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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知的인 어른을 위한) 최소한의 교양수업
나는 스스로 지적인 어른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 )안의 부분은 숨기고 싶다. 하지만 원래 제목은 ‘지적인 어른을 위한’이 포함된다. 이 책의 저자에 앞서 우선 책을 추천한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자. “이 책은 렌즈와 같습니다.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돈, 종교, 철학, 역사, 예술의 윤곽을 선명하게 잡아가는 데 도움을 줄 거거든요. 그 어떤 누구와도 풍부한 대화를 이어가고 싶다면 이 책을 추천합니다.”(밍찌-크리에이트) “예측할 수 없는 세상을 체계를 통해 다시 볼 수 있게 해 준다. ‘복잡’한 것을 ‘복합’적인 것으로 바꾸어 보는 눈을 길러주는 책이다.”(이윤규-변호사) 등 많은 이들이 이 책을 추천했다. 책은 지난 4월 16일 3쇄가 인쇄되었음으로 올해 만나는 책 중에서 가장 최근에 출간된 책이기도 하다.
저자인 사이토 다카시(齊藤孝)는 일본 메이지대학 문학부 교수로, 도쿄대학 법학부와 동 대학원 교육학과 박사 과정을 졸업한 교육학, 신체론, 커뮤니케이션론 전공자로 지식과 실용을 결합한 새로운 스타일의 글을 선보인 책, 누적 1,000만 부수를 기록할 만큼 많은 독자를 사로잡고 있다. 대중과 소통하는 일본 최고의 교육전문가이자, 커뮤니케이션 전문가로 〈세계사를 움직이는 다섯 가지 힘〉, 〈50부터는 인생관을 바꿔야 산다〉, 〈혼자 있는 시간의 힘〉, 〈독서는 절대 나를 배신하지 않는다〉등 많은 저서를 내놓았다. 번역자 신찬 선생은 인제대학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일본학을 전공한 학자다.
책의 제목을 보면 현대를 살고 있는 어른이 갖추어여야 할 교양에 대해이야기하는 것인 것 같다. 흔히 그것은 상식적으로 인문학 사고에 대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들린다. ‘삶을 풍성하게 누릴 수 있도록 토대를 다지길 당부한다.’고 하고는 다섯 가지, 즉 돈과 자본, 종교, 철학, 역사, 예술을 주제로 삼았는데 흔하지 않게 맨 첫 장이 ‘돈과 자본’이라니? 물론 돈이 인간 행복의 척도가 되는 세상이고 보니 그렇게 볼 수도 있겠으나, 돈으로는 행복과 목숨을 살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저자는 어떤 의도로 돈과 자본을 맨 처음에 꼽았을까?
“단순히 대량의 지식을 가진 것만으로는 앞이 보이지 않는다. 세계에서 발생하는 전쟁이나 격변하는 흐름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 불확실한 시대를 살고 있다. 그렇다고 거기서 눈을 돌리고, 외면하면 어느새 상황, 사람, 돈 같은 외부 변화에 휩쓸리고 만다. 이런 때야말로 판단력을 잃지 않고 살아가기 위한 제대로 된 중심이 필요하다. AI나 여타 다른 존재로는 대체 불가능한, 오직 인간밖에 할 수 없는 ‘생각’으로 사는 힘을 기르고, 급류 속에서도 닻을 내리고 버틸 수 있는 힘, 그것이 진짜 교양”이라고 하며 그것을 위한 중요한 토대로 5가지를 꼽은 것이다.
“배우지 않으면 곧 늙고 쇠해진다”고 한 주자의 말처럼 “끊임없는 배움과 녹슬지 않는 지성은 몸과 마음, 인생의 생기에도 영향을 준다. 교양이라고 하면 막연해서 어디서부터 쌓아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사람, AI에 대체되지 않을 역량을 계발해야 한다고 느끼는 사람, 유튜브에서 오락이 아닌 지식 채널을 시청하는 사람, 이런 책 한 권의 가성비를 누리고 싶은 사람, 그리고 지적 호기심이 있는 사람들 모두 이 책을 통해서 아는 것은 자세하게, 모르는 것은 재밌게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새로 알아가는 기쁨에 빠져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다 보면 나의 내면이 훌쩍 업데이트 되었음을 발견할 것이다”출판사가 이 책을 광고한 것이다.
“인류의 발자취를 통틀어 모은 ‘교양의 보석상자’라고 말할 수 있는 이 책에서 예측 불가능하고 살기 어려운 시대를 헤쳐나갈 무기를 얻자. 생각에는 통찰의 힘을, 인생에는 풍성한 깊이를 더해줄 에센스가 지금 여기에 있다.”라고도 했다.
