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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선생과 이 선생은 대학동기다.
예과시절 비교해부학 실습시간에 필요한 개구리는 김 선생이 논밭을 다니며 조달했고, 대신 이 선생은 시험기간에 자신이 정리한 노트를 김 선생에게 제공했다. 그런 협력적 우호관계는 본과에서도 이어졌다. 아무도 피해 갈 수 없는 해부학 실습시간이 되면 김 선생은 메스를 양 손에 들고 다녔다. 이 선생이 사체실습에 잘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기 몫의 실습을 끝낸 김 선생이 이 선생 자리에 가서 대신 메스를 잡았던 것이다. 그래도 굳이 셈을 하자면 대학시절 내내 평균적으로 덕을 본 사람은 김 선생이다.
쓸데없는 일에 관심이 많아서 종종 수업을 놓치기 일 쑤였던 김 선생의 노트를 채워준 사람도 이 선생이었고, 그 말은 곧 이 선생이 아니었다면 김 선생이 무사히 6년만에 졸업을 할 수 있었다는 보장은 없었을 것이라는 것이 주변 사람들의 총평이기 때문이다. 물론 김 선생은 지금도 이 선생이 자기가 아니었으면 졸업을 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우긴다.
어쨌건 그렇게 6년을 같이 보냈던 두 사람이 우여곡절 끝에 결혼을 했다. 누가봐도 이 선생이 손해 본 결혼이지만, 김 선생은 이 문제도 자신이 손해 본 결혼이라고 주장한다. 한 대 쥐어박아도 마땅한 철면피같은 주장이지만 김 선생은 그래도 그것이 남자의 자존심이라고 믿는 눈치다.
의사부부의 결혼은 좋은점과 나쁜점이 있다. 그것도 서로 연차가 차이가 나는 선후배 간이라면 문제가 다르지만 동기간이라면 곤란한 점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이유는 당연히 졸업후의 과정 때문이다. 대개 의대를 졸업하면 인턴을 마치고 레지던트를 거친다. 그 과정에서 한 번의 낙오도 없이 일사천리도 전문의를 취득해도 요사이는 종합병원에서 전임의 과정을 2년을 더 거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요사이 의학전문 대학원을 진학하는 학생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답답한 마음이 들 때가 많다. 과거 의대체제에서는 꽤나 낭만이 있었지만 전문대학원 체제에서는 그것이 많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일반화 할 수는 없지만 의학전문대학원을 진학한 사람들중에는 적지 않은 수가 화려한 직업으로서의 ‘의사의 꿈’을 꾸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 경우는 상당수가 중간에 심한 자괴감에 빠져들게 된다.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준비하던 늦깎기 도전자들이 새로 시작하기에는 너무 많은 기회비용을 소모하게 되기 때문이다. 물론 의사라는 직업이 과거와 다르다는 사실은 접어두더라도 그렇다. 그래서 의학전문 대학원에 진학하려는 사람들은 재고, 삼고를 거쳐 스스로가 이 일을 선택하려는 이유가 무엇인지 신중하게 결정하는 것이 좋다. 그러니 동기가 부부가 되면 각자 과정을 밟느라 정상적인 가정을 꾸리는데 그만큼 오랜 기간이 걸리게 된다.
두 사람도 그랬다.
김 선생은 외과계열을 선택했고, 이 선생은 내과 계열을 선택했다. 게다가 각자 근무하는 병원도 서로 다른 곳이었다. 그러니 두 사람이 만나는 일이래야 한 달에 한 두번이 고작이었다. 그 점이 부부의사의 나쁜 점이다. 하지만 좋은 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아내가 하루건너 한번씩 집에 들어오지 않아도, 남편이 연락도 없이 집에 들어오지 않아도 당연히 그런가보다 이해를 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또 각자가 직장에서 일어난 일을 설명하기에도 간편한 점이 많다. 그러니 보통의 부부가 서로 영역이 달라서 이해의 폭이 좁아지는데 비하면 그점은 좋은 편이다.
한데 문제는 임신과 출산이다. 병원이라고 해서 특별히 더 나은 배려는 없다. 아니 사실은 산모에게는 가장 가혹한 곳이다. 간호사들이나 여자의사들은 출산 당일까지도 일하는 경우가 많다. 병원은 기본적으로 근무자 중심이 아니라 환자 중심으로 돌아가는 곳이기 때문이다. 요즘은 덜하다지만 예전에는 출산후 3-4주면 다시 근무를 시작하는 경우가 대부분인 곳이 병원이었으니, 특히 3교대를 하는 간호사들의 경우에는 모성건강 측면에서는 가히 최악의 조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구나 예쁜것만 보고 좋은 것만 생각해야 한다는 산모의 태교는 꿈도 꿀 수 없다. 노동량 측면에서는 더 힘든 여성들도 많겠지만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병원이라는 공간의 특성상 이보다 더 극적인 곳은 없기 때문이다.
두 사람도 마찬가지 문제에 봉착했다. 이 선생이 임신을 했기 때문이다. 김 선생 입장에서는 매일매일이 노심초사 였다. 점점 배가 불러가는 아내를 만날 짬을 내는것 조차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선생은 대개의 동료들이 다 그랬기 때문에 본인은 담담하게 자신의 일을 해나갔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출산예정일이 다가왔다..
