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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3:1
인류 최대 난제는 '죄'라고 말합니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그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롬5:12) 의 배경이 되는 역사의 사건이 창세기 3장입니다. 죽음의 경고(2:1-7)를 가볍게 여기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돌아보면 제 리즈시절이었던 30대에는 투박한 통나무로 전원주택을 짓고 뜻 맞는 지체들과 쉐퍼 박사의 라브리 공동체를 하고 싶었는데, 막상 60대가 되고 보니 지금은 먹고 지낼 만한 점포 하나 가지고 딸내미들 시다발이하면서 글쓰기를 하고 싶습니다.
"Sin" is the greatest challenge of mankind. "A sin comes into the world because of one man, and death comes from that sin," is the historical event in Genesis Chapter 3. There is an incident in which the warning of death (2:1-7) is taken lightly. Looking back, in my 30s when I was in Leeds, I wanted to build a country house out of rough logs and do Dr. Shaffer's labyrinth community with suitable physicians. Now that I am in my 60s, I want to write with my daughters and daughters with a store that I can e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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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우리 님과 한 백년 살수 있다면“ 행복할 것 같지만 Eden동산에 살던 청춘남녀를 보니 먹고사는 문제가 다 해결된 사람들이 막연히 호기를 부리며 읊조린 유행가 가사일 뿐인 것 같습니다. Eden이나, 저 푸른 초원이나, 장소, 사랑하는 사람, 시간까지 세트가 똑 같았지만, 행복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결핍-권태는 패턴이 아닐까. 몽땅 다 그저 받았는데도 만족하지 않은 것을 보면 내가 만든 Eden인들 만족하겠습니까?
"I would be happy if I could build a picturesque house on the green grass and live with my beloved one for a hundred years." However, looking at the young men and women who lived in Eden Park, I think the lyrics are just the lyrics of a popular song that people who have solved the problem of making a living are vaguely curious and recited. Eden, the green grass, the place, the loved ones, and the time were the same, but they were not happy. Wouldn't lack wishness be a pattern? Would the Eden people I made be satisfied with seeing that they were not satisfied even though they received everyt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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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뱀의 유혹에 빠짐으로 창조질서에 저주가 임하고 관계가 어긋났어요. 이 대목에서 왜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느냐고 따질까요? 우리가 아는 것처럼 시험(Test)은 그 자체로는 중립적(페이라스모스)입니다. 하지만 반응하는 사람에 따라 유혹(Temptation)이 될 수도 시련(Trial)으로 단단해질 수 도 있는 것 아닙니까? 시험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허용하신다는 차원에서 누구에게든 당면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Humans were tempted by snakes and cursed the creative order and their relationship was out of sync. Why does God give free will to humans in this passage? As we know, the test is neutral (peirasmus) in itself. However, isn't it possible to become Temptation or Trial depending on the person who reacts? It means that the test itself is not a bad thing, but that anyone can be faced by God in terms of what he allo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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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과는 하나님이 주인이고 인간은 피조물임을 구별하여 그 주종의 관계를 분명히 알려 주는 나무요, 순종이 선이고 불순종이 악임을 알게 하는 나무였습니다. 그 경계 안에 거할 때 인간은 진정 자유로울 수 있고 인간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경고(2:17)를 무시하고 그 경계를 넘어가는 일이 발생합니다. 위대한 창조와 창조주의 뜻에 반하는 위험한 반역이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특권은 가볍게 여기고, 자신의 한계는 인정하지 않고 그 경계는 무시한 결과입니다.
