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번째 글 올립니다. (feat. 노벨문학상)
무 싹을 바라보는 견해들 / 고은희
잘라놓은 반 토막 무에서 싹이 돋아 나왔다.
할머니는 처녀 적 사립문 같다고 하고 아버지는 막 빠져나오는 송아지 같다고 하고 나는,
혁명 같다고 했다.
연속 재배하면 벌레 먹고 풀이 날개를 치면 한없이 나약해져버리는 무. 두더지가 지나간 자리를 싹둑 잘라두었던 것인데, 잘린 쪽은 이미 구름으로 덥혀져 있다. 구름의 본성은 땅으로 스며들고 스며든 본성이 하늘을 닮아간다는 것. 부채 살 같이 퍼진 무의 속을 보면 알 수 있다.
무는 흰 구름과 파란 하늘이 함께 들어 있는 채소라서 무를 여러 번 말하면 맵고 지린 맛이 난다.
구름에서 속 씨가 웅크리고 있다. 모든 싹은 처음에는 속잎이었다가 속잎이 겉잎이 되는 동안 사립문이 헐리고 철 대문이 달리고 송아지는 개의 값을 뒤집어쓰고 음매음매 컹컹 짖는다. 그 사이,
혁명은 손가락질 받았다.
무청은 줄줄이 엮여 내걸리고 반 토막 무만 남아 필사적으로 싹을 틔우고 있다. 철 대문에서 싹이 자라고 싹이 노란 송아지가 컹컹 짖는다. 한 개의 무를 할머니는 구름 쪽을 먼저 썰고 나는 파란 하늘 쪽을 먼저 썰자고 한다.
매운 입술이 내미는 혁명의 싹,
반쪽 남은 무를 보고도 분분한 의견이 한 집에서 산다.
2016 제12회 5.18 문학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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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은 이렇습니다. "반으로 잘라놓은 무에서 싹이 돋아 나온 것을 보고 “혁명 같다”고 말하는 화자를 내세워 ‘무’와 ‘혁명’ 사이의 유비(analogy)를 유려하게 사유하는 시다. 모범 답안 같다는 느낌을 줄 정도로, 관찰과 성찰, 메시지와 수사학, 보편성과 시의성 등의 이항(二項)적 요소들 사이의 유려한 상호작용을 시연해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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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의 문학상 수상작이 특정한 주제를 포함하기에 지금 응모해도 당선권에 들만한 한 편을 고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이 작품을 소개하게 된 건 굳이 5.18이라는 주제로 국한하지 않더라도 발상이 신선해서입니다. 독자에 따라선 평이하게 보는 시선도 있겠지만, 무 싹에서 혁명을 보는 견해만큼은 쉽지 않아서입니다. 더불어 제목 역시 앞으로 회원님들이 응용하기에 따라서 더 다양하게 변주될 수도 있겠기에 소개합니다.
시의 해석이 따로 필요하지 않을 만큼 내용은 평이합니다. 하지만 그런 평이함 속에서도 할머니와 아버지는 시대에 순응하듯이 사랍문과 송아지를 가져오죠. 사립문도 그냥 사립문이 아니라 할머니 처녀 적 사립문이며 송아지 역시 막 빠져나오는 송아지라고 희망에 차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같은 상황에서도 혁명을 보죠. 잘라놓은 반토막 무에서 싹이 돋는 것이 얼마만큼 맵고 지린 맛의 혁명인지 구체적으로 드러내고, 급기야는 그런 사립문이 헐리고 철 대문이 달리고, 송아지가 개의 값을 뒤집어쓰고 손가락질받는 혁명이라고 말합니다.
무청이 줄줄이 엮여 내걸리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반토막 남은 무가 필사적으로 싹을 틔우는 건 그거야말로 꺼지지 않는 혁명이기 때문일 겁니다. 철 대문에서 싹이 자라는 것도, 개의 값을 뒤집어쓴 송아지가 음매음매 컹컹 짖는 행위 역시도 그럴 텐데요. 같은 상황을 두고도 분분한 의견 속에서 살아가야만 하는 현실 인식이 심사평에서처럼 보편성과 시의성을 획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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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 작품이 산문시의 전형으로 볼만큼 아주 잘 직조된 느낌을 받았네요. 산문시를 쓸 때 무연시로 쓸지, 연을 나눈다면 어디에서 연을 나눠야 할지 고민할 텐데요. 이 작품은 혁명 같다고 했다. 혁명은 손가락질 받았다. 와 같은 핵심적인 진술을 한 연으로 처리한 게 돋보입니다. 더불어 바로 앞의 연에서 나는, 그 사이, 처럼 쉼표로 연을 바꿔준 것도 효과적이었고요. 이러한 쉼표 하나만으로도 산문시는 리듬감을 갖기도 하거든요. 1, 2연도 맨 마지막 연처럼 붙였어도 좋았을 것 같네요.
