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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with헌수 원문보기 글쓴이: 할아버지
동심회 경주 여행기
박천식. 이유자.
4/25(수) 오전엔 흐리고 빗방울이 떨어지더니, 경주에 도착하니 줄기차게 비는 쏟아지고 바람은 쎄게 불어 춥기까지 하다.
오늘은 동심회, 2박3일로 경주 여행 떠나는 날이다. 년초 광홍군이 늦게 얻어 귀한 아들, 정면이의 장가턱으로 주선한 아산.도고 관광여행 자리에서. 당초엔 어디 구라파 해외 여행이라도 나갔다 오자고 하였으나, 손자.손녀를 돌보아야하는 우리집 사정 때문에 간신히 틈을 내서 합의한 국내 나들이다. 다행히 구영조 회장이 하나 회원권을 가지고 있어 숙소문제는 켄싱톤 경주(보문) 콘도로 해결 되었다. 참석 인원은 사정이 있어 김근환 내외만 불참하고 또 김광홍군만 싱글이며, 나머지는 구영조.이정희, 한장백.이영자, 백명현.이정옥, 이의효.사충자, 박천식.이유자 등 다섯쌍 11명이다. 며칠전부터 인터넷응 뒤져, 남산 유적 탐사, 감은사지.문무대왕릉 관광, 토함산 일출, 경주 국립 박물관 관람을 키.포인트로 데충 일정을 정한다.
요즈음은 봄은 없이 겨울 다음 바로 여름이 오는 모양이다. 어제까지 한 사나흘, 초여름 날씨처럼 덥고 맑더니 오늘 따라 비가 내리고 바람이 몹시 불어 등산복을 입었는데도 쌀쌀하게 느껴진다. (내 이름에 하늘天자가 들어 날씨는 좋았었는데...,) 10:20 집을 나서서 KTX 천안아산역 주차장에 도착하니 1일 주차에 5000원, 할수 없이 되돌아 나와 고가밑에 주차해 놓고 서둘러 역으로 달려간다. (世上事 공짜란 없다. 급하게 나오면서 미등을 안 끈채 내리는 바람에 하이카 신세를 졌고, 15천원 아끼려다 4만원 벌금을 물게되었으니...,ㅋㅋ) KTX플랫홈에는 대기실도 있고 TV도 있어, 11:05에 도착하는 125호 열차를 15분 넘게 기다려도 지루한 줄 모른다. 정시에 도착한 열차에 승차하니 서울에서 내려 온 일행 9명이 반갑게 마중한다. 열차 안에서 동주님이 준비한 김밥등을 안주삼아 의효군이 손수 7년전 담았다는 은행술을 주고 받으니 어느새 1시간 반이 훌쩍 지나 신경주역에 도착한다.
신경주역에 내리니 비는 줄기차게 쏟아지고 있었다. 역앞에 기다리고 있는 한진 렌트카 소속 15인승 버스(기사:이석)에 승차하여, 우선 예정대로 天馬塚이 있는 大陵園(사적512호)을 관람한다. (우린 이제 능과 총을 구별할 줄 안다) "미추왕(13대)은...재위 23년 만에 돌아가니 대릉에 장사지냈다."라는 삼국사기 기록에서 이름지어진 대릉원은 미추왕릉 뿐만 아니라 규모가 가장 크고 많은 유물이 출토된 황남대총, 1973년도 가장 늦게 발굴, 신라 유물중 가장 뛰어난 금관(국보188호)과 天馬圖障(막을장)泥(진흙니) 등 유물 11500여점이 출토되어 세상을 깜작 놀라게 한 천마총 등 23여기의 능이 밀집해 있다. 원래는 경주평야 한복판 노동리,노서리,황남리,황오리,인왕리 등 5개의 고분군으로 관리해 오던것을 작년 7월달에 대릉원으로 통합되었단다. 우리는 봄비답지 않게 세차게 쏟아지는 비속을 뚫고 유일하게 무덤 내부를 공개하는 후문 쪽에 있는 천마총을 둘러보고 능원을 한바퀴 돈다. 천마총 무덤안에는 국보 2점을 비롯한 중요 유물 복사품이 전시 되어있는데(진본은 나중에 박물관에서 볼수 있었다), 천마총이라는 명칭의 유래이기도한 천마도는 진흙을 막기 위하여 말안장에 덧대어 매어논 자작나무로 된 장니(우리나라 말로는 '말다래'라 한다.)에 천연 물감으로그렸는데 천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그 솜씨가 놀랍기만하다.
