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엊그제 어떤 동문 모임에서 고 장기붕 교수님에 관한 일화가 화제였기에 다시금 선생님을 그리며 이 글을 함께 공유하고자 합니다.
제자 사랑의 진수 張基鵬 교수님 영전에(2012년 4월 2일)
정운종(전 경향신문 논설위원)
평소에 늘 감사한 마음을 간직하며 존경해 마지않았던 장기붕 선생님! 이렇게 갑자기 비보를 듣고 보니 너무나 가슴이 아픕니다. 삼가 명복을 빌며 졸지에 상을 당하신 유가족 여러분께 충심으로 조위를 표합니다.
무릉도원을 연상케 하는 은행잎들의 반김과 찬사와 축복이 넘실대는 대성로에서 인, 의, 예, 지의 학풍을 다진 학생 시절은 성균인 누구에게나 잊지 못할 추억이지만 선생님께서 충남 천안 입장 고향마을에서 저서 국제법을 쓰실 때 제가 옆에서 원고를 정리해 드렸던 일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쳐 갑니다. 저서의 원고가 거의 끝날 무렵 입영 영장을 받고 군에 입대하던 날 동구 밖까지 나오셔서 작별 인사를 하시던 그 자상한 모습이 눈에 아른거려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선생님!
제가 제대를 하고 시골에 있을 때 가장 먼저 걱정을 해주시며 서재를 살림방으로 꾸며 놓고 빨리 아이들 대리고 상경하라며 보살펴 주신분이 바로 선생님이셨습니다. 제가 대학을 졸업하고 군에 갔다 제대를 한 뒤 시골집에서 실업자 신세로 있을 때도 서재를 비우시고 부엌까지 손수 꾸며 저희 내외를 불러 올려 살림을 차리도록 배려 해주신 장기붕 교수님과 이원석 교수님 내외분을 제가 어찌 잊겠습니까.
선생님은 학생들 하나하나를 개별적으로 대하시는 기분으로 강의를 하셨고 100분 강의에 단 1분도 허실이 없으실 정도로 빈틈없는 강의와 자상한 인품으로 강의실 분위기는 항상 진지했고 배움의 열기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선생님의 국제법 강의는 언제 들어도 정력이 넘쳐 있었고 항상 제자들에게 배움의 의욕을 고취 시켜주시고 실의와 좌절에 빠지지 않도록 보살펴 주시던 인간미는 많은 제자들이 장기붕 교수님을 존경해 마지않는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였다는 생각에 다시금 머리가 숙여 지옵니다.
하지만 선생님! 저는 그동안 선생님의 은혜를 그토록 많이 입었음에도 제대로 선생님께 사은의 뜻을 표해 드리지 못했습니다. 어느 해인가 제천으로 이사를 하셨다는 말씀을 듣고 댁으로 찾아뵈었을 때 거실에 조그만 탁구대를 설치해 놓고 내외분이 탁구를 치며 소일 하신다는 말씀을 듣고 노후의 무료함을 달래고 계시는 선생님이 안쓰럽게만 느껴졌습니다.
시국상황에 늘 민감하시었고 정론을 펴라고 강조하시던 선생님!
남북관계에 유난히 관심이 많으셨던 선생님이 원칙과 정도를 강조하시며 고견을 들려주시던 선생님의 전화 속 낭랑한 목소리가 지금도 귀에 쟁쟁합니다.
선생님은 잠시도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시지 않으셨습니다. 틈만 나면 바둑을 두시며 천하를 요리하셨고 때로 약주가 과하실 때도 없지 않으셨지만 절대로 몸매가 흩으러 진 채 제자들을 대하지 않으셨습니다. 어느 날 선생님은 제천에서 다시 천안으로 이사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저는 신문 방송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매주 수요일 독립기념관 출근, 장기붕 전 성대교수’ 유난히 돋보이는 신문 제목을 보며 눈을 의심했지만 그 분이 바로 내가 존경하고 모시던 선생님이라는 사실을 알고 한동안 할 말을 잊었습니다. 장 교수님께서 그런 사연이 계셨구나! 한편 놀라며 신문기사를 읽어 내려가는 동안 다시 한 번 선생님의 고매한 성품에 옷깃을 여미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매주 수요일 오전 8시 30분만 되면 점퍼 차림의 노부부가 쌀쌀한 아침 공기를 가르며 충남 천안시 독립기념관 제5전시관에 높이 5m,폭 2m의 철제 사다리를 힘겹게 끌 고와 이곳에 전시된 안중근 의사동상을 정성스럽게 닦는 모습! 장기붕 교수님의 노년은 이렇게 거룩했습니다.
장기붕교수 부부(왼쪽)와 청풍호반에서장 교수님은 42년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된 형 때문에 일제의 감시대상에 올랐고 44년 징병령이 시행되자마자 일본군에 강제로 끌려가 일본군에 편제됐던 것이 평생 마음에 걸려 속죄하는 마음으로 안중근 의사의 동상을 닦기로 결심했다고 생전에 술회 하셨습니다.
지난 1989년 정년퇴임한 뒤 충청북도 제천에서 10여 년 간 생활하셨던 선생님이 천안으로 주소를 옮긴 것도 독립기념관에서 봉사활동을 해야겠다고 결심한 때문이라니 선생님의 깊은 뜻을 이제야 알게 된 저로서는 그저 부끄러움이 앞설 뿐입니다.
선생님이 심장질환 수술을 받고 사모님 역시 허리 디스크로 고생하고 계신다는 사실도 이 신문 기사를 읽고 알았으니 이토록 무심하고 불민한 제자가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뒤늦게 속죄한들 벌서 선생님은 가시고 안계시니 참으로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선생님의 타계는 국제법 학계의 거두를 잃은 슬픔으로 제자들 모두가 오열하고 있습니다. 우리 후진들은 선생님이 학계에 남기신 크나큰 업적은 물론이고 제자 사랑이 남다르셨던 고매하신 성품을 영원히 잊지 않을 것입니다.
성법 5.7 동기회 안순영 회장과 이형국 박사와 함께 선생님의 영전에 마지막 작별을 고하고 제자들을 남달리 사랑하셨던 선생님의 값진 삶을 회상하며 다시 한 번 머리 숙여 선생님의 명복을 빌었습니다.
아무쪼록 후고의 염려를 훌 훌 떨쳐 버리시고 모든 번뇌도 아픔도 없는 하늘나라에서 부디 편안한 마음으로 영생을 누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