【제1장】돈과 자본
나와 우리나라 사람들 모두는 자본주의 속에서 살고 있다. 이는 18세기 후반 영국에서 일어난 산업혁명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성립되었다. 자유롭게 경쟁하기 때문에 사회가 발전하기 쉽지만, 한편으론 부를 쌓는 자와 가난한 자의 격차도 쉽게 생긴다. 부족 사회였을 때는 이런 불평등은 없었다. 사냥과 채집으로 공평하게 나눠 먹었기 때문이다. 오늘날과 같은 우울증도 없었다. 경제적 불평등이 스트레스가 되었는데, 우리는 그것을 모르고 사는 것일까? 이런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1867년 카를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공산주의 사상을 체계화했다. 공산주의는 재산을 사적으로 소유하지 않고 모두 공유하며 빈부격차가 없는 사회를 실현한다는 것이다. 나라가 자본을 소유·관리하여 평등한 사회를 만들자는 것이다.
《성경》다음으로 많이 읽히는 《자본론》은 BBC 설문조사 결과, 지난 천년 간 인류에게 가장 영향력을 가진 책 1위, 가장 위대한 사상가 1위, 철학자 1위로 마르크스를 꼽았다. “지금까지 존재한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다.”“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저 《공산당 선언》은 이 두 문장으로 요약된다. 사회주의 국가나 공산주의 국가 모두 문제가 많다. 성공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마르크스에 대한 지식은 교양에 속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일본에는 자본주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가 있다. 시부사와 에이치(涉宅榮一)라는 인물로 그는 서구에서 자본주위 대부로 일컫는 프랭클린과 마찬가지로 도덕적 가치관을 갖고 경제활동을 해 나라를 일으키려고 했다. 1840년 태어난 그는 에도 막부 마지막과 메이지 시대 초기 격변의 시대를 살았다. 농가의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학문, 검술, 장사를 배웠고 실력을 인정받아 무사가 되었고 27세 때 만국박람회가 열린 파리로 갔다. 거기서 돈을 가진 대중이 은행에 돈을 맡기고 은행은 모은 돈을 능력있는 사람에게 빌려주어 사업을 일으키고, 은행 돈을 빌려 사업으로 돈을 벌어서는 이자를 붙여 은행에 돌려주는 것을 보았는데, 마치 몸속에 혈액이 순환하듯 돈이 순환하는 법칙을 알게 되었다. 이것이 자본주의 사회라는 것을 이해한 시부사와는 자본주의를 바탕으로 경제력을 키우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일본으로 돌아와 일본 최초 은행(현 미즈호은행)을 설립하고 도쿄가스, 도쿄해상화재보험, 도쿄증권거래소, 게이한철도, 제국호텔, 기린맥주, 삿포로 맥주 등 500개가 넘는 기업을 설립했다. 지금은 당연한 은행도 19세기 후반에는 없었다. ‘경제의 설계자’로 불리는 그의 일대기는 NHK 대하드라마 〈청천을 찔러라〉라는 제목으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런 그가 평생을 곁에 두고 배운 것이 《논어》라고 한다. 프랭클린이 《성경》을 곁에 두었다는 이야기와 상통한다. 유럽시찰을 마치고 돌아와 중앙 행정기관 대장성 관리가 되었지만 그는 4년 만에 그만두고 경제발전에 매진하게 되는데, 친구가 “천박한 금전에 눈이 어두워 관직을 떠나 상인이 되겠다니 참으로 어이가 없다. 지금까지 자네를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어.”라는 말까지 듣지만 사부사와는 “나는 논어로 일생을 살아 보이겠어.”라고 대답했다 한다. 논어를 경제에 끌어들이다니 하는 생각도 들지만, 그의 경영철학을 정리한 〈논어와 주판〉은 경제를 발전시키는 데 윤리관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한다. 《논어》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GAFA라고 있다. 미국의 거대 IT 기업 구글, 애플, 페이스북, 아마존의 앞 글자를 따서 부른 것이다. 국내 기업을 응원하고 싶어도 너무 편리해서 휴대폰은 애플의 아이폰, 책은 아마존의 킨들에서 구매하고 구글이나 페이북을 쓰는 일이 흔하다. 우리 일상이 거대 자본에 하나씩 삼켜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느끼기도 하지만, 이것이 모노폴리(독점)라는 생각이 든다. 현실적으로 부동산을 사거나 기업을 인수하는 일은 벽이 아주 높다. 그래서 모노폴리 같은 게임을 통해 돈을 벌거나 자본에 대한 감각을 익히고자 하는 이도 있다. 그것이 결코 나쁘다고만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거대 자본에 의한 독점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지만, 현실에서는 횡행하고 있다.
부와 상벽을 이루듯이 같이 이야기되는 것이 빈곤이다. 빈곤층의 자립에 희망을 주는 사례가 있다. 방글라데시에 있는 그라민 은행의 창시자 무함마드 유누스의 마이크로크레닷은 여성들을 중심으로 소액대출(무담보)을 해 주고 사업적 자립을 도와 빈곤 퇴치에 기여함으로써 2006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창업자의 자서전은 빈곤에 맞서는 용기와 행동에 찬사를 보내지 않는 사람이 없다고 한다.