의사나 간호사처럼 병원 근무자들은 초산의 경우 아무래도 신경을 덜 쓰게 된다. 동료 의료진들이 가까이 있다는 점과, 초산은 진통에서 출산까지 꽤 시간이 걸린다는 점을 스스로가 잘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 대부분 직장에서 일하는 여성들은 임신 출산으로 자리를 장기적으로 비우게되는 일을 당당하게 여기기 보다는 대신 동료에게 짐을 지운다고 여기기가 쉽다. 그래서 직장 여성들은 대개 출산전에는 거의 임박해서까지 일을하고 출산후에 조금이라도 더 쉬려고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의사나 간호사등 병원 근무자들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날 김 선생은 하루종일 수술 스케쥴이 잡혀 있었고, 이 선생 역시 일정이 한 시간의 여유도 없이 빠듯했다.
김 선생은 예정일이 다가오자 마음이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이 선생이 근무하는 병원에서 출산을 해도 되지만, 그렇게되면 잠시라도 짬을 내서 산모와 아기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사라진다. 그래서 결국 이 선생이 일단 진통이 오면 김 선생이 근무하는 병원으로 옮겨서 출산 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수술이 진행되는 내내 이 선생으로부터 연락이 없었다.
이 선생은 거의 저녘때가 되어서야 진통이 왔다. 그것도 농약을 마시고 응급실에 도착한 혼자를 진료하던 중에 갑작스럽게 시작된 것이다. 김 선생은 수술중에 그 사실을 전달 받았고, 때문에 우선 자기가 근무하는 병원으로 옮기라는 전언 밖에 할 수 없었다.
그때부터 김 선생의 심장이 두근거리고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세상의 누구던 그 순간에는 그렇게 긴장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김 선생은 최대한 침착하게 마음을 다잡으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수술은 진행중이었고 마치려면 최소한 두 시간은 더 걸릴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다른의사에게 맡기고 수술실을 나가기에도 너무 과민한 것 같아서 최대한 천천히 수술을 진행했다.
문득 아마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이 환자 보호자의 마음도 그렇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러고보면 의사들도 가끔 보호자가 된다. 그리고 그 보호자로서의 긴장과 불안을 겪으면서 차츰 환자나 보호자들을 더 가까이 이해하게 된다. 때로는 지나치게 과민한 보호자들도 있다. 두 번 세 번 같은 질문을 하고 가족들이 돌아가면서 진료실을 찾아와서 같은 질문을 하면 수술에 지친 의사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짜증을 내기가 쉽다. 하지만 보호자들은 각기 연락을 받고 뛰어와서 의사부터 찾게 마련이다.
역지사지인 것이다.
어쨌거나 김 선생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하지만 다행히 수술은 무사히 마무리되었고 밖에 기다리는 보호자들은 수술이 원만했다는 김 선생의 설명에 안도하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다음은 김 선생 차례였다. 물론 병원직원들이 특별한 친절을 베풀었겠지만 진통이 닥친 산모가 보호자 없이 혼자서 분만실을 찾아 입원수속을 한다는 것은 그리 마음 편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김 선생은 수술을 마치자마자 고향에 있는 어른들에게 연락을 하고 곧장 분만실로 향했다.
동료의사들이 최대한 친절을 베풀면서 진료를 하고 있었다. 마침 김 선생이 들어서자 분만을 담당 할 산부인과 스텝이 물었다. ‘김선생 산모는 자연분만을 하신다는데 그래도 마취과에 연락해서 일단 에피듀랄을 걸지?. 아기가 머리가 좀 커서 힘들텐데..’. 자연 분만을 하기에는 아기 머리가 좀 크기 때문에 산모가 고생을 하게 될 것이니 아예 무통분만을 시도하자는 뜻이다.
척추 외막에 마취액을 투입하면 진통이 줄어들고 출산후에도 고통이 적다. 김 선생은 식은 땀을 흘리는 이 선생의 얼굴을 쳐다보며 ‘그렇게 하시죠. 아무래도 그게 나을 것 같네요’. 하고 답했다.
잠시후 마취과에서 도착했다. 불과 30분전에 김 선생이 수술하던 수술방에서 마취를 걸던 최선생이었다. ‘최선생 잘 부탁해요’. 김선생의 부탁에 마취과 최 선생이 고개를 끄떡이며 이 선생을 옆으로 돌아 눕게 했다. 척추사이에 작은 관을 넣기 위한 것이다. 김 선생은 그 자리를 피했다. 아무리 늘상 보는 일이지만 가족의 몸에 시술이 시작되는 것을 보고 있을 의사는 아무도 없다.
의사의 입장이 아닌 보호자의 입장이 된 것이다.
그 시간 이후 김 선생의 수술 스케쥴은 동료가 담당했다. 아무래도 평정심을 잃은 상태에서 다른 사람의 몸에 칼을 댄다는 것이 내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간이 갈수록 자꾸 손에 식은 땀이나고 마음이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아드레날린이 극도로 분비된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아버지는 그 과정을 거쳐 오늘 그들의 자식을 대면하고 있는 것이다.
분만이 자꾸 지연됐다. 분만이 쉽게 진행되지 않았다. 초산인데다 아이의 머리가 좀 큰 탓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자꾸 흘러갔다. 산부인과 선생들의 출입도 잦아지고, 약간은 긴장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산부인과 신 과장이 물었다. ‘경막마취 탓인지 진통이 너무 늦어져서 아무래도 유도분만을 해야 할 것 같은데, 일단 시도해보고 안되면 제왕절개를 하는게 어떨까 싶은데?’.
