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봉길 의사 순국일에 붙여-카스의 박종국세상사는이야기님의 글
1932년 12월 19일
오늘 윤봉길 의사가 순국하신 날입니다.
아래 사진을 보니 가슴이 먹먹하고 슬픕니다.
눈물이 흐르면서 화가 납니다.
잊지 않고 꼭 기억해야겠습니다.
윤봉길 호는 매헌,
본관은 파평으로 충청남도 예산 출신이다.
1918년에 덕산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다음해 3·1운동이 일어나자
식민지 교육을 거부하며 자퇴하였다.
그 후 한학을 배우고
독학으로 국사와 신학문을 공부하였다.
야학을 세우고 월진회를 조직하여
농민계몽운동과 농촌부흥운동, 독서회운동을 전개했고,
교재로 <농민독본>을 직접 지었다.
1930년 3월에 망명길에 올랐다가
도중에 채포되어 잠시 옥고를 치르기도 했으나,
다시 만주로 탈출했다.
1931년 상하이로 가서 직공 생활과
야채 장사를 하면서 노동조합을 조직하였고,
영어학교에서 공부하였다.
그 해 겨울 한인애국단을 이끌던 김구를 찾아가
독립 거사를 맡겨 달라고 부탁했다.
1932년 4월 26일 한인애국단에 정식 가입하였다.
1932년 4월 29일 일본 국왕의 생일
홍커우공원에서 거행하는 전승 축하식장에
폭탄을 던지는 거사를 실행했다 .
4월 29일에 윤봉길은
폭탄이 장치된 도시락과 물통을 가지고
삼엄한 경비를 뚫고 축하식장에 미리 들어갔다.
그리고 행사가 시작되자 단상 정면에 폭탄을 던져,
일본 상하이 파견군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라 대장,
상하이 거류민단겸 행정위원장인 가와바타 데이지를 즉사시키고,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 기치사브로 중장,
제9사단장 우에다 겐키치 중장,
중국주재 일본공사 시게미스 마모루 등에게 중상을 입혔다.
거사 직후 현장에서 체포되어 일본 오사카로 압송되어,
6월 21일 군법 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그해 12월 19일에 총살당했다.
윤봉길의사의 거사를 계기로
침체에 빠졌던 독립운동은 사기를 얻었고,
독립운동 단체들이 중국의 지원을 받게 되었다.
특히 윤봉길 의거를 주도한 김구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권위가 더욱 높아졌다.
유해는 1946년에 옮겨져 효창 공원에 안장되었고,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박종국참살이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