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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오씨 대종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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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대댁 손자 글방 스크랩 계룡산(鷄龍山)(1) 산세와 신도안
오대댁손자 추천 0 조회 170 07.11.20 10:19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지난 일요일 (2007-11-18) 동문회 따라 국립공원 계룡산(鷄龍山)에 다녀왔다.

이에 글을 쓰는데 한 편에 싣기는 너무 많아 (1) 산세와 신도안, (2) 갑사와 동학사의

두 편으로 나누어 올린다.

 

삼남대로(三南大路)

 

경부고속도로를 따라 가던 버스는 천안에서 논산 가는 고속도로를 택한다.

이쪽 고속도로는 몇 년 전 새로 생겼지만 실은 옛 삼남대로에 더 가깝다.

삼남대로 노정(路程)은 춘향가 중 이몽룡이 암행어사로 남대문을 떠나

남원으로 내려가는 구절에 잘 나타나 있어 천안부터 여산 부분을 읽어 본다.

 

…..천안 삼거리 숙소하고, 도리티 얼른 넘어 김게 역마 갈아타고

덕평 원터 활원 광정리며 모란(毛老院) 금강 얼른 건너 공주감영 들어가서

공북루 구경하고, 늘티고개 높은 행길 부처당리 얼른 지나 경천(敬天)와서

숙소하고, 노성읍 풋기다지 지나와서 은진 읍내 작다리 얼른 지나

여산 읍내 숙소하고……

 

위에 나오는 지명-도리티, 김게(금제), 덕평, 활원, 모란 등은 지금도 찾으려면 찾을 수 있다.

논산 지나 여산(전북 익산 관할)은 옛 삼남대로에서 호남의 입구다.

지금도 여산 휴게소쯤 가야 비로소 전라도 풍정이 나는 듯 하다.

 

 

차현(車峴)

 

논산 쪽으로 방향을 튼 버스는 곧 차령터널을 지난다. 차령(車嶺)-차현(車峴)은

삼남대로의 주요 길목일 뿐 아니라 고려 태조 왕건이 죽기 직전 943년 봄

박술희를 통해 남긴 유언-훈요십조(訓要十條)중 괴이하기 짝이 없는 제8조로 유명하다.

 

…차현(車峴) 이남과 공주강(公州江) 바깥은 산천(山川)이 배역(背逆)하니.. 운운

 

공주강이란 금강이 공주를 지날 때 이름이다.

위 구절을 언뜻 읽으면 호남을 가리키는 것 같지만 충청도의 공주, 부여, 논산도 포함된다.

일제(日帝) 식민사관의 대표적 학자 금서룡(今西龍-이마니시 류)가 1910년대 이미 두 편의

논문을 발표하여 훈요십조 위조설을 제기한 이래 진위 시비가 끊이질 않고 있다.

훈요십조가 왕건이 진짜로 남긴 유언이던 아니던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실린 것으로 보아 고려 시대 풍수관에 그런 부분이 있었을 것 같다.

 

 

 

사진 : 구글 차령과 공주

 

차령에서 얼마 가면 공주강이다. ‘강 바깥’을 공주강 북쪽으로 해석하여

문제의 8조 지역이 차령과 금강 사이 아주 좁은 지역이라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안팎의 기준은 왕경-개경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공주강 바깥은

개경에서 보았을 때 강 저쪽 곧 금강 남쪽이다. 차령과 공주강이 거푸 나온 것은

풍수에는 원래 산과 물이 따라 다니니 같은 내용을 산과 물로 번갈아 말한 것이다.

