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대정중학교 이경선 녹나무
세상에는 큰 산, 너른 바다도 있지만, 작은 돌멩이, 작은 풀꽃도 있다. 이들 중 무엇이 중요하고 필요한지는 세상의 존재 이유가 아니다. 세상은 영원이라는 시간의 흐름과 무한이라는 공간으로 그저 존재할 뿐이고, 나머지는 유한이며 그 존재 가치도 같지 않기 때문이다.
이경선은 1914년 5월 14일 경기도 시흥군 서이면 안양리에서 수산물 도매상을 하던 고부이씨 이도일과 김응주의 1남 1녀 장녀로 태어났다. 이연순이라고도 했으며 일본식 이름은 노무라케이센(乃村景仙)이다. 어릴 때 아버지의 고향 제주 서귀포시 대정읍 가파리 342로 왔다.
아버지 이도일(1897~1971)은 한학자로 대일 항전기 가파도 가파초등학교 전신인 신유의숙을 설립한 선각자이며 초대 숙장이었다. 사업 경영에도 뛰어나 대정에서 주정공장을 운영하며 서귀포지역의 유통업을 일으켜 항일운동가들에게 경제 지원을 했다. 해방 뒤에도 제주 대정중(1946년)과 대정유치원을 설립했고 대정중학교 초대 교장, 대정유치원 초대 원장이었다.
이경선은 제주 대정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32년 12월 서울의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에 다녔다. 이때 울산 출신의 교사 이관술의 지도로 독서회를 조직 활동하다 1933년 1월 종로경찰서에 체포되었다. 2월에도 독서회 사건 혐의로 임순덕과 함께 서대문경찰서 고등계에 연행되었다. 3월에 동덕여고보를 졸업하고, 이화여자전문학교에 입학하여 1학기 수료 뒤 도쿄의학전문학교 유학으로 의사의 꿈을 이루려고 자퇴하였다.
하지만 유학을 떠나지 않고 이듬해인 1934년 경기도와·강원도를 중심으로 인텔리 노동자·직공 등을 망라한 조선공산당 재건동맹에 나섰다. 또 경기도 시흥군 소재 조선직물주식회사 인견공장의 여공으로 취직해 여공들과 함께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는 여성 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을 이끌었다. 그러던 중 조선공산당 재건동맹 활동으로 같은 해인 2월 21일 일경에 체포되어 징역 1년 6월,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세월이 흘러 1941년 이경선은 일본 고베의 나카노 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하지만 그해 12월 9일 효고현 경찰에 체포됐고 풀려난 뒤 고베약학전문학교에 진학하였다. 그러다 1942년 10월 23일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효고현에서 체포되어 1년 6월의 옥고를 치르고 1944년 2월 29일 출옥, 복학하여 학업을 마치고 8·15해방에 귀국했다.
이렇듯 이경선은 제주 서귀포 대정에서 주정공장을 하는 부유한 집의 딸로 태어났지만 모든 기득권을 버리고 항일운동에만 전념하다 무려 5번이나 체포되고 3년여간 옥살이를 했다.
그리고 1945년 해방과 더불어 서울 출신 오영조와 결혼했으며 1946년 12월 서울에서 열린 조선부녀총동맹 중앙 집행위원회 산하 선전부에 참여했다. 1947년에는 아버지가 교장인 제주 대정중에서 물리·화학 교사로 재직했다. 또 여성들의 권익향상을 위한 강연에 나서 수많은 인파를 몰고 다녔으며 지역 주민들의 ‘훌륭한 연설가’라는 칭송을 받았다.
그러던 중 1947년 3·1절 발포사건으로 촉발된 4·3의 광풍에 ‘묻지마 연행’을 당할 때 이경선은 아버지와 함께 일본으로 밀항 약국을 운영하며 생계를 이었다. 하지만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재일교포 북송에 북한으로 갔는데 사망연대는 알 수 없다.
2021년 3월 1일 보훈처는 이경선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주기로 했고 7월 26일 경기북부보훈지청에서 남동생인 76살의 이경암에게 전달했다. 남과 북이 하나이면서 하나가 되지 못하는 현실에서 통일 염원과 함께 이경선이 재직했던 제주 대정중 교정을 지키는 녹나무와 우리의 희망인 학생들을 바라보며 그녀가 꿈꾸었던 세상을 함께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