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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나는 부산 안팎 동래읍성ㆍ금정산성 일대를 여러 회차로 나누어 탐방하였는데, 그 전년도
2013년 나는 서울 한양도성ㆍ탕춘대성을 11차로 나누어 나만의 탐사경로를 계획하고 실행하였다.
그 중 제6차가 문묘를 포함한다.
통상적으로 서울성곽은 둘레길을 걷기 마련이지만 그렇게 걷기를 하면 숙정문안내소 구간을 빠뜨리게 된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게 바로 아래에 소개할 여정이다.
최순실, 국정농단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때 쯤 나는 10 시간 40 여분 간 도보 촬영을 하였다.
일자: 2013년 8월 7일
시간: 오전 6시 ~ 오후 18시
목적: 성균관ㆍ문묘 답사, 삼청각ㆍ숙정문 구간을 경유하여
경로: 사직단 ~ 영추문 ~ 신무문 ~ 삼청터널 ~ 삼청각 ~ 홍련사 ~ 숙정문안내소 ~ 숙정문 ~ 말바위쉼터
~ <성균관ㆍ문묘> ~ 벽화마을 ~ 낙산공원 ~ 암문 ~ 흥인지문 ~ 종묘 ~ 삼일문 ~ 보신각 ~ 숭례문
화질: 나름 스마트폰 그런데 요즘 스마트폰에 비하면 많이 떨어져
벌써 햇수로 6 여년 전 모습으로 현재와 비교해 보면 참 옛날같다.
핵심 성균관ㆍ문묘를 다음 후반부로 게시하고 그 전후 행적으로 전반부를 구성해 보는데,
세부적인 것은 과감히 생략ㆍ제거하고 주요 지점을 간략히 나열해 본다.
새벽 공기를 가르며 사직단에서 시작해 본다. 본 건물은 없고 주춧돌만 잔뜩 놓여 있는 사직단과 바로 그 앞을 가로막는 아파트가 갑갑하다. 돈의문에서 시작하는 인왕산 구간은 사직단에서 조금만 서쪽으로 더 가면 나오는 사직터널 바로 위에서 본격적으로 가팔라진다. 하지만, 숙정문 안내소를 향해 가려고 동쪽 방향으로 간 것.
얼마전 기사로 났었지만 경복궁 서문인 영추문은 사연이 참 많다. 당시만 해도 효자로 여기만 오면 갑갑했다. 그 때는 경찰기동대가 도열해 있었던 것이다. 동쪽 영춘문도 마찬가지로 오후 늦은 무렵만 되면 삼청동길 삼거리에는 의경들이 방패로 가리고 진지를 쳤었다. 현재는 대통령 문재인 시대를 맞이하여 그건 건 전혀 없다. 자유롭다. 그 곳에 가벼운 마음으로 갈 수 있다.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437&aid=0000197817
일제 아픔 서린 경복궁 서문 '영추문'…43년 만에 개방
기사입력 2018-12-06 21:14 최종수정 2018-12-07 06:26
[앵커 손석희]
경복궁 서문인 '영추문'이 43년 만에 개방됐습니다. 위치가 궁금하실 텐데요. 경복궁 정문에서 왼쪽으로 이동해 작은 골목으로 들어가면 만날 수 있습니다. 옛 서울지도에도 정확히 표시돼 있습니다. 가을을 맞이한다는 뜻의 '영추'. 음양오행설에 근거해 이름이 붙었다고 하는데 서쪽이 바로 '가을'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영추문은 일제강점기의 아픔이 서려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1926년 갑자기 한쪽 벽이 무너졌는데 일제는 그 앞을 지나다니던 전차의 '진동' 때문이라고 했죠. 하지만 붕괴 이틀 전 순종이 승하했기 때문에 어수선한 틈을 타 일제가 계획적으로 벌인 일이라는 의혹도 동시에 제기됐습니다. 이후 완전히 사라졌던 영추문은 1975년 다시 세워졌지만 줄곧 닫혀 있었습니다.
