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아가 8장 1-6절
설교제목 : 사랑이 그립다
함께하여 일으킨 기적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우리 모두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 한주간 평안하셨습니까? 튀르키예를 뒤덮은 강진이 있은 후, 10일을 넘어서부터 이제 구조보다는 살아남은 자들의 의료적 지원과 생활지원 쪽으로 구조활동이 이루어진다는 보도를 접하였습니다. 그런 가운데 카흐라만마라슈의 무너진 아파트 잔해 밑에서 형제가 200여 시간 만에 구조되었습니다. 아브뒬바키 예니나르(21)와 무함메드 에네스 예니나르(17) 형제는 보디빌더인 무함메드가 평소 먹던 단백질 보충제 가루와 자신들의 소변을 먹고 버티었습니다. 8일이 넘는 시간 동안 두 형제는 언젠가 구조될 것을 확신하여 무너진 잔해 속에서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72시간이 생존 가능성을 두는 시간인데, 200시간을 그들이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서로를 의지하며 연합하였고, 희망을 끈을 놓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무리 삶이 절망적이라 할지라도 누군가와 연합하여 함께 한다면 언제든 기적은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한자로 사람 인人은 서로가 서로를 지지하며 연합한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습니다. 이는 인간다움의 실현은 함께 연합하는 것, 연대임을 시사합니다. 지진으로 인한 사망자가 4만 명이 넘어셨고, 목숨을 건진 수백만 명도 모든 것을 잃고 길거리로 내몰렸습니다. 작은 연대가 모아짐으로 이 고난의 시간을 넘어가길 기도합니다.
함께 하고 싶은 마음
아가서 8장은 사랑하는 임을 마치 오라버니였으면 좋겠다고 고백하며 시작합니다.
“아, 임께서 어머니 젖을 함께 빨던 나의 오라버니라면, 내가 밖에서 임을 만나 입맞추어도 아무도 나를 천하게 보지 않으련만(1)”
사랑하는 임과 자주 같이 있을 수 없기에, 자신의 오빠였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신부가 사랑하는 이를 형제였으면 하고 바라는 까닭은 자신의 사랑을 아낌없이 주고 싶은 마음, 언제라도 입맞추며 함께 하고 싶은 마음 때문입니다. 늘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이 바로 사랑의 감정일 것입니다. 함께 하고 싶은 마음, 헤어지기 아쉬운 마음에는 사랑이 깃들어 있습니다. 헤어지기 싫어지면 결혼해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신부는 더 내밀한 곳으로 사랑하는 이를 초대합니다.
“우리 어머니 집으로 그대를 이끌어 들이고, 내가 태어난 어머니의 방으로 데리고 가서, 향기로운 술, 나의 석류즙을 드리련만(2),”
신부는 자신의 태어난 근원적인 곳으로 임을 데리고 가서 향기로운 술인 석류즙을 주려고 합니다. 여기에서 술과 석류즙은 사랑의 정수, 에로스를 대변합니다. 사랑하면 더 가까이 자신을 개방하고, 더 내밀한 곳을 보여주고자 합니다. 이에 더하여 아낌없이 사랑의 묘약을 주고자 합니다. 연인과의 관계,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속에 향기로운 술과 석류즙을 줄 수 있다면 가장 신뢰할 만한 행복과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주고 싶은 마음, 사랑을 주고자 하는 태도가 우리의 삶을 살아있게 하고 생동력있게 합니다. 이런 마음이 우리에게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이런 어머니 집으로의 초대는 탈굼 성서에 의하면 메시아의 연회와 닮아 있습니다.
“왕이신 메시아여, 내가 당신을 이끌어서 나의 전에 들이겠습니다. 당신은 야훼 앞에서 내가 두려워하고 그의 길로 걸을 수 있도록 나를 가르쳐 주소서. 그리고 거기에서 우리는 리워야단의 향연에 함께 참여해서 세상이 창조되던 날부터 보존된 오랜 포도주와 에덴 동산에서 의로운 사람들을 위하여 준비된 석류열매와 과일즙을 마실 것입니다.”[Pope, Marvin H, “Song of Songs”, Anchor Bible, Garden City, p660]
아람어 성경은 어머니의 집으로 들어가 사랑의 술을 마시는 것은 마치 메시아의 도래와 함께 이루어지는 큰 잔치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신부가 자신의 궁정의 침실로 초대하는 분은 메시아이고, 그 메시아가 초대된 그곳에 의로운 자들이 함께 석류열매와 과일즙을 마시는 향연이 펼쳐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중요한 신부의 태도를 발견합니다. 사랑하는 임이신 주님을 적극적으로 초대하여 함께 축복된 잔치를 마련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과 관계해야할 때 지녀야할 태도입니다. 두렵지만 의식이 무의식과 관계할 때 필요한 태도이며, 자아가 자기에 대하여 지니는 태도입니다. 우리의 가장 깊은 내밀한 방에 주님을 모시고 함께 향기로운 술과 석류즙으로 마시며 축제를 벌여야 합니다. 나만이 흥청망청 즐기며 자아의 욕망을 실현하는 잔치는 이기적이 되고, 권태로워지고, 중독적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함께하고 싶은 마음, 사랑의 감정으로 주님을 나의 전에 모시어 들일 수 있는 삶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잠든 임을 깨우다
다시 화자는 친구들, 혹은 처녀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들은 질문합니다. “사랑하는 이에게 몸을 기대로 벌판에서 이리로 오는 저 여인은 누구인가?(5a)”
그런데 이 구절은 3장 6절에서 ‘거친 들을 지나 오는 자가 누구인가?’라는 질문과 동일합니다. 단 다른 점이 있습니다. 3장에서는 신랑이 거친 들을 지나오고 있다면, 8장은 신랑에 기댄 신부가 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둘은 연합된 형태로 오고 있습니다. 보다 진전된 형상이며, 혼자가 아닌 이제는 연합된 실체로서 두 사람이 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자가 다시 화자가 되어 고백합니다. “사과나무 아래에서 잠든 임을 내가 깨워드렸지요. 임의 어머니가 거기에서 임을 낳았고, 임을 낳느라고 거기에서 산고를 겪으셨다오(5b).”