Good and evil were trees that made it clear that God was the master and that humans were creatures, and that purebred was good and infidelity was evil. When living within those boundaries, humans can be truly free and human. However, ignoring God's warning (2:17) and crossing those boundaries occurs. A dangerous rebellion took place against the will of great creation and creativity. This is the result of taking the privilege given by God lightly, not acknowledging one's own limits, and ignoring those bounda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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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는 말씀에 대한 의심에서 시작합니다. 간교한 뱀은 말씀의 진정성과 그 의도를 의심하게 할 만한 질문을 던지면서 접근합니다. 선악과의 경고는 자유의 제한보다는 더 많은 자유의 허용에 방점을 둔 것이지만 사탄의 일을 통해 하나님의 배려는 부당한 간섭이 되고, 경고는 공갈이 되고, 순종이 아닌 인간의 욕망만 부채질하는 것으로 바뀝니다. 문제는 하와의 대응과 아담의 침묵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과장하고 형벌은 축소하면서 본의를 왜곡합니다.
Sin begins with a doubt about the word. The sophisticated snake approaches by asking questions that may make you doubt the sincerity and intent of the word. The warning of good and bad focuses on allowing more freedom than on the limitation of freedom, but through Satan's work, God's consideration becomes undue interference, the warning is changed to be changed, and it only fuels human desires, not obedience. The problem is Hawa's response and Adam's silence. God's orders distort the real intention, exaggerating and reducing punish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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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뱀에게 틈을 내주며 뱀의 선동에 넘어가질 않았습니까? 하나님의 말씀보다 뱀의 말을 더 신뢰했고 하나님께 순종하라는 말보다 하나님처럼 되라는 말을 더 좋아했습니다. 이것이 죄의 본질입니다. 죄는 먼저 수치심을 주어 스스로 고립됨으로써 관계를 단절시켰습니다. 그렇게 관계가 끊어지면서 서서히 죽어가게 합니다. 마치 혈액순환이 되지 않아 장기가 괴사하는 것처럼 관계의 죽음을 거쳐 존재의 소멸에 이르게 합니다.
In the end, didn't you fall for the snake's incitement while giving it a break? I trusted the snake's words more than God's words and preferred the word to be like God to obey God. This is the essence of sin. Sin first caused shame and self-isolated the relationship. As the relationship breaks down, it gradually dies. Like an organ necrosis due to lack of blood circulation, it goes through the death of the relationship and leads to the extinction of exist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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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범죄 이후입니다, 죄가 발각된 인간은 하나님의 소환을 받지만 아무도 시인하지 않고 책임을 회피하고 상대에게 전가하고 심지어 그 탓을 하나님께로 돌립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하고 잘못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수습입니다. 실수는 인정하고 잘못은 사과하고 죄는 회개하면 되는데 그것을 거부하면서 문제를 더 악화시킵니다. 그것은 자신을 지키는 길이 아니라 죽이는 길입니다. 나는 남을 공범자로 만들거나 내가 공범자가 되지는 않았는가? 요즘 부끄럽거나 두려운 일이 무엇인가?
The problem is after the crime, the human being who is found guilty is summoned by God, but no one admits it, shirks responsibility, passes it on the other person, and even blames it on God. Everyone can make mistakes and do wrong. The problem is to fix it. You only have to admit mistakes, apologize for mistakes, and repent for sins, but refuse to do so, making the problem worse. It's not a way to protect yourself, it's a way to kill. Have I made others an accomplice, or have I not become an accomplice? What are you ashamed of or afraid of these da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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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의 유혹과 하와(1-6)
a.배경에 대한 서술:1a
b.뱀의 질문:1b
c.하와의 대답:2-3
d.여자의 행동:6
선악과를 먹고 난 후 아담과 하와의 행동(7-8)
a.조치:7
b.하나님을 피하는 두 사람:8
아담과 하와를 찾으시는 하나님(9-13)
a.아담:9-12
(a)하나님의 부르심:9
(b)아담의 대답:10
(c)하나님의 응수:11
(d)초라한 아담:2
b.하와: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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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의(1a)
지으신 들짐승 중에(1b)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1c)
뱀이(1d)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1e)
하나님이(1f)
참으로 너희더러(1g)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1h)
먹지 말라 하시더냐?(1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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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뱀에게 말하되(2a)
동산 나무의 실과를(2b)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2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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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산 중앙에 있는(3a)
나무의 실과는(3b)
하나님의 말씀에(3c)