이때는 무조건 ‘예스’라고 답해야 한다는 것을 김 선생은 잘 알고 있다. 소위 vip 증후군에 걸리기 때문이다. 차라리 면식이 없는 호나자에게는 의사가 객관성을 가질 수 있지만, 환자에게 vip 대접을 해야하거나, 환자가 특별 대우를 요구하거나, 동료와 가족과 같은 경우에는 오히려 객관성을 잃기가 쉽기 때문이다. 김선생은 바로 고개를 끄떡였다.
결국 아침이 다되어서야 이 선생이 분만장으로 옮겨졌다.
김선생은 분만장 밖에서 기다렸다.
아무리 의사라고 해도 자신의 가족이 분만장에 들어가 있는데 안에서 지켜 볼 용기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초산이어서 분만장으로 옮기고도 쉽게 출산소식이 들려오지 않았다. 심장이 뛰고 손에 땀이났다.
세상의 모든 아버지가 그렇듯 김 선생도 그 순간에는 머릿속이 하얘지고 저절로 두손을 모아쥐고 있었다.
하지만 꽤 시간이 흘러도 분만 소식이 들리지 않고, 잠시후 산부인과 의사들이 하나씩 분만장으로 황급히 뛰어 들어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불길한 예감이 머리를 스쳐갔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것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중간중간 빠른걸음으로 분만실을 출입하는 간호사들이 눈을 마주치려고 하지 않았다. 직감적으로 무엇인가 문제가 생긴 것을 알아차렸지만 그 순간 김선생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의료진에게 말은 건다는것이 오히려 부담을 줄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주위에 아무도 없었다.
가족들에게 분만 다음날 천천히 오시라고 전했기 때문에 다들 지금쯤 출발 준비를 하고 있을터였다. 누군가로부터 ‘괜찮아 문제 없을거야’라는 위로를 받고 싶었다. 하지만 주변에는 다른 산모들과 보호자들의 모습만 보였을 뿐이다.
이때 김선생의 동료인 박선생이 회진을 마치고 분만장에 올라왔다. 친구가 눈에 들어오자 갑자기 안도감이 물밀듯 밀려왔다. ‘어찌되었니? 아직이야..’ 박선생의 질문에 김선생은 조용히 고개를 끄떡일 뿐이었다. 김선생의 표정을 본 박선생이 분만장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분만장으로 들어간 박선생마져 그 길로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후 이번에는 소아과 의사들이 급한 발걸음으로 분만장으로 뛰어들어갔다.
잠시 후, 분만실 문이 열리고 산부인과 과장이하 의료진들이 나타났다. 뒤에는 박선생이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잠깐의 침묵이 흐른 뒤 산부인과 과장이 입을 열었다. ‘출산을 했네. 산모는 무사하네’ . 한편으로 산모가 무사하다는 소리에 안도하면서도 ‘산모는..’ 이라는 말이 목에 걸렷다. 김 선생이 다음 질문을 하기전에 박선생이 말했다. ‘그런데 아기가 좀 문제가 있어. 울지를 않아.. 우선 생명에는 지장이 없어 보이는데 검사를 좀 해봐야 할 것 같아. 굉장한 난산이었어..’
머릿속에 싸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후 하얀 색 강보에 쌓인 아이가 하얀 강보에 쌓인 채 이동용 스트레치가를 타고 분만장 문을 열고 나타났다. 곁에는 소아과 의사 두 사람이 같이했고 아이의 얼굴에는 산소 마스크가 씌어 있었다.
그 순간 김 선생의 다리가 힘이 풀리면서 그대로 의자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산부인과 의사들은 난감한 표정으로 그 앞에 서 있고, 소아과 의사들은 거의 달리다시피 아이를 데리고 방사선과로 들어갔다. CT 검사실이었다. 박선생의 부축을 받은 김 선생이 아이를 따라 방사선과로 들어갔다. 저절로 두 손을 잡고 기도를 시작했다.
‘ 부디 저 아이에게 아무런 문제가 없기를..’
갓 태어난 아이가 세상에 나온지 몇분만에 차가운 CT 기계에 올려졌고, 곁에는 여전히 소아과 의사 한사람이 방사선 방호복을 입은 채 대기를하고 있었다. 웅웅거리는 CT 기계의 나지막한 작동음이 마치 운명의 수레를 굴리는 거대한 수레바퀴 소리처럼 느껴졌다.
방사선과 모니터에 CT 영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 모두가 침묵했다.
아이의 우측 머리에 한눈에 알아 볼 수 있을 정도로 피가 고여있었다. 김선생은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그저 중심을 잃은 시계추처럼 몸이 흔들리는 느낌이었다. 잠시후 소아신경외과와 신경과 의사들이 방사선과에 내려오고 그 자리에서 구수회의가 열였다. 즉각 수술을 하는 것이 옳은지 일단 기다리는 것이 현명한 것인지에 대한 갑론 을박이 벌어졌다. 아이는 한 달도 아닌 갓 태어난 신생아였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몰랐다. 김선생은 신경외과 과장방에서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신경외과의 입장은 수술을 해야 할 것 같지만, 그 경우 생존가능성이 극히 희박하다는 의견이었다. 한편 신경과 입장은 수술을 하지 않을 경우 치명적인 후유증이 우려된다는 소견을 내놓았다. 결정이 필요한 것이었다.