43년 만에 빗장을 푼 영추문을 강나현 기자가 전해드립니다.
[기자 강나현(kang.nahyun@jtbc.co.kr)] [문을 여시오!]
힘차게 열어젖힌 문 너머로 궁궐과 바깥 세상이 43년 만에 만났습니다.
600년 전 조선시대 관리들의 출퇴근 통로였던 영추문은 궁을 출입하는 백성들에게 유일하게 허락된 문이기도 했습니다.
임진왜란 때 경복궁 화재로 사라졌다 150여 년 전, 흥선대원군이 궁을 재건하면서 다시 선 영추문.
그러나 그 이후에도 우리 역사의 아픈 흔적으로 남았습니다.
1894년 일본군은 이 문을 열고 궁에 들어와 고종을 위협했고, 2년 뒤 아관파천 때 고종이 이 문을 나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다는 기록도 전해집니다.
1926년 일본이 바로 앞에 놓은 전찻길 탓에 담장이 무너져내린 뒤 또 한번 사라졌습니다.
[대한뉴스 (1975년) : 1926년 일본 사람들이 총독부를 짓고 지금의 효자로를 넓히며 헐어버렸는데 문화공보부가 광화문에 이어 이번에 다시 복원했습니다.]
1975년, 원래 자리에서 남쪽으로 45m 떨어진 곳에 다시 섰지만 완벽한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나무와 돌 대신 철근 콘크리트로 복원됐고, 또 보안상의 이유로 시민들에게는 줄곧 닫힌 '낯선' 문이었습니다.
영추문이 빗장을 풀면서 경복궁은 이제야 동서남북 4개의 문이 모두 열렸습니다.
문화재청은 발굴 조사를 통해 2040년까지 영추문을 조선시대 그모습 그대로, 원래 위치에 되돌려 놓을 계획입니다.
(화면제공 : KTV 국가기록원)
[영상취재: 정철원 / 영상편집: 백경화]
청와대 영빈관에서 본관 정문으로 조금 가다 보면 경복궁 북문 신무문에 도달한다. 신무문을 들어 가면 얼마전 복원한 건청궁이 좌측에 있고 그 앞에 향원정 그리고 더 남쪽으로 가면 우리가 주로 방문하는 내전과 정전, 그리고 남문이자 정문인 광화문을 만나게 된다. 참 이 곳은 사진찍기할 때 압력을 받았다. 사복 경찰이 나보고 살피지 말고 그냥 빨리 지나가라는 것이었다. 참 어이가 없었다. 최순실 일당이 그렇게 자유롭고 쉽게 드나들던 그곳에 대한민국 시민이 자유롭게 방문하지 못한다니. 그 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알게 되었다. 그 경찰을 비롯 그 주위에 깔려 있던 수많은 경찰ㆍ의경들이 누구를 위해 그토록 나를 쫒아내려 했던 것인가. 일반적으로 신무문 정도면 사진을 여러 장 찍어야 되는데, 딱 한 장 찍은 것이 바로 위 사진이다. 어떻게 찍을 수 있었나. 난 당당하게 요청했다. 신무문 사진 한 장은 찍어야 되겠다고. 그러자 그 경찰은 전체는 안 되고 현판 부분만 찍으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저런 사진이 나왔다. 앞서 영추문과 대비된다. 영추문은 여러 장을 찍었으며 다양한 방향과 각도와 크기로 찍었었다. 나중에 찍은 여러 문도 마찬가지다. 신무문만 일부분으로 단 한 장. 현재는 대통령 문재인의 완전 개방으로 너무 자유롭다. 마음껏 찍어도 된다.
하지만 그러다보니 가치는 적게 되었다. 2013년 8월의 저 사진은 참 귀한 사진이다. 의미가 담긴 사진 아니겠나.
최순실이 실속을 챙기려 드나들고 박근혜는 출근도 안 하고 온갖 짓을 하던 곳의 그 입구 앞에서 나는 역설적으로 가장 가치있는 단 한 장을 사진을 남겼다.
