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레스는 창문에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이젠 어떻게 행동 해야 할지.. 어차피 표적이 되어있는 것이라면 이곳에서 안전한 곳은 아무데도 없다. 섬 밖으로 도망가는 것이 현명할것인지, 아니면 맞서 싸우는 것이 현명할지.
도망친다? 지금으로서는 가장 현명한 방법이다. 상대는 마계의 생물들. 게다가 마족까지 있다. 맞서 싸운다는 것은 자살행위에 가까우며 멍청한 방법일지 모른다. 하지만... 도망치고 싶지 않았다. 하나뿐인 가족을 잃었다. 친구를 잃었다. 부족을 잃었다. 남은것이라곤 약하디 약한 몸뚱이 뿐이다. 이런 자기의 상태를 잘 알고 있었지만 도망은 치고 싶지 않았다. 상대를 생각하면 올라오는것은 분노뿐. 다른 것은 생각나지 않는다. 오로지 분노. 전부 죽여버리고 싶다는 살의. 이런 마이너스의 감정만이 올라온다. 이런 감정들을 제어하기엔 아레스는 너무 어렸다.
한숨이 나온다. 당장이라도 달려가 전부 없애버리고 싶다는 생각은 간절하지만 너무 사태가 좋지 않다. 저 마물들의 무리로 혼자 달려든다면 개죽음만 당할 확률이 100퍼센트다. 게다가... 아버지조차 인형으로 만들고 자신을 일격에 무력화 시킨 그 남자... 지금 다시 싸운다고 해도 이길 확률 또한 제로다. 거기다 한 술 더 떠서... 생각하려니 또 다시 한숨이 나온다.
그의 머리속으로 저녁때의 대화가 떠올랐다.
"천년전? 마...왕!?"
경악으로 안색이 새파래진 아레스의 얼굴... 마왕이라는 단어는 확실히 그만큼의 무게를 지니고 있었다.
마왕.
이 얼마나 공포스럽고 무거운 단어란 말인가. 단순히 마계의 왕이라는 그 명칭 한마디만으로도 그 존재는 충분히 경악스러운 것이다. 힘. 단지 힘만이 모든것이 되는 마계에서 왕이란 그 힘들의 정점. 마계의 존재들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 아는 그로서는 마왕이라는 말에 머리가 어지러워질 정도였다.
현기증을 느끼며 아레스는 간신히 몸을 겨누었다.
"마왕! 지금 마왕이라고 했습니까?"
"그렇네."
굳어진 레비스의 얼굴. 절대 농담이 아니다. 농담으로 떠들기엔 마왕이라는 이름은 너무나 크다. 현기증이 더욱 심해지는 것 같았다.
한번도 이런 가능성을 생각해보지 않은것은 아니다. 하지만 머리속에 떠오른 즉시 다시 머리속에서 지워버린 그 생각. 부인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럴리가 없다고..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그렇게 치부해 버리고 외면했지만 지금에 와서 확신으로 다가온다.
사람을 인형처럼 만들어 가지고 놀수 있는 존재. 그런 존재라면 마계에서도 단 하나뿐이다.
뱀파이어.
어느 생물보다 매혹적인 모습을 가지고, 어느 생물보다 매혹적인 목소리를 가지며, 어느 생물보다 강력한 힘을 가진 존재.
아레스의 머리속에서 실타래들이 하나하나씩 풀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 때의 그는 분명한 뱀파이어. 그 마계에서도 고위급의 위치와 힘을 소유한 자. 그 정도의 존재가 직접 나설 정도라면 마왕이라고 그 이면에 없으리라는 법이 있을까?
"자네의 말대로라면... 그리고 지금의 사태를 보자면 마왕이 관련되어 있으리라는 것은 거의 확실해지네. 자네는 지금 마을들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 잘 모를테지. 입구에 있는 경비원들을 보았나?"
