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중앙정보부의 자료에는 “9ㆍ29 김대중 대통령후보 지명 이후 계속 김대중 전략 입안에 참여하고 있음”, “유기홍이 특별보좌관으로 임명되자 불만을 포지하고 김대중과 거리가 멀어지자 김대중이 계속 설득하여 12.6 특별보좌관(비공식)으로 임명되었음.(김대중은 그의 능력이 1개 지역조직은 가능하나 전국 단위의 조직은 역부족이라고 평가)”라고 분석하였다. (주석 3) 김대중에게 뒤늦게 ‘선거운’이 따랐다.
선거 종반에 자유당이 일선 경찰서에 부정한 행위를 지시한 것을 목포경찰서 정보반장 나승원 경사가 그 비밀 지령을 폭로하여 사회에 큰 충격을 주고, 목포 시민들을 분노시켰다. 이 사건으로 백중지세이던 여론이 김대중 쪽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선거전은 종반이 되자 더욱 거세져서 이승만 정권 시절을 연상시키는 부정행위가 자행되었다. 경찰과 지방공무원이 공화당에 동원되고 나의 선거운동에 대해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방해했다.
다행히 부정을 지시받은 목포경찰서 정보반장 나승원 경사가 국회의원 선거대책이라는 부정선거 비밀지령문을 폭로해 주었다. 나경사는 내가 속한 민주당이 아닌 또 다른 야당인 민정당에 가서 13개 항목에 걸친 부정선거에 대한 상부의 비밀지령을 특별 기자회견 석상에서 폭로해 버렸다. 물론 그 비밀지령 내용은 나를 낙선시킬 목적이었다. 목포에서는 큰 소동이 일어났고, 그런 부정행위를 일체 할 수 없게 되었다. 부정을 저지를 계획이 중단된 덕분에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될 수 있었다. (주석 4) 김대중은 22,513표, 공화당 차문석은 10,973표로 11,540표를 앞섰다. 더블 스코아의 승리였다. 김대중의 감회는 남달랐다. 1954년 제3대 민의원 선거 때 목포에서 참패하고, 인제에서 3번 선거를 치러 ‘2락 1당’의 곡절을 겪고, 그나마 당선 이틀 만에 의원직을 빼앗긴 이래, 절치부심 9년 만에 고향이나 진배없는 목포에서 당선된 것이다.
제6대 국회의원 선거와 관련하여 권노갑은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이때 공화당에서 입후보한 사람은 차문석씨였다. 그의 부친은 일제통치기에 목포 제1의 유력자였으며,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부자였다. 경쟁후보인 차씨는 일본대학을 나와 학도병을 거쳐 해방되고는 국군에 들어가 육군대령까지 지낸 사람이었다. 지명도는 물론 선거자금도 충분해서 공화당의 유력자가 지지하는 강적이었다. 김대중 후보의 승리의 요인은 역시 나승원 경사의 증언에 있었다. 이 선거에서는 자유당 정권기와 마찬가지로 어느 선거구나 경찰관과 공무원이 부정행위를 저질렀다. 하지만 나경사의 증언 덕에 목포의 사례가 전국에서 가장 유명해졌다. 야당측은 결속하여 나경사 증언을 근거로, “이 정도의 부정이 있다면 이번 선거는 무의미하다”며 정부를 공격했고 내무부장관ㆍ치안국장을 인책 사임으로 몰아세웠다.
내가 비서가 된 것은 김대중 선생이 오랫동안 목포를 떠나 있었기 때문에 고향에 잘 아는 사람이 적은 것을 보완해 주기 위해서였다. 김대중 선생은 나의 고향 선배이며 목포상업학교 4년 선배이다. 나는 동국대를 졸업한 뒤 미군의 통역을 하기도 하고, 목포여고에서 교편을 잡고 있어서 각계각층의 사람들을 알고 있었다. 이 사람이야말로 훌륭한 정치가가 될 것이라는 기대에서 돕게 된 것이다. (주석 5) 김대중은 당선되었지만 야권은 참패하였다. 나경사의 비밀지령 폭로에도 지역 단위의 관권선거와 물량공세가 계속된 데다 야권 후보의 난립 때문이었다. 공화당이 총 투표의 32.4% 밖에 얻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전체 175개 의석 중 110석을 차지하여 압승을 거두었다. 준여당인 자유민주당이 9석, 야당에서는 민정당이 41석, 민주당은 13석에 그쳤다. 이번 선거의 주목할 만한 사실은 공화당 공천으로 출마한 전 자유당 계열 유력자들이 모두 당선됨으로써 공화당이 이승만 정권의 유산을 고스란히 이어받게 되었다는 점이다.
1963년 12월 17일 이른바 제3공화국이 출범했다. 3공체제는 △ 의원내각제 폐지 및 대통령중심제로 복귀 △ 긴급명령권, 긴급재정경제처분권 등 대통령에게 강력한 권한 부여 △ 국무회의를 의결기관에서 심의기관으로 전환 △ 양원제 국회를 단원제로 환원 △ 헌법개정에 국민투표제 도입 등을 골자로 하였다.
5ㆍ16 쿠데타 세력이 민간인의 옷으로 갈아입고 출범한 3공의 박정희 정권은 원내 3분의 2에 가까운 의석까지 차지하여 4월 혁명의 민족ㆍ민주이념에 역행하는 정책노선을 걸었다. 외세에 의존하여 남북간 군사대결 및 체제경쟁을 벌이는 한편 정권유지를 위해 외자의존적 경제개발을 추진했다.
제6대 국회는 이 해 12월에 개원되었다. 김대중은 지난 잃어버린 세월을 보상이나 하듯이 의정활동에 전념하였다. 국회도서관을 가장 많이 이용하는 의원이 되었다. 김대중의 존재는 곧 국회에서 부각되었다. 충분하게 준비한 자료를 들고 국회 상임위원회에서 정부 각료들을 상대로 일문일답의 형식으로 질의전을 전개하였다. 그때까지 두루뭉수리식의 질문과 비슷한 답변 형식으로 길들여졌던 국회와는 전혀 다른 방식이었다. 김대중은 주로 국회건설위원회와 재경위원회에서 활동하였다.
김대중의 예리한 질의와 자료 제시로 국무총리와 장관들이 쩔쩔매고, 동료 의원들 사이에도 그에 대한 평가는 높아져 갔다. 개원 뒤 6개월 동안 그는 13회의 최다 발언자가 되었고, 국회에서 주요 문제가 생길 때마다 구체적인 사례와 수치를 들어 정부 여당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박정희 대통령도 주목하게 되었다.
박 대통령도 국회에서의 내 활동을 알고 있었다. 처음으로 국회라는 단체를 상대해야 했던 그로서는 사사건건 문제점을 짚고 나서는 내가 의식되지 않을 리 없었던 것이다. 한번은 국무총리와 모든 각료들이 내 추궁에 쩔쩔매고 돌아간 뒤 김대중이라는 한 사람에게 모두가 휘둘렸다고 대통령에게 역정을 들었다는 얘기도 들려왔다.
그렇다고 내가 비판을 위한 비판을 한 건 아니다. 나는 언제나 좋은 대안이 없는지 궁리했고 또한 그걸 제시하기 위해 노력했다. (주석 6)
김대중의 의정활동은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주석
1) 이희호, 앞의 책, 118쪽.
2) <나의 삶 나의 길>, 108쪽.
3) 중앙정보부, 앞의 자료, 33쪽.
4) <김대중 자서전(1)>, 175쪽.
5) 앞의 책, 175~176쪽.
6) 앞의 책, 11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