경복궁 북쪽을 지나 삼청로를 따라 걷다 보면 삼청공원 좌측을 지나면서부터 가팔라 지면서 지그재그로 도로를 따라 가게 된다. 인도도 없다. 삼청터널은 걸어 통과하면 안 되는 도보통행 금지다. 경복궁 뒷담에 진을 치고 있던 의경들은 이 곳을 지켜야 되지 않나. 그렇지 않았으므로 나는 법규를 위반했음에도 범칙금ㆍ과태료 없이 자연스레 무사 통과했다. 저 멀리 끝 한 줄기 빛을 보면 가슴이 뻥 뚫린다. 하지만 위험한 곳.
5분여를 걸어 통과한 뒤 입구 모습. 단순 건너온 것 같지만 사실 저 터널 위로 지나가는 것은 서울성곽ㆍ한양도성으로 숙정문과 와룡공원 구간에 해당한다. 전 입구와 차이점은 도보통행금지 노란 사각형은 동일하게 양쪽에 있지만 둥근 도로교통안내판이 없다는 것.
삼청터널을 빠져 나와 아주 조금만 더 가면 삼청각 입구 볼 수 있다. 삼청각(현재 전통문화공연장)은
으리으리한 한옥으로 치장된 겉에서 우러나오는 모습처럼 원래는 고급요정으로 1972년 지어져 군사정권 시절 악명을 떨친 서울 3대 요정 <오진암[梧珍庵], 대원각[大元閣], 삼청각[三淸閣]>(오진암(지금 무계원 건물) 대신 청운각[靑雲閣] 또는 선운각[鮮雲閣]을 넣기도 함; 료정(料亭)5대로 칭해도 되겠다)의 하나로 명칭은 백악산 남쪽 三淸洞에서 유래하였다. 주로 국빈 접대와 정치 회담을 위한 요정으로 운영되었고 1972년 7월 4일 남북공동성명 직후 적십자대표단의 만찬을 열었던 곳. 권력실세의 공간으로 30년 가까이 폐쇄적이었으나 2001년 서울시가 인수하여 리모델링을 거쳐 도심속 전통문화 공간으로 속세에 활짝 개방했으며 현재는 세종문화회관에서 관리하고 있다. 한때 시민들은 감히 명함도 들이밀지 못했던 고급 요정이 누구나 자유롭게 오가고 문화를 즐길 수 있는 대중적인 공간으로 탈바꾼된 현장으로 인근 대원각과 비슷하다. 대원각(관리자 김영한 법정에게 통째로 기증 절로 변신)은 현재 길상사다. 길상사는 대사관로를 따라 성북동으로 가다 대사관로 97·98 번지 부근에서 선잠로5길로 진입하면 찾을 수 있다. 대사관로 1번지가 홍련사 입구며 대사관로 3번지가 삼청각. 그러니깐 삼청터널 빠져 나오면 바로 대사관로가 시작된다. 무계원은 종로 익선동 오진암의 건물자재를 사용하여 건축하였고 창의문로(부암동)에 위치한 종로문화재단의 전통문화공간.
삼청각 입구 오른편에 보면 삼청각 표지도 볼 수 있다. 사진 오른쪽 작게 보이는 표지말뚝에서는 주차장으로 갈 수 있다.
http://news.tf.co.kr/read/ptoday/1451293.htm
[TF 企劃] 權力이 사랑한 料亭, 官能 몸짓 접다
한 때 정권 실세와 고위 관료가 은밀히 만나던 요정. 고급 요릿집(한정식집)을 뜻하는 요정은 ‘밤의 정치’, ‘밀실 정치’로 가는 비밀 통로였다.
서울시내 대표 요정 선운각(현 종교시설), 삼청각(현 한정식집), 오진암(현 무계원), 대원각(현 길상사).
◆밀실 정치의 산실 ‘선운각’, 얼굴 마담 정인숙 암살로 ‘발칵’
선운각은 얼굴 마담 정인숙씨 암살 사건으로 1970년대 한국 정치계가 발칵 뒤집힌 장소다. 지금은 한 종교단체가 청소년 선교시설로 쓰고 있다.
