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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내용은 월간서예 240호 기념 특별기획(2001년 8월호)에 게재된 내용으로 세 번에 걸쳐 전문을 소개할 예정이며, 그 첫 번째로 "1. 문화의 세기와 문화의 힘 2.새김과 씀의 예술로서의 서예와 비평 3. 근/현대 한국서예의 분기점과 미술시대 4.현대서예의 시작과 평론가의 역할 5.시대별 베스트 서예작가 선정에 관하여" 편을 소개한다.
20세기 10대 서예가와 21세기 중진서예가 10인(1)
-근/현대 및 당대 한국서예 대표작가를 선정하며
선정 및 집필자 / 서예평론가 손병철 / 정충락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남의 것을 모방하는 나라가 되지 말고 이러한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고 목표가 되고 모범이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진정한 세계의 평화가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로 말미암아서 세계에 실현되기를 원한다. 홍익인간이라는 우리 국조 단군의 이상이 이것이라고 믿는다. (중략) 우리 민족이 주연배우로 세계의 무대에 등장할날이 눈앞에 보이지 아니한가!"
1.문화의 세기와 문화의 힘
한국사의 끝자락엔 언제나 '제국의 역사' 가 있다. 단 한번의 시작이자 마지막이 되어버린 '대한제국' 의 운명은 1897년에 탄생하여, 안중근 의사가 뤼쑨(旅順) 형무소에서 순국한 그 해, 1910년에 파란만장한 그 막을 내리고 만다.비록 당시 열강들의 세력균형이 빚어낸 쟁탈전에 함몰되어 한일합방이라는 치욕의 역사로 끝났지만 조선이 잠시나마 대한제국이라는 황제국으로 호칭하였다는 것은 독자적인 연호와 독립국으로서 주체적인 세계관으로 세계사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이 열렸음을 뜻한다. 지금도 서대문에 의연히 서 있는 독립문은 일제로부터 독립이 아닌 대륙으로부터, 사대주의로부터의 독립의 역사를 말해 준다.
20세기 한국의 역사는 이렇게 하여 초라하게 시작되었다. 서예의 역사인들 예외일 수 없듯 민족정기를 표방하지 않을 수 없는 시대상황으로 바뀐다. 문화란 역사를 거슬러 갈 수는 없지만 언제나 시대를 리드해 나가기 마련이다. 위에 인용한 글은 민족독립과 아울러 통일된 나라로 새로 고쳐 세우려다 흉탄에 쓰러진 백범 김구선생의 <나의 소원>서두의 한 대목이다. 남의 것을 모방하지 말고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을 찾아 세계평화를 위한 주체로서 인류사회에 크게 기여할 것을 한민족의 비젼으로 제시하고 있는 말씀이다. 무엇보다 '문화의 힘'을 강조하고 있는 이 글은 반세기가 훨씬 지나 새로운 세기를 맞은 오늘에 있어서도 더욱 값진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3.1독립선언 정신을 계승하여 널리 국제무대로 한민족의 기상을 드높인 이러한 애국애족사상은 영원히 지울 수 없는 고귀하고 값진 선견지명으로 우리들 가슴속에 울림하고 있다. 한 탁월한 독립운동가로서 뿐만 아니라 민족문화 창달의 정신적 지도자로서의 백범 선생의 이 말씀은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에게 부여된 크나큰 사명이자 숙제로 남아 있음을 상기해 볼 때, 우리는 아직 냉전의 상징이자 비극적 민족분단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였고, 진정한 세계평화의 실현을 위해 뚜렷한 족적을 남기지 못하였으며 신기운의 도래로 시대가 변하였음에도 민족 주체로서의 이렇다할 정체성마저 획득하지 못하고 있음을 돌이켜 반성하지 않을 수 없다.