돈과 관련되는 것에는 사회보장 제도도 한몫한다. 정부 홈페이지에는 이를 ‘안전망’이라고 하고 ‘사회보험, 공적부조, 보건의료, 공중위생’을 규정하고 아이부터 자녀 양육, 노인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의 생활을 평생 지원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질병, 출산, 실업 등 여러 가지 일을 겪는다. 자본주의 사회는 어떤 격차가 생기기 마련이지만, 사회보장 제도의 소득 재분배 기능으로 어느 정도 격차를 메우고 있다. 세금에도 재분배 기능이 있고, 빈곤자 안전장치들은 많다. 불평등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이로 인해 사회 전체의 스트레스를 줄일 수 있는 효과는 있다.
일본도, 한국도 격차를 싫어하고 평등을 선호한다. 복지 책임, 재분배 정책 선호도에서 10점을 기준으로 해서 한국은 7.45, 일본은 7.28, 미국 4.78, 스웨덴 5.48로(2019년 기준)로 나타나 한국인은 다른 나라들에 비해 소득격차를 사회적 불평등보다 개인의 노력에 따른 차이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했다. 1970년대 일본에는 ‘일억총중류’라는 말이 있었다. 일억 인구가, 즉 국민 대다수가 자신을 중산층이라고 생각하고 소득이나 생활 수준에 격차가 별로 없다고 생각했다는 말이다. ‘종신고용, 연공서열’같은 기업 구조가 그 배경이었다. 본인의 성과가 없더라도 정리해고 되는 일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여력이 있는 기업은 일부 대기업 말고는 없다.
의류 브랜드 업체 유니클로와 퍼스트 리테일이 2023년 3월 임금을 최대 40% 인상한다고 한 소식은 화재였다. 그밖에도 포토제약, 니혼생명 등 대기업들이 임금 인상을 표명했는데 임금을 전혀 인상하지 않던 기업들이 드디어 우수한 인력확보를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대부분을 차지하는 중소기업은 어땠을까? 일본 경제도, 우리나라 경제도 전체적인 바닥 올리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다. 저자는 말한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지금까지 30년간 즐긴 외상을 이제 갚을 때가 된 것 같다.” 도쿄대학 호시 다케오(星岳雄) 교수는 “그동안 새로 생긴 회사는 너무 적었고, 오래된 회사는 너무 많았으며, 물가는 제자리였고, 인재들은 평생 회사에 매여 있었다.”고 했다. 다수의 인재들이 한정되지 않은 창업이나 새로운 비즈니스에 도전했다면 조금 달라졌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고 한다. 지난 30년에 대한 책임이 우리에게 있는 것은 아닐까? 동세대 사람들이 반성할 때라고도 한다.
【제2장】종교
전 세계에서 무교 인구가 가장 많은 나라 1위는 중국, 2위 일본, 3위 한국이라고 한다. 특정의 종교를 믿는 사람이 적다는 것은 종교에 대한 지식도 일반적으로 별로 없다는 말이다. 요즘은 종교에 대한 지식여부가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데 종교가 있으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이유다. 다른 이유는 우리가 살아가는데 마음의 안정을 얻기 위해서다. 신앙이 있다는 것은 마음을 기댈 수 있는 대상이 있다는 것으로 노년이 되어 죽음에 대해 사실적으로 느끼게 되었을 때도 마음의 평온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는 말과 통한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어쩌면 죽을 때까지도 종교를 갖지 않을지 모르겠다. 어떤 종교든 본질적으로 마음에 의지가 되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맞는 것 같고 실제로 믿는가를 떠나서도 종교를 배우는 일은 마음의 안정에 도움이 되는 것은 맞을 말인 것 같다. 앞으로 좀 더 고민해 봐야겠다.
세계 3대 종교는 기독교, 이슬람교, 불교다. 다음에 흰두교와 유대교가 있으며, 2020년 기준 이들의 신도수를 보면 기독교가 24.4억, 이슬람이 19.5억, 불교가 4.9억 명, 힌두교는 11.6억이지만 유대교는 1.460만 명에 불과하다. 이슬람은 그 말속에 가르침, 즉 교(敎)라는 의미가 담겨 있어서 이슬람교라고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이슬람을 믿는 사람을 무슬림이라고 하는데, 632년 창시자인 무함마드가 사망한 뒤에 《쿠란》과 관례에 따라 지도자를 선출해야 한다는 ‘수니파’와 무함마드의 혈족을 추종해야 한다는 ‘시아파’가 분열되어 오늘날까지도 갈등을 빚고 있다. 80% 이상을 차지하는 수니파의 대표국가는 사우디아라비아, 시아파의 종주국은 이란이다. 2100년이 되면 이슬람 인구가 가파른 증가세를 보여 세계를 지배할 것이라는 연구도 있는데, 이것은 적도 주변의 인구가 계속 늘고 있는 지역이 대부분 이슬람 국가들이기 때문이란다.