◆남북 막후 협상 장소 ‘삼청각’, 이제는 ‘복합 문화공간’
요정 삼청각은 '걸어서는 들어가도 작은 자동차를 타고 오는 사람은 없다'고 할 정도로 권력 실세의 비밀 장소였다. 현재 이곳은 고급 한정식과 전통문화를 두루 느낄 수 있는 공간이다.
◆한 시절 화려한 몸짓 접다. 성매매 알선 수모 겪은 '오진암'
오진암은 마당에 큰 오동나무가 있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 서울시 첫 등록식당인 이곳은7·4 남북공동성명 사전 논의 장소로 유명하다. 종로 익선동에서 부암동으로 터를 옮겼다.
◆밤의 요정 '대원각', 무소유 정신에 감명받아 '길상사'로 탈바꿈
밤의 정치로 명성을 떨친 대원각은 법정 스님의 무소유 정신과 연이 닿으면서 사찰 길상사로 변신했다.
조금전 살짝 지나갔지만 삼청각 입구에서 다시 삼청터널쪽으로 되돌아온다. 제대로 관심을 가지고 살피자 그제서야 마주하게 되는 조그마한 표지 하나가 눈에 들어오고 저절로 눈에 확 띄는 커다란 홍련사 표지와 함께 숙정문 가는 길의 길목 양편에 각각 서 있다. 바로 저 두 표지 사잇길로 들어가면 숙정문 안내소를 만난다.
숙정문으로 올라가기 직전 삼청터널의 뻥 뚫인 건너편 구멍을 한 번 보고 간다.
동시에 반대편 삼청각 방향 홍련사 입구 표지도 다시 한 번 보고 간다.
料亭의 뜻
사전적 고급요릿집
현재는 한정식식당
제5공화국 관광식당으로 변모
서울 북악산 料亭 3각(제3·4공화국 料亭정치 料人들 즐겨 찾던 곳)
1 종로구 청운동 청운각은 1956년 조차임 개장한 곳으로 1965년 한일 회담이 성사된 곳이지만
운영자 조차임은 자산 정리로 장학재단 우산육영회를 만들어 없앴다.
2 성북동 대원각은 1951년 개장한 성북구 성북동 길상사의 전신으로 대한불교 조계종 소속 송광사의 말사가 된 곳
1997년 운영자 고 김영한(1916~1999, 법명 길상화)은 무소유(1976 초판1쇄 범우사 2010-03 3판86쇄)로 유명한
법정(1932-10-08 ~ 전남해남 2010-03-11)에게 자신 소유한 부지를 시주하여 사찰로 탈바꿈.
3 성북동 삼청각은 1972년 개장해서 1972년 남북조절위원회와 1970년대 남북적십자회담에 사용된 곳
4 종로구 익선동의 오진암은 서울시 음식점 1호 업소로 1972년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북한 박성철 제2부수상이 만나 7.4 남북공동성명을 논의한 곳
종로구 부암동 무계원(武溪園 창의문로5가길2 안평대군의 武溪精舍)으로 목재 자재를 옮겨와 복원 건축하여 개원(2014.03.20).
5 강북구 우이동 선운각은 1967년 장정이가 개장한 곳으로 유명한 정치사건인 정인숙 살해 사건의 정인숙 근무지.
그 피해자가 모델·배우ㆍ선운각1급접대부였던 고 정인숙(鄭仁淑 1945-02-13 ~ 1970-03-17). 본명은 정금지(鄭金枝)ㆍ일명은 정혜미, 대구출신
쿠데타 군부독재가 판치던 1980년까지 밀실정치 3대 料亭하면 대원각, 삼청각, 그리고 선운각을 말한다
10·26후 망하고 현재 그 일부를 할렐루야 기도원에서 구매해서 기도원과 사택으로 사용.