흔히들 21세기를 정신문화의 시대요 정보네트워크의 시대라 말한다. 지구촌화 된 빠른 정보의 소통이야말로 백범 선생이 반세기 전에 이미 말한 '문화의 힘'이 아닐 수 없다. 20세기 눈부신 과학기술의 발달로 말미암아 도달한 지점에 가장 중요하게 대두된 문제가 곧 '문화의 힘'인 정보의 내용인 것이다. 누가, 어느 민족이 보다 밝고 맑은 두뇌와 가슴으로부터 어질고 착한 지혜와 창조적 정신문화를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 근본적 문제해결의 관건이자 21세기 대전환기를 사는 우리 모두의 공동목표인 것이다. 무엇보다 '도의정신 문화시설'이야말로 우주에 등불과 같이 빛날 우리민족의 사명이요 이상이다.
2.새김과 씀의 예술로서의 서예와 비평
사람은 누구나 한결같이 아름다운 것, 행복한 것, 평화로운 것, 가치 있는 것을 바라고 좋아하기 마련이다. 인간의 보편적인 목표가 이러할 진데, 민족의 해방과 세계의 평화를 위해 기거이 한 목숨을 받친 선열들의 충혼은 물론, 아름다움이라는 가치추구를 위해 일생을 바쳐온 예술가 또한 궁극적인 목적에 있어서는 그 예외가 아님은 두 말할 것도 없겠다. 따라서 극동에 있어 고대로부터 조형예술의 정수이자 시서화 삼절의 모체라 할 수 있는 서의 예술 역시 마찬가지이다. 실용에서 심미적 가치로 발전해온 새김과 씀의 예술로서의 서예역사는 지필묵이 사용되기 이전의 상고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오늘날 갑골문 연구뿐만 아니라 선사시대의 암각화, 혹은 암각서의 연구에서도 그러한 조짐들이 발견되고 있기 때문이다.
서가이든 서예가든 혹은 전각가이든 그의 목표는 좋은 글씨, 훌륭한 예술작품을 창작하는데 있다고 할 것이다. 고대 유가의 이상적 교육의 목표였던 6예와 과거에 의한 등용문의 조건이기도 했던 身, 言, 書, 判이라는 4가지 덕목 가운데 書과 역시 전통적 문인사대부의 길로 나아가는 첩경이자 인격완성의 필수적 조건이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서품이 곧 인품으로 평가되던 시대의 그 위상과 가치수준은 시/서/화가 해체의 길을 걸어 온 지난 한 세기 문화환경과는 그 비교의 여지조차 허용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서/화 분리 이후 한국미술은 현대화가 곧 서구화의 이름으로 급변해 왔으며, 서구문화의 충격과 격심한 전통의 단절로 인해 그 가치관 또한 판이하게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사 이래로 예술활동과 평가작업은 어느 때나 있어왔고 또 반드시 있어야 할 만큼 중요한 분야이기도 하다. 예술가개인의 창작을 위해서나 한 시대 예술의 발전을 위해서도 비평가의 안목에 의한 평가와 정리작업은 소중한 것이다.
창작활동과 비평활동은 양립되어야 하면서도 그 둘의 지향하는 목표에 있어서는 일치하며, 또 불가분리의 관계에 놓일 수밖에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위대한 거장들의 작품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역사와 민족의 경계를 넘어 우리들의 마음은 직접 공명하기 마련이듯, 미술품이란 한 나라의 일시적 문화현상에 그치는 것이 아닌 시대를 초월한 세계적인 보편성을 가질 때, 비로소 진정한 아름다운의 가치를 획득할 수 있는 것이며, 그것은 바로 비평에 살아남은 역사의 평가에 의한 것이다.