기독교와 이슬람, 유대교는 일신교이며, 불교는 ‘성불’이라는 깨달음, 힌드교는 다신교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힌두교는 일신교가 아니냐는 견해도 있는데, 수많은 신들이 자유자재로 모습을 바꾸기 때문에 원래는 한 명의 신일지 모른다는 것이 이유다. 힌두교의 중요 신은 세계를 창조한 신인 브라흐마, 세계를 유지하는 신 비슈누, 세계를 파괴하는 신 시바다. 이 신들이 세상을 ‘창조·유지·파괴’를 되풀이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힌두교의 사상이다. 유대교는 기독교와 이슬람의 원류로 《히브리 성경》이라는 것인데 기독교의 《구약성경》와 같다. 절대신 야훼를 신봉하며 유대인은 야훼로부터 선택된 민족이라는 것이다.
《구약성경》은 구세주가 나타날 것이라는 약속을, 《신약성경》은 구세주로부터 예수가 나타난 이후 하느님의 새로운 약속을 기록한 것이다. 《구약성경》은 분량이 너무 많아서 읽기도 힘들다. ‘아담과 이브’, ‘노아의 방주’, ‘바벨탑’등 유명한 이야기가 여기에 있다. 또 유명한 출애굽기가 있는데, 애굽(이집트)을 탈출한다는 뜻이다. 모세가 이집트에 노예로 있던 이스라엘 백성을 풀어주고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데려간다는 이야기인데,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너무 많아지는 것을 두려워한 파라오는 기원전 11세기 이스라엘의 사내아이가 태어나면 나일강에 던지라고 명령한다. 모세는 그 가운데 태어나 강물에 버려졌으나 이집트 공주에게 발견되어 뜻밖에 왕자로 자라게 된다. 모세는 태어남부터 드라마틱하다. 성인이 된 모세는 하느님의 사명을 받고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이집트를 빠져나오게 되는데, 방해하던 파라오를 설득하려고 여러 재앙을 일으키고 이에 못 이긴 파라오가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내지만, 군대를 보내어 뒤쫓게 한다. 뒤에는 이집트군, 앞에는 바다, 이런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모세는 하느님께 기도해 바다를 둘로 갈라지게 한다. 모세의 기적이 그것이다.
종교의 공통된 주제는 ‘고통스러운 이 세상을 어떻게 살 것인가?’일 것이다. 불교는 집착과 욕망을 없애면 고통에서 해방된다고 한다. 괴로움이란 집착에서 온다고 한 것이 불교다. 고통에서 벗어나면 환생을 멈출 수 있다고 한 것인데, 태어남과 죽음을 거듭하는 것이 윤회다. 이 윤회의 고리를 끊으면 고통도 없어진다는 것이다. 굳이 윤회를 믿지 않더라도 괴로움이 집착에서 온다는 말은 납득이 될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누군가와 사귄다는 것을 알면 충격받고 배신감을 느끼고 질투심이 생겨 괴롭다. 집착하기 때문이다. 대신 그들이 뭘 하든 상관없다는, 집착을 버리면 고통에서 벗어나고 해방된다는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버리고, 누군가를 추앙하는 것이 나쁜 일은 아니지만, 뭐든 과하면 탈이 나듯이 그럴 때는 ‘지나치면 좋지 않다. 마음을 가다듬자’고 한 붓다의 말을 떠올리면 처음에는 다소 쓸쓸하지만, 끝에는 편안해지는 것이 불교다.
이슬람은 과격하다는 이미지가 떠오르지만, 그런 행동을 하는 사람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쿠란》은 이슬람의 경전으로 114장으로 구성된 여기에는 《성경》과 같은 이야기 구조는 없고 계율로서 생활 속 일들을 ‘이렇게 하라’는 식이고 신의 명령이라는 것이 세세히 적혀 있다. 식사 예배는 물론 상거래, 결혼, 이혼, 유산 상속, 도둑질과 살인에 대한 징벌 등에 대해서도 지시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행동양식이며 법체계라고 할 수 있다. 신앙+행동 양식+법체계=이슬람이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가 쉽다. 《쿠란》에는 ‘예배는 하루에 다섯 번 메카를 향해 올린다. 돼지고기나 술은 금한다.’등의 생활규범이 엄격하고 ‘돈을 빌려줬을 때는 이자를 받아내려 하지 말라. 이혼한 여성도 공정하게 부양받을 권리가 있다.’와 같은 매우 선한 규정들도 많다. 기독교의 예수처럼 오직 ‘알라’가 유일하고 절대적인 신으로 인간은 모두가 똑같이 신의 노예이며 특권계급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특징인데 인간은 누구나 평등하다는 것이다. 다만 ‘신 앞의 평등’이지 근대 서구 국가에서 꽃피운 ‘법 앞의 평등*’과는 다르다. 이슬람은 이미 7세기에 평등의 개념을 앞장서 주장한 점에서 선진적이라 할 수도 있다.
《쿠란》은 암송하기에 어울리는 경전으로 리드미컬한 문체를 우리말로 옯기는 것은 무척 힘들다고 한다.
