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지 어머니는
김 진 영
어릴 때를 돌아보노라면 장독대 안 커다란 항아리와 작은 단지 옆에서 어머니와 함께 쪼그려 앉아서 나지막하게 말을 나누던 기억이 난다. 20대 초반의 어린 나이의 어머니는 속상한 일이 있으시면 그곳에 가셨다. 커다란 항아리 뒤에 몸을 숨겨서 숨죽여 눈물을 지으셨다. 하루는 당신을 찾으러 와서 곁에 앉아 있는 작은딸을 꼭 안으며 울먹이셨다.
어머니는 어린 나이에 결혼하여 ‘엄마’가 되기도 전부터 시작된 새로운 가족들과의 관계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으셨다고 한다. 흔히 말하는 ‘시월드’를 겪으신 거다. 그러던 중에 ‘엄마’가 되고 도망치고 싶은 현실에서도 자신만 바라보고 있는 아이들을 두고 도망치지 못하셨다. 특히 눈물이 많고 사고뭉치인 작은딸이 눈에 밟히신 것 같다.
엄마의 어린 시절은 힘든 가운데 늘 당차셨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집안 일손을 맡아서 하셨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 작은 몸으로 가마솥에 밥을 하고, 추운 날씨에도 멀리에서 물을 길어 오셨다고 한다. 할아버지께서 일찍 돌아가셔서 많은 것을 도맡아 하셔야 했다. 동생들을 돌보는 것 또한 엄마의 몫이었다.
그러다 직장 생활을 하던 중 행복한 가정을 꿈꾸며 결혼하셨다. 상상할 수 없는 어려움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모른 채……. 몰래몰래 우는 것으로 어려움을 삭혀 나가셨던 것 같다. 엄마 껌딱지인 나와 엄마의 눈물은 늘 함께했다. 그러다가 분가를 통해서 우리는 비로소 가족이 되었다.
어릴 때부터 늘 많은 일을 해오셔서인지 딸들에게는 집안일을 강요하지 않으셨다. 이제 시절이 바뀌었으니, 남자도 요리나 청소를 잘해야 한다며 아들에게 더 알려주시기도 했다. 지금까지 그렇게 일해온 것이 너무 힘들어서 딸들은 고생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남아 선호 사상이 강하셨던 친할머니가 계셔도 우리 남매는 아무런 탈 없이 함께 즐겁게 지냈다. 어머니가 종종 하셨던 말이 있다. “난 너희들끼리 친했으면 좋겠어. 그게 최고의 효도야!” 이 말에는 ‘힘든 시절에 내 마음을 지탱해 준 건 너희란다.’라는 뜻도 숨어있을 것 같았다. ‘엄마’라는 이유로 버티고 견디신 것이다.
나를 힘들게 한 사람이라면 인연을 끊을 만도 한데, ‘어머니’는 한결같이 효도하셨다. 할머니께 도움이 필요한 날이면 제일 앞장서서 가시기도 했고, 함께 시간을 보내며 이야기하셨다. 단지, 사랑하는 남편의 어머니란 이유로 말이다.
세월이 지나 할머니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지금까지의 잘못을 토로하셨다. 당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하시며 눈물로 말씀하셨다. 그렇게 가슴앓이의 아픔을 조금 덜어내셨을까.
더 오랜 시간이 지나 할머니께서 편찮으셨다. 그때도 ‘어머니’는 다른 지역에 있는 ‘시어머니’를 뵈러 아침 일찍 가서 늦은 저녁에 오기를 반복하셨다. 그러다가 어머니는 먼저 할머니를 우리 집으로 모시고 오는 건 어떠냐는 의견을 내셨다. ‘어머니’께 할머니는 젊은 시절 남편을 사별하고 힘겹게 살아온 사람, 또한 그 세월의 힘겨움에 사랑이 필요한 대상이셨다.
가족회의를 할 때 그 말씀을 하셨다. 나는 할머니와 함께 방을 쓰고 싶다고 했다. 남아 선호 사상이 강하셨던 할머니와 자주 말다툼을 했지만, 매번 손녀의 애교로 분위기를 풀었다. 꼬치꼬치 따지는 손녀의 모습이 자신과 닮았다며 더 예뻐하시기도 했다. 거기에 더 큰 이유가 있다면, 힘든데 더 힘들 어머니가 안쓰러워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방에는 거동이 불편하신 할머니를 위해서 요강이 준비되어 있었다. 당연하다는 듯이 요강을 내가 정리했더니, 어머니는 깜짝 놀라시며 당신이 하시겠다고 하신다. 그 말에 난 비위도 강하고, 이 정도는 할 수 있다고 했더니 눈물을 글썽이셨다.
병간호는 온 가족이 함께했다. 깨끗한 공기를 위해 자주 청소하고, 식사를 챙겨드렸다. 찝찝하지 않도록 씻을 수 있게 도와드리고, 시원하게 안마도 해드렸다. 모두 하나가 되었다.
그러다가 병세가 악화하여 할머니댁으로 가셨다. 우리 집에서는 병원 가는 길이 멀고, 할머니댁에서 병원에 다니기가 더 가깝기 때문이었다. ‘에미’ 없으면 불안해서 잠을 못 잔다는 말씀에 어머니는 할머니댁에 함께 계셨다. 매 순간 할머니를 위해 기도하시며 손을 잡아 드렸다. 마지막 순간 그 누구보다 할머니의 의지가 된 ‘어머니’셨다.
마음이 여린 어머니였지만, 병원에서 알려준 주사 놓는 방법대로 할머니께 약을 주사하셨다. 훗날 들었을 때 그게 두려웠다고 하셨다. 그 두려움을 이기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겨내신 것이다. 단지, 가족을 사랑하는 그 마음 하나만으로…….
어머니를 생각하면 장독대 항아리들이 떠오른다. 커다란 항아리 뒤에 숨죽여 울던 여린 엄마의 모습. 단지, 가족 사랑 하나만으로, 단지, ‘어머니’란 이유만으로 버티고 견뎌 온 세월…….
어머니, 사랑합니다. 따스한 봄날 장독대 같은 어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