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철원답사기
2019년 11월 8일에 철원에서 개최하는 학술회의가 신라사학회와 태봉학회가 주최한 “신라의 쇠망-태봉성립의 전야”라는 주제로 열린다는 통보를 받아 참가하기로 했다. 학술회의의 내용보다도 내가 철원에 꼭 한번 가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한 달 전에 가기로 결심을 하고 신라사학회를 창립하여 학회를 활성화 함에 크게 기여한 김창겸 박사와 언약을 했다. 차편은 김회장의 주선으로 동승하기로 했다.
철원은 6.25전쟁이 끝날 무렵 고지탈환을 위해 중공군과 서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혈투를 벌였던 백마고지 등으로 유명한 곳이고 이곳에서 철원도성을 지표조사를 했다는 소식을 십수년 전부터 신문을 통해 알고 있었고 나는 생전에 꼭 한번 가보고 싶었던 곳이었다.
전날 인터넷으로 철원지역에 대한 사전 정보를 확인했다. 마치 연인을 만나보는 기분으로 철원에 가는 시간이 기다려졌다. 나는 신라사학회 회장인 박남수 박사의 차편으로 이날 기조강연을 맡은 이기동 박사와 함께 동승하여 두 시간이 걸려 11시 30분에 철원군청이 도착했다. 서울에서 철원까지 가는 고속도로는 추가령지구대의 길로 터널 하나 없는 평탄한 길이었다. 철원은 주위의 높고 힘찬 강원도 특유의 산세를 차창 밖으로 바라다 볼 수 있었다.
가는 도중 이기동 교수는 이곳 철원에서 3년간 군대생활을 한 이야기를 어제의 일처럼 그리고 마을 표지판이 나오면 자기 동네처럼 이야기처럼 상세히 이야기 해주어 흥미진진하게 들었다. 이기동 교수는 살아 있는 사전으로 칭해도 좋을 정도로 뛰어난 기억력을 가진 분이시다. 한국고대사 연구의 거목이다.
학술대회 전에 점심 식사는 이현종 철원군수가 초대한 자리였다. 태봉학회 회장인 조인성 교수도 만났고, 발표자, 토론자들이 함께 식사를 했다. 이 자리에서 지뢰를 제거하고 지표조사를 맡았던 국방문화재연구원 원장 이재 교수를 만났다. 이재 교수는 나와 3년간 육군사관학교에서 함께 근무하면서 존경했던 절친한 분이다. 겸손하고 도타운 인품으로 많은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는 분이었다. 2시부터 4층의 군청 대회의실에서 학술발표회가 진행되었다. 꼼꼼하게 준비한 발표자들의 발표와 진지한 토론이 5시까지 진행되었다.
저녁식사는 군청에서 4킬로 정도 떨어진 프로방스 펜션 식당이었다. 저녁식사를 하면서 우리는 환담을 나누었다. 10시쯤 이기동교수는 이재 교수의 차로 서울로 떠났다. 이기동 교수를 위해서 이재교수가 답사를 포기하였다. 이재 교수는 떠나면서 답사자료로 꼼꼼히 준비한 철원 도성에 대한 자료를 나에게 한 부 주고 가셨다. 이 교수가 계셨더라면 철원도성에 대한 깊은 설명을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는 후일을 다시 기다릴 수밖에 없다.
또한 나는 이재범교수로부터 신간 저작인 “나의 일본여행”를 받았다. 숙소에서 나는 4시간 동안 흥미진진한 여행기를 절반쯤 읽었다. 그의 여행기는 일제시대 조선총독을 지낸 사람들의 고장을 일일이 답사하면서 우리나라와 일본의 역사이야기를 종횡으로 상세하게 서술했다. 일제 시대의 역사와 임진왜란의 이야기, 정한론 등의 이야기를 유물과 유적을 지도와 함께 관련지어 해설해주는 보기 드문 값진 훌륭한 여행기이다.