우산을 바쳐도 생쥐꼴이 다 된 우리는 경주 시내 관광의 당초 일정을 바꾸어 동해권 관광에 나선다. 아직 3시도 안되어 저녁 먹기에 너무 일러 들린 骨窟庵에서 우리는 행운의 새로운 체험을 맞게된다. 원래 우리는 단단한 화강암으로 만든 석굴암과는 달리 부드러운 석회암 절벽에(그래서 혹자는 인도 석굴의 영향을 받았다고도 함) 새긴 골굴암摩崖如來座像(보물581호)을 보러고 들렸는데 골굴사에서는 때마침 오후 3:30 무터 화랑사관학교 사범과 학생들의 선무도 시범과 가람 동호회의 민속 공연이 열려 운 좋게 보게 된 것이다.(그러면 그렇지 내 이름에 '天'자는 개뿔로 들어 갔나?ㅋㅋ) 그 옛날 화랑도의 무예와 호국 불교의 승가 무도인 유연하면서도 힘찬 우리나라의 전통 무예, '선무도'의 일면을 비가 오는 바람에 극락대전 실내, 바로 눈 앞에서 만나게 된 것이다.
이어서 우리는 感恩寺址(사적31호)와 문무대왕릉(大王巖.사적158호)을 보고 그곳에서 저녁을 먹기로 한다. 감은사는 삼국통일을 완성한 문무왕(30대)이 불력으로 나라를 지키고자, 특히 倭를 진압한다는 뜻으로 鎭國寺라 칭하고 처음 시작하였으나, 그의 아들 신문왕(31대)이 완성하여 아버지의 은혜에 감사한다는 의미에서 감은사라하였고, 護國龍이 된 부왕이 드나들수 있도록 금당 초석과 기단 아래를 비워 두었으며, 국보 112호인 삼층 석탑 2기(동탑.서탑)가 우뚝 서 있다.(삼국 통일 이전의 신라의 절에는 1개의 탑이, 삼국 통일 이후에는 2개의 탑이 있다고 함) 우리는 그 옛날 신문왕이 용이 승천하는것을 보았고, 온갖 시름을 씻어주는 萬波熄笛을 얻어 신라에 이롭게 하였다는 利見臺(사적159호)에서, "내가 죽으면 화장하여 동해에 장례하라. 그러면 동해의 용이되어 신라를 보호하리라."는 문무왕의 유언에 따라 유골을 바위(대왕암) 속에 묻고, 십자형 수로와 화강암 판석등의 인공 장치를 설치했다는 문무왕릉을 바라 보다가 그앞 횟집에서 푸짐한 회와 얼큰한 매운탕으로 포식, 대취하여 숙소에 들어와 여장을 푼다. 월초만 하더라도 공황장애 증세로 우리를 애타게 하던 회장님께서 심기일전하여 동행하심도 황감한데 거금을 회사하여 저녁까지 하사하시니 기쁘기 한량 없다. "성은이 망극 하나이다. 만수무강 하소서."
4/26(목) 날씨 쾌청, 남산 위에 바람 조금 세게 불다.
오늘은 경주남산 문화유적을 답사하는 날이다. "寺寺星張, 塔塔行雁"(절들은 별처럼 들어 섰고, 탑들은 기러기처럼 줄지어 서 있다.) 일연스님께서 삼국유사에 남산을 이렇게 읊고 있다. 지금 현재는 국가지정 문화재이며, 국립공원이고,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다. 남산에는 국보(1점), 보물(12점), 사적(14개소), 지방유형문화재(11점) 등 694개 유적, 유물이 43개 골짜기에 산재되어 있는 그야말로 입장료 없는 야외 대형 박물관이다. 우리는 1박2일 TV 프로에서 유흥준 교수가 안내한 "7대 보물 찾기" 길을 따라 삼릉에서 용장사 터 까지는 다 함께 가고, A팀은 용장마을로, B팀은 통일전 주차장으로 하산키로 결정한다.
