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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하며 춤추며
이원익
바야흐로 딴따라의 시대다. 딴따라라고 하면 유행가 같은 대중음악이나 그런 음악을 하면서 먹고 사는 이를 가리키는 좀 속된 말이다. 한 가지 유감은 왜 이렇게 좀 낮춰 부르는 말은 흔히들 순수한 우리말로 돼 있고 좀 고상하고 그럴듯한 대상을 나타낼 때는 한자말에다 영어, 불어 등 외국어를 갖다 쓰느냐 이 말이다. 예를 들까? 먹고 자는 집이라면 선술집에서 시작하여 주막, 여관, 호텔, 빌라, 리조트 하면서 왜 차차 비싸고 좋아지느냐 이 말이다. 그래서 딴따라가 맨 밑바닥이면 가수, 싱어, 그 다음은 뭔가? 보칼리스트? 엔터네이너?
아무튼 고국은 온 나라가 이른바 딴따라 열풍이다. 골목마다 노래방이요 노래교실이요 음악학원에다 아이돌 오디션 준비반에는 구름같이 아이들이 모여든다. 엄마 손 잡고. 가락이나 가사의 정체성이 좀 모호하기는 하지만 케이팝 열풍이 세계 곳곳에 번져 나간 지는 이미 한참이 되었다. 이곳 동포사회도 정도의 차이지 예외가 아니다. 어디 가서 마이크 잡으면 다들 한 가닥씩 하는데 끝까지 정말 노래 부르기 싫어하고 못하는 친구는 열에 하나 될까 말까다. 미국 사람이라면 그 반대일 것이다. 어, 저 친구 한 소리 하네? 몰랐는 걸, 할 만한 이가 열에 하나는 될까? 나머지는 다 우리 기준에는 음치거나 아예 음치 축에도 못 든다. 왜 이리 유독 한국 사람들은 끼가 많은 걸까?
노래만큼은 아닐지 몰라도 흔들고 추는 데도 일가견이다. 아직은 좀 점잔 빼는 문화가 남아 있고 기본 추임새부터 배워 본 적이 없어서 그렇지 그 꺼풀만 벗겨 놓으면 못 노는 사람이 없다. 조선시대 오백 년 동안 워낙 이런 예능 기질을 억눌러 놔서 뒤늦게 집단적으로 폭발하는 것일까? 하기야 우리 자신의 기록은 거의 사라졌지만 중국의 사서인 위지 동이전 같은 데서 몇 자씩 남아 전하는 바를 보더라도 우리는 본래 먹고 마시며 노래하고 춤추기를 꽤나 즐긴 피플이었나 보다.
같은 나라에서도 경상도와 전라도가 조금씩 장끼가 다른데 노래는 전라도가, 춤은 경상도가 좀 더 앞서갔지 않나 싶다. 얼마 전까지, 한국 사람들이 온통 도시의 소시민들이 되기 전까지는 시골이나 중소 읍면 같은 데서 중년이나 초로의 아저씨 아줌마들이 버스를 대절하여 장거리 계모임을 가거나 하면서 유람하는 문화현상이 전국적으로 만연하였었는데, 먼지 나는 신작로를 덜컹거리며 달리는 버스간에서도 남녀 구별 없이 일어나 주구장천 춤추고 노래하며 취해 흐느적거리는 풍경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저리 몸서리를 치게 만들고 맺힌 속을 못 풀어 흐느적이게 하였던가?