 

인터넷이나 종이 책에 이 8조에 관하여 수 없이 많은 글이 있으나 분류하면

1)(내용이 비록 황당하지만 왕건이 그런 말한 것은) 사실

2) (신라계가 백제계를 깎아 내리기 위하여 악의적으로 만든) 위조

3) 범위가 공주강과 차령사이

4) (왕건의 후백제 견훤에 하도 혼이 나서) 후백제 지역설

(따라서 후백제 판도가 아니었던 나주 이남지역 제외)

 

그 외는 대부분 재탕이나 아류다. 차현 이남 공주강 바깥의 산천이

왜 배역하느냐에 대하여도 1) 산과 물이 역(逆)으로 흐른다는 설

2) 산과 물이 풍수상 반궁수(半弓數)라는 설 등이 있으나 더 이상은 (略)한다

 

최창조 씨의 ‘호남 산천 배역론과 정여립의 모반” 읽어 볼만하다.

http://www.hani.co.kr/section-005060000/2000/005060000200001102003001.html

 

 

이제 버스는 차령 터널을 지나 배역(?)의 땅으로 들어가 공주강-금강을 건너

널티(板峙)고개 (위 춘향가 중 늘티고개)에서 좌회전 하여 갑사(甲寺)로 간다.

 

 

 

계룡산 이름의 유래

 

다음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신도안 정도 때 무학대사가 산세를 보니 금계포란(金鷄抱卵) 형에

비룡승천(飛龍昇天)형이라 둘 중 계(鷄)와 용(龍)을 따서 계룡산이라는 설(說)

 

다른 하나는 천황봉에서 쌀개봉, 삼불봉으로 이어지는 연봉(連峰)이

닭 벼슬을 한 용 같이 생겨서 붙었다는 설(說)이다.

 

이런 것은 재미로 들으면 되지만 잠깐 따져 본다.

풍수에서 능선은 힘차게 벋던 아니던 다 용이다.

또 봉우리들도 닭벼슬 같이 생긴 곳 많다.

문경 새재 동쪽 계립령도 닭벼슬 같다고 붙은 이름이다.

조사는 못 했지만 어쩐지 무학 이전에도 계룡산이라고 불렀을 것 같다.

 

 

사진 : 삼불봉에서 본 연봉(連峰). 이어지는 능선이야 당연히 용이고

봉우리들 모습이 닭벼슬 같은지? 각자 판단하기를!

 

 

계룡산에 이르는 산 줄기-맥(脈)

 

공주-금강 북쪽의 산들은 백두대간이 속리산을 지날 때 뻗은 가지 금북정맥이고,

공주-금강 남쪽 충청도 산들은 금남정맥(錦南正脈)이다.

 

백두대간이 전라도 덕유산 아래 영취산에 와서 본 줄기는 지리산으로 가고

서북으로 곁가지가 나오니 금남호남정맥이다. 이 곁가지는 마이산에서 다시

둘로 갈라진다. 한 가지에서 전라도 일대 산봉우리가 맺히니 호남정맥이고,

다른 한 가지가 북으로 올라 오는 금남정맥으로 계룡산은 그 끝부분이다.

 

 

 

사진 : 삼불봉에서 본 금남정맥. 멀리 덕유산 아래 영취산에서 시작하여

마이산에서 호남정맥과 갈라진 후 북으로 계룡산까지 왔다.

 

 

 

사진 : 동국여지지도(공재 윤두서, 1710년 경)

 

백두대간 갈래를 더 이야기 해 본다. 우리나라 모든 산의 뿌리는(山之祖宗)

백두산이다. (또는 그렇다고 조상들은 생각했다)

 

백두산에서 나온 대간(大幹)-큰 줄기가 함경도를 가로 질러 함흥에 와서

동해안을 따라 내려 가다가 금강산 북쪽 안변 철령에서 한 줄기가 갈라져

철원을 지나 경기도에 들어와 운악, 운길, 예봉, 불암, 수락, 도봉을 거쳐

삼각산에 이르니 한북정맥(漢北正脈)이다.

 

철령에서 백두 큰 줄기는 금강산, 설악산, 오대산을 거쳐 태백산에 이른다.

