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적 표현과 고정관념
시 또는 시창작에 관한 상당한 정도의 수준을 갖춘 사람은 예외에 속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적 표현에 어떤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즉, 어떤 종류의 표현만을 시로 생각하는 경향이 그것이다. 이런 고정관념 또는 편견은 잘못된 교육과 독서의 과정에서 형성된 것으로, 올바른 시의 이해에 큰 장애가 될 뿐 아니라, 시를 창작하고자 할 때도 제일 먼저 뛰어넘어야 할 벽과 같은 존재이다. 이 벽과 같은 고정관념을 이겨내기 위해 몇 가지만 알아보자.
여기에 3편의 시가 있다.
이 3편을 읽고, 어느 작품이 가장 시답다고 느껴지는지 한번 골라보라. 그러면 스스로가 어떤 고정관념에 물들어 있는지 알게 된다.
피를 흘리며 땀을 흘리며 퍼렇게 멍든 강은
꽃망울 송이송이 터트릴 내일을 향해
힘타게 흘렀다
숨이 차오르는 순간의 고통을
뒤로 뒤로 밀어 놓고
높은 산을 타고 넘는 바람처럼
끓어오르는 뜨거운 마음을 안으로 숨기며
강은 쉼 없이 흘렀다
둑에 부딪히고 바위에 상처를 입고
뱃머리에 갈라지는 가슴을 안고
강은 한마디 말없이 앞으로만 흘렀다 ------강. 1
푸른 혈맥이 엉키어
살아 꿈틀거리는 가슴
수 천 년을 이어 온 꿈이
암흑과 광명을 씻으며
내일로 굽이친다
푸른 하늘을 닮은 눈이 영원을 비추며
오욕의 역사를 더듬으며
구슬처럼 반짝이고
아무도 점치지 못하는 미래의 한 광휘를
저리도 온후한 전신으로 조용히 말한다 -------강. 2
강은 둑을 따라 천천히 흘렀다
가다가 잠깐 발을 멈추고
행락객이 모두 가버린
여인숙의 닫힌 창문을 보며
밟힌 풀이 다시 허리를 펴는 순간을 보며
천천히 흘렀다
다시 이곳을 올 수 있는
날은 어떤 강에도 없다
다가올 다른 세계를 기다리며
눈을 감고 생각하기도 하고
몸을 모로 눕히고 먼 산을 보기도 하며 흘렀다 -----강. 3
<강.1>은
장식적 수사가 눈에 거슬리는 작품이다. 이것저것 끌어들여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시적내용)를 꾸미고 있기 때문이다. 천천히 다시 읽어 보라. 그러면 ‘힘차게’ ‘쉼 없이’ ‘앞으로만’ 강이 흐른다는 내용을 강조하기 위한 시구들로 가득 차 있음을 알 것이다. 즉, 이 시는 ‘힘차게 흐르는’ ‘쉼 없이 흐르는’ ‘앞으로만 흐르는’ 강이라는 단순한 내용을 꾸미는 시구(장식적 수사)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므로 이 작품이 가장 시답다고 느끼는 사람은, 시란 무엇인가 다른 글과 달리 화려한 수사 속에 있으리라는 잘못된 인식 위에 있다.
<강. 2>는
현학취가 강한 작품이다. 아는 체하는, 어딘가 철학적인 냄새를 피우고 있다. 강을 ‘푸른 혈맥이 엉키어/살아 꿈틀거리는 가슴’이라든지 ‘수 천 년을 이어 온 꿈이/암흑과 광명을 씻’는다든지 하는 표현들이 그것이다. 시가 철학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과 철학적인 수사(修辭)를 하고 있다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다.
시가 철학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은 시 속에 깊은 뜻이 있다는 의미이며 철학적인 수사를 쓰고 있다는 것은 아는 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강.2>를 가장 좋다고 느낀 사람은, 시란 어려운 또는 남들이 잘 모르는 표현을 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을 가능성이 많다.