9일 토요일
나는 아침 7시부터 8시까지 숙소 근처의 산책을 했다. 산책로는 계단으로 잘 만들어졌다. 집주인이 우측으로 도는 길을 권유했지만 잘 만들어진 나무 게단을 따라 가 보았다. 가랑잎이 수북히 쌓여 있고, 한탄강의 물이 때로는 급히 달리다가 조용히 멈춰 서 있는 것을 보면서 나는 잠시 시냇물에 대한 생각에 빠졌다. 그 순간 자연과 인간 그리고 역사 이야기를 한데 아울러 씀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다시 계단을 올라와 집주인이 일어준 길을 가려고 할 때 마침 산책을 나온 채미하 교수와 김수민 박사를 만나 동행했다 ."삼인행에 필유아사"(세사람이 걸어가면 반드시 내가 배울 스승이 있다)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숙소로 돌아왔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철원에서 향토사학을 전공하는 태봉학회 총무이신 김영규 선생이 준비한 버스를 타고 9시에 답사를 했다. 김영규씨는 수십년간 이곳 철원의 역사와 문화를 깊이 있게 연구하는 향토사가이다. 숙소 근처의 승일교를 먼저 설명해주셨다. 이 다리는 북쪽은 김일성이 중간까지 만들고 남쪽은 이승만이 만들어 합친 다리라고 해서 승일교(承日橋)라고 칭한다고 설명해주었다. 식전에 돌아본 그 다리의 역사를 들은 것이다.
숙소에서 1킬로 떨어진 곳인 고석정(孤石亭)을 답사했다. 임꺽정의 동상이 창을 들고 힘차게 서 있었고, 세종대왕이 강무했던 곳이라고 한다. 당시 철원은 경기도로 철원에 강무를 한 것은 태종대이고, 세종은 세자로 동행을 한 적이 있고, 세종대에도 철원은 강무장으로 지정되었다. 강무는 군사훈련이 목적이지만 종묘에 사냥한 짐승을 바친다는 명분도 있었으며 봄철 강무와 가을철 강무가 있었다. 철원의 강무, 순제등의 강무장 및 강무에 대하여는 앞으로 연구를 해야할 것이다.
고석정이란 8각 정자에서 내려다보는 한탄강의 기암절벽의 암석은 기교를 다한 신의 작품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현무암과 화강암이 강물과 세월에 닳고 씼겨 천태만상을 짓고 있으며 홍수가 지면 철원 평야의 물이 모두 이리로 흘러 모여 엄청난 높은 수위로 차오른다는 설명도 들었다.
우리는 버스를 타고 남쪽에 멀리 서 있는 금학산을 뒤로 하고 북으로 차를 달려 도피안사에 다달았다. 도피안사는 도선국사가 신라 시대 말 865년에 창건한 사찰이지만 건물은 전쟁 통에 여러 차례 소실되었고 화강암으로 만든 삼층석탑(보물 223호)과 대적광전 안에 모셔진 철조비로자나불상(국보 63)이 사찰의 역사적 무게감을 실어주고 있다. 이곳 도피안사는 궁예가 자주 찾은 사찰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바로 그곳 남쪽으로는 최영장군의 선조의 분묘가 멀리 남쪽에 있었다.
(왼쪽부터 김영규, 필자, 이재범, 김창겸 씨이다.)
이곳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훌륭한 정치가인 왕건 고려태조가 살았던 집터가 있다고 하는데 이곳은 아직 발굴을 하지 못하고 덮여져 있다고 한다. 큰 차를 돌릴 수 없다고 하여 이곳은 답사하지 못했다.
우리는 다시 버스를 타고 북쪽으로 달려 구 철원지역으로 갔다. 이곳은 김영규 선생의 소개에 의하면 일제시대 이곳을 개간하기 위해 각지의 소작민을 모았기에 각도별로 각자 촌락을 이루어 살아서 함경도촌, 경상도촌, 평안도촌이 있었다고 한다.
100년 전에 세워졌던 감리교 교회터가 전쟁으로 소실되고 그 기초 부분이 남아 있었다. 이 곳부터가 전쟁으로 없어진 구철원 지역이라고 한다. 다시 북쪽으로 가다가 마지막으로 ‘노동당사’라는 3층의 세멘트 골조가 웅장하게 남아 있었다. 이는 1946년에 공산당이 지은 건물이다. 전쟁으로 구 철원 시가지가 폐허가 되고 지금은 철원은 신철원으로 칭한다고 한다. 전쟁의 참혹한 현상은 한 도시를 없애버리기도할 정도로 전쟁의 심각한 파괴를 보여주는 역사의 현장이었다. 북한에도 강원도 철원군이 있듯이 철원군은 허리가 잘린채 70년을 보내고 있으니 이제 이곳은 사람의 추억 속에서 잊혀지기 전에 서로 다닐 수 있기를 기도해 본다. 우리는 직탕폭포에서 매운탕을 먹고 답사를 마쳤다. 나는 식사를 마치고 돌다리를 건너 한탕강 물에 손을 담가 보았다.
