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팔정도(八正道)
팔정도(八正道)라, ‘정(正)은 성(聖)이다. 기도편사(其道偏邪)를 리(離)하므로 정도(正道)라 운(云)하고, 또한 성자(聖者)의 도(道)이므로 성도(聖道)라 한다.’ 정(正)이나 성(聖)은 같은 뜻입니다. 성스럽다 하는 것도 역시 발라야 성스럽겠지요. 그러니까 정도(正道)나 성도(聖道)는 같은 뜻입니다. ‘기(其) 도(道)’ 그 닦는 길이, 도 이것도 역시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한 가지는 진리 자체를 도라 하기도 하고, 또는 진리에 가는 길, 길을 도라 하기도 합니다. 그와 같이 바로 당체를 도라고 하지만 우리가 생각할 때는 거기에 가는 길도 역시 도라고 말합니다. ‘편사(偏邪)를 리(離)하므로 정도(正道)라 운(云)하고,’ 치우칠 편(偏)자, 삿될 사(邪)자, 치우치고 삿됨을 떠나므로, 떠날 리(離)자, 정도라 말하고, 운(云)하고, 그 길이 치우친다거나 삿되면 정도라 할 수가 없겠지요. ‘또한 성자(聖者)의 도(道)이므로 성도(聖道)라 한다.’여기에 여덟 가지 법문이 있지 않습니까.
1. 정견(正見)
일(一)에 ‘정견(正見)이라, 고집멸도(苦集滅道) 사제(四諦)의 리(理)를 분명(分明)히 견(見)함을 운(云)하며, 팔정도(八正道)의 주체(主體)이다.’
여러분들이 다 배워서 몇 번씩 보시고 알겠습니다만 부처님 법문은 누가 말하나 항시 새로운 것입니다. ‘고집멸도(苦集滅道) 사제(四諦)의 리(理)를 분명(分明)히 견(見)함을 운(云)하며,’ 고집멸도 사제의 이치(理致)를 분명히 못 보면 정견(正見)이라 할 수 없단 말입니다. 우리는 정견을 꼭 세워야 합니다. 정견을 못 세우니까 함부로 우리가 망동(妄動)을 한단 말입니다. 바른 견해(見解) 바른 인생관(人生觀) 바른 가치관(價値觀) 이것이 정견인데,
그러면 바른 인생관은 무엇인가? 역시 우리 인생은 고(苦)다. 고라고 분명히 느껴야 쓴단 말입니다. 물론 근원적인 의미에서는 아까 말마따나 고(苦)나 집(集)이나 멸(滅)을 다 떠나 버렸지만 그러나 현상적으로 볼 때는 인생은 고(苦)단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 수행자(修行者)는 항시 현상적(現象的)인 것을 몽환포영(夢幻泡影)으로 보고<苦·空·無常·無我>, 실상적(實相的)인 것 생사(生死)가 없고 번뇌(煩惱)가 없고 이러한 실상<常·樂·我·淨>을 참말로 봐야 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항시 대비(對比)해서 봐야 쓰는 것입니다.
고집멸도 사제의 그런 이치를 분명히 봄을 말하며 이것이 ‘팔정도(八正道)의 주체(主體)이다.’ 여기 다음에 정사유(正思惟) 정어(正語) 많이 있지만 내내야 바른 가치관, 바른 가치관 정견이 항시 주체입니다. 생활도 마찬가지로 바른 가치관이 있어야만 바른 생활을 할 수가 있듯이 수행도 역시 바른 정견이 앞섭니다.
즉 인생고는 여러 가지 생로병사나 그런 고에 해당하고, 고의 원인은 저번에 배운 바와 같이 탐진치(貪嗔痴) 삼독심(三毒心)에서 일어나는 선악의 행위를 말하는 것이고 그러나 그런 것을 다 떠나버린 참다운 행복의 경계 이것은 멸인 것이고 멸에 이르기위한 길은 이와 같이 팔정도라 하는 사제법문의 도리를 분명히 아는 이것이 바른 견해란 말입니다.
2. 정사유(正思惟)
이(二)에 ‘정사유(正思惟)라, 이미 사제(四諦)의 리(理)를 견(見)하고 더욱 사유주량(思惟籌量)하여 진지(眞智)를 증장(增長)함을 운(云)함.’