글씨도, 음식도 名匠大家의 반열에 오른 우리의 오너회장 동주여사가 끓여준 콩나물국이 어제밤의 숙취를 말끔히 씻어 준다. 이석 기사가 마련한 국물 있는 김밥도시락, 생수를 나누어 메고 08:40 명현이 내외를 제외한 9명이 삼릉에서 금오봉을 오른다. 8대 아달라왕, 53대 신덕왕, 54대 경명왕이 묻혔다는 三陵(사적311호)을 돌아, 남산팔경중 8경인 삼릉 송림을 가로 질러, 숭유억불 정책의 상징인 머리없는 석조여래좌상을 지나, 유흥준 교수의 제1대 보물인 磨崖線刻六尊佛(지방문화재21호)을 만나 우측 바위위의 법당터에 앉아 잠시 휴식을 취한다. 그 뒤에 있다는 제2대 보물은 찾지 못하여 지나치고, 제3대보물인 삼릉계 석불좌상(보물666호)의 자애로운 미소와 만난다. 광배와 얼굴 일부를 성형 보수한 흔적이 있으나 참으로 아름다운 불상이다. 수도 꼭지를 틀어 상선암의 약수를 마시고 제4대 보물인 마애석가여래좌상(지방문화재158호)을 찾았으나 봄철 낙석 위험으로 폐쇠되어 올라 가지도 못하고, 내쳐 세찬 바람을 맞으며 11:20 金鰲峰(463M) 정상에 올라 기념 사진을 찍는디.(천연 절벽 바위를 다듬어 만든 불상에 '마애'를 붙이고,'선각'이란 바위에 줄을 그어 새김을 뜻한다)
정상에서 삼화령을 넘어 임도(포석정~통일전)를 따라 가다가 임도를 버리고 오른쪽 용장마을 가는길은 밧줄을 잡고 내려가야하는 몹시 가파른 바윗길이다. 한참을 내려가니 경관 좋은 마루턱에 큰바위를 기단삼아 우뚝 서있는 제5대 보물 용장사지 삼층석탑(보물186호), 마애여래좌상(보물913호), 석불좌상(보물187호, 이 석불도 머리가 잘린채 높은곳에 오똑히 서 있다)이 연달아 나타난다. 원래 경치 좋은 이곳에서 점심을 먹으려고 했으나, 바람이 너무 불어 조금 더 내려 오니 오른 쪽으로 봄철 출입금지 표지가 보인다. 그 팻말 넘어 양지 바른 곳에 넓직한 풀밭과 무덤이 보이길래 들어가서 12:30경 점심 먹을 자리를 잡는다. 나중에 알고 보니 바로 이곳이 생육신의 한사람인 매월당 김시습이 금오신화를 썻던 곳이라는 龍藏寺址이다. 필시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웅장한 사찰이었을 터인데 이름 모를 무덤과 잡초만 무성한것이 세월의 덧없음을 실감케한다. 그러나 우리는 바람 막혀 아늑한 그 곳에서 관광 기사가 사다준 김밥도 만나고, 김치도 맛있어서 모두들 즐거워하며 역시 의효군이 손수 담근 7년된 매실주를 마시면서 축하와 격려로써 서로를 북 돋우며, 따듯한 양지에 지천인 쑥도 뜯으면서 한참을 휴식한다.
즐겁고 행복한 점심을 끝낸 후, 우리는 雪岑橋를 지나 칠불암과 용장마을 갈림길에서 혜어져 나와 의효 내외 3사람은 남산 유일의 국보 제312호를 찾아 걸음을 재촉한다. 칠불암 가는길에 백운재를 넘어 칠불암 윗쪽 천인 절벽에서 제6보물인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보물199호)을 아찔한 현깃증을 느끼며 돌아보고, 이윽고 남산 유일의 국보인 칠불암 마애불상군(4+3=7개 불상)을 만난다. 그곳에서 일찍 떨어져 심심했을 명현군에게 전화를 걸어보니, 우리를 제외한 8명이 이미 합류하였으나 영자씨가 발목을 다쳐 약사러 갔기때문에 조금 늦을 것 같다는 전언이다. (내 묵주기도가 부실 했었나? 제발 많이 다치지 않았으면...,) 천천히 가도 좋으련만 그래도 뭐가 바쁜지 염불사지, 남산리 삼층석탑(쌍탑,보물124호)은 획획 지나가고 칠불암~통일전 주차장의 2.6Km를 1시간도 안걸려 주파한다. (덕분에 평소 운동은 안하고 쌤님과 학생들에게 호통만 치시던 원장님께서 몸살이 단단이 났단다. 쌤~통...,ㅋㅋ) 주차장 옆에는 신라 소지왕(21대)이 까마귀의 도움으로 이 연못에서 도인을 만나 "거문고 집을 활로 쏴라."는 글을 받아(書出) 목숨을 구했다는 書出池(사적138호)와 박정희 대통령이 삼국통일과 화랑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무열왕(29대),문무왕(30대), 그리고 김유신 장군의 영정을 모신 통일전이 있다.