숙정문 가는 길 입구에서 조그만 올라가다 보면 짠한 것을 만나게 된다. 바로 이 곳을 시민들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도록 한 자다. 바로 시대를 너무 많이 앞서 갔었던 대통령 고 노무현. 고인만 아니었다면 그렇지 않을 텐데. 고인이 되었다는 것은 바로 그런 것. 그런데, 노간지보다 더더욱 어울리는 표현 "조금 다르게 살아보니 생각보다 행복합니다. 그래서 말인데 좀 다르면 안 되나요?" 행복은 그런 것.
다시 올라가면 드디어 숙정문 안내소를 만나게 되는데, 아직 9시가 안 되어 출입시간이 되질 못한 관계로 잠시 휴식을 하게 되었다. 그 곳 주위에서 발견되는 갈림표지. 그때까지 올라온 방향이 삼청터널이고 앞으로 올라가야 할 방향이 숙정문인 것. 그런데, 말바위 쉼터는 무엇. 사실 이 곳은 일종의 산속 교차로다. 저 표지대로 우측으로 가면 북악산 팔각정으로 갈 수 있고 좌측으로 가면 말바위 쉼터로 가게 된다. 두 길은 숙정문길 양쪽에 선명하게 보일 정도로 잘 다듬어져 있다. 그런데, 말바위 쉼터는 어디. 바로 한양도성의 성곽 한 지점으로 와룡공원에서 성곽밖으로 가다가 바로 말바위 쉼터에서 바로 나무계단을 타고 넘어가 성곽위 여장을 넘고 성곽안으로 들어 가게 되며 자하문 안내소까지 주로 성곽안(곡장~백악마루 구간일부에서 다시 안팎을 넘나든다)으로 가게 된다. 또한, 말바위 쉼터에서는 창의문으로 가는 말바위 안내소로 가지 않고 바로 그 반대편으로 가면 삼청공원으로 내려가는 내리막산길을 만나게 된다. 동시에 전망대가 있는 좋은 뷰포인트다.
숙정문 안내소에서 받아 목에 걸었던 것. 창의문 안내소에서도 말바위 안내소에서도 모두 받아봤었다. 3군데 모두에서 받아 봤다. 여러 방향에서 진입해 봐야 해서
숙정문 안내소를 지나면 제법 가팔라 지지만 길지 않아서 숙정문에는 곧 도착한다. 하지만 워낙 부지런히 걸어서 숙정문 조금 못 가서 턱 좋은 지점 평평한 곳에서 퍼졌던 기억을 떠올린다. 여러 수방사 보초병 초소에서는 날 무척 예의주시했을 것이다. 얼른 지나갔으면 좋겠는데 한 동안 퍼질러 앉아 움직이지 않고 있었으니. 어서가. 얼른 지나가. 왜 그래 최순실 여기 없잖아 오지도 않잖아. 그런데, 숙청문은 암문으로서 문루를 세우지 않았다는데, 복원잘못인가
말바위 쉼터 문턱. 여기는 와룡공원, 삼청공원, 말바위 안내소로 각각 갈 수 있는 삼방향 갈림목.
조금 전 언급했듯이 숙정문을 통과하지 않고 바로 내려가면 숙정문 안내소를 거쳐 북악산 팔각정까지 직통으로 갈 수 있다. 그렇게 본다면 교차로라고도 볼 수 있겠다.
산속 성곽에서 갑자기 왠 벽화가. 그건 바로 점프했기 때문.
바로 이 포스트의 주제, 와룡공원 아래 성균관 대학교 정문 부근의 문묘를 다음 포스트로 미루고 건너 뛰었기 때문.
그렇다면 저건 어디에. 요즘 방방곡곡 다 있는 벽화가 그려진 저 벽화마을은 SKKU에서 내려서면 창경궁로를 만나게 되는데, 창경궁로에서 한 블록을 가로질러 대학로로 빠져나가서 대학로를 횡단한 후 조금 걸어 올라가면 만나게 되는 그 동네 벽화다.