너희는 먹지도 말고(3d)
만지지도 말라(3e)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3f)
하셨느니라(3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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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이(4a)
여자에게 이르되(4b)
너희가(4c)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4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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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그것을(5a)
먹는 날에는(5b)
너희 눈이 밝아(5c)
하나님과 같이 되어(5d)
선악을 알줄을(5e)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5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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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6a)
먹음직도 하고(6b)
보암직도 하고(6c)
지혜롭게 할 만큼(6d)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6e)
여자가(6f)
그 실과를 따먹고(6g)
자기와 함께한(6h)
남편에게도 주매(6i)
그도 먹은지라(6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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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7a)
그들의 눈이 밝아(7b)
자기들의 몸이(7c)
벗은 줄을 알고(7d)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7e)
치마를 하였더라(7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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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8a)
날이 서늘할 때에(8b)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8c)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8d)
아담과 그 아내가(8e)
여호와 하나님의(8f)
낯을 피하여(8g)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8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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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9a)
아담을 부르시며(9b)
그에게 이르시되(9c)
네가 어디 있느냐(9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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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되 내가 동산에서(10a)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10b)
내가 벗었으므로(10c)
두려워하여(10d)
숨었나이다(10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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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사대 누가(11a)
너의 벗었음을(11b)
네게 고하였느냐(11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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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더러(11d)
먹지 말라 명한(11e)
그 나무 실과를(11f)
네가 먹었느냐(11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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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이 가로되(12a)
하나님이 주셔서 (12b)
나와 함께하게 하신(12c)
여자(12d)
그가(12e)
그 나무 실과를(12f)
내게 주므로(12g)
내가 먹었나이다(12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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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13a)
여자에게 이르시되(13b)
네가 어찌하여(13c)
이렇게 하였느냐(13d)
여자가 가로되(13e)
뱀이 나를 꾀므로(13f)
내가 먹었나이다(13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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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의 미혹_the fascination of a snake_
뱀의 선동_the incitement of a snake_
죄의 결과_consequence of one's sins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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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죄는 우리 안에 두려움과 수치심, 책임전가라는 비겁함을 주나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나누고 사람과의 관계까지 파괴합니다. 오 주님, 금단의 유혹에 빠져 지낸 지난날을 회개합니다. 주께서 부르실 때 이실직고하고 죄를 끊어 가죽 옷을 입게 하옵소서.
O Lord, sin gives us fear, shame, and cowardice of transitioning responsibility. In addition, it divides God and man and destroys relationships with man. O Lord, I repent of the past when I was tempted by withdrawal. When the Lord calls, confess this truth, cut off sin, and let him wear leather clothes.
2025.1.5.mon.Clay
//설교 비평 1.
이 설교의 강점은 죄를 단순한 윤리 위반이나 규범 불복종으로 환원하지 않고, 관계의 파괴·두려움의 발생·책임 전가의 연쇄로 서술한다는 데 있다. 특히 “하나님의 명령이 의견으로 전락했다”는 표현은 죄의 본질을 인식론적 차원에서 정확히 짚어낸다. 그러나 이 설교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다. 바로 죄가 발생하는 지점이 ‘의식’ 이전, 곧 몸과 무의식의 층위에서 이미 시작되었다는 통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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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뱀의 질문은 이성보다 먼저 몸을 흔든다
뱀의 첫 질문은 논리적 명제가 아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이 질문은 신학 토론이 아니라 감각을 흔드는 암시다. 뱀은 하나님의 명령을 반박하지 않는다. 대신 몸이 먼저 반응하도록 만든다. 하와는 아직 먹지 않았지만, 이미 보고, 느끼고, 상상한다. 설교에서 “시험은 중립적”이라고 말하지만, 몸철학의 관점에서 보면 시험은 이미 신체 감각에 접속하는 순간 비중립적이다. 인간은 순수 이성으로 시험을 맞이하지 않는다. 우리는 늘 욕망하는 몸으로 시험 앞에 선다.
