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림산과 감복동 마을이야기
오늘은 영양읍 주산이며 땅과 물을 다스리는 신이 산다는 흥림산과 감복동 마을에 대하여 이야기해 봅니다.
흥림산(興林山, △766.7m)
최근 자연휴양림이 조성되었다. 『여지도서』(영양)에 "흥림산은 현 서쪽 10리에 있고, 예전에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내면 산을 미쳐 다 내려오기도 전에 비가 올 정도로 영험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일어난다는 뜻의 '흥(興)'과 장마를 뜻하는 '림(霖)'으로 산 명칭을 부르게 된 배경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흥림산 부근에서 통일신라시대 절터와 기와조각이 발견되었는데, 기와조각에 흥림사(興林寺)로 표기되어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산 이름의 한자 표기도 예전에는 '흥림산(興林山)'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옛 군현지도와 전국지도 대부분에서 흥림산이 표시되어 있다. 그만큼 영양에서 중요시되었던 산으로 여겨진다.
http://m.cafe.daum.net/ilovejayeon/OXKY/82?svc=cafeapp&sns=band遊山記유산기. 遊日月山記유일월산기.
興霖山記흥림산기국립수목원에서 산림역사 자료 연구총서 시리즈로, 선조들이 남긴 유산기를 국역하기로 한 것 같습니다.
이 시리즈는 ‘산림정책과 산림문화의 역사성 규명을 위한다’라는 목표를 가지고 시작한 듯합니다만,그 목표에
얼마나 부합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떻든, 유산기(遊山記)는 유기(遊記)의 일종으로 산을 구경한 느낌을 적은 기록인 것입니다.
울진산수기를 남긴 김창흡이 유기(遊記)를 남기는 것은 “글을 써서 기록해 와유(臥遊)에 보탬이 되는 자료로 삼는다.
(134쪽)”라고 적은 것처럼 훗날 유기를 다시 읽으면서 여행의 감흥을 되살릴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만일 오늘의 면려에 미치지 못한다면 장차 향인을 면치 못하고 다 사라지고 민몰되어 초목과 다를 게
없으리니 어찌 크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94쪽)”라면서 스스로를 독려하기 위하여 유기를 남기기도 했다고
합니다.
<국역 유산기>에는 조선의 문인들이 남긴 170여편의 유산기 가운데 경상북도에 있는 산을 다룬 23편을 골라 국역
하고 있습니다.
국립수목원 신준환원장님이 남긴 발간사의 한 대목입니다.
“유산기는 말 그대로 산수 간을 노닌 일을 기록한 것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 선조들의 유교문화와 산림문화의 오묘한
만남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산수유기를 통해 주체의 관찰과 행위를 알 수 있으며, 자연 앞에 인간의 왜소함을 돌아보는 겸허를 배웁니다.
솜씨 좋은 사진을 보듯 펼쳐지는 장관이며, 꼼꼼하고 치밀한 선인들의 기록정신, 봉우리의 유래와 산비탈의 모습과
능선의 굴곡이 눈앞에서 펼쳐집니다.”
1924년 전인미답의 곳인 에베레스트 정상을 600미터 남기고 실종된 조지 말로리는 에베레스트 등정을 앞두고
필라델피아에서 가진 강연에서 ‘당신은 왜 위험하고 힘들며 죽을 지도 모르는 산에 갑니까?’'라는 한 부인의 질문에
‘산이 그곳에 있으니까요(Because it is there.)’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주자(朱子)는 “산을 감상하고 물을 완상화는 것도 마음을 놓아버리는 것[放心]이다.”라고 하셨고,
공자께서는 “인자(仁者)는 산을 좋아하고 지자(智者)는 물을 좋아한다.”라고 하셨다고 하는데,
사람마다 산에 가는 이유가 다를 것 같습니다. 우리 선조들은 어땠을까요?
조선 후기 문신 박장원은 “무릇 높은 곳에 올라 먼 곳을 바라보며 답답한 심사를 펴는 것은 진실로 또한 사람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마음이다. 평소에도 그러한데 하물며 유폐를 당한 경우에 있어서 이겠는가
(박장원, 보상망창산기, 97쪽)”라고 산에 오르고 싶어 하는 선비의 마음을 설파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자연에서 삶의 지혜를 배우는 모습도 볼 수 있는데, “가파른 산길을 올려다본 후 천천히 느린 걸음으로
걸으며 쉬지 않는 것을 공부로 삼았다. 이 몸이 점점 높아져 원근의 여러 봉우리들이 이미 눈 아래에 떨어져 있는 것을
휘익 돌아보았다. 우리가 학문을 하는 것도 이와 유사하리라.
처음에는 힘들어서 발꿈치를 붙이고 있기가 매우 어렵지만 한결같은 뜻으로 앞을 향해 나아가고 물러나지 않는다면,
끝내 반드시 도달하는 곳이 있을 것이다.(허훈, 유금오산기, 204쪽)” 그래서 선비는 산에 올라서도 중도에 포기하지
않는가 봅니다.