정체를 잘 규명할 수 없는 이런 막춤과 막노래의 모습으로, 일견 천박하면서도 처절한 민중 욕구의 걷잡을 수 없는 분출이 있었다는 것이다. 서부개척 시대, 백인들에게 쫓기던 인디언 부족들의 마지막 광란의 춤 같은 종교현상과는 좀 다르지만 말이다. 아무튼 이 때도 지나가는 버스간을 척 보면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를 안다. 운전수만 빼고 모두 일어나 흐느적거리며 막춤을 추는 군상이 차창 가득 지나갔다면 그건 경상도 어디에서 온 버스요(이때 안전벨트 왜 안 매었느냐고 나무란다면 시대착오다. 그리고 랩 음악에 맞춰 재미로 차체를 기우뚱거리는 요새 젊은 애들 자동차의 옵션은 아마도 이런 고물 버스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 같다), 한두 사람이 일어나 목청을 뽑고 나머지 사람들은 앉은 채 일심동체로 어깨를 들썩이며 두 팔을 들어 일사불란하게 박자 맞춰 손뼉을 치거나 윗몸이 파도타기를 하며 따라 부른다면 그건 전라도 버스다. 경상도가 춤꾼을, 전라도가 명창 소리꾼을 많이 낸 게 그저 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이제 이러한 사회문화현상이 좀 수그러들자 민중들은 조금은 더 세련되게 이러한 노래와 춤의 참여자가 되어 전국노래자랑의 출연자가 되거나 청중으로 자리를 메운다. 그러다 신바람이 나면 아예 무대에 뛰어오르거나 무대 앞 좁은 마당에서 얼씨구나, 몸을 비비고 흔든다. 가수들이 나와 노래하는 날이면 각 방송국의 대형 방청석은 남녀노소로 언제나 만원이다. 나가수니 뭐니 하는 노래하는 프로그램들은 가히 그 열기가 대단하다. 이제는 가수와 청중이 따로 없다. 전 국민의 노래 솜씨와 듣는 귀가 전반적으로 상향평준화 되었다. 그러니 웬만한 옛날 가수는 치열하게 경쟁을 뚫고 올라온 요즘 젊은 가수들과 실력으로는 상대가 잘 안 된다. 좋은 시절 다 지나간 것이다.
이렇듯 우리가 세월 따라 겉만 바뀌었지 노래하고 춤추기를 즐기는 그 심성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런 속성이 바다 건너왔다고 변할쏘냐? 먹고 살기 폭폭해서 가슴에 묻어 두니 터뜨려 연습할 기회는 적고, 활화산처럼 소록소록 에너지만 쌓이고 있다는 말이다. 그 사이에 해외 교포들이 얼마나 노래 실력에도 뒤쳐졌는지는 본국 사람들과 같이 노래방에 한 번 가보면 된다.
내가 왜 이런 시답잖은 얘기를 길게 늘어놓는가 하면 자고로 이 노래하고 춤추는 에너지를 이용 못하면, 이 물결을 타지 못하면 정치고 종교고 뭐고 큰 성공 하기는 글렀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다. 그래, 본론으로 들어가자. 노래와 춤을 경시하고는 선교든 포교든 제대로 성공할 수 없다. 그런데 우리 불교는 지금 노래와 춤을 잘 쓰고 있는가? 아니면 그까짓 게 뭐라고 하며, 진리가 중요하고 수행이면 끝나는 거지 그깟 유흥이 무슨 대수라고 하며 한 구석에 처박아 두고만 있지는 않는가? 앞만 보고 한 우물 파는 것도 좋지만 이제 주위도 좀 살펴보자. 기독교에서는 지금껏 어떻게 해 오고 있는가?
성급히 결론부터 말하자. 불교는, 특히 미주 한국불교는 힘이 달리는 것인지 아예 생각조차 못하는 것인지 음악과 춤을 포교에 거의 써먹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일부에서는 이런 것들을 백안시 하고 있지 않나 하는 느낌이다. 이래서는 안 된다. 감히 말하건대 음악이 없는 세상은 무성영화처럼 죽은 세상이며 춤이 없는 세상은 움직임과 박동이 없는 정물화의 세상이다. 좀 단정적으로, 음악과 춤을 모른다면 불법을 널리 펼 수 없다고까지 말하고 싶다. 불교가 크려거든 합창단부터 만들어 음성공양을 베풀어라. 심산유곡의 수행처가 아니라 누항의 포교당이라면 때때로 춤사위의 손짓, 몸짓으로 삶에 지친 중생들을 부처님 품 안으로 불러들여라.