15:30경 얼굴과 마음씨가 모두 예쁜 박명순 기사(아가씨도 기사라 부르나?)와 상면하여 모두 합류하였으나 다들 힘들어 하기에 시내 관광은 뒤로 미루고 숙소에 돌아와 사우나등 휴식을 취하고 18:30에 저녁을 먹고 안압지 야경만 관람키로 한다. 저녁 메뉴인 양념 돼지(또는 오리)고기 쌈밥으로 포식한 우리는 야경이 아름다운 雁鴨池(사적18호)를 수학여행 온 학생들의 악다구리 속에서도 1289m 둘렛길을 완주한 후 일찍 잠자리에 든다. 안압지는 삼국 통일 후 동궁(임해전)의 苑池로 만든 인공호수로 당초 月池라 불렀으나, 후대에 붕괴되어 기러기와 오리만 드나든다고 안압지라고 불리었다한다. 1974년도 비교적 최근의 준설및 발굴 과정에서 15023점의 국보급 유물(바로 붙어 있는 박물관에 따로 전시되어 있다)이 출토되었고, 아직도 완전히 복원 되지 못한 현재의 모습도 매우 아름답고 과학적이어서(연못의 휘어짐과 3개의 섬과 미쳐 다 복원 궁궐등이 조화를 이루어 어느곳에서도 호수 전체를 조망할 수 없다.) 삼국통일 이후 신라 왕조의 화려함과 당시의 조형.건축 기술의 우수성을 짐작케 한다.
4/27(금) 구름 한점 없이 맑은 날, 동해의 일출을 보다.
새벽 4:10 우리는 씩씩한 박여(기)사의 버스에 몸을 싣고 꼬불꼬불 언덕길을 달려 석굴암 주차장에 다다른다. 석굴암 주차장에서 토함산 정상까지의 1.6Km 등산길은 잘 정비되었으나, 어제 발목을 다친 영자씨 내외는 남겨두고, 광홍,의효,충자,유자,천식,정희,영조,(이상 정상 도착순)등 7명이 吐含山(745m) 정상에 오른다. 토함산은 신라때부터 호국의 鎭山, 東嶽이라 불렀으며, 어제 오른 남산지구와 함께 경주국립공원 8개 지구중 하나이다.05:33, 드디어 우리는 문무왕께서 護國龍이 되어 잠드신 동해 바다에서 바로 떠 오르는 붉은 해를 맞이한다. 봄철은 연무 때문에 보기 힘든 일출을, 이 팀들과 함께 하조대의 일출이후 십년도 넘게 지나서, 대망의 흑룡의 해인 壬辰年 오늘, 황공하게도 천년을 두고 바라보셨을 석굴암의 부처님(그 부처님의 시선은 밤이 가장 길어 일년중 가장 길한날인 동짓날의 일출 방향이란다) 머리 위에서, 동해의 일출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 만만세! 통일이여, 오소서! 동심회여, 영원하라!"