굳이 더 말할 게 없는 작품이지만, 학우님들이 시를 쓸 때 응용해 볼만한 표현을 고르자면, ~같다고 했다, ~를 닮아간다는 것, 여러 번 말하면, 뒤집어쓰고, 손가락질, 필사적으로 ~ 있다, ~의 싹. 이런 표현들은 학우님들이 시를 습작할 때 참고하시면 좋을 것 같네요. 시어 하나만 달라져도 시는 전체적인 느낌이 확 달라지기에 시인들은 늘 좋은 시어를 찾기 위해 애쓰죠. 소설을 읽다가도 좋은 표현이 있으면 메모해두기도 하고요. 그러니 좋은 작품을 보면서 내용을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표현했는지 살펴보는 게 더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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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계기로 4년 전, 그러니까 2020년에 써둔 노벨문학상 관련 글이 있어 함께 올리니 재미로 읽어봐주시길요.
이건 여담이지만, 노벨문학상은 문학적 평가만으로 주는 상이 아니라는 건 이제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다. 물론 받으면야 좋겠지만, 받지 못한다고 해서 문학적으로 뒤처진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말하자면 국적이나 인종 등 정치적인 요인에 크게 좌우되는 것이 그 이유일 것이다. 2020년 수상자 루이스 글릭만 해도 그렇다. 시인이, 그것도 미국 시인이 수상한 이유도 당시 미투 사건과 관련하여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입지가 좁아진 한림원이 그나마 비유럽권에 상을 줌으로써 이미지 세탁을 한다는 말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20세기 영향력 있는 문학 평론가 해럴드 블룸은 "노벨문학상은 문학적 가치보다 다른 요인을 더 많이 생각하는 것 같다. 알다시피, 국적이나 인종 같은 정치적인 요인이다.”라고 말했으니 말해 뭣할까.
제1회 수상자로 유력했던 톨스토이가 수상에 실패한 것도 스웨덴과 역사적으로 불편한 관계인 러시아 국적이기 때문이라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다. 어디 그뿐일까, 밀란 쿤데라, 톨스토이, 마크 트웨인, 프란츠 카프카, 조지프 콘래드,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버지니아 울프, 마르셀 프루스트,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니코스 카잔차키스, 제임스 조이스, 막심 고리키, 헨리크 입센, 에밀 졸라, 올더스 헉슬리,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 라이너 마리아 릴케, 안톤 체호프, 시어도어 드라이저, 토마스 베른하르트.. 이런 저런 이유로 수상하지 못한 작가들이 셀 수 없이 많다.
우리나라는 1980년대 이후 한림원의 요청을 받아 몇 차례 작가들을 추천한 바 있는데, 1982년 김동리를 비롯해서 서정주가 1990년과 1994년, 최인훈이 1992년 추천되었으며, 그 밖에도 황순원, 박경리, 황석영, 김지하, 이문열, 고은, 신경숙 등의 작가가 언론 등에서 유력한 후보로 거론되곤 했다. 북한에서는 이기영이 <두만강>으로 후보에 오른 적이 있다고 한다. 우리가 흔히 오해하는 것 중의 하나가 작가의 어떤 '작품'이 노벨문학상을 받는다고 착각하는데 정확히 말하면 작품이 받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받는다고 한다. 해마다 노벨문학상이 결정되면 노벨 수상작이라는 이름으로 서점에 좍 깔리는 걸 볼 수 있는데 이는 수상자의 작품 중 하나일 뿐, 그 작품으로 상을 받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언제쯤이면 노벨문학상을 받을 수 있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는 사실이지만 이 상은 세계적으로 사용자가 많은 언어를 쓰는 작가가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그러니 우리나라 같은 경우는 일단 먼저 번역이 많이 되어야 할 것이고, 그 번역으로 타국의 독자에게 일정 이상의 주목을 얻어야만 가능할 것이다. 한림원의 요청이 있다지만, 솔직히 구색 맞추기에 불과해서 들러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셈이다. 그러니 애초부터 국내에서 출판하지 말고 외국어로 외국 출판사를 두드리는 것도 한 방법이라는 게 괜한 말이 아니다.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맨 부커상을 2016년에 수상한 한강이 있긴 하나, 맨 부커 인터내셔널 부문상은 2005년에 생겼으며 역사도 매우 짧고 권위도 상대적으로 부족해서 노벨 문학상에 비할 바가 아니다. 이 또한 번역가의 능력이 크게 좌우했다는 건 우리도 다 아는 사실이다.