그 순간 의사로서 어떤 합리적인 판단도 이성도 모두 마비되어 버린 김선생은 그저 한사람의 보호자로서 방금 대면한 아이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해야 할 가혹한 상황에 내몰리게 된 것이다. 김 선생은 그저 박선생의 얼굴만 쳐다 볼 뿐이었다.
모두 기다렸다. 결국 반 나절 정도를 기다려 보기로했다, 더 이상 혈종이 커지면 생명의 위험을 감수하고 수술을 하고 더 이상 출혈이 확대되지 않으면 신경과에서 약물 치료를 하면서 기다려 보자는 결론이 내려졌다.
그 순간 박선생이 단호하게 말했다.
‘옮기자..!’
그랬다. 설령 기다린다 해도 일단 할 수 있는 일은 소아 뇌수술에 더 많은 경험이 있는 의료진에게 맡기는 것이 옳았다. 김 선생은 그길로 이 선생이 기다리고 있는 병실로 올라갔다. ‘ 아이가 약간 약해, 우선은 인큐베이터에서 좀 있어야 겠어’ 산모에게 주어질 충격을 우려해서 김선생은 애써 웃는 표정으로 이 선생을 위로했다.
김선생은 그 길로 아래층으로 내려가 준비된 엠블란스에 올라탔다. 아버지는 오늘 갓 태어난 아이를 차마 차가운 엠블란스 침대에 눕히지 못해 자신의 품에 안았다. 가느다란 아이의 팔에는 이미 하얀 링거줄들이 서너줄 달려있었다. 그때 이후로 김 선생에게는 앰블란스로 아기를 후송할 때마다 늘 동행하는 의료진의 품에 안기는 습관이 생겼다.
앰블란스가 출발하려는 순간 박 선생이 올라탔다.
‘나도 같이가자’
싸이렌이 울리고 김 선생과 박선생, 그리고 방금 세상의 처음 대면한 아이와 한사람의 간호사 그렇게 네사람을 태운 엠블란스가 서울로 출발했다.
엠블란스가 출발했다.
가운을 입은이래 환자를 이송하면서 늘 타왔던 엠블란스다. 그러나 의사가 아닌 보호자의 입장에서 서버린 김 선생에게 싸이렌 소리는 마치 벌집을 침공당한 벌들이 보호하려 필사적으로 날갯짓을 하며 윙윙거리리는 아우성처럼 느껴졌다.
품안에 아이는 지금 자신이 어떤 운명인지도 모른 채 두 눈을 또랑또랑하게 뜨고 김 선생, 아니 아버지의 얼굴을 올려다 보고 있었다. 김 선생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주르륵 흘러 내렸다. 눈물은 김 선생의 턱을 타고 아이의 이마에 떨어졌다.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안타까운 장면을 바라보던 박 선생의 눈에도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엠블란스가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동안 김 선생도, 박 선생도 평생 흘릴만큼의 눈물을 한꺼번에 모두 쏟아냈다.
김 선생이 잠시 고개를 들어 박선생의 얼굴을 올려다 보았다.
벌개진 박 선생의 눈에서 그칠줄 모르고 흐르는 눈물을 보는 순간, 김 선생은 ‘ 일생동안 언젠가는 내가 너를 위해 이만큼의 눈물을 흘려주겠다’고 맹세했다.
이윽고 엠블란스가 목표로 했던 대학병원에 도착했다. 엠블란스의 문이 열리고 김 선생이 아이를 품에 안고 내리자 해당병원 응급실에서 이동용 스트레치카를 밀고 엠블란스를 마중나온 의료진이 담담한 목소리로 김 선생에게 물었다. ‘NS 환자라고 들었는데, 일단 신생아실로 옮겨서 진료하는게 나을것 같습니다. 환자 보호자는 같이 안 오셨습니까?’. 옆에 있던 박 선생이 대신 뭐라고 설명하자 응급실 당직의의 눈에 곤혹스러운 눈빛이 스쳐갔다.
아이는 신생아 중환자실로 옮겨지고, 담당 교수를 만났다.
소아 뇌 수술 경험이 국내에서 세 손가락안에 드는 경험이 풍부한 노교수였다.
그를 만나자마자 김 선생이 무릎을 꿇었다. ‘선생님 어떻게던 살려주십시오’. 그순간 김 선생은 의사가 아닌 벼랑 끝에 선 보호자에 불과했다. 노교수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쳐갔다. 하지만 김 선생은 그에게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선생님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우선 당장 수술실부터 확보해 주십시오’. 터무니없는 소리인줄 알면서도 김 선생은 그렇게 말 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의료에서 그렇게 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다.
둘 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혹시라도 수술실이 확보되지 않아서 수술이 지연될 수 있다는 절박감의 발로였다.
우선 CT 촬영을 다시 하기로 했다. 이번에는 김 선생은 CT 실에 동행하지 않았다. 차마 자기눈으로 아이의 머릿속을 들여다 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잠시동안의 회피였을 뿐 결국에는 현상된 필름을 뷰박스에 걸고 노교수와 마주 앉을 수 밖에 없었다.
‘자네도 충분히 이해하겠지만 이 경우는 판단이 힘드네, 내가 수술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이 별로 없어 보이네, 수술 후에 뇌압이 가라앉지 않으면 결국 감당 할 수 없을 거야. 성인이라면 만니톨을 충분히 써 보면서 컨트롤을 할 수 있지만 이 아이의 경우에는 이미 부종이 심한 상태고, 출혈양이 너무 많아서, 수술을 하는 것이 적당할지 모르겠네’. 솔직히 자신이 없다는 노교수의 말을 듣는순간 김 선생은 절망에 휩쌓이고 말았다.