극동에서 꽃피워 온 서예술 또한 문화계승에 담당자로서 고도의 안목을 갖춘 지식계급인 선비들의 비평적 평가에 의해 지속적으로 발전되어 왔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고대로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문인 사대부뿐만 아니라 심지어 절대권자인 제왕조차 서화에 능통하고 그에 대한 평가의 감식안을 겸비하고 있었다는 것은 서구역사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서예술은 민간보다는 관방의 전용물처럼 되었던 것이며, 서가 오랜 전통을 이어오면서 발전할 수 있었던 연유도 과거를 통한출세의 길과 인격도야의 도구로서 필수과목이었던 것에 기어한다. 동양에선 비평의 어원이 된 비주와 비준이란 말도 제왕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3. 근/현대 한국서예의 분기점과 미술시대
한국서예의 근/현대 구획문제는 아직 통일된 견해를 갖고 있지 못하다. 그러나 필자는 한국 근대서예를 19세기 초 근대적 자각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자하 신위와 추사 김정희시대로부터 광복 전까지 100여 년으로 보고, 현대서예를 1945년 소전 손재형의 주도로 조선서화동연회를 조직하고 '서예'라는 명칭 사용을 주창한 해방공간으로부터 그 기점을 설정한 바 있다. 1910년부터 현대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이는 설득력을 얻기 어려운 문제로 보인다. 왜냐하면 매국역신 일당 이완용 등의 선전을 통한 친일파 서가들의 득세와 추사 아류의 그림자를 지우지 못한 일제하의 36년은 주권이 상실된 민족서예의 암흑기요 한국서예의 쇠퇴기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서구화 바람의 개화기를 거치면서 봉건시대의 유일한 인재 등용문이었던 과거의 폐지와 더불어 20세기 문턱에 이르러선 전통적인 미의식이었던 시서화에 의한 문필정신마저 어쩔 수 없이 해체되기 시작하였다. 서양문물의 도입과 국권의 상실은 서둘러 서화의 전통적 개념을 미술로 바꾸어 놓았으며 끝내 서와 화의 분리의 시대를 맞게 되었던 것이다. 1911년 설립된 경성서화미술회(회장 이완용) 강습소는 書과와 畵과를 두었으며 서과는 우리나라 근대 서예학원의 효시였다. 한편 1915년 해강 김규진이 독자적으로 창설했던 서화연구회를 비롯한 1918년에 발족된 민족미술가들의 집결처였던 서화협회와 1922년 대구에서 석재 서병오에 의해 설립된 교남시서화연구회 등이 일제하에서도 강습소를 설치하고 서화연구생을 모집하여 민족예술을 가르쳤다.
특히 근대적 미술가 단체의 시작인 서화협회 발기인 13명중에는 서가인 오세창과 서화 겸전의 김규진이 참석하고 있으며 1921년에 발간된 <서화협회보>에 의하면 정회원에 서화가 서병오가 들어 있다. 비로소 과거에 의한 선비글씨와 문인 사대부의 여기에 지나지 않았던 문인화 위주의 전통서화의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시대적 요구에 따른 서/화분리의 직업적 전문성의 미술가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아울러 본격적인 전시문화의 전개로 새로운 직업의 미술가로서의 사가와 화가의 대등한 자위로 자리 매김 하게 된다. 근대적 미술전람회 형식으로는 1913년 서화미술회가 주최한 서화대전전람회가 최초이다. 1921년에 개최된 제1회 서화협회전은 15회(1936)까지 지속되었으며 繪畵部와 書部로 나누어 전시하였는데, 14회부터는 손재형이 서부 정회원으로 참석하고 있으며 15회는 민태식, 윤제술 등이 응모 입선작으로 전시되었다.
민간단체의 협전과는 대조적인 정치적 목적으로 총독부가 1922년에 개최한 조선미술전람회는 민족미술 발전에 부정적인 측면을 지울 수 없으나 근대 한국서단의 형성에 중요한 배경을 이루고 있음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한다. 제1∼2회 선전 서부의 심사엔 정대유, 김규진, 김돈희, 박영효, 박기양, 서병오 등이 참여하고 있으며, 입선에 이한복, 오세창, 안종원, 김용진 등의 이름이 보인다. 제3회부터는 이한복, 이병직, 손재형, 강신문 등이 입선하고 있다. 특히 선전 書부는 제10회(1931) 전시를 끝으로 제외되고 그동안 서부에 속해 있던 사군자부는 제1부 동양화부로 흡수시켰다. 그러나 서부 출품작가들의 강한 반발에 밀려 총독부는 그 이듬해 '선전에서 분리된' 독립된 공모전으로 조선서도전을 개최하게 된다. 제1회 서도전에는 손재형, 송치헌, 이철경, 강신문 등이 입선하였다.