<강. 3>은
사실적인 인식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는 작품이다. 장식적이지도 않고, 현학적이지도 않다. 관찰을 통해 감각적, 사실적 풍경과 심상을 작품으로 재구성해놓고 있다. 그러니까, 이 사실적인 관찰을 중요시하고 <강. 3>을 가장 좋다고 느낀 사람은 무엇보다 먼저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고, 또 그것이 모든 사고의 출발점이라는 점을 알고 있는 경우가 된다. 그러니까,<강. 3>을 가장 좋다고 느낀 사람이 시에 관한 바른 인식을 갖고 있는 경우이다. 어떻든, 어느 쪽이든, 위에서 알아본 자기 검토를 유의하면서 앞으로 제기될 문제를 살펴보면 더욱 효과적인 공부가 될 것이다.
시는 소설이나 희곡 등과는 다른 문학양식이다.
시, 소설, 희곡, 평론 등등은 모두 문학적 담론(쉬운 말로 하자면 문학적 표현)이다.
그러나 소설에는 소설적, 희곡에는 희곡적 표현의 특성이 있듯이, 시에도 시적 표현의 특성이 있다. 이런 특성 때문에 모두 문학적 담론임에도 불구하고 장르가 나뉘어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시를 창작하고자 하는 사람은 소설적 또는 희곡적 글쓰기가 아닌 시적 글쓰기를 해야 하고, 시적 글쓰기가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시적사고(詩的思考)와 시적표현(詩的表現)이 어떤 것인지 알아야 한다.
또한, 시에 관한 전문 용어를 잘 안다고 해서 시를 잘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용어를 안다는 것은 그 개념을 안다는 것이므로, 그 용어가 뜻하는 바를 잘 활용할 수 있다는 것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직유라는 용어를 예로 들어 보자.
(1) 절망은 차라리/ 내리는 눈처럼 포근하구나
(2) 솜털 같은 눈 내밀고있는 버들가지 사이로/굵은 나무줄기 같은 빗줄기가
보기의 두 시구는 모두 직유를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잘 살펴보자.
(1)은 인간에게는 상황에 따라 슬픔이나 고통. 절망과 같은 비극적 감정이 역으로 느껴질 때가 있을 수 있다. 너무 어이가 없을 때 웃음이 나오는 것과 같은 역설적인 정서가 그것이다. 그러니까 그런 심리를 눈(차면서도 포근하게 느껴지기도 하는)을 통해 적절히 표현한 것이라면 (2)의 ‘굵은 나무줄기’라면 그 굵기가 상당하기 때문에 빗줄기의 굵기로는 지나치게 과장되어 있어 우리에게 거부감을 일으키게 하는 서툰 직유, 과장된 직유이다.
이와 같이 어떤 용어를 개념적으로만 알고 있는 경우는 시창작에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다. 많이 생각하고 많이 읽고 많이 써보는 일 외에 지름길이란 없다.
화염경배 / 이민우
보일러 새벽 가동 중 화염투시구로 연소실을 본다 고맙다 저 불길, 참 오래 날 먹여살렸다 돼지고기 공납금이 다 저기서 나왔다 녹차의 쓸쓸함도 따라나왔다 내 가족의 웃음 눈물이 저 불길 속에 함께 타올랐다 불길 속에서 마술처럼 음식을 끄집어내는 여자를 경배하듯 나는 불길처럼 일찍이 붉은 마음을 들어 바쳤다 불길과 여자는 함께 뜨겁고 서늘하다 나는 나지막히 말을 건넨다 그래 지금처럼 나와 가족을 지켜다오 때가 되면 육신을 들어 네게 바치겠다
대상 속 의미를 보는 법
대상과 현상의 의미 읽기는 뚫어지게 응시하는 데서 가능하다. 뚫어지게 바라본다는 말의 의미에 닿고 있다.
대상을 새롭게 읽다 보면 서산에 지는 해를 끄집어 올리는 방법도 있다. 그것은 조용히 앉아 열 시간을 기다리다 동쪽으로 돌아앉으면 된다.
그러면 누군가는 별것 아니라고 할 것이다.