태백에서 대간(大幹)은 서쪽으로 틀어 소백, 문경 주흘산, 속리산으로 가고

곁 가지가 동해 바닷가를 따라 내려가니 낙동정맥(洛東正脈)이다.

 

속리산에서 백두 원줄기는 덕유산으로 가고 한가지가 서북으로 돌아 나가니

한남금북정맥이다. 한남금북정맥은 안성 칠현산(또는 칠장산)에서 둘로 나뉘어

서쪽으로 충청도 금강 북쪽의 산을 만든 줄기는 금북정맥(錦北正脈)이요,

북으로 올라와 광교, 청계, 관악산을 이루고 김포까지 간 줄기는 한남정맥(漢南正脈)이다.

 

 

사진: 산경표 (필자가 가지가 갈라지는 산 이름을 써 넣었음)

 

신도안(新都內)

 

조선 왕조가 새로운 도읍 터로 처음 계룡산 밑을 정한 것은 유명하고

그 신도안 터는 지금 계룡대 안이다.

 

실록 태조  2년( 1393 계유) 1월 19일 임금이 송경(松京)을 출발하여

계룡산(鷄龍山)의 지세(地勢)를 친히 보고 장차 도읍을 정하려고 하니…..

 

실록 태조  2년( 1393 계유) 3월 24일 계룡산에 새 도읍을 정하였는데…..

 

이렇게 해서 돌도 나르고 공사를 하는 것 같더니만

여덟 달 정도 지나 그만 둬 버린다.

 

실록 태조  2년( 1393 계유 ) 12월 11일

경기 좌,우도 도관찰사(京畿左右道都觀察使) 하륜(河崙)이 상언(上言)하였다.

 

“도읍은 마땅히 나라의 중앙에 있어야 될 것이 온데, 계룡산은 지대가

남쪽에 치우쳐서 동면, 서면, 북면과는 서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중략(中略)

 

지금 듣건대 계룡산의 땅은 산은 건방(乾方)에서 오고 물은 손방(巽方)에서

흘러 간다 하오니, 이것은 송(宋)나라 호순신(胡舜臣)이 이른 바, ‘물이

장생(長生)을 파(破)하여 쇠패(衰敗)가 곧 닥치는 땅’이므로, 도읍을 건설하는

데는 적당하지 못합니다.”

 

임금이 명하여 글을 바치게 하고 중략(中略).…

새 도읍의 역사(役事)를 그만두게 하니, 중앙과 지방에서 크게 기뻐하였다.

 

(*)건방(乾方) : (약간 서쪽으로 치우친) 남쪽

손방(巽方)   : (약간 동쪽으로 치우친) 북쪽

 

 

사진 : 팔괘관24산도 중 건방과 손방.

실재로 금남정맥은 계룡산 남쪽에서 오고 금강은 북쪽에서 온다

 

계룡산의 문제

 

하륜의 상소 요점은 신도안이 너무 외지고 풍수 상 문제 두 가지였다.

 

처음 문제 한양에 비해 너무 외지다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둘째 풍수는 필자로서 판단할 지식이 없다. 그러나 물 문제라면 명확하다.

 

식수는 신도안 옆에도 갑천이 있다. 문제는 옛날 우리나라 수송이 주로

조운(漕運)이라는 점이다. 육지의 길은 사람이 걸어 다니는 정도고 물자는

배로 날랐다. 그런데 계룡산은 조운(漕運)이 되지 않는 곳이다.

 

….충청도는 금강(錦江) 하나로 근원은 비록 멀지만 공주(公州) 동쪽은

물이 얕고 여울이 많아 배가 통하지 못한다. 부여(扶餘) 은진(恩津)에서

비로소 바다 조수와 통하여 백마강 이하 진강 일대는 모두 배편이 통한다...

... 중략 ..

온 나라 안에서 한강이 가장 크고 근원이 멀며 조수를 많이 받는다.

택리지 복거총론(卜居總論) 생리(生利) 중에서

 

지배구조-좌식자(坐食者)들을 먹여 살릴 로지스틱에 결정적 결함이 있었다.