어디선가 다시 싸이렌이 울리고 천정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냉정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잡았지만 손이 덜덜 떨리는 것을 어찌 할 수 없었다. 결국 결정을 해야만했다. 박 선생이 말했다. ‘그래도 일단 수술을 하자, 만약 안할 경우에는 결국 출혈이 멈추고 생명을 건진다고 해도, 결국은 일생동안 중증 뇌성마비로 살게되지 않겠냐. 그건 아이를 위해서도 옳지 않아’ . 하지만 김 선생의 귓가에는 수술을 할 경우보다 그대로 둘 경우에 생존 가능성은 더 크다는 노교수의 목소리가 맴돌고 있었다.
수술을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아이는 소아 중환자실에서 뇌압을 내리기 위한 치료와 지혈제등을 투여받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루, 이틀이 지나고 다시찍은 CT 사진에는 더 이상의 출혈이 진행되지 않는 것 처럼 보였다. 하지만 아이의 오른쪽 뇌의 거의 절반은 출혈된 혈종에 의해 짓눌려 있는 상태였다. 성인과 달리 아이들은 두개골이 완전히 닫히지 않아서 그나마 생존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렇게 이틀간의 시간이 흘러갔다.
박 선생은 그때까지 돌아가지 않고 김 선생 옆을 지켰다. 김 선생이 말했다 ‘차라리 우리병원으로 돌아가자. 어차피 수술을 하지 않을 거라면 여기서 계속 있을 필요는 없다. 차라리 내가 옆에서 같이 지켜주는게 나을것 같다’. 김 선생 역시 그말에 동의했다. 태어난지 겨우 삼일이 지난 아이와 김 선생, 박 선생은 다시 오던길을 따라 엘블란스를 타고 병원으로 되돌아갔다.
병원에 도착하자 다른 의료진들이 근심어린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특히 산부인과 동료들은 마치 죽을죄를 지은듯한 표정으로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 아이는 신생아 중환자실로 옮겨지고 그때부터 긴긴 투병이 시작되었다. 아이는 세상에 태어나서 아직 한번도 무엇인가를 먹지도 못하고 링거만 계속 투여받고 있었다. 김 선생은 묽은 우유라도 먹여주고 싶었지만 소아과 의료진들이 질식의 위험을 들어 반대했다.
투명유리로 만들어진 신생아실 인큐베이터 속에 작은 나무 묵주를 손목에 건 어린아이가 고단한 숨을 쌕쌕 몰아쉬고 있었다. 지금 이 아이의 눈에 비친 병원의 풍경들이 이 아이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바라본 장면의 전부였다.
아이 옆에는 여러명의 다른 아이들이 누워 있었다.
어떤 아이는 미숙아로, 어떤 아이는 황달로, 어떤 아이는 심장 수술을 받은 채로, 또 어떤 아이는 흡인성 폐렴으로 아직 엄마의 품에 한번 안겨보지도 못한 한 무리의 신생아들이 인큐베이터에 누워 생사의 고비를 넘나드는 전투를 치르고 있었다. 그중에서 싸움에서 승리한 아이는 귀환을 맞이하는 축복과 성원속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떠났지만, 결국 병마와의 싸움에서 패배한 아이는 배냇 저고리 한번 입어보지 못한채 오열하는 부모의 품에 안겨 그곳을 떠나야만했다....
길고도 긴 투병이 시작되었다.
매일 같이 CT를 촬영했다. 엄청난 양의 방사선이 아이의 몸을 관통했다. 그것을 바라보는 김선생의 마음은 새카맣게 타들어 가는 듯했다. 심지어 보호자로서 또 의사로서의 입장에 동시에 서게 된 자신의 운명을 비관했다. 차라리 아무것도 모른다면 가슴이 이렇게까지 아프지는 않을 것 같았다.
카톨릭 신자였던 김 선생은 자신이 의사였음에도 신에게 매달렸다. 아무도 몰래 일 주일간의 금식기도를 시작하며, 그간 살아오면서 저지른 모든 잘못들을 참회하고 아이의 생명만 구할 수 있다면 신에게 무릎을 꿇고 앞으로의 삶을 평생 신에게 순명하며 살겠다고 약속하고 서원했다.
다행히 아이의 머릿속에 반이나 가득 들어 찬 혈종들이 더 이상 커지지는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머릿속에 가득하던 핏덩어리가 서서히 흡수되기 시작했지만 대신 그 자리에는 수종, 즉 물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혈종이 수종으로 바뀌어가는 과정이었다. 이것은 이 상황에서 더 악화되는 것은 멈추었지만, 대신 아이의 뇌기능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선언과 다름없는 것이었다. 아이의 우측뇌는 이미 두개골의 절만을 채운 혈종으로 인해 거의 눌려있는 상태였다.
3주만에 아기가 우유를 먹기 시작했다.
