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가을, 겨울 유행을 앞서 만나본 레디투웨어 컬렉션 리포트
올 가을을 위한 레디투웨어 컬렉션 리포트
지난 2월 뉴욕을 시작으로 밀라노, 파리의 2009 F/W 패션 위크가 열렸다. 디자이너들은 불황에 대한 현실적 대안 찾기에 몰두하거나 잠시나마 우울함을 잊게 하는 판타지를 제안했다. 가을, 겨울 유행을 한발 앞서 만날 수 있었던 주요 레디투웨어 컬렉션 리포트.
NEW YORK
한 시즌을 앞서 가는 패션계의 시계는 봄이 시작될 즈음 가을을 가리킨다. 올해도 지난 2월 13일 뉴욕을 시작으로 밀라노와 파리로 이어지는 2009 F/W 컬렉션 릴레이가 시작됐다.
패션계 최대 이벤트인 만큼 ‘패션 위크’로 불리는 컬렉션 기간 도시에는 활기가 넘치게 마련. 그러나 올해는 달랐다. 패션계 역시 불황의 그늘을 피할 수 없었다. 디자이너들은 패션쇼 규모를 대폭 줄였고 행사 자체를 취소한 브랜드도 적지 않다. 그들이 제안한 트렌드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현실적 대응의 제안’과 ‘꿈과 환상의 제안’. 샤넬과 YSL 등이 우울한 상황을 반영한 블랙 위주의 비교적 ‘실용적’인 의상을 선보였다면 디올, 알렉산더 맥퀸 등은 드라마틱한 패션 판타지로 잠시나마 현실을 잊게 했다. 뉴욕은 세계적 금융 위기의 진원지인 만큼 불황의 여파 역시 가장 컸다. 많은 디자이너가 뉴욕 패션 위크의 베이스 캠프인 브라이언 파크를 떠나 임대료가 비교적 저렴한 소호와 첼시의 갤러리 등으로 이동했다.
패션 위크의 문을 연 것은 뉴욕 컬렉션의 하이라이트로 꼽히는 마크 제이콥스. 초대 인원을 평소의 3분의 1 수준인 500명으로 줄였지만 1980년대를 추억한 의상에는 활기가 넘쳤다. 이번 시즌 가장 강력한 트렌드 1980년대.
그러나 마크 제이콥스는 일반적인 1980년대 아이콘인 ‘파워 우먼’과 차별화해 이스트 빌리지에서 클럽 파티를 즐기는 상류층 자제들의 화려하고 쾌락적인 스타일에 초점을 맞췄다. 신디 로퍼, 마돈나, 펑크, 스포티즘 그리고 네오 바로크풍을 믹스매치한 의상을 제안했다. 랄프 로렌의 테마는 로맨틱 럭셔리. 리틀 블랙 드레스로 시작한 패션쇼에는 진회색 트위드 슈트, 부드러운 파스텔 컬러 니트, 보이프렌드 카디건, 빈티지풍 벨벳 드레스가 등장했다.
랄프 로렌 특유의 영국적이고 세련된 감성이 곳곳에 묻어 있었고 섬세한 엠브로이더리 장식으로 동양적인 터치를 가미했다. 우울한 경제 상황의 그늘을 느낄 수 없었던 또 다른 컬렉션은 다이앤 본 퍼스텐버그였다. 무대 위에는 자유를 갈망하는 ‘현대의 방랑자’가 줄을 이었다. 추상적 애니멀 프린트와 태피스트리 패턴, 코듀로이가 주요 코드. 전체적으로 실루엣은 길고 치렁치렁했다. 자유로운 레이어링이 가능한 스웨터 망토, 캐시미어 팬츠, 모헤어 코트 등이 소개됐다.
턱 밑에서 끈을 조이는 피셔 해트가 캐주얼하면서도 클래식한 무드를 연출한 토미 힐피거 컬렉션은 카멜 컬러의 케이플릿 코트와 데님으로 쇼를 시작했는데 전반적으로 세련되면서도 합리적인 뉴요커의 옷장을 엿보는 듯했다. 대공황 시기였던 1930년대 스타일은 불황에 대해 고민하는 많은 디자이너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디젤이 선보인 것은 특유의 언더그라운드 정신으로 재해석한 1930년대 스타일. 주를 이룬 것은 낡은 듯한 작업복을 테마로 클래식을 가미한 그런지 스타일.
오염되고 녹슨 듯한 스모키 컬러, 그레이의 톤온톤 체크 패턴이 절제된 분위기를 고조시켰고, 언뜻 거칠게 보이지만 섬세하게 공들인 디테일이 돋보였다.
