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그리고 우정/전성훈
얼마 전 지인들을 만나 식사 모임을 가졌다. 식사를 마치고 누군가 맥주로 입가심을 하자고 하였으나 대부분 2차 술자리를 원하지 않아 그 대신 조용한 찻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입맛이 달달하면서도 구수한 한약 냄새를 풍기는 십전대보탕을 주문하였다. 따뜻한 차 맛을 천천히 음미하면서 이런 저런 신변잡기와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중에 요즘 세태에 비친 친구와 우정 이야기가 나왔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이 있듯이 중고등학생 시절에는 친구 또는 우정에 대한 교훈적인 이야기가 많았다. 이와 관련된 이야기로 중국, 일본 예화를 들 수 있다. 고대 중국 제나라의 유명한 정치가인 ‘관중과 포숙아’의 [관포지교]이야기, ‘이숍 이야기’ 내용을 재구성하여 친구에 대한 아름다운 우정을 그린 일본의 단편 [달려라 메로스] 이야기가 있다.
[관포지교]는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다. 관중과 포숙아는 어려서부터 같은 동네에서 자란 친구 사이로 훗날 두 사람은 각기 서로 다른 주군을 모시며 정치에 투신하여 입신출세를 모색하였다. 관중은 제나라 환공 동생의 신하가 되었다가 왕권 싸움에서 패하여 환공에게 붙잡히는 신세가 되었다. 포숙아는 제 환공을 모시는 신하로서 환공에게 중국 천하를 제패하고 싶다면 관중을 살려서 신하로 쓰라고 적극적으로 천거하였다. 제 환공은 관중을 용서하고 받아들였다. 포숙아는 관중이 자기보다 높은 지위인 재상에 올라가도 시기하지 않았다. 포숙아는 자기의 그릇이 관중만 못하다고 사람들에게 말했다. 관중은 제 환공을 받들어 모시며 제나라를 춘추오패의 첫 번째 패자로 만들었다.
[달려라 메로스]는 임금을 비난하여 사형을 받을 처지에 있는 메로스와 그를 대신하여 사형대에 목을 매었던 친구 세리눈티우스 이야기다. 친구 대신 사형대에 매달려 친구인 메로스가 하나뿐인 여동생의 결혼식을 무사히 치루고 오도록 3일간의 말미를 벌어준 세리눈티우스. 친구의 우정을 배반하거나 도망가지 않고 다시 사형대를 향해서 젖 먹던 힘까지 죽을 힘을 다해 달려온 메로스. 그 두 사람의 진정한 우정을 보고 사형을 중지시키고 죄를 사면해준 임금의 이야기다.
이 처럼 멋지고 아름다운 친구사이의 우정을 드라마로 만들면 막장드라마가 판치는 요즘 세상 잣대로 볼 때 신파적이라서 형편없는 시청률로 조기 종영될 수 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친구를 파멸시키고 원수 사이가 되거나 끔찍한 살인 사건으로 비화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또한 “당신의 불행이 나의 기쁨이다”이라는 ‘샤덴 프로이덴’증후군이 무서울 만큼 우리 현실 속에 널리 펴져 있다. 친구 사이의 우정도 시대의 변화에 맞추어 자연스럽게 바뀌어가는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한 이치이다. 이제는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전설이 없어진 지 오래다. 현재의 기준으로 과거를 재단하는 것도 잘못된 발상이지만, 먼 옛날 잣대로 오늘을 바라보는 것 또한 어불성설이요 시대에 뒤떨어진 낡은 정신이며 흘러간 노래다.
소위 3포세대( 취업, 결혼, 출산 포기), 5포세대( 연애, 인간관계 포기), 7포세대(꿈, 희망 포기)라는 절망에 사로잡힌 젊은이들이 거리를 배회하는 것이 오늘 우리 사회의 부끄러운 민낯이다. 또 젊은이들 세계에는 어른들이 알 듯 모를 듯 한 조어가 판치는 세상이다. 듣기도 망측한 ‘헬 조선’이라는 비속어가 난무하더니, 얼마 전부터는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라는 계층 사다리를 일컫는 수저 타령 노래 소리가 매스컴에 넘친다. 바로 이 땅의 젊은이들의 슬픈 자화상이다. 지금의 20-30대 중반까지의 젊은이들은 50대 이상의 기성세대와는 확연히 다른 가치관과 불안하기 짝이 없는 현실에서 산다. 이들에게 “ ‘달려라 메로스’나 ‘관포지교’를 교훈 삼아 긍정적인 친구관계를 맺고 열심히 살아가면 좋은 세상을 만나게 될 것 이다.”라고 말하면 구태의연한 헛소리를 한다며 비웃거나 욕설을 퍼 부을 것이다.
세상살이를 어느 정도 알고 있는 50대 이후 세대의 친구 관계는 어떠한가? 누군가에게 속내를 보여 줄 수 없는 부끄럽고 창피하고 떳떳하지 못한 처지에 있는 사람도 있다. 어렵고 힘든 인생살이에 울화가 치밀어 하루하루를 생지옥 같은 삶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람도 있다. 그런가 하면 남들 앞에서 으스대거나 뽐내고 싶은 부유한 환경 속에서 어쩔 줄 모르는 권태로움에 사로잡힌 사람도 있다. 다양한 삶의 모습에 학창시절이나 젊은 시절과는 전혀 다른 관계로 변해버린 친구 사이에 마음 아파하는 사람도 있다.
중년 이후 친구 관계는 추억 속의 과거로 돌아갈 수 없는 ‘지금 여기’라는 커다란 장애물이 턱 버티고 있다. 뛰어넘을 수 없는 장벽을 앞에 두고 눈을 지그시 감고 깊게 숨을 들여 마시고 친구와 자신의 관계를 조용히 들여다본다. 우리는 누가 더 낫고 누가 못난 것이 아니라 도토리 키 재기 식으로 서로 똑같은 존재이다. 너와 나, 우리는 빈손으로 왔다가 맨손으로 가야 하는 한없이 나약하고 가련한 중생이다. 결코 되돌아 갈 수 없는 아련한 과거에 더 이상 연연해하지 않아야 한다. 지금 발 딛고 서 있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드릴 수 있도록 마음을 비워야 한다. 언제인지 모르지만 머지않아 누구도 알 수 없는 ‘영원한 길’로 떠나야 한다. 그 때를 미소 지으며 담담하게 맞이할 수 있도록 꽉 쥔 두 주먹을 펴고 손바닥을 하늘로 들어 올리는 연습을 해야 할 시기이다. 문득 어디선가 들리는 한 소리, 그 소리가 오늘 밤 내내 귓가에 맴돌고 떠나지 않는다.
“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마라, 슬픔의 날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 오리니, 마음은 미래에 살고 현재는 늘 슬픈 것, 모든 것은 순간에 지나가고 지나간 것은 다시 그리워지나니.....” [푸시킨,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 (2016년 3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