그의 기억에 마을 입구에서 자기를 막아서던 가벼운 무장차림의 청년이 떠올랐다. 확실히 그런 광경에 경비까지 서 있어야할 이유가 있나하는 생각이 들어 이상하다고 여겼던 기억이 난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레비스는 침중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평소대로라면 정말 이상하기 그지없는 장면이지. 정말 쓸데없는 일이기도 하겠고. 하지만 지금에와선 그렇게 하지 않는것이 더 이상할 정도로 사태가 변해버렸네. 고블린들이 출몰하는가 하면 최근에는 놀까지 봤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더군. 영주가 빨리 손을 써서 병사들을 보내주었기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전부 낭패를 봤을거야. 하루빨리 대책을 세워야 할 일이야."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건 정말 시급한 문제다. 일반인들의 눈에까지 마물들이 보이고 있었다. 이게 뭐가 이상할게 있냐는 생각도 들겠지만 충분히 심각한 일이다. 보통 평범한 사람, 즉 예를 들어 농부와 같은 사람들이 길을 다니다 마물과 마주쳐 죽을 확률은 거의 0퍼센트에 가깝다. 다시 말해 보통 사람들에게는 마물이라는 것을 구경할 기회조차 거의 없다는 것이다. 물론 예외가 있겠지만 그 예외도 아주 극소수인 데다가 그 예외의 사태가 벌어질 만한 일도 이곳에선 있을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지금 그 예외가 일어나고 있다는 말이다. 제란 곳곳에서 마물들이 발견되고 있다. 이것은 마치 천년전에 있었다는 마물과 인간과의 전쟁의 조짐과 동일하다. 마왕이라는 말이 나와 소문처럼 공공연히 돌고 돌아도 전혀 이상할 것 없는 그런 상황. 아직은 극소수의 마물들만이 눈에 띄이고 있지만 숲 속에는 얼마나 많이 모여있을지 모르며, 그것들이 언제 들이닥칠지 아무도 모른다.
"아직은 그렇게 상황이 심각하지는 않아요. 그저 고블린이나 놀이 한두마리 정도 출몰하는 정도지만... 앞으로 또 어떻게 변할지는 알수없지요."
"피난은... 못합니까?"
"불가능할거라 생각해요. 아직은 안전하다지만... 혹시 또 모르지요. 저도 지금이 가장 적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지만 당신의 말을 듣고 보니 전혀 아닐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왜...?"
"당신이 만난 그 남자는 아마도 뱀파이어겠죠? 다른 생물을 조종할 수 있는건 그들뿐이니.. 그런데 그들은 마계에서도 아주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다고 해요. 이미 그런 존재가 이곳에 와있다면..."
레아의 말을 그는 금세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정도의 존재가 이미 와있다면 그보다도 훨씬 아래에 위치한 마물들은 어떨까? 사실은 이미 충분할 정도의 마물들을 데리고 있으면서 즐기는 마음으로 구경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니 오싹한 생각과 함께 다시 분노의 마음이 끓어올랐다. 젠장할 자식들.. 우리를 갖고 놀고 있다는 건가?
"흐음... 걱정이군. 부디 아무일도 없어야 할텐데..."
"......"
"아무튼 상황이 이런 만큼 자네는 무작정 복수심에만 매달려 돌진하는 것은 안되네. 오히려 더 냉정하고 신중을 가해야 할 때이지. 당장이라도 가고 싶은 자네 마음은 알겠지만..."
"......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부디 신중을 가하길 바라네. 그나저나 저녁은 들어야겠지?"
"아니.. 별로 생각 없습니다. 고맙지만 사양하도록 하지요."
"에? 하지만 아무것도 먹지 못했을텐데..."
"이 정도로 쓰러지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필요한것은 식사가 아니라 생각이지요."
"자네 생각이 그렇다면 어쩔수 없지. 자네 방을 준비하도록 말하지."
똑똑똑.
문을 두들기는 소리에 그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누구지? 문쪽을 힐끗 쳐다본 아레스는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들어오세요."
창문 밖만을 촛점없이 내다보는 아레스의 귓가에 살며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이윽고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뭐하세요?"
여자의 목소리. 레아라는 엘프로군.