4.현대서예의 시작과 평론가의 역할
1945년부터 한국 현대서예의 변천과정을 편의상 네 시기로 구분할 수 있으나, 해방공간으로부터 1949년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와 6.25전쟁을 거쳐 1966년(제15회)까지의 국전 전반기와 1981년 제30회로 막을 내린 국전 후반기, 1982년 민전으로 재출발한 미술대전 시기와 1989년 서협과 미협 주최 동일명칭의 두 개의 서예대전 시기가 그것이다. 국전 전반기는 소전과 일중 등의 주도에 의한 藝派의 전성시대였고, 국전후반기는 검여와 여초를 위시한 재야세력인 法派의 등장으로 혁신과 보수의 양파계열간의 대립 충돌을 가져 온 한국서단의 과도기였던 셈이다. 80년대 미술대전 시기는 전위적 실험정신이 농후하였던 예파 계열의 1세대 서예가들의 퇴진과 법파들의 득세로 한국서단이 전반적으로 보수적 색채의 획일화 경향을 초래한 시기였으며, 90년대 서예대전 시기는 세기말의 현상과 더불어 세대교체를 통한 이론의 무장과 개성을 가진 백화제방의 신진작가들이 대거 출현한 시기라고 할 수 있겠다.
작금 한국서단에서 서예평가론을 전업으로 한 사람으로서는 해방 후 1세대 비평가에 속하는 한면자 석도륜과 80년대 이후 농산 정충락과 필자 등 셋이다. 석도륜은 60∼70년대 미술평론을 겸한 서예평가론가로 독보적인 활동을 하였으며 시서화에서도 일가견을 가진 평단의 원로이다. 그는 1967년 동아일보에서 발간하고 있던 월간지 <신동아> 4월호에 '한국의 얼굴'이라는 연재기획물의 하나인 '현대 한국의 서단을 대표하는 <서예가11인>' 선정위원으로 미술사가 최순우, 시인 서화가 김상옥, 미술평론가 이구열, 문화관계 언론인 이흥우 등과 함께 참여한 바 있다.
선정위원 5인이 제출한 명단 집계에 딸라 선발된 60년대 한국을 대표하는 현대서예가 11인의 면면들을 득표순에 다라 기록하면 소전 손재형(64세), 검여 유희강(57세), 어천 최중길(50세), 일중 김충현(47세), 여초 김응현(42세), 시암 배길기(51세), 철농 이기우(47세), 원곡 김기승(58세), 동정 박세림(43세), 운여 김광업(62세), 동교 민태식(64세) 등이다.
당시 대표 서예가 11인(본시 10명을 선정하기로 하였으나 소전의 고사로 결국 11인이 되고 말았다)에 선발되었거나 거론된 서예가는 모두 18명이었으며, 탈락된 서예가들과 함께<신동아>지 '한국의 얼굴'로 등장한 서예가 11인은 60년대 한국예계의 한 단면을 읽을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음은 분명하다. 석도륜은 또 1978년 중앙일보에서 발행하던 <계간미술>5호와 7호에서 <한국현존서예가10인선>과 한국의 전각가 가운데 <인인(印人)10인선>을 각각 단독으로 선발하여 도판과 함께 평문을 게재하고 있기도 하다. 참고로 그 명단을 보면 70년대 <한국현존서예가10인선>에는 손재형, 오재봉, 김기승, 최중길, 배길기, 김충형, 이기우, 조수호, 정환섭, 김응현(년령순) 등이며, <인인8가선>에 든 전각가로는 석불 정기호, 속봉 고봉주, 심당 김제인, 청사 안광석, 철농 이기우, 회정 정문경, 초정 권창륜, 승무용 등이다. 그는 현존서예가들의 '작가별 해설'을 쓰면서 "본래 생존해 있는 書家는 평을 않는 것이 상책인 것으로 나는 알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불가불 그렇게 자인하게 되고만 것이다."라고 비평가의 고충의 일단을 밝히고 있기도 하다.