서둘러 하산하니 05:50분, 아무리 애걸복걸 하여도 06:30 까지는 입장을 안시켜 40분을 이리저리 배회하다가 石堀庵(국보24호)으로 간다. AD710년 경덕왕(935대) 때 대신이었던 김대성이 전생의 부모를 위하여(현생의 부모를 위해서는 불국사) 세운 석굴사, 부드러운 석회암 절벽을 파내어 만든 인도의 엘로라석굴,아잔타석굴, 또는 중국의 용문석굴,운강석굴 등 천연 석굴과는 달리, 단단한 화강암을 떡 주물르듯이 다듬어 만든 세계유일의 인공 석굴(1995년 유네스코의 세계문화 유산으로 지정)인 석굴암, 화강암 벽돌을 2단으로 쌓아 아치헝 돔을 만들고 그위에 자연석, 흙을 두터이 쌓아 굴을 만들어, 그 안에 역시 단단한 화강암을 다듬어 모신 대자대비하신 본전(그 명호는 남성적인 지혜를 상징하는 석가여래가 아니라, 신라인의 淨土신앙과 관음의 여성적 자비를 상징하는 아미타불이라 함)과 벽면에 빙둘러 세운12분의 보불과 전면의 사천 대왕,등 입구가 무너져 처음 발굴한 일본학자들도 東洋 無比(석굴은 동양 밖에 없으니 世界 무비이리라)라 놀라고, 오늘날 방문하는 세계의 권위자들도 그 예술성과 그 과학성에 모두 놀란, 민족의 자존심인 석굴암, 천년을 지하에서 변치 않던 그 보물이 일제시대에 본전 밑으로 흐르는 지하수(찬물이 석불의 結露현상을 막았다 함)를 메워 버린 이후 이슬이 맺히고 석불이 부식되어, 5.16 이후 에어콘을 설치하였으나 소용이 없고 아직도 신라시대의 원형대로 복원하지 못하고 문화재 보호를 위하여 일반인의 입장을 금하고 있어 멀리서 칸막이 넘어로 겨우 본존만 참배할 수 밖에 없었으니....., 아! 아! 하다 못해 석굴 전모의 사진과 설명문이라도 게시해 놓아 두었으면 좋으렸만!!!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한채 석굴암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고, 다보탑(국보20호),석가탑(국보21호),연화교와칠보교(국보22호),청운교와백운교(국보23호),바로자나불(국보26호),금동아미타여래좌상(국보27호)이 있는 佛國寺로 향한다. 국보급 유물 이외에는 조선시대, 또는 최근에 개축 복원된 것인데, 그나마 원형대로 복원되지 않아 유물과 건물이 영 어울리지 않는다. 특히 지금도 아름다운 자태를 뽑내고 있는 청운교와 백운교 밑으로는 석벽을 뚫고 옥계수가 흐르고 바로 앞에 연못(아사달의 무영탑의 전설이 얽힌 연못일런지도 모른다)이 있어 사바의 중생들이 물 건너 구름(靑雲과 白雲) 건너, 紫霞門을 지나 부처의 나라로 들어간다는 삼국유사의 멋진 체험은 구경할 수도 없고, 통행마저 금지시켜 불법의 오묘한 세계를 맛 볼 수도 없다. 오히려 박여(기)사의 배려로 산보한 불국사 정문 앞 공원의 겹벗꽃이 더욱 아름답다. 숙소로 돌아와 9시경 맛있는 아침을 먹고 오후 1시 까지 휴식키로 한다. 특히 어제 남산 용장사 터에서 뜯은 쑥으로 음식의 달인, 동주 여사가 정성껏 끓인 기 맥힌 쑥국과 박여(기)사가 담근 맛난 김장김치가 애들 말대로 죽여 준다.
오후 1시 정각, 우리는 현대 호텔 후원의 아름다운 꽃밭을 지나 박대통령이 만들었다는 50만평 규모의 인공호수 보문호를 한바퀴 드라이빙하고 국립 박물관으로 향한다. 국립경주박물관은 2만여평의 대지 위에 좌측으로부터 특별 전시관, 미술관, 중앙의 고고관, 우측의 안압지관 등 상설 전시관 4동과 옥외 전시장에 10 여만점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고, 그중 백륜사금동약사여래입상,(국보26호),금관총금관(국보87호),불국사삼층석탑내발견유물(국보126호),토우장식장경호(국보195호)등 국보 13점과 보물 26점이 전시되어 있다. 중앙에 위치한 고고관에는 선사원삼국실, 신라1실과 2실, 1986년 이양선님이 기증한 菊隱기념관으로 나누어 있고, 좌측 특별 전시장에는 한.중 수교 20주년을 맞아 당대 유물전이 열리고, 그 뒤편 미술관 1층은 불교 미술실이며 2층은 금석문실과 황룡사실이 있다. 오른쪽 안압지관에는 안압지에서 출토된 3만여점의 유물 가운데 뛰어난 명품 70점이 전시되어 있고, 옥외 전시장에는박물관의 상징이며 에밀레종이라고도하는 聖德大王(33대)神鐘(국보29호), 高仙寺三層石塔등 다수의 석조 유물이 전시 되어 있다. 학구열이 대단한 우리 일행은 배고픔도 잊은채 뿔뿔이 흩어져 관람에 빠져있다가 3시가 넘어서야 갈치 조림으로 시장끼를 떼운다.