신부가 사과나무 아래에서 신랑을 발견했고, 그가 그곳에서 태어났다는 고백합니다. 이런 문장은 신이 한 나무 아래에서 세상에 태어났다는 신화적인 표상을 드러냅니다. 사과나무는 풍요와 사랑의 상징하며, 기독교 세계관 속에서는 지식의 나무입니다. 사과는 여성적 지혜를 표상하기도 합니다. 사과나무는 결국 모성상의 속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맥락이 신부가 나무 아내에서 잠든 신랑을 깨운 것입니다.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신부는 어머니의 품에서 잠든 남성성을 깨우는 아니마입니다. 그래서 자신으로 품으로 유도하는 형상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머니 나무 아래에서 잠든 남성은 어머니의 세계에 유착되고 속박된 미분화된 남성으로 머무를 수 밖에 없습니다. 안락하고 늘 그리움을 자아내는 어머니 품에 잠들어 있는 남성은 늘 어머니 같은 여성을 찾아다니고, 동성애적 형태가 드러날 수 있고,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영원한 소년에 머무를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이를 신앙생활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내가 안락함과 안일함, 축복받은 상태의 낙원에 잠들어만 있다면 그는 늘 어머니의 젖을 갈구하는 의존적이고 유아적인 신앙에 머무룰 수 밖에 없습니다. 내 영혼은 잠들어 있는 나를 흔들어 깨웁니다. 그때 우리는 잠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신부와 신랑을 누구로 설정하든 잠든 이를 흔들어 깨울 때 비로소 새로운 결합, 혼인식 채비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나무 아래에서 잠들어 있는 것이 무엇인가요? 잠든 분을 흔들어 깨워 새로운 변환을 실현해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사랑의 두 대극
아가서는 사랑의 본질을 궁극적으로 노래합니다.
“사랑은 죽음처럼 강한 것, 사랑의 시샘은 저승처럼 잔혹한 것, 사랑은 타오르는 불길, 아무도 못 끄는 거센 불길(주님의 불길 같습니다)입니다(6).”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질투는 스올 같이 잔인하며 불길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개역개정, 6)”
사랑의 본성에는 두 개의 대극이 있음을 제시합니다. ‘사랑agape’과 ‘질투zelos’입니다. 사랑(신적인 사랑)과 질투(인간적인 욕망의 사랑)는 동전의 양면처럼 연합된 대극의 표상입니다. 이는 우주 안에서 발생하는 리비도의 양극에 상응합니다. 융은 의식 안에서 이 양자를 연합시키는 것이 “연금술의 도덕적 과업”이라고 말합니다. 연금술의 도덕적 과업은 열정으로 타오르는 남성적 정신의 여성적이고 모성적 배경을 정신의 원리와 조화를 이루도록 만드는 것이다.[C.G.Jung, Mysterium Coniunctionis, C,W.14, para.35.]
이 노래에서 우리는 모든 열정으로 타오르는 불길 속에는 꺼뜨릴 수 없는 신성한 힘, 신의 리비도가 있으며, 이는 우리에게 연합을 위한 갈망, 대극 융합을 통한 새로운 변환, 새로운 것을 산출하려는 창조적 본성이 담겨 있습니다. 모든 사랑의 갈망, 타오르는 열정의 불꽃 뒤에는 신적 창조력이 내재되어 있는 것입니다. 겉보기에 사랑과 성에 불길 아래에는 새로운 창조성을 실현하려는 목적이 담겨 있습니다. 인간에게 가장 근원적 충동이며 인간은 이를 실현하기 위한 과정 속에 있다고 단언할 수 있기조차 합니다. 연합의 갈망은 개성화의 충동입니다. 인간의 정신 속에서 실현해야 할 가장 중대한 요소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랑의 불길은 아무도 끌 수 없고, 사랑을 살 수 없습니다(7).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도 바울은 권면합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1-3).”
사랑 그 자체의 생명의 정수이며, 신앙의 정수임을 아주 명확히 하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 타오르는 불길과 열정은 사그러들지 않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충동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불길에 희생되면 우리의 인간성은 해체될 수 있습니다. 그 불길과 연합할 수 있는 건강한 자라면 창조적 인간으로 하나님의 뜻에 이바지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우리는 가장 깊은 뜻에서 우주 창조주의 사랑의 수단과 도구이며 그 희생물입니다.
사랑이 그리운 세상입니다. 삶이 조금 불편하고, 넉넉지 않고, 고단해도 사랑의 불만 있다면 충분히 따뜻하게 내 자신과 주위를 데울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과 질투의 두 대극을 내 안에서 조화롭게 이루어낼 수 있는 인생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안에서 창조성을 실현해갈 수 있는 복된 인생길 되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