사유(思惟) 이것은 생각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미 사제(四諦)의 리(理)를 견(見)하고’ 먼저 사제의 이치를 분명히 알고, ‘더욱 사유주량(思惟籌量)하여 진지(眞智)를 증장(增長)함을 운(云)함.’ 더욱 사유주량 하여 진지를 참다운 지혜를, 증장(增長) 이것은 폭(幅)으로나 상하(上下)로나 길이나 폭이나 다 늘이는 것이 증장입니다. 즉 말하자면 어떤 것을 보다 더 길이나 폭이나 모두를 늘리는 것이 증장이란 말입니다.
3. 정어(正語)
삼(三)에 ‘정어(正語)라, 진지(眞智)로써 구업(口業)을 수(修)하여 일체(一切) 비리(非理)의 어(語)를 작(作)하지 않음을 운(云)함.’
진지로서 참다운 지혜로서 구업(口業)을 수(修)하여 구업을 닦아서 구업은 내내야 입으로 짓는 업 아닙니까. 일체 비리(非理)에 이치에 어긋나는 이치가 아닌 말을 짓지 않음을 말한다.
이런 때도 앞서 든 그러한 생멸사제나 그런 관념도 필요하지만 역시 근원은 언제든지 아까 말한 무량사제 말입니다. 또는 무작사제 그러한 상이 없는 사제를 근본에다 딱 두고서 우리가 말을 해야 한단 말입니다. 구업은 아시는 바와 같이 나쁜 것은 욕설(辱說), 이간하는 말, 또는 거친 말, 꾸며서 하는 말,
4. 정업(正業)
사(四)에 ‘정업(正業)이라, 진지(眞智)로써 신(身)의 일체(一切) 사업(邪業)을 제(除)하고 청정(淸淨)의 신업(身業)에 주(住)함을 운(云)함.’
진지로써 바른 지혜로써 몸의 일체 사업을 일체 삿된 업을 다 없애고 제하고 청정 신업에 주함을 청정신업에 머무름을 말한단 말입니다. 이런 것은 우리가 다 아는 문제 아닙니까. 하여튼 살생 말고, 또는 훔치지 말고, 모다 그런 등등 술 먹지 말고, 이것이 신업에 이것이 청정 몸의 업 신업입니다. 그런 몸으로 청정 계율을 지키는 것, 몸으로 나쁜 점을 떠나는 것입니다.
5. 정명(正命)
오(五)에 가서는 ‘정명(正命)이라,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을 청정(淸淨)히 하여 정법(正法)에 따라 활명(活命)하며, 오종(五種)의 사(邪)활(活)명(命)을 리(離)함을 운(云)함. (*오사명(五邪命); 천문(天文), 지리(地理), 사주(四柱), 상(相), 점(占) 等)’
신구의(身口意) 몸으로 짓고, 입으로 짓고, 뜻으로 짓는 그러한 삼업(三業)을 청정히 하여, 정법(正法)에 부처님의 참다운 진리에 따라서 활명(活命), 생활 하는 것이 활명입니다. 생활을 하며 활명하며, 오종(五種)의 다섯 종류의 사활명(邪活命)이라, 삿된 생활을 떠남을 말한단 말입니다.
오사(五邪)는 무엇인고 하면 이것은 천문(天文)이나, 천문을 보고서 그 하늘의 별이나 보고서 아는 점만 치고 사는 것이 천문 아니겠습니까. 지리(地理)라, 풍수지리학(風水地理學)을 보고서 도참설(圖讖說)로 해서 이상한 말을 하는 것이고, 사주(四柱)라, 그 사람의 운명을 감정해서, 사주라는 것은 생년(生年)·월(月)·일(日)·시(時)가 사주입니다. 그걸 따져서 그 사람운명을 감정해서 뭐라고 헛된말을 한단 말입니다. 또 상(相)을 보고서 점(占)을 하고 이런 등등의 것이 사명(邪命)입니다. 지금 사람들은 이런 것도 더러 출가(出家)한 분들도 한다 말입니다. 이런 것은 모두가 삿되게 생활 하는 것입니다.
삿된 생활을 떠나서 청정한 신구의(身口意)로 우리가 생활 한단 말입니다. 따라서 직업도 바른 직업을 가져야 한단 말입니다. 바른 생활 바른 직업을 갖는 것 이것이 정명입니다.
