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3. 10 조선일보에서…
알렌 박사 유품, 105년 만에 한국 왔다
▲ 9일 알렌 박사의 유품을 미국에서 찾아 연세대에 기증할 계획인 문흥렬 회장이 고종 황제가 알렌 부부에게 하사한 의복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이진한 기자
문흥렬 HB그룹 회장이 1년 넘게 美서 찾은 것
고종이 하사한 의복과 약 빻는 그릇·책 등 10여점
"4월9일 제중원 125주년 맞아 연대 세브란스병원에 기증"
연세대 세브란스 병원의 전신(前身)인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병원 제중원(濟衆院) 설립자 호러스 알렌(Allen· 1858~1932)의 유품(遺品)이 105년 만에 돌아왔다.
연세대 홍보대사인 문흥렬 HB그룹 회장(69)은 9일 "한국에서 공사(公使)와 의사, 선교사로 활동하다 1905년 미국으로 송환된 알렌의 유품 10여 점을 최근 미국에서 입수했다"며 유품을 공개했다. 알렌의 유품이 공개되기는 처음이다.
중국에 파견된 미국인 선교사였던 알렌은 1884년 주한 미국공사관 소속 의사로 오면서 한국과 인연을 맺었다. 갑신정변(甲申政變) 당시 명성황후 조카 민영익이 개화파의 칼에 맞아 중태에 빠지자 고종은 독일 외교관 묄렌도르프의 추천으로 알렌에게 치료를 맡겼다.
▲ 알렌 박사가 미국으로 돌아간 뒤 한국 재 임시절 습득한 우리나라 역사와 풍습, 언어들을 기록한 책.
알렌은 27군데 자상(刺傷)을 입은 민영익의 상처를 명주실로 꿰매고 붕대를 감아 치료했다. 침을 놓고 약을 달여 먹이는 것이 치료의 전부였던 당시로선 획기적이었던 외과 치료였다. 4일 만에 민영익이 소생하자 고종은 감복해 알렌 부부에게 의복을 하사했다. 예복으로 추정되는 비단옷 두 벌에는 고운 빛깔 자수가 수놓아져 있다.
세브란스병원 박형우 교수는 "알렌의 자서전을 보면 고종이 민영익을 치료해준 데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 비단 옷과 부채, 도자기 등을 선물했다는 기록이 있다"면서 "알렌이 어의(御醫)로 활동해 통정대부(通政大夫)라는 관직을 받았기 때문에 당상관(堂上官)에 해당하는 의복도 받았다"고 설명했다.
알렌은 그 뒤 고종에게 병원 설립을 제의했다. 1885년 4월 9일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의 전신인 광혜원(濟衆院)이 문을 열었다. 고종은 이 최초의 서양식 병원에 '제중원'이라는 이름을 내렸다. 제중원은 '중생을 구제하는 집'이라는 뜻으로 논어(論語)의 '박시제중(博施濟衆·백성에게 널리 인정을 베풂)'에서 따왔다.
▲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의 전신인 제중원을 세운 알렌 박사가 직접 찍은 흥선대원군 사진.
문 회장이 입수한 유품에는 알렌이 제중원에서 사용했던 약 빻는 그릇과 방망이, 알렌이 직접 찍은 100여년 전 남대문과 대원군의 사진들이 포함돼 있다. 루스벨트 당시 미 대통령이 고종에 보낸 알렌 소환장도 눈에 띄었다.
알렌은 1905년 미국이 필리핀을 지배하는 대신 일본은 조선에 대한 독점 이익을 갖는다는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체결되자 루스벨트 대통령을 찾아가 "일본이 조선을 점령하면 안 된다"고 강하게 반발했다. 1882년 조미(朝美)수호조약을 맺어놓고 미국이 조선을 버려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 것이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항의하는 알렌을 제중원 원장에서 해임하고 본국으로 송환한다는 소환장을 고종에게 보냈다. 문 회장이 입수한 루스벨트의 소환장에는 "To Emperor of Korea(한국의 황제에게)", "Your Good Friend, Theodore Roosevelt(시어도어 루스벨트로부터)"라는 문구가 선명하다. 이 밖에 알렌이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숯을 넣는 손 난로와 알렌이 고향으로 돌아간 뒤 직접 저술한 책 2권도 유품에 들어 있다.
문 회장이 알렌의 유품을 찾기 시작한 것은 2008년 말부터였다. 문 회장은 "서양의학의 기틀을 세워 준 알렌의 유품을 지금 찾지 않으면 영원히 우리 손에 들어오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에 나서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알렌의 고향인 미국 오하이오주 톨레도를 여러 차례 방문해 지역 대학과 도서관, 박물관을 뒤졌다. 그러나 톨레도에만 알렌이라는 성을 가진 사람이 200명이 넘었다. 그러던 중 지난해 말 일본계 미국인 교수 가와시마의 부인이 알렌가(家)로부터 유품을 입수해 소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가와시마 교수는 2년 전 세상을 떠났다.
문 회장은 "알렌이 본국으로 돌아갈 때 가져갔던 물건들은 알렌의 손자며느리 글래디스 알렌의 자매들이 보관하고 있었다"며 "글래디스 알렌의 자매들은 생활고로 1994년 유품들을 가와시마 교수에게 넘겼다"고 했다.
문 회장은 지난달 18일 미국으로 가와시마 부인을 찾아가 "미국 선각자가 조선을 위해 헌신했음을 알리고 싶다. 한국 국민을 위해 알렌의 유품을 제공해 달라"고 설득했고 결국 20일 허락을 받아냈다. 문 회장은 이 유품들을 오는 4월 9일 제중원 개원 125주년을 맞아 연대 세브란스 병원에 기증할 예정이다. 이날 알렌의 손녀 리디아 캐서린 알렌 여사는 기념식에서 민영익 시해 시도에 쓰인 칼을 기증할 예정이다. 이 칼은 알렌이 쓰러진 민영익 옆에서 발견한 것으로 알려졌다.
문 회장은 "조선을 떠나면서 'I fell with Korea(나는 한국과 함께 쓰러졌다)'는 말을 남긴 알렌은 조선을 배반하지 않고 신의를 지킨 선교사이자 외교관이며 제중원 의사였다"고 말했다.
김시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