상책 다음으로는 '불가불'에 해당하는 고육지책인가, 그렇다고 마냥 비평가의 책무를 저버릴 수만은 없지 않은가. 같은 맥락에서 한 세기가 가고 새 천년을 맞이하고서도 현대서예사적인 조명이나 현 한국서단을 총체적으로 평가, 정리해 보는 아무런 담론도 기획작업도 없다면 이는 평론가로서 역사적인 태만의 오류를 범하는 경우가 될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이다. 다행히 <월간서예>의 기획특집으로 <20C대한민국10대서예가선>과 <21C대한민국중진서예가10인>을 선정하여 발표함으로써 이 나라 근/현대 서예사를 재조명하고 내일의 한국서예의 새로운 비젼 제시를 위한 초석 마련에 작은 힘을 보태려는 것이 선정자의 뜻이다. 물론 평론가의 작가 선정작업 그 자체로서도 이미 비평적 역할에 해당되는 문제이겠으나 평자의 비평적 관점과 선정의 기준이랄까 그 배경에 대한 관행들에 있어서도 어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20C 10대서예가들은 대부분 이미 물고 작가인 경우여서 선정기준에 따라 별 어려움 없이 마쳤으나, 중진서예가10인은 견해의 차이를 좁히는 데도 몇 개월의 시간이 소요되었으며, 그 20%는 결국 서로 양보할 수밖에 없었음을 밝힌다.
5.시대별 베스트 서예작가 선정에 관하여
이번 기획의 의도는 위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한국 근/현대 서예사의 구획문제와 관련하여 20세기 근대서예와 현대서예의 대표적 작가를 통해 시대별 특성을 살펴보고 21세기 한국서예의 본격적인 정체성 탐구에 기여하는 데 있다. 먼저 21세기 10대 서예가 선정에 관한 배경이다. 20세기 한국서예는 통시적으로 1945년을 분기점으로 하여 근대와 현대로 나눈 것이다. 엄밀히 말해 1945년부터 공식명칭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서예'란 용어를 기준으로 할 때, 해방 이전의 작가는 書家로 볼 수밖에 없으며, 해방이후로부터 서예가라는 명칭이 가능하다. 이는 단순히 시대구분을 위한 명칭의 차별성을 의미하지 않고, 한국현대서예사 기술을 위한 핵심 언어(key word)로써 역사의 한 획을 긋는 모범답안과도 같은 것이다. 書家라면 畵家란 말에서 보듯 서/화 분리 이후의 과도기적인 근대성을 직업 명칭이다. 물론 일제하에선 일본방식 대로 '서도'에서 비롯된 書道家로 사용되었을 법도 하다. 하지만 서예가란 명칭은 보다 현대성을 지닌 직업 예술가에 더 가깝게 들리는 것은 당연하다할 것이다.
따라서<20세기 대한민국10대서예가전>에서 근대와 현대로 나누지 않고 '서예가'로 통친한 것은 부득이한 경우이다. 지난 4월 중순 선정자 첫 회합에서 해방 전 '서가' 5명과 해방후 '서예가' 5명으로 할 것을 미리 선정범위로 정해 놓고 각 배수에 해당하는 작가 명단을 검토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5월에는 현역의 중견서예가10인을 공시적인 차원에서 검토하기에 이른 것이다. 지난 세기 한국미술사는 한마디로 말해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지역적 특수성과 국제적 보편성 등의 대립항의 개념으로 정리될 수 있는, 한 마디로 말해 挑戰과 應戰이라는 문제로 귀결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평자는 한국서예사 역시 안과 밖의 문제로 소용돌이 친 세기의 격동기를 전/후반으로 나누고 전반기는 '민족적 정체성'으로 후반기는 '독창적 서예성'을 대표작가 선정기준의 잣대로 삼은 것이다. 서가는 전자에, 서예가는 후자에 관련된다.