계룡산에서 배가 통하는 강경진(江景津) 까지는 근 백리인데 그러나 한양은

바로 배가 들어 오지 않는가? 계룡산은 처음부터 ‘깜’이 되지 않았다.

 

 

태조에게 신도안으로 정도할 뜻이 정말 있었을까?

 

과정을 보면 태조(太祖)가 계룡산에 도읍할 뜻을 정말 가졌는지 의심스럽다.

지금 큰 돌이 몇 백 개 남아 있다 하나 공사를 열심히 한 것 같지 않다.

또 하륜의 상소 한 장으로 주저 앉았다는 것이 이상하다.

 

 

풍수는 주관적이라 보는 사람마다 달라 격렬한 논쟁이 따르기 마련이다.

실록에는 왕릉을 정할 때 마다 풍수 가지고 다툰 기록이 많이 나온다.

능 보다야 도읍이 훨씬 중요한 것 아닌가?

그런데 계룡산 도읍에 대한 풍수논쟁은 너무 싱겁게 끝나버린다.

 

언제 어디서나 수도를 옮길 때는 기득권 세력의 강력한 반발이 있다.

지난 수도 이전 논쟁 때 경국대전부터 온갖 이야기 다 나왔지만

결국 반대의 본심은 서울 경기 사람들 집값 떨어지는 문제 아니던가?

 

비록 위작(僞作=가짜) 시비가 있지만 중국의 아득한 옛날 일을 적은 책 상서(尙書-

書經이라고도 함)에도 천도의 어려움이 나온다. (=)나라 때 도읍이 홍수로

살기 어려워 옮기려 하나 귀족들이 반대하자, 반경(盤庚)다음과 같이 말한다.

 

“ …내가 천도하려는 것은 장차 하늘의 명령을 받들어 이어가려고 함이지

너희를 위협하려는 것이겠느냐, 오히려 너희를 받들고 기르고자 함이다…”

 

고구려가 도읍을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옮긴 것이 교과서에는 장수왕 때로

간단히 나오지만 동천왕, 광개토왕, 장수왕을 지나 후대 까지 근 200 년이 걸렸다.

그럼에도 귀족들이 국내성파와 평양파로 갈려 거의 내전 수준으로 싸웠다.

고구려 멸망 주요 원인 중 하나가 귀족들의 분열인데 이 분열이 국내성에서

평양 천도를 둘러 싼 싸움이 시발이라는 주장이 있을 정도다.

 

위진 남북조 시대 선비족 탁발부(鮮卑 拓跋部)가 세운 북위(北魏)는

처음 도읍이 평성(平城) 지금 산서성 대동(大同)이었다. 선비족(鮮卑)이

북중국을 평정하자 평성이 수도로서 너무 외지다는 문제가 나왔다.

 

효문제(孝文帝) 때 낙양(洛陽)으로 옮기려 해도 귀족들이 반대한다.

서기 493년 효문제는 남정(南征)-동진(東晉) 정벌에 나선다.

당시 북위(北魏) 국력은 동진 정벌이 무리였다. 대신들은 원정에 나선 효문제의

 말 아래 엎드리며 간한다. 그러자 효문제는 대군을 일으켜 그냥 돌아갈 수 없다.

당장은 남정을 못하더라도 중원에 도읍하여 앞일을 도모하겠노라 한다.

대신들 생각에 잘못하면 나라가 망할 전쟁 보다는 천도(遷都)가 낳았다.

이리하여 대신들이 만세 부르는 가운데 효문제는 낙양으로 도읍을 옮겼다.

 

효문제는 전쟁 할 생각이 없었다. 동진을 정벌한다고 대군을 일으키니 놀라

말리는 신하들에게 양보하는 척하며 그럼 도읍이라도 하고 옮긴 것이다.