아레스는 피식 웃음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과연 그의 눈이 닿은곳엔 확 눈에 띄는 녹빛눈에 큰 귀를 가진 소녀가 들어온다. 보면 볼수록 신비스러운 눈이다. 처음엔 엘프라서 그런줄 알았는데 그런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세상에서 유일한 눈이라...
"무슨 볼일이라도...?"
"아. 그냥...."
침묵. 할말이 없어진 둘은 멀뚱하게 서로를 쳐다보기만 했다. 어색해서인지 둘의 사이에서는 서먹서먹한 기류만 흘렀다.
아레스는 속으로 헛웃음을 흘렸다. 실수했군. 이렇게 말하는게 아니었는데. 나도 모르게 무뚝뚝하게 말이 나가버렸다. 눈에 곤란한 빛이 어리는 것을 보니 약간 미안해진다.
"저..."
"응?"
"이제 어떻게 할건지는 생각해봤어요?"
"...글쎄요..."
그는 다시 창밖으로 몸을 돌렸다.
어떻게라.... 어차피 답은 하나이지 않는가? 내가 앞으로 어떻게야 할지는 말이다. 하지만 일부러 대답하지 않았다.
또다시 침묵이 깔린다.
"......"
"......"
한명은 말없이 창밖만을 보고, 한명은 말없이 그런 등뒤만을 본다.
그러다 이번엔 레아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런 침묵은 그녀에겐 정말 답답하기 그지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냥 말없이 기다렸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드디어 열린 말문이었지만(거기다 반말..) 그녀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어차피 대답을 기대한것도 아니었기에 아레스는 계속 입을 열었다.
"그것도 왜 하필 우리에게 일어난거지? 천년전의 복수? 제기랄!"
육두문자를 내지르며 아레스는 이를 악물었다. 겨우 그런것이었나? 겨우 그것 때문에 아버지가 죽은거야? 부족들이 죽은거냐고! 빌어먹을 마왕 자식!!
"또다시 이곳에 모습을 들어낸것을 후회하게 만들어주겠어! 불가능할지라도 가능하게 만들거야!"
복수하러 왔다가 복수 당해보라지! 절대로.. 절대로 가만두지 않아. 온몸을 던져서라도 죽인다! 불가능하다면 가능하게 만들겠어! 절대 날 막을순 없어. 혼자 남겨진 자의 분노가 어떤것인지 온몸으로 깨닫도록... 그렇게 만들어 주겠어!
".....감정이 격해져 있어요. 그러면 안돼요... 그러면."
"네가... 네가 뭘 안다고?! 몰라. 아무도 몰라! 알리가 없지! 면전 앞에서 하나뿐인 가족이 적의 손에 마음대로 좌지우지 되고 있었어.. 누구보다 존경했던 사람이 마치 장난감처럼... 그런 취급을 받고 있었다구! 이걸 네가.. 이때 내 심정을 네가 알아!? 아냐고!!"
"......"
깊었다. 그의 마음속에 새겨진 감정의 골은... 그 증오는 레아의 생각보다 훨씬 깊었다.
이건 어쩔 수 없어.. 스스로 풀어나가는것 외에는...
그녀는 눈을 감았다.
그녀의 귀로 분을 삭히는 그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미안해요. 난... 도대체 누구에게 화를 내고 있는거지? 젠장! 한심해."
"아니요. 아니예요. 충분히 이해하니까..."
자책같은건 하지 말아요.
이 말을 그녀는 마음속으로 삼켰다.
그 때, 그녀는 웬지 불길한 느낌을 받았다. 마치.. 아주 부정한 것을 눈앞에 둔 듯한 느낌.. 이건!?
"이건... 그날밤에 느꼈던 감각.. 설마?!"
무언가를 느낀 아레스도 놀란 얼굴로 그녀를 돌아본다. 둘이 동시에 느꼈다면 틀림없다. 둘은 거의 동시에 창문 옆으로 몸을 붙이며 작게 외쳤다.
"마물!"
"그것도 마계에서 직접 소환된 마물인듯 싶어요."
"설마 그녀석이...!?"