*1789년 프랑스 혁명으로 채택된 〈인간과 시민의 권리에 관한 선언〉을 바탕으로 한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평등하며 종교 사상, 언론·출판의 자유를 누리며 평등한 법 적용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후 인권선언과 각국 헌법의 기초가 되었다.
힌두교는 의아할 정도로 우리와 생소하다. 하지만 불교를 통해서 이미 간접적으로 경험하고 있는 것이 많다. 명상과 경전 읽기 같은 일상생활에서의 수행, 내면의 변화를 중시한다는 점에서 불교와 뿌리가 같다. 힌두신의 가르침을 따르는 국제 영성공동체 ‘하례 크리슈나’는 서울, 인천, 김해, 포천 등에 사원을 두고 있으며, 1,000여 명 신도를 보유하여 사상을 알려가는 중이라고 한다. 공물을 태워 번뇌를 불살라 없애는 기원 의식, 불전이나 묘 앞에 꽃과 경단을 공양하는 의식 등은 그 뿌리가 힌두교에 있다. 신과의 접신의식에서 의외로 힌두교와 공통된 점이 많다. 눈앞에 해야 할 일이 힘들어 도망치고 싶어질 때, 의심의 시간이 아니라 행동을 보여야 하는 시간이라면 결과를 바라지말고 그저 의무를 다하면 된다고 일깨우는 힌두신 크리슈나의 말이 우리에게 격려가 된다.
불교를 믿는 일본과 한국은 부처님을 모시고 절을 찾아 기도하는 방식에서는 비슷하지만, 일본의 최대종파는 정토 신앙을 표방하는 ‘진언종’이고, 한국은 ‘조계종’이라는 점에서는 차이가 있다. ‘스스로 수행해 집착을 버려라, 다만 내가 스스로보다는 그 처분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특징인 일본에서의 정토신앙은 중국에서(당나라 선도대사)에서 시작되어 신라(원효대사)를 거쳐 일본으로 건너가 하층민들이 절대적으로 믿고 따랐기 때문에 최대의 종파가 된 데 반하여, 한국은 고려 시대 지눌에 의해 통합적(참선 중시 선종과 경전을 중시한 교종의 통합을 추구한) 수선사 운동으로 조계종이 강세를 보인다.
【제3장】철학
철학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은 인생이 무엇인가 하고 묻는 만큼 어려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한가한 사람이나 하는 학문쯤으로 생각하기 싶다. ‘나’라는 존재가 무엇인가?로 부터 시작하는 것이 철학이다. 근본적인 문제로 돌아가 생각하는 학문, 인류가 오래전부터 모든 것에 의문을 품기 시작하면서 시작한 학문이 철학이다. 철학을 교양으로 알면 분명 인생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것은 맞는 말 같다. 우리는 철학자 하면 의례 고대의 소크라테스(기원전 469∼399년)를 먼저 생각한다. 그는 책을 남기지 않았으나 제자인 플라톤이 쓴 것을 통해 그의 철학을 알 수 있다.
간혹 ‘그렇구나, 아무것도 몰랐구나.’하고 놀랄 때가 있다. ‘그러면 진실이 무엇일까?’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지혜를 사랑하는 순간, 철학이 시작된다. 아무리 철학을 공부해도 깨닫지 못하면 ‘철학을 하지 않는 것이다.’놀라움과 깨달음이 없다면 철학이 아닌 것이다. 반대로 모든 것에 놀라움이 있다면 철학적 삶을 사는 것이다.
‘학문의 아버지’로 불리는 사람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384∼322년)다. 그는 플라톤의 제자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가정교사였다. 그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무거운 물체와 가벼운 물체를 동시에 떨어뜨리면 무거운 물체가 먼저 떨어진다는 낙하이론은 16세기 갈릴레오 갈릴레이 이전까지, 아폴로 15호가 달에서 그 실험을 하기 전까지 2000년 동안 그의 이론이 옳다고 여겼다. ‘카타르시스’라는 말도 그가 처음 사용했다. ‘영혼(정신)의 정화’로 현대에도 연극이나 문학비평 등에 많이 쓰인다. 그리스 비극 이야기를 하면서 비극의 본질이 카타르시스에 있다고 한 것인데 주인공이 불행에 빠지는 것은 ‘연민’을 느끼고 나에게도 저런 일이 생길 수 있다는 ‘공포’를 떠올릴 때 감정이 정화된다는 것이다. 그는 윤리학의 창시자이기도 한데 ‘행복해지기 위해 어떻게 덕을 닦아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그는 ‘중용의 덕’이 중요하다고 했다. 용기가 과하면 ‘만용’이지만, 부족하면 ‘겁쟁이’가 되는 것처럼 적당히 좋은 용기를 가져야 한다고 했다. 이미 공자는 그 말을 했었지만.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 이전에도 ‘세계는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를 연구한 사람들이 아주 많았다. 탈레스는 ‘만물의 기원은 물’이라고 했고, 피타고라스(기원전 582∼486년)는 ‘만물은 수(數)’라 했으며, 헤라클레토스는 ‘만물은 흐른다’고 하여 본질은 ‘변화’라 생각했다. 또 데모크리토스는 만물의 근원은 원자이며 원자는 허공 속에서 운동하고 결합함으로써 세계가 만들어진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근대과학과도 맥을 같이 하는 이론으로 놀랍지 않을 수 없다. 