그 작고 여린 입술로 입에 물려주는 젖병을 힘없이 빨기 시작한 것이다. 생존을 위한 본능이 이제야 작동하기 시작한 셈 이었다. 김 선생의 가슴에 작은 빛이 비춰지기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주변 의료진들은 여전히 수심이 그득했다. 아이가 좌측 팔 다리를 전혀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오른쪽 팔다리도 움직임도 극히 미약한 상태였다. 아이는 비록 생명은 구했지만 모두가 걱정하던 그러나 어쩌면 너무나 당연했던 경과를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고 아이의 몸무게가 늘기 시작했다. 김 선생은 모든 진료와 수술을 중단하고 아이 곁을 지키고 있었다. 이 선생은 김 선생의 강권으로 일주일만에 퇴원을 했고 퇴원하는 순간에도 자신이 낳은 아이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만약 아이가 잘못된다면 차라리 이 선생이 아이의 얼굴을 대면하지 않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김 선생이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어떻게던 아이를 회복시켜 스스로 안고 집으로 데리고 갈 생각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두 달째 되던 날에야 아이가 퇴원을 하게 되었다. 이미 이주전부터 몸무게도 많이 늘었고 상태가 호전되었지만, 삼주째되던 날 아이의 서혜부에 탈장이 발생했기 때문에 퇴원이 일주일 늦어진 것이다.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너무 많이 울었었다. 아기는 잠을 자지 않으면 늘 자지러지게 울어댔다. 머리에 들어찬 혈종이 얼마나 고통스러우면 저렇게까지 아이가 울면서 몸부림을 치겠는가 생각할 때마다 김 선생의 모든 뼈마디가 하나하나 부서지는 느낌이었다. ‘얼마나 머리가 아팠으면....’. 아이를 돌보던 간호사가 눈물을 지었다.
아직 저를 낳아준 엄마 얼굴도 한번 보지 못한 아기가 그렇게 고통을 호소하며 울어댄 탓에 복압이 증가하면서 아직 덜 여문 서혜부 인대를 뚫고 장이 튀어나와버린 것이다.
견디기 어려웠다. 아이가 울때마다 탈장은 점점 더 커졌고 아무리 탈장 보호대를 둘러놓아도 아이가 울기 시작하면 장은 여지없이 다시 튀어나왔다. 장이 괴사 될 가능성이 점점 커지면서 결국 수술을 하기로 결정했다. 중환자실에서 뇌출혈 치료를 받고 있던 생후 3주의 아이가 전신마취를 하고 탈장 수술을 받아야 하게 된 것이다.
김 선생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이렇게 가혹한 운명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옆에서 지켜보던 박 선생도 김 선생도 서로 할 말을 잃고 수술실 앞에서 아이가 무사히 수술을 마치고 나오기만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동료들이 수술을 할 터였다. 김 선생도 수많은 아이들의 탈장 수술을 해왔었다. 하지만 그 순간 순간 지나갔던 수술들이 그렇게 누군가의 피를 말리는 일인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차마 수술실에 들어가지 못한 김 선생이 아이가 수술을 마치고 수술실을 나서는 순간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시선이 아기에게로 다시 수술을 집도했던 동료와 마취과 의사의 눈으로 옮겨졌다.
두 사람다 안심하라는 사인을 보냈다. 수술이 무사히 끝난 것이었다.
그렇게 아이가 탈장 수술까지 마치고 회복실로 들어가는 동안 김 선생의 주변에는 박 선생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김 선생을 어렵게 키워 낸 홀어머니가 놀라실까봐 아직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까지 아이의 할머니에게는 단지 아이가 황달이 있어서 치료가 더 필요하다고 얘기하며 한사코 면회를 시키지 않고 있었다. 처가에도 마찬가지였다. 양가 부모님은 여태 아이 얼굴을 못본 것이 섭섭하고 걱정이 많았지만 그래도 의사 부부가 자기 아이 치료를 어련히 알아서 할까 생각하며 다소간은 안심하는 눈치였다.
아이는 결국 두달만에 퇴원을 할 수 있었다.
김 선생은 엠블란스에서 처럼 아이를 품에 꼭 안고 박 선생이 운전하는 승용차에 올랐다. 아이가 처음으로 자기집에 가는 날 이었다. 하지만 아이는 그 특별한 날에도 김 선생의 품안에서 내내 자지러지는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그것이 이미 두 달째였다..
아이가 집에 돌아오는 날 집안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었다.
집에 들어서는 순간까지 울음을 그치지 않고 얼굴이 빨개지도록 울고 있는 이 아이의 미래에 대한 근심이 부모인 김 선생과 이 선생 뿐만 아니라, 아이를 맞는 삼촌과, 숙모, 할머니의 얼굴에까지 짙게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아이는 비로소 집으로 돌아왔다. 집안의 장손이었던 아이를 맞을 방에는 이미 임신 초기부터 준비 해온 각종 옷가지들과, 장난감, 흔들침대, 딸랑이들이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그전부터 가족회의가 여러차례 열렸었다. 이 선생은 병원을 그만두고 자신이 아이를 돌보는 것이 순리라고 생각했지만, 두 집안의 어른들은 아까운 공부를 포기하면 안된다고 설득을 계속했다. 결국 친 할머니인 김선생의 어머님과 제수씨가 아이를 맡아 기르겠다고 나섰다. 또 처가에서는 가장 힘든 시기인 돌이 될 때 까지라도 아이를 키워 주겠다고 힘을 보탰다.
하지만 이 아이가 지금 처한 상황은 특수한 상황이었다.
결국 이 선생은 아이의 미래를 위해서도 공부를 계속하기로 하고, 아기는 처음 몇 달간 외가에서, 그리고 그 다음에는 친가에서 돌보기로 결정했다. 김 선생과 이 선생은 틈이 날 때 마다 집으로 달려오곤 했지만, 아직 공부를 계속해야하는 두 사람의 처지에서는 마음만 두고 갈 뿐, 항상 아이의 곁을 지킬 수 없었다. 대신 어머니와 제수 두 사람이 부모 대신 헌신적인 희생을 했다. 아이는 30분도 쉬지 않고, 계속 자지르지게 울었다. 얼굴이 벌개지고 눈이 충혈되고, 이마에 땀을 줄줄 흘리면서도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문제는 아이가 좌측 사지를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 이었다.