짧은 문장이었지만 내포되어 있는 뜻은 명확했기에 그녀는 망설임없이 대답했다.
"그건 아닌듯 싶어요. 느껴지는 기운은 하나! 하지만 강한 기운은 아니예요."
"...그렇다면 그 스멀스멀거리는 기분 나쁜 녀석일 가능성이 크겠군!?"
"쉐이드를 말씀하시는 거군요."
둘은 숨죽이고 창문밖을 살폈다. 아직까지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기분 나쁜 기운은 분명하게 그들의 감각을 계속 건드리고 있었다.
레아는 조용히 손끝으로 마법의 기운을 모았다. 그녀의 계열은 수(水)! 과연 그녀의 손끝에는 푸른빛의 마나들이 서서히 뭉치기 시작했다.
긴장하여 숨을 죽인채 아레스가 작게 말했다.
"들켰을까?"
"그런건 아닌것 같아요. 그런데 조금 이상하네요."
"...?"
"왜 하나뿐일까요? 당신의 말대로라면 상당한 숫자의 쉐이드들을 거느리고 있을텐데..."
"... 날 죽이는게 목적이 아니라 찾는것이 목적인 건가?"
"그럴수도 있겠네요. 일단은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기다리죠."
그런채로 몇분이 지났다. 마침내 하늘에 무언가 검은 물체가 스멀스멀 움직이는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별빛하나 보이지 않는 칡흙과도 같은 밤하늘이었지만 그 가운데서 스멀거리는 그 기분 나쁜 느낌은 확연하게 눈에 들어왔다.
"확실하군. 하지만 무기도 없는 내가 처리하기에는 무리겠어."
"제게 맡기세요. 워터 애로우!"
자신있게 말한 그녀는 손끝으로 모으고 있던 마나 덩어리를 창문 밖으로 던지면서 시동어를 외쳤다. 그러자 둥글게 말려있던 그 푸른빛의 덩어리는 순식간에 화살의 모습으로 바뀌면서 손살같이 허공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그 마법은 쉐이드를 햔해 정확히 날아가 머리(라고 생각되는 부분)에 작렬했다.
-우오오오오!
난데없는 일격을 맞고 기괴한 비명을 질르며 떨어지는 쉐이드를 향해 그녀는 연이어 이타를 날렸다.
"성스러운 물의 힘! 아쿠아 스플래쉬!"
그녀의 손으로부터 생성된 물덩어리가 아직 떨어지고 있는 쉐이드를 향해 날아가... 그대로-조용하지만 확실하게- 폭발했다. 폭발의 여파는 크지 않았지만 파괴력 만큼은 상당한 것이라 폭발이 여운이 사라지자 그곳에 보이는 것은 까만 밤하늘 뿐이었다.
".... 굉장한데! 마법이라는 것 말이야!"
그 광경을 남김없이 지켜보던 아레스는 감탄사를 터뜨렸다. 난생 처음으로 본 마법이라는 힘은 그에게는 굉장히 매력적인 힘이었던 것이다. 그의 감탄에 레아는 살짝 웃었다.
"후후. 마검사보다는 못하겠지요."
"마검사?"
"네. 마검사요. 설마 자신이 마검사라는걸 모르신 거예요? 크린족은 전부가 뛰어난 마검사들이라고 들었는데...."
"난 마검사란 말도 처음 듣는데..."
"흐응. 그랬구나. 사실은 저도 마검사라는게 뭔지는 정확히 몰라요. 말로만 몇번 들어봤을 뿐이죠. 그런데 그들은 보통의 검사들과는 달리 '검기'라는.. 마나를 이용하지만 마법과는 다른 그런 힘을 사용한다고 들었어요."
"검기..."
한번도 특별하다고 생각해본적은 없는 기술이었다. 그의 주위에서 검기를 쓰지 못하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으니까. 그는 새삼스레 자신의 검기를 떠올렸다. 언제나 푸르른 빛갈을 내뿜던 검의 기운... 그녀의 말에 따르면 이 검기가 사람들 사이에선 잘 볼수없는 기술이라는 것이 아닌가.
