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호서원
경상북도 문화자료 제 449호
소재지: 경산시 하양읍 부호리 114
조선세종때 좌의정을 지낸 경암 허조(文敬公 許稠 1369~1349)선생을 배향한 서원이다.
선생의 호는 경암(敬庵)이며 시호는 문경공(文敬公)이시다. 조선왕조 통치의 기본 법전인 경제원과 속육전을 수찬하였고 국조오례의의 사례의를 찬정하여 석전의식을 개정하였다.
이 서원은 효종 4년(1653) 영남유림에서 금호동(현 하양읍 금락리)에 사당을 창건하였으며 숙종10년(1684)에 위판이 봉안되었다. 경종4년(1724)에 사이동(현 하양읍 서사리)으로 이건하였으며 정조14년(1790)에 사액(최구석이 상경하여 받음)되었다. 그리고 고종8년(1871)에 서원 정비령(대원군의 철폐령)으로 훼철되었고 고종38년(광무 5년 : 1901)에 훼철원지에 유허비각을 건립하고 1913년 현 위치에 서원이 유림들에 의하여 복원되었다.
서원의 강당인 수교당이다.
강당은 전면 4칸,측면 1칸의 팔작지붕의 구조이며 전면에 됫마루를 조성하였다.
1913년에 새로이 지었다.
사우인 경덕사로 들어사는 내삼문이다.
사우는 강당의 뒷쪽에 위치하지 않고 전면 좌측에 배열되어 있다.
아마 다시 복원하면서 이렇게 배치한것 같다.
경덕사 역시 강당인 수교당이 지어진 1913년에 세웠다.
허조선생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4칸규모인 성경재이다.
성경재와 구인헌의 현판이 같이 걸려있다.
아마도
동서재의 건물인데 지금은 향사를 준비하는 공간인듯 하다.
성경재에 함께 걸린 구인헌이다.
금호서원의 외삼문은 준도문이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금호서원 유허비
하마비
2) 금호서원 유적비
금호서원의 건립 배경과 연혁 등이 수록되어 있으며 부근에는 자연석의 하마비와 사이동의 유래 등을 각인한 비석이 있다. 이 비석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해가뜨면 일어나고 해가 기울면 쉰다네 우물을 파서 마시고 밭을 갈아 먹는다네"(日出而作 日入而息 鑿井而飮 耕田而食)라는 문구에서 네 개의 이자(而字)를 따서 사이동(四而洞)이라 명명하였다 한다.
금호서원
효종4년 1653년 후손과 유림에 의해 하양현 금호동(금락리)에 경암의 舊墟곁에 祠(사당)로 건립되었다가 숙종 10년 1684년 위패(位版)을 사당에 봉안하였다
이후 1724년 (경종4년)하양현 사이동(현서사리)으로 이건하였으며, 1790년(정조14년)2월에 금호서원으로 사액 되었다.
이후 1871년에 훼철령으로 훼철 되었다가 1901년 옛사이동에 구지에 유허비가가을 건립하고 1923년 지금의 부호리 114번지에 복원하여 위판을 봉안, 향사를 지내오고 있다
허조 호는 경암이고 자는 중통 본관은 하양, 1369년(공민와18) 4월 11일에 태어났으며, 5세때 이미 姿품品 이 순수하고 식견이 밝아서 이미 成人의 모습을 띄어다고 한다
8세때 양촌 권근(1352-1409)선생의 문하에 나아가 수학하며, 뜻을 가다듬고 힘껏 공부하였다. 1392년 24세에 조선이 개국하자, 좌보궐겸 지제교가 되어 당시예악이 모두 흩어져 없어진 것을 전고에 따라 주수케하니, “훗날 우리나라 전례를 맡을 자는 반드시 이사람이다.”라는 양촌 선생의 친찬을 들었다.
陽村선생은 고려말에 주자락을 전래하여 유교적인 윤리를 도입한 晦軒 安珦(1243-1306) 선생의 문인인 權溥의 직손으로 아우 權遇와 함께 益齋이제현 가정 이곡 牧隱鄭夢周, 陶隱이崇仁 三峯정도전 야은길재 등과 師友관계에 있었던 인물이다.
안향선생은 경암선생의 증조인 허수綏 선생의 처부이니, 경암선생의 학문적 성취는 바로 이러한 家學的전통이 지대한 영향을 끼쳤음을 알수 있다.
.시호는 문경 1392년 하양현 금호동에서 태어나 22세에 문과에 급제해 세종조를 대표하는 대 유학자로 좌의정을 지냈다. 국조오례의 가운데 길례 서례 14항목과 의식 35항목을 편찬했으며 국가의 통치강령인 예제와 육조의 기본법전인 속육전을 수찬 보완하였다. 또 성균관에 학사를 설치하고과거를 통해 인사를 공정하게 시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