플라톤(기원전 427∼347년)은 이데아를 말해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영혼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사물의 본질’이 이데아라고 했다. ‘현실의 것은 불완전하지만, 완전한 것은 존재한다.’라는 이데아론은 기하학에서는 매우 당연하다. 피타고라스 학파 사람들에게 배운 플라톤은 이를 발전시켰던 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언제나 듣고 보지만 정말로 어려운, 이해하기 힘든 말이 아닐 수가 없다. 이 말은 데카르트(1596∼1650년)가 한 유명한 말로 철학자이지만 수학자이기도 한 그는 그때까지 글로 표기하던 수학 공식을 표기법으로 깔끔하게 정리했다. 예를 들어 방정식을 ax2+bx+c=0으로 쓸 수 있다고 한 것이다. 그의 사고법 바탕에는 수학이 있었다. ‘잘못된 논거로 판단하지 않도록 한다. 문제를 작게 분할하여 규칙과 순서에 따라 푼다. 마지막으로 일일이 따져보고 전체를 재검토 한다.’철학 사고도 이와 같았다. 그는 확신했던 것을 찾고자 할 때는 모든 것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러면 모두가 수상해진다. 모든 것을 의심하고 모든 것이 의심스러워진 시점에서도 단 한 가지는 확실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의심을 하는 나 자신의 의식’이었다. 자기의식의 존재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었다. 이것이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이다.
데카르트의 사상은 획기적이었다. 오랫동안 아리스토텔레스와 기독교 사상에서 벗어나 ‘나 자신’에 주목하기 시작했고 근대적 자아의 각성을 선언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인간은 대상을 인식해야만 비로소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인간의 능력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현상계뿐이다. ‘이데아를 찾아 헤맬 것이 아니라, 현상계에서 진리에 다가가려 노력하면 돼.’이것은 칸트의 생각이다. 고정관념이나 선입견을 버리고 있는 그대로를 관찰함으로써 신선함을 느끼고 새로운 발견에 감동하는 것이 현상학이다. 이것은 에드문트 후설(1859∼1938년)의 이론으로 이후 하이데거, 사르트르, 메를로퐁티 등으로 계승되었다.
하이데거(1889∼1976년)‘세계 내 존재’라는 개념을 제시했는데, ‘우리는 세계 속에 살고 있다. 우리는 세계를 구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세상에 내던져진다는 것은 스스로 결정할 수 없으므로 부조리하다고 할 수 있다. 부조리하지만 인간은 자신이 나아갈 길을 계획하고 선택할 수 있다. 스스로 자신의 길로 나아가기도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언젠가 죽는다면 나 자신의 삶을 살아가겠다고 생각하고 미래를 향해 선택해나가는 것이다. 부조리하게 던져지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가능성을 열고 미래를 만들어가는 존재, 유한한 시간을 의식하는 사람이라면 떠밀려가기보다 내가 정말로 하고 싶은 일, 내게 중요한 것에 집중하게 된다는 말이다. 하이데거는 인간은 자신의 죽음을 의식한 ‘본래적’삶의 방식을 취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실존주의적인 삶이 세계적인 삶이라는 것이다.
또 다른 실존주의 사상가 중 한 명이 장 폴 사르트르(1905∼1980년)다. 그는 ‘실존은 본질에 앞 선다.’고 해 깨닫기 전에 이미 실존(존재)하기 때문에, 존재의 이유라 할 수 있는 ‘본질’을 나중에 만들어가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존재와 무》, 《실존주의란 무엇인가》같은 저서를 남겼지만 소설도 남겼다. 소설 《구토》는 서른 살의 주인공 로캉탱이 여러 가지 것에서 의문을 품고 구토를 하는 이야기로 “어느 날 그는 마로니에의 나무뿌리를 보며 구토를 느끼고 그 정체를 깨닫게 된다. 나무뿌리는 왜 거기 있어야 하는지 설명될 수 없으며, 그냥 있을 뿐이었다. ‘존재의 이유 없음’부조리함이 그에게 구토를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우여골절 끝에 주인공은 소설을 쓰고자 다짐하고 그냥 태어났으니 사는 삶이 아니라 스스로 존재의 이유를 만들어가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구토》에는 존재의 이유가 설명될 수 없는 “나무뿌리를 보며 구토를 느끼고 그 정체를 깨닫게 된다.”는 말이 있는데 무엇을 말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동양인이라면 오히려 정해진 목적이나 이유가 없는 존재 그 자체에 기쁨을 느끼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주체도 객체도 없는 하나의 감각이 동양적이다. 고대 인도에서는 우파니샤드라는 철학이 있었다. ‘범아일여(梵我一如)’라고 한 것인데, 우주를 지배하는 원리 ‘범(梵)’을 브라만, 개인인 ‘아(我)를 아트만이라고 부르고 브라만과 아트만이 동일함을 아는 것이 궁극적 깨달음이라고 한 것이다.