이미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던 일이지만, 예상보다 상태가 심각했다. 아이는 돌이 지나도 몸을 뒤집는 간단한 동작조차 성공하지 못했다. 그저 약한 오른쪽 다리로 바닥을 밀면서 조금씩 불편한 자세를 바꾸려고 하는 바람에 아이는 늘 머리를 중심으로 왼쪽으로 큰 동심원을 그리며 등으로 이불을 밀고 다닐 뿐 이었다. 바라보는 사람들의 가슴이 새카맣게 타들어 갔다. 아이가 돌이 지나면서 이른 재활 치료를 시작하기로 했다. 그리고 매일 같이 이뤄지는 재활치료는 아직 아이가 없었던 제수씨가 도맡았다.
‘제수씨 미안합니다’ 김선생이 늘 제수에게 미안한 마음을 전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제가 작은 엄마인데요. 뭘’ 하는 대답과 오히려 김 선생을 걱정하는 제수씨의 따뜻한 시선과 위로였다. 그 순간 주변 사람들의 위로와 격려는 김 선생이 그 상황을 이겨나가는데 큰 힘이 되어주었다.
재활 치료를 시작하기전에 촬영한 MRI 결과는 극히 비관적이었다.
아이의 우측 뇌는 거의 기능을 상실한 상태였고 뇌 주름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검은색 물이 들어차 있었다. 뇌의 실질 조직 역시 혈액이 전달되지 않아, 좌측 뇌에 비해 현저하게 검게 변색되어 있었다. 결국 ‘외상성 중증 뇌성마비’ 진단을 받게 된 것이다. 하지만 유일한 희망의 실마리는 아이의 뇌성마비가 강직성이라는 것이었다.
팔다리가 비틀어지는 강직성은 그나마 재활치료가 가능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는 사지가 축 늘어져서 움직일 수 조차 없기 때문에 훨씬 나쁜 경우이기 때문이다. 지금 이순간 우리가 길거리에서 그런 분들을 잘 만나지 못하고 강직성 뇌성마비 환우들을 만나는 이유는 그분들은 대개 외출 자체가 불가능 하기 때문이다.
두 살도 안된 아이가 ‘보바스’ 재활치료를 시작했다. 굉장히 힘든일이었다. 굳어가는 팔을 억지로 꺽어 늘리고, 아이 근육이 수축해서 퇴화하는 것을 막기 위해 아이에게 강제 운동을 시켜야 하는 것이다. 아이도, 그것을 지켜보는 보호자도 모두가 눈물로 밖에 할 수 없는 처절한 과정이다.
아이는 일 년 이 년 그 과정을 계속했다.
그리고 이제 아이의 양육도 이 선생이 박사과정을 끝내면서 이선생의 몫으로 돌아왔고, 아이는 점점 자라 나이가 들기 시작했다. 그 시간동안의 과정들은 피눈물로 밖에는 증언 할 수 없을 것이다. 세상의 모든 이들은 남의 일들에 무심하지만 그것이 바로 내 일이 되는 순간 우리는 그 짐이 얼마나 무겁고 힘든 것인지를 알게된다.
두 사람 역시 그랬다. 늘 병원에서 환자들을 보아왔지만, 그것이 두 사람에게 현실이 되리라고는 추호도 상상해 본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젠 그것이 두사람에게 엄연한 현실이었다. 두 사람은 내내 의사이자 보호자로 살았다. 병원에서는 의사가 되고 아이의 재활치료에서는 보호자가 되었다. 병원에서는 관습적으로 ‘물리치료 처방전’을 내렸지만, 돌아서서 아이를 데리고 재활병원에가면 반대로 아이의 재활 치료를 맡은 물리치료사에게 ‘선생님 잘 부탁 드릴게요’라고 정중한 인사를 하게 되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아이가 예상보다 좋은 성과를 보이기 시작했다.
아이에게 그런 병이 생긴것은 스스로의 의지와는 하등 상관없는 불운이었지만, 그래도 의사 부모를 만난 것이 불행중에 다행이었는지 모른다. 아이는 조기 물리치료와 두차례에 걸친 건- 인대 이식수술, 치환 수술, 그리고 당시로서는 일반화 되지 않았던 보톡스를 이용한 강직근육 이완치료까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한 치료를 받았다.
그 결과 아이가 제대로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이는 어린시절부터 반복적인 물리치료와 수술로 인해 엄청난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심지어는 그 와중에 맹장염에 걸려서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김선생이 외과 의사였지만 아이가 스스로 표현을 잘 못하는 바람에 이미 맹장이 터지고 고열이 나면서 복막염이 진행된 다음에야 맹장 수술을 받을 수 있었다. 그 외 사고등으로 아이가 위험한 고비를 넘긴 것이 그 후로도 여러번이었다.
김 선생과 이 선생은 아이를 통해 삶을 배우기 시작했다.
이제 더 이상 불행이라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채찍이라고 여기자고 약속했다. 하지만 아이를 볼 때마다 미안한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아이가 조금씩 회복되고 스스로 걷기 시작했다. 왼팔이 뒤틀리고 얼굴이 조금 일그러져도 뒤뚱거리면서 뛰기도 하고 수영을 할 수도 있었다.