MILAN
뉴욕의 뒤를 이은 밀라노 컬렉션. 어느 도시보다도 고급스럽고 상업적인 브랜드가 많은 덕에 바이어와 업계 관계자, 취재 기자의 빈자리가 더욱 크게 느껴졌다. 그러나 밀라노의 디자이너들은 불황을 아랑곳하지 않는 과감한 컬렉션을 선보였다. ‘테일러링을 강조한 클래식’과 ‘1980년대 스타일의 글램 섹시’ 룩이 큰 축을 이루었다.
전원의 투박한 이미지와 도시적 시크함이 공존했던 프라다 컬렉션에는 1940년대풍에서 영향을 받은 테일러드 코트와 슈트, 다양한 스타일의 원피스가 등장했고, 가죽과 번아웃 벨벳, 니트, 모피 등 다양한 소재의 매치와 배색을 통해 재미를 더했다. 눈길을 끈 것은 스타일링에 터프한 느낌을 더한 다양한 신발. 허벅지를 거의 덮는 긴 부츠, 스터드와 프린지 장식의 스트랩 펌프스, 고무 부츠 등이 대표적이다.
구찌 컬렉션의 모티프는 영화 <매버릭>과 1980년대 유명한 모델이자 패션 아이콘 티나 초. 1980년대 나이트 라이프를 표현하기 위해 극단적 여성스러움과 중성적 에지를 믹스했다. 스포티한 디테일과 포멀한 요소를 믹스한 드로스트링 후드, 실크 소재 조깅 팬츠 등이 눈길을 끈 아이템. 지난 시즌에 킬힐이 주를 이룬 슈즈 컬렉션은 이번에도 강한 섹시미를 강조했다. 가죽을 오일 처리하여 표면이 반짝이는 가죽 백과 고급스러운 파이톤 백들도 주목받았다.
펜디 컬렉션에는 묵시록에 나올 법한 여전사들이 등장했다. 각진 어깨, 직선적인 실루엣, 블랙과 화이트 컬러가 이번 시즌 펜디를 특징지었다. 모헤어, 번 아웃 시폰, 플란넬, 캐시미어 등 다양한 고급 소재가 등장했고, 브랜드의 상징 중 하나인 모피를 다양한 방법으로 제안했다. 살바토레 페라가모 컬렉션의 기본을 이룬 것은 정교한 테일러링. 펜슬 스커트가 키 아이템으로 등장했고 여기에 1940년대 스타일에서 영향을 받은 어깨를 둥글린 재킷, 소맷단을 사선으로 자른 코트, 모피 코트를 매치했다.
드레이핑이 돋보이는 원피스와 니트 아이템도 멋스러웠다. 보테가 베네타는 ‘세련되면서 개성을 살릴 수 있는 옷’을 표방했다. 부드러운 크림색과 갈색을 중심으로 따뜻한 느낌의 컬러 팔레트를 선택한 보테가 베네타는 침착하고 고요한 가운데 멋스럽고 세련된 스타일을 제안했다. 가방 컬렉션에서는 스티치로 표현한 입체적인 디테일이 눈길을 끌었다.
조르지오 아르마니는 1980년대 파워 우먼의 이미지에 집중했다. 페이턴트 레더 베레와 장갑, 와이드 벨트, 레드 립스틱 등이 1980년대풍의 극적인 컬렉션을 완성한 요소들. 반면 엠포리오 아르마니 컬렉션은 한층 어려졌다. 미니스커트를 비롯한 거의 모든 옷차림을 무릎 길이의 반투명 니삭스로 마무리해 스쿨 걸 느낌까지 들었다. 그러나 러플 장식의 워싱 가죽, 부클레 트위드, 벨벳 아이템들은 기존 고객을 위한 배려로 남겨뒀다. 버버리 프로섬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크리스토퍼 베일리는 영국 스타일을 바탕으로 한층 우아하고 성숙해진 컬렉션을 전개했다. 엘리자베스 여왕, 블룸즈버리 그룹의 버지니아 울프와 바네사 벨 등이 이번 시즌 버버리 프로섬의 뮤즈.
1980년대풍이 부담스러운 소비자들에게 특히 어필할 만한 컬렉션이었다. 언제나 순수함과 최고의 퀄리티에 충실한 질 샌더는 이번 시즌에도 브랜드 특유의 기본 공식에 충실한 의상을 제안했다. 베이식한 터틀넥 스웨터와 매치한 더블 페이스 코트는 실용성과 럭셔리를 겸비한 대표 아이템이며 패션쇼 후반부에는 건축적인 실루엣의 아이템을 더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라프 사이몬의 독창적인 감성을 느낄 수 있었다.