벽화마을에서 언덕 능선에 올라서면 창신동 구간 성곽에 도달하는데, 그 주위에는 암문 3개가 있고 그 중 하나를 골라 통과하여 낙산성곽동길로 빠져 나왔다. 흥인지문을 마주하게 되는 그 길의 끝자락에 도달할 무렵 짜잔 만나는 현재는 정비되어 사라진 낙산공원 표지목. 성곽 위 예전 동대문 교회 십자가가 보인다. 당시엔 오토바이가 쭉 늘어져 서서 막고 있어서 보기 좋지 않았는데 그곳을 새로 동대문성곽공원 조성공사 사업을 해서 깨끗하게 정리하고 현재는 조금 더 길 안쪽에 있는 성곽 덧담벼락 옆으로 옮겨져 깔끔하게 정리되었다. 매연의 직접 그을림으로부터 성곽 보존 차원인 듯.
1396년(태조5) 1월 9일∼2월 28일 전국의 민정이 무려 11만 8,000여 명이 동원되어 600척을 한 단위씩으로, 축성 구역을 97구로 나누어 정하였다. 구역마다 천자문의 자호를 표시하여 백악산 동쪽에서부터 천자(天字)로 시작하여 낙산·남산·인왕산을 거쳐 백악산 서쪽에 이르러 조자(弔字)까지 구획하여 공사를 하였다. 공사는 구역마다 책임자를 두어 책임진 부분에 해당하는 성벽에 관직과 축성한 고을의 이름을 새겨넣어 책임을 분명하게 하도록 하였는데,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새로 공원조성 하면서 움푹 들어간 종로편 성곽에 새 밝은 것 아닌 옛 어두운 색깔의 것을 볼 수 있는데 바로 그게 그 흔적.
성 둘레 5만9500척(尺)을 600척씩 97개 공구로 나누고 천자문 순서대로 일련번호를 매겨 책임을 맡겼다. 백악산을 기준으로 첫 글자인 천(天)자로 시작해 시계방향으로 돌아 97번째 글자 조(弔)자로 끝난다. 천(天)자부터 일(日)자까지(1∼9공구)는 동북면(평안도 황해도), 10∼17공구는 강원도, 18∼58공구는 경상도, 59∼73공구는 전라도, 74∼97공구는 서북면(함경도)이 맡았다.
농번기에는 쉬고 1396년(태조5) 가을에도 8만 명의 정부를 동원하여 토축 부분을 석축으로 고치고 4대문과 4소문을 완성하였는데 옹성은 1397년 4월 완공하였다.
흥인지문 일대는 8門중 유일하게 방어에 불리한 평지였기에 유일하게 명칭에도 之를 넣고 성문바깥에 옹성도 쌓았고 광희문 방향에 치성도 만들어 방어에 주력했는데, 옹성과 더불어 흥인지문과 낙산구간의 연결은 직선이 아니고 움푹 들어간 ㄷ字 모양으로 꺾어 시작해서 방어에 유리하도록 설계한 것 같다. 흥인지문과 광희문 주변의 도로로 단절된 구간에는 성곽이 있었던 자리임을 알려주는 바닥 표시를 해 두어 그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그 낙산성곽동길을 쭉 따라 걸어 오면 흥인지문을 만나게 된다. 사진은 흥인지문을 지난 이간수문으로 가는 오간수교 앞에서 현재 동대문 성곽공원 방향으로 찍은 모습. 2013년 당시에는 동대문 교회가 철거되지 않은 시기여서 동대문 교회가 보인다. 그 좌측 건물 한 동은 현재 목동병원의 전신인 동대문병원의 한 동만을 남긴 것인데, 나머지 병원건물은 철거되어 동대문 성곽공원이 부분적으로 만들어 지고 있었다. 바로 그 한 동을 리모델링 하여 현재 한양도성 박물관을 만들었다. 오간수교를 지나면 동대문 디자인플라자를 만나게 되지만 그 곳보다 더 오묘한 것은 바로 이간수문이다. 막상 가보면 생각보다 엄청 크다고 느끼게 되는데, 명종때 의적 임꺽정이 오간수문을 통해 도성안으로 진입을 충분히 할 수 있었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또 치성(雉城·돌출된 방어시설)도 나름 눈여겨 볼 만 하다. 여기서 광희문으로 가지 않고 방향을 확 틀어서 종묘광장공원으로 가게 된다.