6. 정정진(正精進)
육(六)은 ‘정정진(正精進)이라, 진지(眞智)를 발용(發用)하여 강인(强靭)하게 열반(涅槃)의 도(道)를 수(修)함을 운(云)함.’
진지를 - 참다운 지혜를 -일으켜서 강인하게 조금도 어떤 경우든 거기에 꺾이지 않고서 말입니다. 강인하게 열반의 길, 열반은 영생해탈(永生解脫), 열반, 극락, 영생, 다 같은 뜻입니다. 영생의 길을 닦음을 말한단 말입니다. 비록 이런 것을 다 안다 하더라도 게으름 부리면 갈 수가 없습니다. 안 쉬고 애쓰고 해야 쓴단 말입니다. 정정진이라, 참다운 지혜를 일으켜서 강인하게 꿋꿋하게 열반의 영생의 길을 닦는단 말입니다.
7. 정념(正念)
칠(七)에 가서 ‘정념(正念)이라, 진지(眞智)로써 정도(正道)를 억념(憶念)하고 사념(邪念)이 무(無)함을 운(云)함.’
참다운 지혜로써 정도를 억념하여, 억념 이것은 마음 깊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깊이깊이 말입니다. 그냥 정견(正見) 이것은 우리 불교에서 말하는 문사수(聞思修)라, 그냥 귀로 들어서 아, 그렇구나, 이렇게 알 정도는 정견 이지만 정사유(正思惟)는 생각을 더 깊이 하고, 정념(正念)은 더 깊이 해서 그때는 확신을 딱 가져서 말입니다. 마음 깊이 억념(憶念)이라, 억념은 그와 같이 기억해서 잃지 않는단 말입니다.
따라서 정견, 정사유, 정념 이것은 그러한 정도의 차이입니다. 정견을 보다 더 깊이 정사유 하고, 보다 더 깊이 하면 정념이고 말입니다. 마음으로 기억해서 잃지 아니해가지고서 사념(邪念)이 떠나서 그때는 삿된 생각이 없단 말입니다.
8. 정정(正定)
팔(八)에 ‘정정(正定)이라, 진지(眞智)로써 무루청정(無漏淸淨)한 선정(禪定)에 입(入)함을 운(云)함.’
참다운 지혜로써 무루청정한 선정에 들어감을 말한다 말입니다. 무루청정(無漏淸淨)은 무엇인가? 루(漏)자 이것은 ‘샐 루(漏)자’ 번뇌(煩惱)를 루라 합니다. 물이 새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번뇌가 있는 법은 유루법(有漏法)이고, 번뇌가 없는 법은 무루법(無漏法)입니다. 마음이 헛간디로(쓸데없는 곳으로) 새버려서 온전치 못한 것이 루(漏)를 의미한 것이니까, 번뇌가 있으면 마음이 헛간디로 새버리면 유루(有漏)고, 번뇌가 없으면 무루(無漏)란 말입니다.
무루청정(無漏淸淨)한 수행(修行)은 어떤 것인가? 앞서도 말한 바와 같이 원래 번뇌가 없고 본래 무번뇌(無煩惱)라,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란 말입니다. 본래 하여튼 물질이라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오직 부처님만 계시고, 오직 마음만 있고, 그런 수행이 무루청정한 수행인 것입니다. 우리는 꼭 무루청정한 수행을 해야 씁니다.
기독교와 불교와의 여러 가지 차이점을 많이 거론하지만 기독교는 내내야 결국은 하나님 따로 있고, 나 따로 란 말입니다. 하나님과 나를 하나로 보는 기독교 교리는 별로 없습니다. 물론 마태복음서나 요한복음서의 어느 수승한 대목에 가서 우리가 깊이 생각하면 그렇게 합리화 시킬 수는 있다 하더라도 우선 표현 된 것으로 보면 기독교는 하나님 따로 나 따로입니다.
어떤 종교나 불교와 같이 ‘부처님과 나와 둘이 아니다’ ‘천지우주는 부처님뿐이다’ 하는 그런 수승한 진리는 없습니다. 그런 진리가 되어야만 참다운 우리 마음의 해방(解放)이 있는 것입니다. 참다운 자유(自由)가 있는 것이고 말입니다. 하나님한테 내가 얽매여 있다. 하나님한테 창조를 당해서 얽매여 있다. 이러면 그때는 우리한테 자유가 없단 말입니다. 따라서 참다운 자유 참다운 인간의 존엄성은 불교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억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어요.