장르로 보자면 시보다는 소설 쪽이 수상에 유리하다는 건 수많은 논문으로도 입증된 사실이다. 아시다시피 시는 번역을 한번 거치면 전혀 다른 말이 되고 만다. 그리고 솔직히 우리나라 시는 현재 우리나라 사람도 이해하기 어려운데 하물며 외국인이 이해한다는 건 하늘이 두쪽 나도 일어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그러니 맨날 문동이니 창비니 해봐야 세계적인 문학 흐름에 비춰보면 결국 우물 안 개구리밖에 안된다는 것이다. 뭐 굳이 외국에서 알아줘야 제대로 된 문학은 아니겠지만, 거시적인 안목에서 세계 문단에 우뚝 서려는 마음은 애당초 없고 오로지 국내 문단만 좌지우지하면서 문단권력에만 혈안이 된 듯해서 하는 말이다.
또한 지역적으로는 유럽에서 시작된 상이다 보니 유럽을 상당히 우대하며 그 와중에 북유럽 작가를 암암리에 밀어주는 경향이 있다. 2020년까지의 통계로 보자면 스웨덴어는 수상지 홈그라운드 빨로 7명이나 받았고, 폴란드 문학은 국가 규모에 비해 5명이나 배출했고 러시아 문학은 역사적으로 스웨덴 등 북유럽과 사이가 최악이라는 점 때문에 문학적 성취에 비해서 미미한 편이다. 언어로 보면 가장 수상자가 많이 나온 언어는 2020년 기준으로 29명이 영어다. 국적으로는 프랑스가 16명으로 가장 많으며 언어로 따져도 프랑스어는 14명을 배출해 똑같이 14명을 배출한 독일어와 함께 영어 다음이다. 그 뒤로 11명을 배출한 스페인어가 있다.
노벨문학상은 그동안 여러 측면에서 구설에 휘말렸다. 유럽 지역 또는 영미권 작가들의 수상이 잇따라 ‘그들만의 잔치’라는 오명도 얻었다. 2016년 밥 딜런의 수상에 의아하고 놀랍다는 반응이 대부분이었지만 밥 딜런의 이름은 그해 베팅 사이트에서 수상 가능성 높은 8위에 올랐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올해도 노벨문학상 수상자 흐름과 해외 언론의 전망, 전 세계 ‘합법’ 도박사들의 예측 등을 살펴본 결과 올해 수상자 선정에는 비유럽국 작가, 정치·이념적 논란이 없는 인물이 수상할 것으로 전망된다고 했는데 역시나 미국 국적의 시인 루이스 글릭이 받았다.
그래선지 우리나라의 노벨 문학상 수상 가능성은 지금으로선 여전히 하늘의 별따기보다 힘들지 않을까 싶다. 그 이유는 앞서 언급한 여러 이유도 이유지만, 무엇보다 국내 작가들이 국내에서만 입신양명의 소명을 다하려는 자세도 한몫한다고 본다. 글빨로 어깨 힘 좀 들어갔다 싶으면 문학적 이념의 구축에 힘쓰기보다 진보니 보수니 좌빨이니 우익이니에 휩쓸려 얼치기 목소리를 내는 것도 문제다. 물론 노벨 문학상이 진보주의자에 유리하고 보수주의자에게 불리하다는 건 앞서 언급한 정치적 이유에 해당되는 것이긴 하지만, 지금 이 나라의 대부분의 진보와 보수는 출발부터 오로지 빨갱이 타령만 하고 있으니 답답한 노릇이다.
'미학 오디세이'로 잘 알려진 진중권 씨를 보면 이 나라의 미학 관련 박사는 뭐하고 있나 싶을 정도고, 하물며 석사가 이 정도로 활개 칠 정도면 박사는 그 능력이 얼만큼일지 가늠조차 못하겠다. 일부 언론사는 발로 뛰면서 취재할 생각은 안 하고 이분의 페북의 글만 골라서 인용해 보도하는 행태를 보노라면 한국의 언론은 도를 넘었다는 외신 기자의 말이 가볍게 들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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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가 2020년에 썼던 글인데, 정확히 4년 후에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다니 하늘의 별따기보다 힘든 일을 해낸 셈이네요. 포털 DAUM 검색창에 '한강'을 검색하면 축하풍선이 올라가는데 이 역시 처음 보는 풍경이라서 재밌습니다. 한글날 하루 지나 한국인 소설가 한강이 또 한 번 한강의 기적처럼 한림원에서 수여하는 노벨문학상을 받았다면서 연이은 '한'으로 쓴 재치 있는 문장도 보았고,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의 작품을 올해는 원어로 읽게 됐다면서 한국인임을 자랑스러워하는 글도 봤습니다. 늘 딴 나라 이야기처럼 듣던 노벨문학상이 우리나라 사람이라니... 아직도 믿기지가 않네요. 대한민국 화이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