 

조선 태조의 본심도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한양으로 옮길 때 개성 신하들이 반대한 것은 유명한 일이다.

오죽하면 정종 때 다시 개성으로 갔을까? 계룡산은 그냥 해본 소리로

놀란 신하들에게 그럼 한양이 어떨까 하고 흥정을 하고, 하륜의 상소는

모양새 쌓기 아니었을까? 그래서 새 도읍의 역사(役事)를 그만 두자

 “중앙과 지방에서 크게 기뻐’ 한 것 아닐까?

 

 

정도령과 신털이봉 전설

 

이성계가 신도안을 돌아 볼 때다. 어느 날 비몽사몽 간에 백발 할머니가 나타나

"여기는 정도령의 도읍지니 다른 곳으로 가라" 고 한다.

 

이성계가 "지금 주춧돌까지 놓았는데 어떻게 하란 말이냐?" 고 하자

할머니는 "공사를 계속하면 앞으로 나라에 큰 화가 미치리라 한다.

 

할 수 없이 이성계는 "떠날 테니 어디에 도읍을 정해야 할지 가르쳐 달라

고 부탁한다. 이에 할머니가 "여기서 5백리 북쪽으로 올라가 도읍을 정하라"

일러주니 그곳이 조선 5 백 년 도읍지 한양이라는 것이다.

 

태조가 꿈에서 깨니 할머니는 홀연히 사라졌다. 태조는 신도안 공사를 포기하며

"흙 한줌이라도 가져가서는 안 된다"는 할머니 말에 따라 일꾼들 신에 묻은 흙을

한곳에 털게 하니 그 흙이 쌓여 신털봉이 되었다 한다.

 

인터넷에서 본 신털봉은 계룡대 안 방공 레이다 기지 근처 조그만 언덕이다.

그러나 이 날 산행이 계룡대를 볼 수 없는 위치라 사진을 찍지 못하였다.

 

 

십승지지(十勝之地)

 

계룡산에서 공주강 넘어  유구 마곡 간은 이른 바 십승지지(十勝之地) 중 하나였다.

 

정감록에 이르기를….

 

..도둑이 4번이나 들어 도둑질을 하지만 반드시 2번은 다시 일어설 것이고,

관악산이 안산이 되었으니 왕궁에 화재가 3번 일어날 것이며, 단 위에

불꽃이 일어날 것이다. 위에서는 근심하고, 아래에서는 흔들릴 것이며,

아전이 태수를 죽일 것이고, 삼강오륜이 영영 없어질 것이다."라고 말했다.

 

심이 "우리 세 사람이 서로 마주 하였으니 무슨 말인들 못하겠는가?

신년(申年) 봄 3월과 성세 가을 8월에 인천과 부평 사이에

밤에 배 1천척이 닿고, 안성과 죽산 사이에 송장이 산처럼 쌓이며,

여주와 광주 사이에 사람의 그림자가 영영 끊어지고, 수성과 당성 사이에

흐르는 피가 내를 이루며, 한강 남쪽 1백리에 닭과 개의소리가 없어지고,

사람의 그림자가 아주 없어질 것이다." 라고 말하자,

 

정감이 "장차 이 일을 어찌 할 것인가?" 라고 탄식했다.

이에 심이 말하기를 "몸을 보존할 땅이 열 군데 있으니, 중략(中略)

여섯째는 공주 정산 마곡이며,

 

또한 남사고 비결에 이르기를,

 

공주 유구 마곡 두 강 사이는 병란을 피할 만한 땅이다.

 

 

사진: 구글로 본 유구 마곡간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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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7.11.20 10:33

    첫댓글 닭벼슬모습은 보이는데 용은 안보여요 아름다운 계룡산 자세히보니 더욱 좋군요?귀중한자료 백과사전입니다 우리 함오방의 가장 자랑이구요 늘 감사드립니다,

  • 07.11.20 13:52

    잘보았습니다 공부 많이 한거 같아요 감사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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