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곡사(麻谷寺)
2025. 1. 31.
마곡사 연혁
마곡사는 100여개에 이르는 충남. 대전. 세종 지역 조계종 사찰을 관장하는 대본산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 7개 사찰 중 하나이다. 태화산에 자리를 잡은 마곡사는 봄이 가장 아름답다고 하여 “봄은 마곡사, 가을은 갑사(春麻谷 秋甲寺)”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이곳은 산과 물이 쌍태극(雙太極)을 이루는 명당이라 전란이나 흉년에도 크게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마곡사는 백제 의자왕 때 자장율사가 세웠다고도 하고 신라의 보조선사 체징(體澄)이 세웠다고도 한다. “마곡”이란 말의 유래는 보철화상이 설법할 때 계곡에 모여든 사람들이 마치 삼밭을 이룬 것 같아 “삼골” 즉 “마곡(麻谷)”이라 하였다는 설과 신라의 고승 무염이 중국 마곡사의 법을 이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고려시대에 국가적으로 중요한 사찰이었음을 보여 주는 유물로 오층석탑과 대광보전의 본존불이 있다. 조선이 건국된 후에 불교는 힘을 잃었다만, 마곡사에는 왕실의 손길이 이어졌다. 1465년경 세조가 찾아와 직접 쓴 “영산전(靈山殿)이란 글을 내리며 타고 왔던 가마를 남겨 주었고, 공주목사와 충청감사는 재물을 지원하였다. 임진왜란 때에는 의병의 집결지이기도 했는데 전란으로 절이 황폐해지자 1650년에 ”각순“이란 스님이 절을 다시 세워 제 모습을 찾았다. 이때 승려들을 모아 놓고 종이를 생산해 나라에 진상하고 기와를 구워 살림을 꾸려갔다. 1782년 큰불이 나서 건물이 모두 탔지만 조정의 지원을 받아 빠르게 제 모습을 찾았다. 1970년 정조의 아들 순조가 태었을 때에는 마곡사에서 천일기도를 올린 덕분이라 하여 승려들을 힘들게 했던 종이를 진상하는 공역을 없애는 동시에 충청도의 으뜸 사찰로 지정하였다. 그 위상은 일제강점기에도 그대로 이어져 전국 31 본산 중 하나가 되었다. 이곳 마곡사에는 그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다녀갔는데 1898년에 23세의 백범 김구도 마곡사를 찾아와 자취를 남겼다. 마곡사에는 19동의 전각과 12개의 암자가 있다. 마곡천 물길을 사이에 두고 남쪽에는 연산전(靈山殿)등 수행 공간이 있고 북쪽에는 대광보전(大光寶殿) 등 교화 공간이 있다.
천왕문(天王門)
천왕문은 해탄문에 이어 마곡사의 두 번째 대문으로 조선 후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건물 안쪽에는 동서남북의 불법을 수호하는 호법신인 사천왕상(四天王像)이 안치되어 있다. 사천왕은 천상계(天上界)의 가장 낮은 곳인 사천왕천(四天王天)의 동서남북 네 지역을 관할하는 신적 존재로, 부처님이 계신다는 수미산(須彌山)의 중턱 사방을 지키면서 인간들이 불도(佛道)를
따라 사는지 살피어 그들을 올바르게 인도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소조사천왕상(塑造四天王像)
보물
공주 마곡사 소조사천왕상은 마곡사 천왕문에 봉안된 사천왕상이다. 입구에서 대웅보전을 바라볼 때 우측에는 “북방 다문천왕” 과 “동방 지국천왕”이 있고, 좌측에는 “서방 광목천왕” 과 “남방 증장천왕”이 각각 나란히 세워져 있다. 사천왕은 고대 인도의 신으로, 불교에서 세계 중심에 있다는 상상 곳의 수미산 중턱에 살면서 동서남북 네 곳을 지키는 수호신이다. 이 사천왕상은 점토로 만들어 “소조(塑造)”를 붙였으며, 중국식 갑옷을 입고 여러 가지 상징물을 든 채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다. 북방 다문천왕은 비파, 동방 직구천왕은 검, 서방 광목천왕은 당과 채과 바구니, 남방 증장천왕은 용과 여의주를 들고 있으며, 의자에 앉아 발아래의 생령(生靈)을 밟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사천왕상은 높이가 약4m에 달하며 건물과 맞닿아 있는 고정돤 형태로, 천왕문을 세울 때 함께 조성된 것으로 본다. 동방 지국천왕 의자의 우측에 “강희(康熙) 23년 계해(癸亥)”라 적혀있어 숙종 9년(1683)에 조성된 것을 확인하였고, 이 기록은 우리나라 사천왕상 연구의 중요한 기중이 되었다. 누가 만든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마곡사 경내에 간은 시기에 세워진 다른 불상을 제작한 조각승 단응(端應) 유파의 작품일 것으로 추정한다.
마곡사 해탈문(麻谷寺 解脫門)
마곡사의 정문으로서 이 문을 지나면 속세(俗世)를 벗어나 불교 세계(法界)를 들어가게 되며 헤탈을 하갰다는 마음을 갖게 된다고 하여 해탈문이라 한다. 중앙 통로 양편에 금강역사(金剛力士像)과 보현(普賢), 문수(文殊) 동자상(童子像)을 모시고 있다. 고종 1년(1864)에 중수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백범 명상길
김구(金九)선생 은거 기념 식수
마곡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이며 독립운동의 지도자인 백범(白凡) 김구(1876~1949)선생이 1896년 명성황후 시해에 대한 분노로 황해도 안악에서 일본군 장교를 상해한 후 은거하여 1898년 원종(圓宗이라는 법명으로 잠시 출가 수도하였던 곳이다. 조국광복 후 선생이 이곳을 찾아 대광보전 주련의 却來觀世間 猶如夢中事(각래관세간 유여몽중사)를 보시고 더욱 감개무냥하여 그 때를 회상하여 향나무 한그루를 심어 놓았다.
마곡사 대광보전(麻谷寺 大光寶殿)
이 건물은 대웅웅버잔과 함께 마곡사의 본전(本殿)이다. 임진왜란으로 불 타 없어진 것을 정조 9년(1735)애 다시 지었다. 건물 내부에는 진리를 상징하는 비로자니불(毘盧蔗那佛)이 동쪽을 바라보며 모셔져 있으며, 후불탱화로 양산회상도가 봉안되어 있다. 내부 바닥에는 참나무로 만든 돗자리가 깔려 있으며, 전면 창호에는 다양한 꽃살 무늬가 조각되어 있다. 대광보전은 안팎으로 구성과 장식이 풍부하고 건축 수법이 독특한 건물로 조선 후기 건축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