점심 식사후 우리는 지난 4백여년간 9대의 진사와 12대의 만석군을 배출한 경주 최부자 집을 방문한다. 12대라 함은 1대 최진집(1568~1636)부터 12대 최준(1884~1970)을 일컬음이니, 권불 십년이요, 3대 부자가 어렵다는 옛말을 무색하게 한것은 중시조의 가훈인 六訓과 자신을 지키는 六然의 가르침에 있는것 같다. 육훈 : 1) 과거를 보되 진사이상의 벼슬은 하지 마라. 2) 만석 이상의 재산은 모으지 마라.(사회에 환원하라) 3) 흉년에는 땅을 늘리지 마라. 4)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5) 주변 백리 안에서 굶어 죽는 사람이 없도록 하라. 6) 시집 온 며느리는 3년간 무명 옷을 입어라. *육연 : 1) 自然超然,2)對人柔然(스스로에게는 초연하고, 남에게는 온화하게 대하라) 3) 無事瀓(맑을징)然,4)有事敢然(일이 없을때에는 마음을 맑게 가지고, 일을 당해서는 과감히 대처하라) 5) 得意淡(물맑을담)然,6) 失意泰然(성공했을 때에 담담하고, 실패 했을때에도 태연하게 행동하라) 실로 '노블레스.오블리즈'의 극치가 아닐 수 없다. 이 가훈은 지금까지 엄격히 지켜 왔고, 지금은 한개 밖에 남아 있지 않은 쌀 7~8백석이 들어가는 세계에서 제일 큰 뒤주가 서너개 있어 흉년에 인근 온동네를 먹여 살렸고, 특히 일제 시대를 지나온 애국지사 文派(의친왕이 지어 준 호) 최준 선생은 백산 안희재와 동업한 백산상회(사실상 문파 선생의 독립자금源이었슴)를 경영, 독립자금을 대다가(김구 증언) 해방후 전 재산을 털어 영남대학의 전신인 대구대학을 세웠고, 그 마저도 한푼도 받지 않고 삼성물산으로 양도하였다가 삼성의 그 유명한 사카린 사건으로 지금의 재단으로 귀속되었다고 한다. 이 집터는 원래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로맨스가 얽힌 요석궁 터였다하니(고택 바로 앞에 요석궁이라는 요리집이 있다),당대의 문호이며 이두문자의 창시자인 설총을 낳은 집터라 후손들이 잘되는지도 모른다.
아직도 기차시간이 많이 남아 우리는 왕릉보다 더 화려한 김유신장군묘(사적21호)를 찾는다. 삼국사기에 문무왕이 김유신을 왕처럼 대우하여 장사 지냈다는 기록과 흥덕왕(42대)이 흥무대왕으로 추증하였다는 기록으로 김유신 묘로 추정하고 있으나, 묘의 화려함과 묘앞의 석비는 조선대에 세웠고, 그 둘레와 석물들은 기록을 참조하여 최근에 복원하였다하니 그 진위는 알 수 없다고 한다. 다음은 태종무열왕릉(사적20호)이다, 묘 둘레에 허물어지지 말라고 군데군데 자연석을 박아놓은 이 무덤의 동쪽에서 둘째 아들 김인문이 두줄로 내려 쓴 '太宗武烈大王之碑'의 명문이 이수에 새거진 비석이 발견됨으로서 유일하게 정확히 왕명을 알 수 있는 왕릉이다. 그로 말미암아 비신은 없고 몸통을 받혔던 龜趺와 이수만 남아있는 이 태종무열왕릉비(국보20호)가 귀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우리는 친절하고 아름다운 해설자의 자세한 설명을 들은후, 왕릉 뒤의 고분군들을 한바퀴 둘러 본다. 왕릉 뒤편 언덕에 올라서니 경주 시내가 한눈에 들어오고 푹신한 잔디밭은 양탄자를 깐양 부드럽다. 한껏 늑장을 부려도 기차시간은 멀었으나 새벽 3시 부터 서둘러 운전한 박여(기)사가 안쓰러워 서둘러 신경주역에 한시간이나 일찍 도착하여 역앞 벤치에 모여 앉아 석별의 정을 나눈다. 이제는 모두 즐겁고 행복했던 추억을 뒤로하고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된 것이다.