동대문교회 십자가탑은 철거했으니 아래 보이는 십자가 첨탑은 창신 성터교회 것인가?
Protestant중 Methodist Church에 해당하는 동대문교회가 역사속으로 사라지다
재단법인 기독교대한감리회 유지재단, 서울시를 상대로 낸 도시계획시설 결정 취소 소송에서
2009.08.11 서울행정법원 행정3부(부장 김종필) 1심 원고 패소 판결(서울시의 공원화사업 정당하다는 판단)
2013년 3월 서울시가 감리교 유지재단과 동대문교회를 상대로 명도소송 제기
2013.10.11 동대문교회옮기기 완료(경기도 광교신도시 새 예배당 신축때까지 종로 연지동 한국교회 100주년 기념관에서 예배 활동 계획)
2013.10.18 1심 승소 판결
2014.10.07 철거 모두 완료
종묘광장공원 안쪽 종묘의 바깥대문. 저 반대편 건너 율곡로에서는 공사 중이었다. 아마 곧 완공될 것이다.
사실 당시엔 종묘 전체 둘레길이 공사중이었다.
종묘 정문 역시 잡상(雜像ㆍ궁전이나 전각의 지붕 위 네 귀에 여러 가지 신상(神像)을 새겨 얹는 장식 기와)을 볼 수 있는 것으로 보아 주요 중요 건축물.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48208
잡상(雜像) 정의
기와지붕의 추녀마루 위에 놓이는 와제(瓦製) 토우(土偶)들
그 장식기와를 만드는 사람을 잡상장(雜像匠)으로 부른다.
궁궐의 전각과 문루의 추녀마루 위에 놓은 10신상(神像)
소설 『서유기 西遊記』에 나오는 인물 및 토신(土神)을 형상화하여 벌여놓아 살(煞)을 막기 위함으로
바로 그 10 鬼物ㆍ龍像은
① 대당사부(大唐師傅) 삼장법사 현장(玄奘),
② 손행자(孫行者) 손오공(孫悟空), ③ 저팔계(猪八戒), ④ 사화상(沙和尙) 사오정(沙悟淨),
⑤ 마화상(麻和尙), ⑥ 삼살보살(三煞菩薩), ⑦ 이구룡(二口龍),
⑧ 천산갑(穿山甲), ⑨ 이귀박(二鬼朴), ⑩ 나토두(羅土頭)
로 몇몇 기록에 나타나지만
그런데, 1834 『궁궐의궤』창경궁영건도감의궤(昌慶宮營建都監儀軌)에서는
가장 앞쪽의 말을 탄 도인상(道人像)은 선인상(仙人像)
그 뒤에 오는 그 밖의 상들은 주수(走獸) 또는 수수(垂獸)·평수(平獸)
즉 11상은 우선 선인상을 비롯하여
① 용(龍), ② 봉(鳳), ③ 사자(獅子), ④ 기린(麒麟), ⑤ 천마(天馬),
⑥ 해마(海馬), ⑦ 고기[魚], ⑧ 해치[獬], ⑨ 후(吼), ⑩ 원숭이[猴]
로 매우 간력히 그려졌지만
그런데, 남아 있는 19C후 실자료를 보면 숭례문(崇禮門, 1448)은 9개, 창경궁 홍화문(弘化門, 17세기)은 5개, 창덕궁 돈화문(敦化門, 17세기)은 7개, 수원 팔달문(八達門, 1796)은 4개, 창덕궁 인정전(仁政殿, 1804)은 9개, 경복궁 경회루(慶會樓, 1867)는 11개, 경복궁 동십자각(東十字閣, 1865)은 5개, 덕수궁 중화전(中和殿, 1906)은 10개여서 지붕 한쪽에 올려놓은 수가 4∼11개로 제각기로 종묘 대문은 5개다.