조금은 생소한 느낌이 들었다.
마나만 느낄수만 있다면 검기를 생성시키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었고, 마나는 그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익숙하게 느껴지던 것이었다. 그것은 매우 자연스러웠던 것이라 한번도 그게 특별한 것이라 생각해 본적은 없었는데 그녀의 말은 다른 사람들은 자신과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그럼 레아...도 검기를 사용할 수 있어? 엘프니까 마나하고는 친할것 아니야."
"아니요. 전 검사가 아닌걸요. 적어도 검에 대한 어떤 깨달음...이라고 할까요? 그런것이 없으면 불가능할거라 생각해요."
"그런가... 그렇군. 그래서 우리 부족이 그렇게 강하다는 말을 들어왔었다는 거구나..."
그는 한번도 마을 밖으로 나가본일이 없었다. 아니, 나가지 못했다. 사람들과 격리된 곳에서 검만을 수련하며 살기로 한 그들이었으니까. 그건 아레스에게도 예외가 될 순 없었다.
하지만 옛날 조상들의 무용담들은 충분히 들으며 자라왔기 때문에 그들이 그들의 강함 때문에 칭송받아 왔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다.
문득.. 그가 어릴적 들었던 이야기가 어렴풋히 기억에 떠올랐다. 옛날에 이름있던 한 마법사가 부족 사람을 보고는 한탄조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아아! 마법사의 길을 걸었다면 정말 위대한 마법사 부족이 될수 있었을것을...'
하지만 그 마법사의 설득에도 그들은 끝내 검만을 고집했고, 그게 지금까지 이어져왔던 것이다. 어째서 그렇게 검만을 고집했는지는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알 수는 있다. 그들 모두가 검을 좋아했으니까. 검도를 이루는 것만이 모든것이었으니까. 아마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그제서야 그는 상념을 깼다. 고개를 들자 레아가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혼자 어색해져버린 그는 그냥 얼버무리며 말을 다른데로 옮겼다.
"음? 아, 아니.. 아무것도.. 그나저나 방금전의 녀석. 최종 목적이 무엇이든 일단 대상은 나겠지?"
"아마도요. 어떤 이유에선가 당신을 놓쳤다면 분명 찾으려 하겠죠."
"그렇겠지. 설마 들키진 않았겠지?"
"들켰다해도 바로 소멸시켰는 걸요. 다만..."
"다만?"
"쉐이드가 소환자에게 자기의 위기를 알리는 것까지 막지는 못한것 같아요. 쉐이드가 비명을 지른게 바로 그런 의미였던 것 같아요.. 지금쯤 쉐이드를 보낸 자도 그것이 소멸되었다는 것을 느끼고 있겠죠. 자세한 위치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막연하게나마 방향 정도는 알아냈을지도...."
"..... 100퍼센트 나를 의심하고 달려오겠군. 일단 빨리 이곳을 뜨는 것이 좋을까?"
"글쎄요... 무어라고 결정을 내리기가 애매하네요."
가만 생각해보자니 레아의 말이 이해가 갔다. 자신이 피한뒤에 그녀석이 이곳에 온다면... 이 마을은 뭐라 할것없이 그냥 전멸이다. 하지만 그냥 기다리고 있자니 아직 복수를 할만한 힘이 없다.
"...미치겠군!"
절로 욕이 나오는 상황이었다. 그러던 중 레아가 갑자기 손짓을 하고 창밖을 내다보자 그제서야 그도 밖이 소란스럽다는 것을 느꼇다.
"무슨일이지? 아차! 그놈이 비명을 질러댄 탓에...!"
레아를 따라 밖을 내다보며 중얼거리던 그는 이내 상황을 알아차렸다. 밖에는 마을 사람들이 전부 나와 웅성거리며 떠들고 있었는데 대부분의 얼굴이 두려움으로 질려있었으니 상황을 알아채지 못한다면 오히려 더 이상하다.
그와 동시에 문이 벌컥 열리며 레비스가 뛰어들어왔다.