2.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죄는 몸의 언어로 번역된다)
창 3장 6절은 죄의 발생을 놀라울 정도로 감각적 언어로 묘사한다. 먹음직도 하고 (미각) 보암직도 하고 (시각)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다 (자아 확장 욕망) 이 지점에서 죄는 더 이상 ‘불순종’이 아니라 몸이 하나님 없이도 충만해질 수 있다는 착각이다. 설교는 죄의 결과로 두려움을 말하지만, 무의식의 관점에서 보면 두려움은 결과가 아니라 즉각적인 신체 반응이다. 먹는 순간, 인간의 몸은 안다.“아, 이제 보호받지 못하는 존재가 되었구나.” 그래서 눈이 밝아진다. 그러나 그 밝아짐은 계시가 아니라 노출의 자각이다.
3. 벗었음을 알았다는 것 (수치심의 탄생)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았다”는 표현은 도덕적 각성이 아니다. 이는 수치심의 발생, 곧 몸에 대한 시선이 바뀌었음을 의미한다. 몸철학적으로 말하면, 이전의 몸은 존재였고, 이후의 몸은 평가 대상이 된다. 무의식은 여기서 급격히 작동한다. 수치심은 설명 이전에 숨고 싶게 만드는 감정이다. 그래서 그들은 곧바로 행동한다. 무화과나무 잎을 엮는다-숨는다-변명할 준비를 한다. 이 모든 것은 의식적 선택이 아니라
두려움에 반응하는 몸의 자동 반사다.
4. 책임 전가는 도덕적 타락이 아니라 자기 보존 본능이다
설교는 책임 전가를 “비겁함”으로 규정한다. 신학적으로 옳다. 그러나 몸의 차원에서 보면, 책임 전가는 살아남기 위한 무의식의 몸짓이다.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그 여자가…” “뱀이…” 책임 전가는 악의 교활함 이전에 두려움에 사로잡힌 존재의 자기 보호 전략이다. 이 해석은 죄를 가볍게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더 무겁게 만든다. 죄란 단순히 잘못 선택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 없는 세계에서 살아남으려는 몸의 처절한 몸부림이기 때문이다.
설교 비평 2.
이 설교는 죄를 “도덕적 일탈”이 아니라 존재 질서의 붕괴로 이해한다는 점에서 이미 고전적인 교리 설교를 넘어선다. 특히 죄의 결과를 두려움·수치심·책임 전가라는 정서적·관계적 현상으로 풀어내는 대목은, 무의식과 몸의 차원에서 죄를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이 설교는 아직 그 언어를 직접 사용하지 않았을 뿐, 이미 그 세계 안에 들어와 있다.
1. 죄는 의식의 결단 이전에 무의식에서 시작된다
설교는 “죄는 말씀에 대한 의심에서 시작한다”고 말한다. 이는 신학적으로 정확하다. 그러나 창 3장의 텍스트는 한 가지를 더 보여 준다. 죄는 이해 이전, 판단 이전, 의지 이전에 시작된다.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다.” 이 구절은 윤리 언어가 아니라 몸의 언어다. 하와는 아직 불순종을 ‘결정’하지 않았지만, 이미 몸이 반응했다. 무의식은 이성보다 빠르다. 뱀의 질문은 교리를 공격한 것이 아니라, 감각과 욕망을 깨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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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설교가 “시험은 중립적”이라고 말할 때, 몸철학적으로 보완할 수 있는 지점이 있다. 시험은 개념적으로는 중립일지 몰라도, 몸에 접속되는 순간 이미 방향성을 갖는다. 인간은 순수한 정신이 아니라, 욕망하는 몸으로 시험을 맞이하기 때문이다.