LA합창단
만약에 아직도 이런 말에 일말의 거부감이 든다면 옛날에는 어떠했는지, 불교에는 과연 음악과 무용이라는 게 있었는지 알아 보고, 알고 나서 다시 생각을 해 볼 필요가 있다. 전문가는 아니지만, 많은 분들의 수고를 덜기 위해 내가 여기 요약을 해 드리겠다. 1600년의 전통을 이어 온 우리 한국 불교에도 어느 종교 못지않은 장엄하고 절절하며 심금을 울리는 풍부한 음악과 춤이 있었다. 그레고리 성가만이 장엄하고 백조의 호수, 호두까기 인형 떼춤만이 화사한 줄로 알아서는 곤란하다. 우리 것도, 내용은 두고라도 제목이라도, 최소한 그러한 어떤 것이 있는 줄이라도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보물을 거름더미에 던져 두지 말라. 찾아서 요긴하게 써먹으라. 지금은 맥이 끊겨 잃어버린 것도 많지만 면면히 살아남은 것도 있다. 그 중에 먼저 음악에 대해 알아보자.
한국의 불교음악으로는 크게 세 가지, 범패와 화청, 그리고 찬불가가 있다.
불교를 포함하여 한국 고유의 3대 성악곡으로는 판소리, 가곡, 범패가 있는데 판소리는 다 아실 것이고, 여기서 가곡이란 주로 시조를 읊는 것이다. 범패는 불교 음악을 대표하는 것으로서 스님들이 주로 절에서 재를 올릴 때 쓰이는 의식 음악이다. 상주권공재, 십왕각배재, 생전예수재, 수륙재, 영산재 등 다섯 가지 재에 쓰인다.
범패는 다시 안채비소리와 바깥채비소리로 나뉘는데 안채비소리는 흔히 염불이라고 하는 것으로 재를 지낼 때 주로 그 절의 법주가 한다. 유치, 청사 같은 한문으로 된 축원문을 대개 범패의 비전문가인 그 절의 스님이 요령을 흔들며 염불을 하는 것이 안채비소리다.
바깥채비란 범패를 전문으로 하는 스님을 일컫는데 주로 다른 절에 초청을 받아 가서 소리를 한다. 이 바깥채비들이 주로 하는 소리로는 홋소리와 짓소리가 있다.
홋소리는 대개 7언4구 혹은 5언4구의 한문 정형시를 노래로 부르는 것인데 복청게, 사방찬, 도량게, 참회게 같은 것들이다.
짓소리는 대개 한문이나 범어의 사설로 되어 있고 주로 합창으로 부른다. 간간이 독창으로 부르는 것은 허덜품이라고 한다. 짓소리는 상당히 길어서 한 가지를 부르는데 삼사십 분씩 걸리다 보니 일제의 탄압 등 외부의 모진 압력으로 모든 절차가 할 수 없이 간소화 되면서 본래 있었던 72곡이 거의 다 없어지고 지금은 몇 개만 남아 있다. 참으로 아까운 문화 손실이다. 그레고리 성가보다 더 값나갔을 장엄한 종교음악 육칠십 곡이 복원 불가능으로 얼마 전에 사라져 버린 것이다.
크게 보아 범패에 속하기도 하는 화청은 불교의 포교를 위하여 만들어진 대중성 짙은 음악이다. 민속음악 가락에다 불경에서 나온 교훈적인 이야기로 된 가사를 붙였는데 한문이 아니라 우리말로 부른다. 이조 중기에 서산대사가 지었다는 회심곡이 유명하다.
이 밖에 화청의 연주곡목은 30여 종이 전해 오는데 많이 불리는 것으로는 축원화청, 육갑화청, 팔상화청, 별회심곡, 백발가, 왕생가, 부모은중경 따위가 있다.
찬불가는 서양 음계로 시도 된 부처님 찬탄 노래다. 지금은 더러 국악 음계를 쓰기도 한다. 현대 찬불가의 효시는 용성 스님의 창가풍 찬불가인 왕생가와 권세가이다. 불교의 대중화와 의식화를 위하여 1927년부터 시작된 현대 찬불가 운동은 용성 스님, 퇴경 스님, 대은 스님 등 주로 스님들이 주도하였다.