PARIS
패션 도시 파리의 디자이너들 역시 현실과 타협을 모색하고 나섰다. 일부 디자이너들은 쿠튀르풍의 조형미 대신 이국적인 에스닉 디테일을 활용했다. 세계적 트렌드로 부상한 글램 룩 스타일에는 파리 특유의 미래적 터치가 더해졌다. 독창성을 대신한 것은 실용성과 고급스러움. 일상생활에 바탕을 둔 스트리트 스타일은 클래식과 결합해 한층 세련되고 성숙해졌다. 주요 코드는 1940년대와 1980년대. 어떤 어려움도 헤쳐나갈 수 있는 강인하고 성숙한 여성의 이미지를 유난히 강조한 것도 2009 F/W 파리 컬렉션의 주요 특징이다.
파리 대형 패션쇼의 대표격인 샤넬 컬렉션도 이번에는 한결 현실적인 무대를 선보였다. 블랙 & 화이트에 대한 찬미로 쇼를 시작한 라거펠트는 경쾌한 제이드와 핑크 컬러로 활기를 더했다. 장식적인 요소로 사용한 것은 탈부착이 가능한 깃과 소매, 우아하고 섬세한 주얼리, 물결 모양의 태피터와 시폰 디테일. 브랜드의 아이코닉 아이템들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했으며 백, 화장품, 아이팟 등을 투명 케이스 안에 담은 기발한 아이디어의 세트를 선보여 샤넬 마니아들의 쇼핑욕을 자극했다.
‘현실과 타협’이라는 대세를 거스르며 크리에이터의 자존심을 지킨 존 갈리아노가 선보인 디올 컬렉션은 1910년대를 대표하는 프랑스 디자이너 폴 푸아레와 오리엔탈리즘에 기반을 뒀다. 할렘 팬츠, 금박 브로케이드, 인디언풍 자카드 원단, 중국 전통 여성복인 챙삼 실루엣, 페이즐리 패턴을 한데 섞어 예술적인 파리지엔 룩을 표현했다. 소품으로는 클래식한 디자인의 핸드백, 미스 디올과 여전히 하늘을 찌를 듯한 킬힐이 등장했다.
로에베는 최고급 가죽으로 유명한 브랜드다운 컬렉션을 선보였다. 가죽을 원단처럼 자유롭고 섬세하게 다룬 정교한 테일러드 재킷, 코트, 스커트, 팬츠 등을 제안했다. 컬렉션에 고급스러움을 더한 모피 역시 빼놓을 수 없는 브랜드의 키 아이템. YSL은 절제를 통한 본질적인 멋스러움을 추구했다. 컬러를 블랙, 그레이, 화이트로 제한해 그래픽 효과를 극대화했는데 궁극적으로 표현하고자 한 것은 어떤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는 강인한 여성. 특유의 정교한 테일러링, 커팅, 혁신적인 소재를 통해 구조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했다. 화이트 셔츠, 캐시미어 재킷과 스커트, 유려한 광택의 크로커다일 펌프스 등이 메인 아이템.
스텔라 맥카트니는 자신의 특기인 테일러링과 란제리를 중심으로 패션쇼를 구성했다. ‘매니시’와 ‘페미닌’을 조화시킨 것. 어깨를 강조한 테일러드 재킷과 코트, 바이커 재킷, 투박한 니트, 스포티한 파카 등을 제안하는 한편 부드러운 실루엣의 드레스를 선보였다.
여기에 에지를 더한 것은 허벅지 길이의 롱 부츠. 메종 마틴 마르지엘라는 여전히 기발하고 실험적인 의상을 선보이며 특유의 패션 철학을 설파했다. 부드러운 브라운 컬러의 보디 슈트, 옷을 입지 않은 듯한 스판 소재, 투명한 아크릴로 만든 어깨 패드, 후드처럼 보이는 칼라 등이 이번 시즌 아이덴티티. 여기에 기하학적인 실루엣의 모노톤 의상들을 더했다. 파리 컬렉션의 대미를 장식한 루이 비통은 당차고 젊은 파리지엔 룩을 표방했다.
뮤즈는 이네스 드 라 프라상주를 비롯한 당대 최고의 모델들. 러플, 주름, 퍼프 소매 등을 사용해 1980년대 후반의 화려하고 과장된 스타일을 재현했다. 레이스 드레스, 버블 스커트, 새틴 레깅스, 셔링 드레스 등이 주요 아이템. 화려한 액세서리의 향연이기도 했던 루이 비통 컬렉션에는 가죽 네크리스와 벨트, 허벅지 길이의 부츠, 러플과 리본 장식의 로맨틱한 구두 등이 포인트로 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