2. 선악과 사건은 ‘존재론적 월경(越境)’이다
설교에서 가장 중요한 통찰은 선악과를 경계의 나무로 해석한 대목이다. 이 경계는 단순한 규칙이 아니라, 존재의 자리를 구분한다. 하나님은 창조주vs 인간은 피조물 이 경계를 넘는 순간, 인간은 “무엇을 했는가”보다 먼저 “무엇이 되려 했는가”의 문제에 들어선다. “하나님처럼 되고자 함”은 지식 욕망이 아니라 존재 욕망이다. 이는 하이데거 식으로 말하면, 인간이 자기 존재의 한계를 수용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근거로 삼으려는 시도다. 설교가 말하듯, 이것은 위대한 창조에 대한 단순한 불순종이 아니라 창조 질서 자체에 대한 반역이다.
3. 수치심과 두려움(몸이 먼저 하나님을 떠난다)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았다.” 이 장면은 인식의 진보가 아니라 존재 방식의 붕괴다. 이전의 몸은 ‘있는 그대로 좋았던 몸’이었지만, 이후의 몸은 평가되고 숨겨야 할 대상이 된다. 수치심은 도덕 감정이 아니다. 수치심은 존재가 위협받을 때 나타나는 신체적 정서다. 그래서 그들은 생각하기 전에 숨는다. 설교가 정확히 짚은 것처럼, 죄는 곧바로 관계 단절을 낳고, 관계 단절은 서서히 존재를 죽인다. “혈액순환이 되지 않아 장기가 괴사하듯”이라는 비유는 탁월하다. 죄는 즉각적인 사망이 아니라, 존재의 순환을 막는 병이다.
4. 책임 전가는 비겁함 이전에 ‘존재 보존 본능’이다
설교는 책임 전가를 단호하게 죄로 규정한다. 그러나 동시에, 이 대목은 무의식의 차원에서 더 깊이 읽힐 수 있다. 아담과 하와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다만 자기 자신을 살리기 위해 타자를 밀어낸다. “그 여자가…” “뱀이…” 이는 윤리적 판단 이전에, 두려움에 사로잡힌 존재의 자기 보존 전략이다. 설교의 강점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수습의 실패”를 문제 삼는 데 있다. 죄 자체보다 더 치명적인 것은, 회피가 반복되며 굳어지는 존재 방식이다.
5. “네가 어디 있느냐”(새 창조의 첫 문장)
이 설교가 암시하지만 아직 완전히 펼치지 않은 지점이 바로 여기다. “네가 어디 있느냐?” 이 질문은 심문이 아니다. 이 질문은 정보 수집이 아니다. 이 질문은 존재 소환이다. 하나님은 범죄 사실을 모르고 묻는 것이 아니라, 숨은 존재를 다시 관계 안으로 불러내신다. 이것이 새 창조의 출발점이다. 인간은 이미 깨졌고-이미 숨었고-이미 책임을 전가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관계를 끝내지 않으신다.
6. 가죽 옷 (새 창조는 몸을 포기하지 않는다)
설교의 기도문이 향하고 있는 방향은 분명하다. “가죽 옷을 입게 하옵소서.” 무화과나무 잎은 인간이 만든 자기 방어적 몸이다. 가죽 옷은 하나님이 입히신 관계 회복의 몸이다. 새 창조는 영혼만을 다루지 않는다. 새 창조는 수치 입은 몸을 다시 살리는 사건이다. 그래서 복음의 끝은 회개한 의식이 아니라 다시 옷 입은 존재다.
7. 종합 비평
이 설교는 이미 무의식의 깊이를 알고 있고, 몸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존재론적 붕괴로서의 죄를 인식하고 있다. 다만 그것을 ‘하나님의 새 창조’라는 이름으로 명시적으로 묶어 주기만 하면, 이 설교는 교리 설교를 넘어 존재 설교가 된다. 죄는 말씀을 어긴 사건이기 이전에 하나님 없는 존재 방식의 시작이었고, 새 창조는 다시 착해지는 것이 아니라 다시 불려 나오는 것이다. “네가 어디 있느냐?” 이 질문이 여전히 오늘 우리의 몸과 무의식에 울릴 때, 그곳에서 창세기 3장은 끝나지 않고 새 창조의 서문으로 다시 시작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