다시 말해 전자의 作家群에 속하는 서가는 '민족적 정체성'의 여부에 관련된 문제이고, 후자는 작가군에 속하는 서예가는 '독창적 서예성'의 문제완 관련된다. 시대정신, 독창성, 개성 그밖에도 작가의 업적, 문제(주제)의식, 작품성, 예술성 등 다양한 기준이 적용되었음은 물론이며, 해당 중진서예가들도 예외는 아니다.
그럼 근대적 서가의 '민족적 정체성'이란 어떤 것인가? 간단히 살펴보지 않을 수 없겠다. 이민족의 침입으로부터 국권을 상실한 한일합방 전후의 한민족의 본디 참모습은 대한독립의 쟁취요 오로지 국권 회복에 있었다. 한학을 통해 성인의 말씀을 배우고 그것을 교육하는 등 실천하는 길만이 가정과 국가에 충효를 다하는 것으로 본체를 삼았던 지조 있는 선비의 도가 필묵을 통해 어떻게 표현되리라는 것은 명약관화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시대가 영웅을 만든다는 말이 있듯 본의든 아니든 안중근 의사와 백범선생 같은 민족적 書家는 그렇게 하여 탄생된 것이다. 정체불명의 그 많은 매국의 명필들과 친일의 서도가 그리고 소극적 항일서가들이 병존하였던 일제 암흑기에 '민족적 정체성'을 온전히 지킨 예술가가 과연 몇 명이나 될지 역사에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최근 '한국미술사 연구의 아버지'로 재조명되고 있는 3.1독립운동의 33인 민족대표자이며 서가이자 전각가요 서화연구가인 위창 오세창 선생 또한 민족적 서가로 우뚝한 분이시다. 해강 김규진과 석재 서병오 역시 시서화 할 것없이 달통한 천재적 거장의 풍도로 동양3국을 호령했던 근대의 대표적 예술가이자 민족교육자였다.
그리고 현대적 서예미학 개념에 포함되어 마땅할 '서예성'이란 용어는 씀의 예술로서의 서예가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가의 여부를 결정하는 조건이자 핵심적 관건이다. 특히 서예가 현대예술의 한 장르로 독립할 수 있는 근거 역시 이 '독창적 서예성'에서 찾아진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사상이나 감정을 나타내는 예술 가운데 음악에는 음악성이 있고 회화에는 회화성이 있듯 서예에도 서예성이 있어야 함은 당연하다. 예를 들어 사군자가 회화성보다는 서예성에 더 가깝기 때문에 선전에서 국전을 거쳐 오늘에 이르도록 서예부에 속해 있었던 것과 같은 이치이다. 즉 사군자의 소재가 비록 문자는 아닐지라도 씀의예술과 방법적 일치와 畵題를 동반하고 있다는 점외에도 필묵정신의 서예적 요소를 더 많이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간단히 정의하면 서예성은 서예만이 가진 독자적 특성을 말한다. 즉 시간개념으로서의 선의 무한성과 찰나성, 공간약식으로서의 획의 일회성과 다양성이 바로 그것이다. '독창적 서예성'은 이 네 가지 특성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으니, 해방후 대표적 서예가로는 제1세대의 손재형과 김충현, 유희강과 이기우 그리고 이철경으로 압축되었다. 이는 곧 통시적 관점으로 본 것이며, 굳이 분류한다면 독창적 조형언어를 구사한 藝派의 소전과 일중, 전통서법에 의한 개성고수로 일관한 法派의 검여와 중도파적 노선으로 서예와 전각을 겸전한 철농, 그리고 규슈작가로서 한글 궁체연구와 보급에 일생을 받친 무소속의 갈물파로 구분해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여타는 그 계파에 속하는 제자이거나 재야의 기타 雜派로 논외에 부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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