해방 이후 1950년대에는 청소년 포교에 원력을 세운 운문 스님이 찬불가 운동을 주도했다. 운문 스님은 조계사 어린이 법회를 창립하여 어린이들에게 불교를 친근하고 쉽게 전달해 주려고 틈틈이 가사를 써서 추월성, 이찬우, 정민섭씨 등에게 작곡을 의뢰했다. 대부분이 동요 형식을 취하고 있다.
60년대와 70년대에 들어와서 여러 청소년 불교 단체가 생겨나자 법회와 행사 때에 부를 찬불가가 필요하여 작곡가들에 의해 찬불가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70년대 후반부터는 작곡가들이 개인적으로 사찰 합창단을 지도하며 합창단을 통해 작품을 보급시키기도 했다. 1970년 조계종 총무원에서 현상 공모하여 최영철이 작곡한 <삼귀의>와 <사홍서원>을 전국 법회에 의식곡으로 보급 시켰다.
1980년대부터는 찬불가의 중요성이 인식 되면서 각 사찰마다 합창단을 만드는 것이 유행이었다. 작곡자와 지휘자가 분리되기 시작하면서 찬불가 제작과 보급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늘어 전문성을 띠게 되었다. 1983년 김용호의 <새 찬불가집>, 운문 스님의 <불교 성가집>과 서창업, 최영철, 변규백 씨 등의 찬불가집이 출판 되었다.
이 시기에는 전문 음악 단체가 생겨났는데 범패를 전수, 보존하기 위한 <옥천 범음회>, 국악관현악으로 구성 된 <한마음 국악 포교단>, 개인들이 만든 <더틂소리 법악원> 같은 것들이다. 전문 성악인들의 모임인 <성불교 성악 동호인회>가 적극적으로 찬불가 보급에 나섰으며 한마음선원의 <한마음 국악 포교단>이 창설 되었다.
1991년 불교 방송은 <찬불가 100곡 제작 보급> 사업을 시작하였다.
원명사 범패공연
자, 이제 춤에 대해서도 간략히 알아보자.
음악과 마찬가지로, 혹은 음악보다 더 오랜 고유의 전통이 스며있는 것이 춤이다.
흔히 승무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 이는 본래는 속인이 승복을 입고 추는 민속무용이다. 중요 무형문화재 제27호로 지정 되었다. 따라서 승무는 불교 의식에서 추는 춤이 아니고 흥과 멋과 기교가 자유분방하게 어울린 서민의 애환이 담긴 춤이다. 장단의 변화에 따라 일곱 마당으로 구성 되는데 보통 파계승의 번뇌 등을 주제로 하고 현대적인 창작을 통해 행해진다. 춤옷은 기본적으로 치마, 저고리나 바지, 저고리를 입고 불교의 가사와 장삼을 두르고 고깔을 쓴다.
잘 알려진 살풀이춤은 본래 승무가 아니라 무속에서 기원한 민속춤이다.
반면에 전통적인 불교 의식에서 추는 춤을 범무라고 한다. 승무와 달리 범무는 주로 스님이 춘다. 나비춤, 바라춤, 법고춤 세 가지가 있다.
나비춤은 작법이라고도 하는데 불법을 상징하는 춤으로서 보통 두 사람이나 네 사람이 추며 반주는 범패와 사물이라고 하는 요령, 태징, 목탁, 북 등이 사용 된다.
바라춤은 불법을 수호하는 뜻을 지니며 도량정화와 깊은 관계가 있다. 양손에 바라를 들고 춘다.
법고춤은 기쁨에 넘쳐 뛰어오름, 즉 용약환희의 뜻을 지닌다. 따라서 어느 춤보다도 동작이 크고 활기가 있다.
이 밖에 타주라는 것도 있는데 수행을 다짐하는 뜻에서 추는 춤이다. 팔정도를 표시한 팔각기둥을 세워 놓고 그것을 오른 손에 잡은 채로 두드리며 그 둘레를 돌면서 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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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멋있네요 늘 행복한하루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