<에필로그>
이번 여행은 70줄에 들어선 우리에게는 조금은 벅찬 일정이었다. 그럼에도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서로 협력하고 배려하여 무사히 즐겁게 마쳤으니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니다. 천우신조로 날씨마저 우리를 도와주어 첫쨋날엔 비가 와서 화랑도의 무예인 선무도의 정수를 보았고, 둘쨋날 부터는 맑게 개여, 남산 유적탐사와 토함산 일출을 즐길수 있었다.
필립핀에서 돌아온지 얼마 안된 명현군은 필시 현직에 있을 때에 지겹게 가보았던 경주 관광 명소를 아무 군말 없이 따라 주었고, 홀로 싱글이 되어 서러웠을 광홍군도 흔쾌히 앞장 서서 솔선 수범하였다. 심한 당뇨로 고생하고 있는 장백군도 지난 겨울 내내 한번도 운동을 못하여 도저히 산행할 수 없는 처지 임에도 기를 쓰고 끝까지 동행하였으며, 영자씨도 아픈 다리를 감추고 미소를 잃지 않은채 낭군님을 돌보았다. 히말리야를 몇번 등정하고, 인도, 러시아등 세계 전역을 두루 섭렵한 의효군은 무척 따분하고 심심했을터인데도 묵묵히 후미를 돌보아 주었고, 젊은 아내 충자씨도 원장님의 권한을 휘둘러 사흘이나 무단 결석하면서 낭군 곁을 지켜냈다.(아마 남산 하산길에 낭군을 배반해서라도 A팀에 끼지 않은 것을 무척 후회 하였으리라.ㅋㅋ) 그리고, 아! 아! 사랑하는 이유자씨, 손자.손녀 돌보느라 심신이 다 지쳤을터인데, 돈 못 벌어다 준 남편이 야속하기도 했을터인데, 훌훌 털어버리고 분위기 맞추느라 고생 많이 하셨소이다. 그리고, 또하나의 인간 승리, 구영조 회장님과 동주 이정희 여사, 처음부터 끝까지 살림 다 꾸려 나가고, 숙박비와 싱싱한 횟값 왕창 쏘시고, 아침마다 맛있는 건강식사 챙겨 주시니, 하해와 같은 그 큰 은혜, 갚을 길 없어, 두분에게 하느님의사랑과 자비와 은총과 축복을 내려 주십사고 빌고 또 비나이다. 사순 시기에 큰 병 이겨내고, 환자보다 더 큰 고통 견뎌 낸 사도요한.요세피나, 부활 축제 기간에 금오봉을 넘고, 토함산 정상의 일출도 보았으니, 이제는 날마다 건강과 평화와 행복만이 충만하리라.
1962년도에 서로 만나, 70년도에 결혼하여 40~50년이나 친교를 맺어 온 우리 同心會!!! 이제 '어떻게 잘 살것인가?'보다, '어떻게 잘 죽을것인가?'를 더욱 많이 생각해야 할 나이가 되었다. 우리 이제 앞으로도 이제껏 잘 해온 그대로, 서로의 우정 변하지 말고, 마음의 문도 활짝 열고, 서로 자주 만나 도타운 정 쌓으면서, 희노애락도 같이 나누면서 아름다운 황혼의 여정, 동행하자꾸나.
친구여! 사랑한다! 고맙다! 너희들이 있어 더욱 행복하단다!
임진년 오월 초하루 천안에서 玉溪 朴天植 씀
첫댓글 빨간 불이 켜진 방이 별로 없어서, 혹시 경주 여행 가시면 도움이 될까해서, 불국사 앞 겹사구라가 한창인 지난달 하순에 대학 동기 부부들이 다녀 온 경주 여행기를 뒤늦게 올립니다.
와

놀랍고도 놀랍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자세하고 구체적이고, 멋진 여행기를 쓰셨는지 놀랍습니다.



2박 3일의 여행에 동참한 듯 세세한 그림이 글속에 담겨 있네요.
다음 경주 갈때 인쇄해서 가져가면 훌륭한 자료가 되겠네요. 다만 글씨가 넘 작아 읽기가 힘들었습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역시 회장님이시네요.
제가 요즈음 몸이 좀 아파서 늦게 읽었네요...
카페에 글만 쓸줄 알아, 사진을 못 올려서 죄송합니다.
눈이 아프시도록 보아 주신 마리아님, 고맙습니다.
빨리 퀘차하시고, 아프지 마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