불교는 그야말로 참 가장 수승한 것이 바로 내 마음이니까 말입니다. 또한 일체중생이 그런 마음이 다 들어 있는 것이니까 다 평등한 것이고, 참다운 평등, 참다운 자유, 참다운 존엄은 불교 밖에는 없습니다. 무루청정(無漏淸淨)한, 오직 천지우주가 청정미묘(淸淨微妙)한 불성(佛性)뿐이다 말입니다. 청정 미묘한 불성뿐이라는 그러한 참 지혜에 입각해 가지고서 참선(參禪)도 하고 염불(念佛)도 해야만 참다운 선정이란 말입니다.
억지로 싫은 것을 의심(疑心)하고 따지고 그러는 것은 사실은 무루청정(無漏淸淨)한 참선이 못되는 것입니다. 다 떠나서 세상에 그야말로 더러운 것은 아무것도 없고 의심할 것도 없고 의심할 건덕찌도 없고 말입니다. 의심할 건덕찌도 또는 차별할 만한 그런 어떤 엉터리도 없고 이러한 모두가 아까 말한 바와 같이 청정미묘(淸淨微妙)한, 청정미묘한 불성에 입각한 수행이 되어야만 무루청정(無漏淸淨)한 참선이고 염불인 것입니다. 염불(念佛)도 그래야 되고 우리가 불공(佛供)을 모신다 하더라도 역시 또는 영가(靈駕)를 천도(遷度)한다 하더라도 이와 같이 무루 청정한 마음에 입각(立脚)하면 훨썩 더 천도가 빠른 것입니다.
* 팔정도(八正道) 중(中),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의 삼지(三支)는 계품(戒品), 정념(正念) 정정(正定)의 이지(二支)는 정품(定品),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 정정진(正精進)의 삼지(三支)는 혜품(慧品).
팔정도 가운데서, 정어 이것은 참다운 말을 이릅니다. 사제의 진리를 다 알고서 참다운 진지에 입각해서 구업을 구한다 말입니다. 말을 한단 말입니다. 그러한 정어와 정업이라, 이것도 역시 참다운 지혜로 해서 우리 신업(身業) 즉 말하자면 몸으로 하는 행동 하는 이것이 정업 안 되겠습니까. 또는 정명이라, 참다운 진지(眞智)로써, 참다운 진리가 앞서지 않으면 정업도 정명도 못되는 것입니다.
꼭 참다운 진지 참다운 지혜가 앞서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참다운 가치관이 앞서야 만이 바른 말, 바른 업, 바른 생활이란 말입니다. 같은 말도 알 듯 말듯하니 억지로 하면 위선(僞善)에 불과합니다. 역시 도리에 입각해서 말입니다. 도리를 우리가 억념해가지고서 도리에 입각해가지고서 우리가 바른 말하고, 바른 업을 짓고, 바른 생활을 해야만 그것이 무루청정한 삼업(三業)이란 말입니다.
팔정도 가운데서 정어, 정업, 정명, 삼지 세가지 이것은 계품에 즉 계행에 계율에 해당하고, 또 정념, 정정, 이것은 정품, 선정에 해당하고 말입니다. 또 정견, 정사유, 정정진, 삼지 이것은 혜품에 해당 합니다. 즉 말하면 부처님의 여러 가지 수행법(修行法)은 모두가 다 가장 간추리면 계(戒)와 정(定)과 혜(慧) 아닙니까. 즉 삼학도(三學道)라, 석 삼(三)자, 배울 학(學)자, 길 도(道)자, 삼학도 이것이 가장 간추린 수행 방법인데 좀 부연시키면 이와 같이 팔정도(八正道)고 말입니다. 더 부연시키면 무량의 수행법이 있겠지요.
우리는 우선은 이와 같이 팔정도만으로 해서 짐작하고 팔정도를 더욱 줄이면 방금 말한 바와 같이 정어, 정업, 정명, 3지 이것은 계품인 것이고, 정념, 정정, 2지는 정품인 것이고 선정에 해당한 것이고, 정견, 정사유, 정정진, 3지는 혜품에 지혜에 해당합니다. 이와 같이 요는 따지고 보면 계정혜(戒定慧) 삼학도(三學道)를 말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