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붕당의 태동
1500년대, 16C 후반, 사림 내부에서 붕당이 형성되고 정치의
주도권을 잡으려는 싸움이 일어났다.
정치에 참여하려는 양반이 수가 크게 늘어나자,
한정된 관직 수에 치열한 경쟁과 반목이 불가피하게 생겨났다.
붕당의 시초는 선조 8년(1576년), 명종 비였던 인순왕후의
아우 손암 심의겸과, 청년학자 성암 김효원 사이에서
사소한 감정으로 시작되었다.
사소한 일이란 김효원이 이조 정랑에 천거되자,
심의겸이 그가 윤원형의 문객이라 반대한다.
그 후 심의겸의 동생 심충겸이 그 자리에 천거 되었을 때
김효원이 반대하고 나섰다.
이조 정랑을 줄여서 정랑이라 부르고,
인사를 하는 자리로 말성이 많은 요직으로 천거에는 밀이 많은 자리다.
심의겸이 정동에 있으므로 그 무리들을 동인이라 불렀다.
김효원의 집은 낙산 및에 있어 그를 편드는 사람을 서인이라 불렀다.
동인에는 주리철학의 도학을 펼친 남명 조식과 퇴계 이황의
제자들로 형성된 영남학파다.
서인에는 주기철학을 주장했던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을
추종하는 기호학파다.
성암 김효원과 손암 심의겸의 두 사람의 감정이 중심되어
조정의 공기가 심강치 않게 돌아갔다.
율곡 이이가 이를 조정하려고 선조에게 물어서
두 사람을 지방관으로 좌천시켰다.
심은 가까운 개성유수로 김은 먼 곳의 경원부사로 발령하였다.
동인편에서 불공정한 처사라며 이율곡을 서인으로 지목하였다.
선조 20년(1589)에 정여립의 모반에 의해 기축옥사 사건이 일어난다.
10월에 황해도 관찰사 한준, 재령군수 박충간, 안악군수 이축등이
정여립이 모반할 것이라는 것을 밀고함으로 발단되었다.
관련자들을 체포하고 처형하자, 정여립은 자살하고 아들은 체포된다.
이 사건으로 동인에 대한 박해가 가해졌다.
서인 정철이 문초관이되어 2년에 걸처 동인의 연루자를 검거 주륙하였다.
동인의 기세는 크게 꺾였다.
광산김씨약사. 편집자. 선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