노자는 이것저것 재는 것보다 자연 그대로가 좋다고 했다. 무위자연이 그것인데 세상 만물은 상대적이고 항상 변하므로 인간은 여기에 선과 악, 길고 짧음, 아름다움과 추함, 행복과 불행 등 고정된 이름을 붙여서 구분하므로 괴로워진다고 했다. 구분이 헛되고 억지스런 것이라는 것을 알면 비교 판단하는 행동과 욕심을 버리고, 그대로의 상태로 만족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장자 또한 도의 경지에 오르면 모든 것이 같은 만물제동(萬物齊同)이 된다고 했다. 생김새는 다양해도 모든 것은 도라는 근본 원리의 변형일 뿐 원래는 같다는 것이다. 나비도 인간도 자신도 모두 진실이며 대립과 구별을 초월한 세계에 살라는 비유를 닮은 호접지몽(胡蝶之夢)이라는 꿈 이야기도 《장자》에 나온다. 자연 속에 자신을 해방시키고 자연과 일체감을 갖는 명상이나 좌선을 실천하는 동양사상이 결코 논리적이고 합리적이기만 한 서양사상에 정말로 뒤지는 것은 아니다.
【제4장】역사
세상에는 예언자도 예언서도 많다. 그러나 미래를 예측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다만 과거를 통해 배울 수는 있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이 있듯이 역사에서 배우면 보다 나은 미래를 지향할 수는 있을 것이다. 역사는 ‘국사’와 ‘세계사’가 있다. 한국사인 국사에서 세계사를 바라보고 균형을 맞춘다면 역사를 제대로 보고 아는 것이다.
부정적 세계사라면 대항해 시대에 시작된 아메리카의 발견과 그것으로 인한 세계사의 판도를 바꾼 일일 것이다. 스페인은 코르테스를 멕시코에 보내 멕시코 아즈텍 제국을 멸망시켰고(1521년), 파사로를 남아메리카에 보내 잉카제국을 멸망시켰다.(1533년) 이들이 얼마나 많은 원주민을 학살했는지는 선교사였던 라스 카사스가 쓴 〈인디아스* 파괴에 관한 간략한 보고서〉에 남아 있다. 카사스는 정복자 군대의 신부로 식민지 개척에 관여한 인물이지만 당시의 비참한 상황을 목격하고는 가만히 있을 수 없어 기록을 남긴다고 했다. 카사스에 따르면 그가 목격한 40년 동안에 목숨을 빼앗긴 아메리카 원주민은 1,500만 명에 이르렀다.
남미 브라질은 포르투갈어를 쓰고 그 외 국가들은 스페인어를 공용어로 쓴다. 또 기독교인이 과반 이상인데, 이는 언어와 신앙 모두를 지배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식민지 경영에 원주민을 노예로 부렸다. 그러나 원주민을 혹사함으로써 급격히 인구가 급감하자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를 대량으로 공급해 오는 ‘노예무역’을 시작했다. 17,18세기 동안 흑인 노예는 1000만 명 이상이라고 한다. 끔찍한 재배와 살육, 혹사가 아닐 수 없다.
*스페인이 차지한 남북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을 지칭
이외에 영국을 비롯한 서구 제국들과 일본까지 가세한 제국주의 침략의 역사, 종교전쟁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부정적 역사가 이어지지만 역사는 흐르고 있다. 지금도 계속되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야말로 해결될 수 없는 전쟁일까 하는 궁금증을 낳는다. 21세기 들어 일어난 큼직한 전쟁은 이미 수천 혹은 수만 명이 죽고 또 세계인 모두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더 이상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국제 평화를 위해 ‘국제연맹’이 창설되었으나 이어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강력한 세계 평화를 지켜야 한다는 목소리로 ‘유엔(국제연합)’이 창설되었다. 그러나 이것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는 무용지물이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왜 침공한 것일까?
둘은 같은 소련을 구성하던 나라다. 소련은 붕괴되었지만 문화적으로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인의 마음의 고향과도 같은 곳이다. 러시아 입장에서 뿌리가 같은 형제 의식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2014년 러시아가 국민투표로 우크라이나를 병합한 것이다. 이때는 전쟁으로까지 발전하지는 않았다. 러시아는 이런 방식으로 우크라이나를 병합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을까? 그러나 크림반도 병합 때 잠자코 있던 나토가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지원을 함으로써 상황은 급변했다. 여기에 미국과 영국 등이 러시아를 끌어들여 상황이 악화되었다.