담당 재활의학과 의사는 ‘기적’이라고 했다. MRI는 여전히 우측 뇌가 기능이 없음을 알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중 아이의 취학연령이 가까워졌다. 두 사람은 상의 끝에 학교를 늦추기로 했다. 특수학교가 아닌 일반학교를 보낼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에 일년간 사회교육과 운동치료를 집중적으로 더 하기로 한 것이다.
아이는 지능이나 판단 능력이 두 어살 아래 아이들 수준으로 뒤처지긴 했지만, 그래도 한쪽팔로 컴퓨터를 만지고, 글을 쓰고, 구구단을 3단까지 외울 수도 있었다. 두 사람은 어느새 지옥이 아닌 천국을 만나고 있었다. 인간이 절망만 하고 산다면 누구나 일 년도 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 절망적 상황을 조금씩 이겨 나가면 그 ‘나아짐의 힘’이 오히려 천국의 기쁨이 되기도 한다. 드디어 김 선생의 집에 조금씩 웃음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이 보면 이상한 사람들이라고 할지도 몰랐지만 두 사람은 그렇게 받아들였다. 아니 받아들이기로 했다.
하지만 김 선생의 내면에 있는 깊은 무의식속에는 지금 이순간에도 아이의 운명에 드리운 그림자로 인해 뼈를 깎는 듯한 아픔이 숨어 있다. 때로는 그때의 산부인과 동료들을 원망하는 마음도 들고, 때로는 ‘언젠가 우리가 죽고나면 저 아이를 누가 돌봐줄 것인가..’라는 안타까움이 밀려들기도 한다. 김 선생은 아이만 정상이 된다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 줄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어차피 망상에 지나지 않는 것 이다..
더 안타까운것은 아이가 다니던 재활병원의 다른 아이들이었다.
그나마 김 선생의 아이는 부모가 어떤면에서건 모든 것을 던져 회복의 길로 들어서고 있었지만, 원래 그보다 초기 상태가 훨씬 나았던 다른 아이들이 생계에 쫒긴 부모들의 포기, 그리고 제도와 여건의 부족으로 그대로 주저 앉아 버리는 장면들을 수도 없이 지켜 보았다. 사람인 이상 김 선생의 마음속에 그 아이들에 대한 안타까움이 생겨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저 그렇게 묵묵히 다른 아이들을 두고 볼 수 밖에 없었다. 우선 당장 김선생의 눈앞에도 수미산 같은 짐이 한가득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김 선생이 이후 장애우들이나 아이들 문제에 유난히 촉각을 곤두세우는데 하나의 동기가 된 것은 분명했다.
여기서 이 이상의 이야기를 풀어가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아이는 지금 학교를 다닌다. 여전히 왼 팔은 펴지못한 채 구부러져 있고, 다른 아이에 비해 머리가 작으며, 척추가 왼쪽으로 휘어 있고, 걸을 때 조금 균형이 흐트러 진다는 점을 빼고는 다른 여느 아이와 다름이 없다. 더구나 이번학기 아이가 받아 온 성적표는 평균 50점 수준에 석차는 학교 180명 아이들 중에서 172등 이었다. 최소한 아이가 스스로 몇 개의 문제를 풀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 아이보다 못한 녀석들이 무려 8명이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두 사람은 이렇게 성적표를 볼 때마다 신기하다.
지난번에는 160등을 한 적도 있다. 선생님 말씀으로는 영어를 꽤 잘한다고 했다.
이제 두 사람의 작은 소망은 이 아이가 언젠가 좋은 배우자를 만나는 일이다. 가끔 이제 갓 유치원에 들어간 어린 딸아이에게 마져 나중에 커서 오빠를 많이 사랑하고 아끼고 보살펴야 한다는 말을 하려하다가도 그 말이 목구멍에 걸려 다시 들어가곤 하기도 한다.
이 선생은 이 아이보다 ‘몸은 훨씬 불편하지만 착하고 현명한 짝’이 아이의 미래의 배우자가 되었으면 하고 늘 기도한다. 이 아이도 미래의 배우자에게 힘이 되어주고, 대신 배우자의 지혜와 현명함이 늘 아이를 지켜주었으면 하는 바람의 기도다. .
하지만 김 선생은 만약 그것이 욕심이라면 이루어지지 않아도 도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아이를 사랑하는 혹은 이 아이가 사랑하는 그런 짝이 생겨서 서로 아끼고 사랑하며 의지하는 모습을 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마지막까지 부여잡고 버티며 살아 갈 유일한 희망이 바로 ‘사랑’일 테니 말이다...
# 그동안 글을 써나기가 무척 힘들었다. 이 이야기 역시 실화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여러분들이 너무나 잘 알고있는 어떤 사람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글의 주인공은 지금 이대로 '김 선생' 이라 불려져야 할 것이다.. 김 선생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 이야기를 굳이 남들에게 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것은 첫째, 아이가 세간에 호기심의 대상이 되는것을 원치 않는 탓이고, 둘째, 이 이야기가 그동안 그들이 거친 돌판에다 눈물로 새겨온, '소중한' 삶의 기록들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출처] 트라우마 (마지막..)|작성자 시골의사 |
첫댓글 맘이 아프네여~정말 슬픈 이야기,,갓 태어난 그 신생아는 얼마나 힘들었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