그 별것 아닌 발상을 아무나 할 수 있는 것 또한 아니라는 점이다. 여기에서 또 하나의 시창작의 원리를 깨달을 수 있다.
별것 아니고 거창한 것이 아닌 사소한 깨달음이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 속에 뜨거운 인간에 대한 이야기가 안겨있다.
카피라이트 정철은 연극의 1막과 2막 사이에 암막이 있는 것은 옷을 연극이 끝날 때까지 그대로 입고 나오면 연극이 지루하니까 옷을 갈아입으라는 뜻이라 했다,
그래서 그는 오늘과 내일 사이에 깜깜한 밤이 있는 이유는 오늘의 생각과 내일의 생각이 같으면 인생이 너무 지루하니까 생각을 갈아입으라는 뜻으로 풀었다.
참으로 기발한 발상의 전환이다.
발상의 전환이 대상의 의미를 새롭게 읽어내는 하나의 수단이 된다.
어떻게 보면 시창작은 낯익은 것들을 서로 관계지어 낯설게 하는 일이다. 다시 말하면 서로 독립적으로 떨어져 있는 낯익은 의미를 관계 짓기 하는 순간 각각 다른 의미의 존재로 거듭나게 하는 일이다.
‘벌레 먹은 나뭇잎의 상처’ ‘남을 먹여가며 살았다는 흔적’이라는 의미가 서로 따로따로 쓰이다 문득 이 두말이 함께 만나면서 서로 가치 있는 의미로 재창조된다. 즉 ‘벌레 먹은 나뭇잎이 아름다운 것은 상처 때문이 아니라 남을 먹여가며 살았다는 흔적 때문이다’라는 시의 의미로 재창조 된다.
‘나의 집’과 ’몸’을 관계 지으면 ...수리할 곳이 많다. 콜레스톨에 막힌 혈관 보일러,
하수구가 막힌 방광, 유리창의 시력, 내 이 집에서 그동안 잘 살았다, 장마철에 젖은 벽지처럼 손보기에 너무 낡았다, 신이여 이제 이 주택을 허물어도 좋다 .... 이런 발상이 가능해 진다.
유도의 ‘낙법’은 ‘떨어지는 법’이다. 이 현상을 가만히 다시 읽다 보면 ‘내 몸을 내가 맨바닥에 내동이 치는 것도 법도가 있다. ‘힘을 주면 내가 나를 해친다’는 의미 읽기가 가능해진다. 그래서 유도장에가면 사범은 늘 ‘힘, 빼 ~~~’라고 외치는 것이 ‘제 몸을 놓는 일’임을 알게 된다.
‘바깥어른은 잘 계슈’
‘지난주에 죽었다우, 저녁에 상추를 따러 갔다가 심장마비로 쓰러졌지 뭐유’
‘저런 쯧쯧 ... 정말 안 됐수, 그래서 어떻게 하셨수’
‘뭐, 별수 있나요, 그냥 깻잎 사다 먹었지요’
위의 일화는 강한 역발상의 힘을 보여준다.
시창작은 한편으로 강렬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또 다른 예를 들면 이런 이야기도 된다.
모든 제품은 유효기간이 있는데 주민등록증은 유효기간이 없다. 유효기간이 지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는 것 .... 우리가 살면서 가끔 지름길을 택하게 되는데 이 지름길은 빨리 갈수는 있을지 몰라도 대신에 놓치는 게 많은 길이라는 것 ......그리고 또 몸이 지은 죄보다 마음이 지은 죄가 더 많은데 왜 마음을 가두는 감옥은 없을까...뭐 이런 생각을 해보는 것이 낯선 발상일 것이다.
좋은 상상력과 창의력은 의외로 평범한 일상과 낯익은 일상에서 만나는 것들에 대한 발상의 전환에서 비롯된다.
문제는 어떻게 다르게 볼 것인가의 문제이며 그것은 개념을 다르게 읽을 것인가의 문제다. 모든 개념, 의미는 시적 상황에 따라 다르기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시창작은 대상과 현상의 의미를 다시 읽는 일이면서, 그러기 위해서 가만히 들여다보면서 삶의 풍경이 되도록 대상과 대상의 관계짓기를 하는 일이다.