유산기의 형식도 필자마다 독특해서 소략하게 산행을 기록한 경우도 적지 않는 반면, 장현광은 주왕산록에서 산천의
기이한 형상을 고서에서 읽은 내용을 빗대어 서술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김창흡이 남긴 울진산수기를 보면,
“대체로 산의 형세는 사람이 서 있는 듯하기도 하고 병풍이 둘러쳐져 있는 듯하기도 하며, 창검 모양으로 빙 두르며
성처럼 푸르게 솟아 있어 마치 연꽃이 우뚝 솟아오른 듯하기도 했다.(129쪽)”라고 현란한 묘사를 읽을 수 있습니다.
권정침은 소백유록에 험지에서 땅을 일구는 농부들의 수고를 기록하고, 사력을 다해 벼랑을 오르는 과정을
‘한 치 나아갔다 한 자 물러나니, 거의 우리가 학문을 할 때 깊은 성찰을 일으키는 과정과 같았다.(141쪽)’라고 적어
산천경계의 유람을 넘서 삶의 애환과 학문의 어려움을 토로하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장복추가 금오산유록에 남긴 “험한 곳에 오르고 높은 곳에 오르려면 급하지도 말고 느리지도 말아야 한다.
급하면 피로해지기 쉽고 느리면 도달하기 어려우니, 천천히 걸음을 옮겨 항상 부족한 듯이 여긴다면 뒤를 돌아보면 점차
멀어질 것이고 앞을 바라보면 더욱 가까워질 것이다.
(168쪽)”라는 구절은 오늘날에도 산에 오르는 사람들이 명심해야 할 경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선인들이 어떤 마음으로 산을 대하였는지 오늘에 살펴 살아가는 지혜로 삼을 내용이 풍부한 책읽기가 되었습니다.
국역 유산기 국립수목원 편저255쪽 유산기(유일월산기 및 흥림산기)
http://m.cafe.daum.net/ilovejayeon/OXKY/153?svc=cafeapp&sns=band일월면 주곡2리 감복동 이야기-감부골.감복골.감복동(甘伏洞 or甘福洞)-
영양군 영양읍 주산이며 영양군청의 배산인 興霖山흥림산 동쪽에 있는 마을로 물을 다스리는 물신(水神)과 땅을
다스리는 땅신(土神)이 있는 마을이라고 붙여진 이름이다.
1600년 무렵부터 감복동(甘伏洞)이 였으 나,1914년 법곡동(法谷洞)과 감복동(甘伏洞)이 통합하여 주곡동이 된
후에 감부골, 감북골,감북곡(甘北谷)이라 부르고 있다가 2016. 9.행정분동으로 주곡2리가 되었다.
감천, 감내,감복의 '감'은 물신이요 땅신을 상징한다.
최남선의 「신자전」을 보면 신을 '검' 이라고 하였으니, 여기 감은 검과 같은 뜻으로서 거북신앙을 드러내는 것
으로 보인다.
거북은 옛말로 거붑이요. 다시 이는 '검'에서 비롯한 것이기 때문이다.(양산 민요 '왕거미 노래'의 거미-검-거북)
모든 삶의 가능성은 물과 땅에서 말미암는 것이니, 땅신을 중심으로 함은 너무나도 당연한 귀결이라 할 것이다.
우리말 감내를 이에 가까운 한자로 대응을 두어 감천이라고한 것이라 추정된다.
감복동은 가마실의 사마-감과 같은 계열의 마을 이름으로 종교적인 뜻으로라면 물신과 땅신의 동네라는 말이 된다.
(고도 : 767m). 영양읍, 일월면 그리고 청기면 3개 면의 경계를 이루는 산이다. 최근 자연휴양림이 조성되었다.
『여지도서』(영양)에 "흥림산은 현 서쪽 10리에 있고, 일월산에서 산줄기가 뻗어 왔으며, 구름 기운이 서리면
비가 온다."라고 기록되어 있다m.cafe.daum.net
산림역사 자료 연구총서 시리즈로, 선조들이 남긴 유산기를 국역하기로 한 것 같습니다. 이 시리즈는 ‘산림정책과
산림문화의 역사성 규명을 위한다’라는 목표를 가지고 시작한 듯합니다만, 그 목표에 얼마나 부합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떻든, 유산기(遊山記)는 유기(遊記)의 일m.cafe.daum.net
영양군 영양읍 주산이며 영양군청의 배산인 興霖山흥림산 동쪽에 있는 마을로 물을 다스리는 물신(水神)과 땅을 다스리는
땅신(土神)이 있는 마을이라고 붙여진 이름이다. 1600년 무렵부터 감복동(甘伏洞)이 였으나, 1914년 법곡동(法谷洞)과
감복동(甘伏洞)이 통합하m.cafe.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