선인상 또는 대당사부 현장상이 아예 없고 모두 큼직한 손오공상이 앞에 앉아 있고 그 뒤로 사자·해치·봉 같은 무리들이 줄지어 있어 『서유기』 속의 내용만으로 모두 되어 있지는 않다.
보물과 국가보물 두 가지가 있는 탑골공원 정문 삼일문. 포스팅을 하는 바로 오늘은 2019년 3월 1일 (1919)3·1절 100주년.
바로 좌측 인사동길이 시작되는데, 지금 인사동은 완전히 망가졌다. 건물주의 임대료 탐욕으로 젠트리피케이션.
그 곳을 가느니 차라리 삼일대로를 따라 낙원상가 밑을 통과하여 운현궁을 방문하는 것이 훨씬 낫다.
사적 제354호 탑골공원은 탑동공원(塔洞公園)·탑(塔)공원·파고다(pagoda)공원으로도 불린다.
보물 제삼호 원각사지대원각사비(圓覺寺址大圓覺寺碑; 1471성종둘)과
국보 제둘호 원각사지십층돌탑(圓覺寺址十層돌塔; 1467세조13)가 서다.
종로를 계속 따라 가다 보면 안 볼래야 안 볼 수가 없는 종각역 앞 보신각 안 종. 너무 유명하고 매년 연말연초에 생중계되는 명소다. 여기서 나는 세종대로로 나아가지 않는다. 일제가 뚫어 놓고 박정희가 넓혀 놓은 태평로가 내키지 않아서다. 때문에 경운궁 정문 대한문이 두 번이나 뒤로 밀려나 현재 위치하고 있다. 사실 태평로는 일제가 만든 길이다. 왜 만들었나. 그건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만든 것과 같다고 볼 수 있다. 본래 숭례문을 들어서면 경복궁까지 가던 큰 길은 현재의 남대문로다. 따라서 나는 보신각에서 남쪽으로 방향을 90도 틀어 내려 갔다. 숭례문을 보기 위해.
한국은행 본관과 남대문 시장을 지나서 드디어 그 날 마지막 장소에 도달했다. 바로 국가보물 상징 숭례문.
숭례문도 시민을 짠 하게 만든다. 2008년 설날의 마지막 연휴의 저녁에 발생한 너무 아픈 상처.
그런데, 그것은 바로 MBㆍ그네의 국정사기ㆍ국정농단의 시작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게 시작이면 끝은 어디.
그것은 바로 현재 하노이 선언도 불발시킨 트럼프 속도 뜨끔하게 하는 바로 impeachment 다.
2008년부터 2017년까지 햇수기간으로 정확히 10년.
우리 시민은 아직도 멍들었던 그 과정을 모두 다 치유하지 못했다. 진행형임과 동시에 큰 역저항까지 받고 있다.
그것은 바로 사법농단잔재의 발호ㆍ탄핵세력의 부할ㆍ사립유치원의 탐욕.
다들 쉽게 알 것이지만 그건 어떤 세력의 뒷받침으로 가능.
시민이 똑똑해져야 한다. 2020 총선에서 물갈이 해야 할 것.
숭례문만 한 장 더. 왜냐하면, 협박으로 단 한 장 어렵게 일부분 찍은 신무문보다는 훨씬 많이 찍었지만 바로 위 사진도 눈치보며 화재사건 후 설치된 경비원에게 야단맞아 가면서 찍은 것이다. 잔소리 들은 사유는 바로 촬영위치.
저 촬영위치는 대한상공회의소 앞 칠패로 건너 세종대로에 내려서야 저 각도, 저 모습을 찍을 수 있다. 불가피.
안 그러면 불가능하다. 바로 사진 하단 풀들 있는 곳으로 들어가서도 안 된다. 도로와 경계를 위해 만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