"이봐! 방금 무슨 소리 못 들었나? 응? 아니, 레아가 왜 여기있는 거냐?"
"일이 좀 있었어요. 내려가서 이야기 하죠."
우리는 방을 나서서 밑에 식당으로 내려갔다. 이 집 주인도 밖으로 나갔는지 밖에서만 웅성거리는 기척만이 느껴졌을 뿐, 식당안은 텅 비어있었다.
우리는 아무데나 자리를 잡고 앉았다.
"방금 전 아주 무시무시한 소리가 들렸다. 등골이 오싹해지는..."
"쉐이드.. 라고 했던가요? 그것이 죽으면서 내지른 비명입니다. 그것이 나타났었죠."
"일단은 처리를 했지만 완벽하지는 못했어요. 그 비명 덕분에 적들에게 대략적인 위치를 들켰을 가능성이 커요."
"그런일이 있었군. 게다가 위치를 들켰을지도 모른다구? 흐음... 그건 확실히 곤란한 문제로구나."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흐음...."
침음성을 내며 레비스는 생각에 잠겼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아레스는 약간은 초조한 기색을 내비쳤다. 녀석이 직접 나타날 경우에는 이 마을은 물론이거니와 자신도 끝장이었으니까. 함부로 움직일 수 없는 상황도 아니었으니 초조함은 점점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드디어 레비스의 입이 열렸다.
"일단은... 움직이는 것이 좋겠지."
"하지만 어떻게...?"
움직일 상태가 못되는데? 움직인다 해도 어디로, 어떻게 움직인단 말인가. 이윽고 열린 레비스의 말에 둘은 놀랐다.
"나도... 상황이 여의치 않을것이라는 것은 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너희만이라도 피해야 한다. 만약의 경우... 이 마을을 버릴거다."
"!!"
"버리겠다고요?! 마을을...!?"
"그래. 사람들을 설득하는 일은 내가 하마. 어찌됐든 현재로서 네가 말한 '그'에게 대항할만한 힘이 있지않다면 방법은 없는거 아니냐."
"그렇다 해도...!"
"그럼 어쩔테냐. 이대로 앉아서 죽을테냐?"
"......"
"냉정해져야 한다! 이대로 너희는 이곳을 떠나야 해. 그래! 아레스 너의 마을이 있던곳으로 가봐라. 무언가 단서가 남아있을지도 모르니까. 너희는 그 단서를 찾아야만 돼! 그리고 절대 죽어서도 안된다. 이제 너희들만이 이 세계의 희망이 될지도 모른다."
".....빌어먹을."
불끈 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이 얼마나 빌어먹을 일이란 말인가. 나같은 놈 목숨 하나를 위해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버려야 하는건가? 그런건가?
하지만 레비스의 말은 구구절절이 다 맞았다. 단 하나도 틀린말이 없었다. 그 사실이 아레스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다. 이가 갈렸다. 이 얼마나 무거운 짐이란 말인가. 이 짐은 마치 물먹은 솜처럼 그를 짓눌러 왔다. 숨이 막혔다. 힘. 그래 힘이 문제다. 힘이 없기 때문에 이런거다. 그리고...
'힘을 얻을 수 없기에 이런거야....'
전신의 힘이 다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랬다. 힘이 없었기 때문에 문제였지만 지금 더 큰 문제는 힘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 허탈했다. 이래가지고서야... 살아있다는 것에도 희망이 없었다.
"이제는 괜찮습니다. 그 덕분이라고 해야할진 모르겠지만 그 덕에 아버지와 누님을 만났으니까요. 그 때는.. 세상이 미웠습니다. 하지만 저를 환영해주는 곳은 아무데도 없었고 결국은 마음의 문을 닫아버릴 수밖에는 없었지요. 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아버지를 만나 사랑을 배웠고 누님을 만나 가족이란 이런거구나 하는것을 느꼈습니다. 두 분은 저에게 행복을 느끼게 해주셨습니다. 인간답게 사는법을 가르쳐주셨지요. 전 정말로 감사하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 행복하다고 느끼고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