(노동당사 앞에서 찍은 답사 일행 김영규씨 제공 )
철원은 넓은 평야를 가지고 있어 이곳에서 생산되는 철원오대 쌀이 유명하다. 이를 우리는 식사를 하면서 직접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북쪽의 비무장지대를 쳐다보면서 우리는 씁쓸한 느낌으로 돌아왔다. 김영규씨의 자세한 설명에 깊은 감명을 받았고, 십여년 전에 많은 노인들로부터 구술집 자료를 모았다는 점과 자료를 열심히 모아 철원의 역사 문화의 자료의 수집에 깊은 관심을 가졌음에 깊은 경의감을 느꼈다.
이곳에서 금강산으로 가는 철도가 일제 때에 놓여졌는 데 비무장지대가 되어 현재는 철도 자체가 없어졌다고 한다. 비무장지대를 국제평화공원으로 지정되고 이를 통해 금강산으로 갈 수 있는 길이 열리기를 두 손 모아 기다리는 것은 나만의 느낌이 아닐 것이다. 송강 정철도 철도길을 따라 갔을 것이고 금강산을 찾은 많은 사람이 이곳을 지나간 금강산 유람기 등 많은 자료가 있어야 할 것이다.
이곳에 궁예가 도읍을 세운 의미를 제대로 음미하기 위해서는 남북의 화해가 절실히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내가 철원을 가보고 싶었던 중요한 이유는 첫째 왕건 태조의 고려건국에 대한 깊은 관심과 둘째는 동안거사 이승휴의 발길이 스쳤던 곳이라는 점이다. 왕건 고려태조는 1100년 전 이곳에서 즉위하여 개성으로 수도를 옮겼다. 이 점은 중요한 일이다.
이승휴는 700년전 원나라하에서 국가의 유지를 위해 힘쓴 분이시다. 그가 지방관의 탐학상을 적발하여 왕에게 보고했다가 오히려 참소를 당하여 그는 동주부사로 이곳 지방관으로 좌천되었다. 그는 이에 관직을 버리고 삼척 고향으로 돌아가 불교를 신앙하고 유명한 제왕운기를 지은 것과 삼척에서 당시 강화 또는 개경까지 5-6차 갔다면 이곳 철원을 지나가는 길을 걸어가지 않았을 가정해 보았다.이 승휴를 연구한 나는 이곳의 지세를 직접 답사해보고 싶었다.
이런 평생의 꿈이 이번 답사로 우선 첫 발을 디뎠다고 할 수 있다. 겨울에는 북쪽에서 기러기 학이 수 백마리가 넘어온다고 하니 인간은 인위의 장벽에 막혀 있어 부자유스러운데 자유로운 학들이 때론 부럽기도 하다. 학을 보면 우리의 소원을 전해달라고 기원하겠지만 그 학을 보지 못했다.
이는 내 일생에 있어서 아주 소중한 답사였다. 왕건태조의 이야기는 버스 안에서 내가 대충 요지를 설명해주었다. 철원은 한국고대를 종결짓고 중세라는 새로운 시대를 열어간 점에 주목해야 한다. 신라의 골품제 사회, 경주인만이 관료가 될 수 있던 고대사회를 허무는데 궁예가 기여했고, 수도가 동남쪽에 치우쳐 있던 데서 수도를 한반도로 중앙으로 끌여올리고 고구려의 역사와 문화 전통을 살림에 중요한 계기를 궁예는 만들었다. 궁예의 첫 국호는 고려였다. 이 때의 고려는 장수왕 10년경에 국호를 개칭한 고구려를 계승하려는 뜻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궁예는 우선 적대세력인 신라와 싸워 자기의 정치기반을 확보해야함이 우선 해결해야할 역사적 과제였다. 왕족 중심 수도 중심의 수백년간 키워온 고대국가체제를 허물고 새로운 국가 중세를 여는 것은 철원 땅에서 정치적 힘을 키운 왕건 고려태조에 의해 이루어졌다. 아마 철원에서 이를 이해하기는 정서적으로 쉽지 않을 것이다. 답사를 잘하게 세심한 배려를 해준 철원군청과 김영규 선생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
첫댓글 잘 배우고 갑니다
낙암 선생님과 함께 한 이번 답사가 매우 유익하고 즐거웠습니다.
이런 기회를 만들어 주신 것은 오직 신라대왕 덕분입니다. 감사합니다.
학회에 참여해 주시고, 후기도 남겨 주셔서 고맙습니다. 김영규 선생에게 알려 철원 분들도 읽어 볼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조회장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철원군청에 감사함을 제대로 표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