미국과 영국 등 지원으로 전쟁을 이어가고 있기는 하지만 죽는 사람도 우크라이나인들이다. 그래서 우크라이나를 이용한 대리전쟁이 아니냐는 시각도 있는 것이다. 러시아가 약화되면 서방국들이 이득이 되기 때문에 그렇다. 우크라이나에 핵이 있다면 상황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크라이나는 소련 당시에는 가지고 있던 핵을 1994년에 포기했다.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에 거액의 빚을 지고 있었기 때문에 핵무기를 넘겨주고 빚을 상환한 것이다. 핵이 있었다면 이렇게 공격받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렇다고 지금 미국, 영국이 우크라이나에게 핵을 제공할 수는 없다. 딜레마가 아닐 수 없다.
일본 헌법 제9조는 스스로 선제공격하지 않고 방어만 한다는 것이다. 이는 패전국으로써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점차 달라지고 있다. 2012년 자민당 헌법 개정 초안에는 ‘방위군’을 ‘국방군’으로 고치고 선제공격도 할 수 있게 하자는 것이다. 하지만 자민당 정권이 계속 집권하고 있음에도 실행되지 못하고 있다. 헌법을 개정하려면 중의원, 참의원 각 2/3 찬성을 거친 후 국민투표에서 과반수 찬성을 얻어야 하는데 이미 전쟁을 기피하는 국민의식이 그것을 쉽게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보면서 2022년 기시다 후미오 내각총리는 지금의 자위대로는 나라를 지키기가 충분하지 않다고 말한 바 있다.
각국이 국방예산을 늘리고 있는데 우크라이나 인근국은 말할 것도 없고 북미, 아시아, 태평양, 중동에 이르기까지 전세계적으로 국방예산을 대폭 증액하고 있다. 미국 항공전문지 〈에이비에이션 위크〉에 따르면 2032년까지 국방예산이 기존 대비 2조 달러(2,600조), 무기 확보 예산은 6,000억 달러(780조) 이상 증액될 것이라고 한다. 안보에 대한 경각심만큼 방위산업에 대한 대전환기를 맞고 있다. 그 덕에 우리도 폴란드에 무기를 팔고 있지만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 문제다.
역사를 배우는 것은 실패에서 교훈을 얻고자 하는 때문이다. 다만 실패한 이야기는 우울하고 안타깝다. 그러나 그 실패에서 어떤 전환점을 맞기도 하므로 인류는 발전해 왔다. 역사는 실패와 성공을 반복하는지 모른다. 성공한 역사는 무엇일까? 저자는 문자의 발명과 과학의 발달이라고 한다. 문자가 없어도 의사소통은 가능하다. 하지만 문자로 인해 단번에 문명이 발전돼 왔다. 가장 오래된 문자는 기원전 3500년 메소포타미아 수메르인이 발명한 쐐기 문자로 알려졌고, 이집트의 히에로글리프, 인더스문자 황하 문자 등이 인류의 정보를 공유하고 축적해왔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이만큼 편리하게 생활하고 병을 극복해 간다는 것 모두가 과학의 발달 덕분이라는 것이다.
【제5장】예술
흔히 인간의 이상을 ‘진선미’로 구분해서 말한다. 眞은 과학이나 철학적 사고를 말하고 善은 도덕성을 말하고 美는 예술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의 감성을 자극해 주는 것이 예술의 힘이다. 다빈치의 〈모나지자〉를 보노라면 르누아르나 세잔, 모네, 마네, 고흐의 것과 별반 차이를 느끼지 못하는 데는 그에 대한 지식이 그만큼 없어서인지 모르겠다. 다빈치의 그림은 윤곽선이 없다.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이 서서히 색을 변화시키는 기법으로 신기하기도 하고, 뿌연 것 같기도 하면서도 또렷해 보이기도 한다. 정말로 그런 인물이 존재하는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모나리자〉그림의 배경은 태초에 지구가 탄생했을 때와 같은 대지에 강이 흐르고 그 앞 여성이 미소를 짓고 있다. 현실의 광경이 아니라는 착각을 일으킨다. 하지만 그림에서 위화감이나 이질감 같은 것은 전혀 느끼지 못한다. 이것이 다빈치의 탁월감이 아닐까.
이런 미술의 흐름은 사실주의→인상파→추상화로 이어지고 인상파에도 고흐, 모네 등 유명 화가들이 많지만, 피카소로 이어진 추상화에서는 근현대 화가들에 의해 유명한 회화들이 많이 탄생했다. 멕시코 출신의 ‘프라다 칼로’라고 있는데 그녀는 자화상을 많이 그렸다. 굵게 이어진 눈썹과 민족의상까지. 그녀는 교통사고와 30여 차례 이어진 수술과 유산, 남편의 외도 등 숱한 고난을 겪으면서 그런 감정을 표현했다. 〈상처입은 사슴〉(1946년, 유채)은 화살에 꽂혀 피를 흘리는 사슴의 얼굴만은 칼로 자신이다. 생생하게 표현한 자존심과 강인함이 느껴지는 것은 칼로 회화의 특징이다.
(프라다 칼로의 자화상, 상처 입은 사슴)
조각, 음악(오페라, 뮤지컬 등), 연극, 영화 모두가 美의 영역으로 감성을 자극하는 요소들이지만, 칼로의 회화를 보면서 이만 줄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