걸려 있다는 것 / 문숙
나뭇가지 모양의 바나나걸이를 샀다
바나나를 어디엔가 걸어두면 더 싱싱하게 보존된다고 한다
자신이 아직도 나무에 달려 있는 줄 알고 꿈을 꾸기 때문이라고
어느 해외입양아가 파양당하고 청년이 되어 친부모를 찾아왔다가
끝내 못 찾고 고시원에서 고독사 했다는 소식이다
그에게는 부모도 자식도 아내도 없어 매달릴 가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이들도 다 자라 내 곁을 떠나고
일생 나를 가슴에 걸고 사셨던 어머니마저 돌아가시자
하고 싶은 일이 없어졌다
나도 지금 바닥에 떨어진 바나나다
울돌목 / 문숙
둘이 합쳐지는 곳엔 언제나 거친 물살과 울음이 있다
서해와 남해가 만나 수위를 맞추느라 위층이 시끄럽다
늦은 밤 쿵쿵 발자국 소리와 새댁의 흐느낌이 들려온다
한쪽이 한쪽을 보듬는 일이 아프다고 난리다
마음 섞는 일이 전쟁이다
우루루 우루루 가슴 밑바닥으로 바위 구르는 소리를 토해낸다
돌덩이들이 가슴에 박혀 암초가 되어가는 시간이다
수면을 편편하게 하는 일 부드러운 물길만이 아니어서
부딪혀 조각난 것들 가라앉히는 시간만큼 탁하고 시끄럽다
저 지루한 싸움은
서로에게 깊이 빠져 익사하는 그날까지 계속될 것이다
버팀목에 대하여 / 복효근
태풍에 쓰러진 나무를 고쳐 심고
각목으로 버팀목을 세웠습니다
산 나무가 죽은 나무에 기대어 섰습니다.
그렇듯 얼마간 죽음에 빚진 채 삶은
싹이 트고 다시
잔뿌리를 내립니다
꽃을 피우고 꽃잎 몇 개
뿌려주기도 하지만
버팀목은 이윽고 삭아 없어지고
큰바람 불어와도 나무는 눕지 않습니다
이제는
사라진 것이 나무를 버티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허위허위 길 가다가
만져보면 죽은 아버지가 버팀목으로 만져지고
사라진 이웃들도 만져집니다
언젠가 누군가의 버팀목이 되기 위하여
나는 싹틔우고 꽃피우며
살아가는지도 모릅니다.
사람이 풍경으로 피어나 / 정현종
사람이
풍경으로 피어날 때가 있다
앉아 있거나
차를 마시거나
잡담으로 시간에 이스트를 넣거나
그 어떤 때거나
사람이 풍경으로 피어날 때가 있다
그게 저 혼자 피는 풍경인지
내가 그리는 풍경인지
그건 잘 모르겠지만
사람이 풍경일 때처럼
행복한 때는 없다.
바람 부는 날 / 장민정
문 좀 열어 줘,
처량한 목소리로 한참을 흔들어도 닫힌 문은 꿈적도 않는다
덜컹덜컹
아랫동네 버드나무 집에서 술 한 잔 걸치고 비칠비칠 골목을 쓸어오다 보면
어느새 창문밖에 와 있곤 한다
덜컹 덜컹
검은 비닐봉지를 스산하게 하늘로 날려 보내고
만만한 것은 하수구로 쓸어 넣어버린다
뼛골로 서있는 어찌할 수 없는 것들 내력도 들추고
지나가는 아가씨들 머리채도 잡아채 보았다
너 때문이다
모두 너 때문이다
아니다 내가 잘못했다
창가에 흘러나오는 엷붉은 빛이 가슴을 저리게 한다
덜컹 덜컹
잃어서는 안 되는 것을 잃어버린
덜컹덜컹 덜 컹 덜 컹
흔들다
흔 들 다
스르르 주저앉고 마는 저 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