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고장 강릉(江陵)
6. 구정면(邱井面)<2>
<1> 선비의 고장 학산(鶴山)
구정면의 면 소재지는 여찬리(余贊里)로, 면사무소와 파출소 등이 있지만 실제로 면의 중심부는 학산리(鶴山里)라고 할 수 있다. 학산리(鶴山里)는 오랜 역사를 간직한 마을로, 고려 말 32대 우왕(禑王)이 고개를 넘어 다녔다는 왕고개가 있는데 여찬리에서 학산리로 넘어오는 고개 이름이다.
고려 말 이성계에 의하여 폐위(廢位)된 고려 32대 왕이었던 우왕(禑王)은 강릉에서, 33대 창왕(昌王)은 삼척(三陟)에 유배되었다가 살해되고 34대 공양왕도 즉위 3년 만에 폐위되어 고려 시대는 막을 내리고 이성계가 정권을 잡아 조선 시대가 열리게 된다.
내가 자란 학산(鶴山)은 역사가 아주 오랜 마을로, ‘생거모학산 사거성산지(生居茅鶴山 死居城山地)’라는 말이 전해져 내려오는 마을이다. 풀이하면 ‘살아서는 모산(茅山), 학산(鶴山)이요, 죽어서는 성산(城山)’이라는 의미인데 모산(茅山)은 학산과 인접한 마을 이름이고 성산(城山)은 대관령 아래에 있는 산골 마을이다.
구정면의 중심인 학산리(鶴山里)는 신라 시대에 지어졌던 사찰 굴산사지(崛山寺址)를 비롯하여 수많은 유적(遺蹟)들이 널려있고 역사적인 이야기도 많을뿐더러 내 고향이라 자세히 설명해 본다.
<2> 굴산사(崛山寺)에 얽힌 이야기들
신라시대 범일국사(梵日國師)가 창건하였다는 굴산사는 지방기념물 제11호로 지정되어 있고, 굴산사 경내에 있는 굴산사지부도(崛山寺址浮堵, 보물 제85호)와 사찰의 깃발을 올리는 정문이었던 굴산사지당간지주(崛山寺址幢竿支柱, 보물 제86호) 등은 구정면의 대표 문화유산으로 보존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범일국사의 탄생설화(誕生說話)를 간직하고 있는 학(鶴)바위, 석천(石泉) 등이 있고, 마을의 역사를 증명하는 정의윤 고택(古宅)과 조철현 고택, 신라시대부터 구전되어 내려온 것으로 추정되어 무형문화재 제5호로 지정된 농요(農謠) 학산오독떼기, 1000년 묵은 은행나무, 서지골 고택, 커피의 원조 테라로사, 거유(巨儒) 정주교(鄭冑敎)님 이야기 등 내가 자란 고향이다 보니 들은 이야기가 한도 끝도 없다.
학바위 / 석천(石泉) / 굴산사지 부도탑 / 굴산사지당간지주
신라의 고승 범일국사(梵日國師)는 이곳 학산에서 태어났는데 동네 처녀가 아침에 우물(石泉)에 물을 길으러 갔는데 바가지로 물을 뜨니 마침 동해에서 떠오르는 해(日)가 바가지에 떠(汎) 있었다. 처녀는 목이 말라 우선 그 바가지 물을 마셨더니 곧바로 태기(胎氣)가 있었고, 산달(産月)이 되어 아이를 낳았는데 처녀가 아이를 낳았으니 남들에게 소문이 날까 두려워 뒷산 바위 밑에 가져다 버린다. 처녀는 마음이 애틋하여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이튿날 아침 바위로 올라가 보았더니 학(鶴)이 날개를 벌려 아이를 감싸고 있고 산짐승들이 젖을 물리고 있었다. 깜짝 놀란 처녀가 아이를 안고 내려와서 키우니 바로 훗날 범일국사(梵日國師)이다. 학이 아이를 감싸고 있던 바위를 학(鶴)바위라 부르게 되었고, 아기의 이름을 범일(梵<汎>日-해가 떠 있다)이라 지었다고 한다.
범일(梵日)은 자라면서 모든 것이 비범(非凡)하여 신라의 서울인 경주(慶州)로 보내 공부를 시켰는데 훗날 신라의 최고 승려로 추앙받아 국사(國師)의 칭호를 받은 범일국사(梵日國師)이다.
범일국사는 고향인 이곳 학산에 와서 굴산사(崛山寺)를 창건하는데 당시 선문구산(禪門九山) 중 사굴산파(闍崛山派)의 총본산이 바로 이곳 굴산사였다고 한다.
한창 번성할 시기의 굴산사는 얼마나 스님들이 많았던지 아침에 스님들 밥을 지으려고 쌀을 씻으면 그 뿌~연 쌀뜨물이 남항진(南港津) 바다까지 이어졌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실제로 지금도 굴산사지(崛山寺址)를 둘러보면 엄청나게 넓어서 부도탑 등 각종 유적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어 굴산사의 규모를 증명해 주고 있다.
범일국사(梵日國師)는 대관령 국사성황(國師城隍)으로 서낭당(城隍堂)에 위패가 모셔져 있는데 대관령산신(大關嶺山神)으로 추앙받는 김유신장군(金庾信將軍)과 더불어 강릉단오제(江陵端午祭)의 주신(主神)이다. 강릉 단오제(端午祭)가 시작되면 대관령에서 국사성황과 산신을 단오장으로 모셔올 때 반드시 이곳 학산리 마을 한가운데 있는 굿당으로 위패(位牌)를 모시고 와서 서낭제(城隍祭)를 지낸 후 단오장으로 모셔가는 절차를 거쳐야만 한다. 마을 이름 학산(鶴山)이라는 명칭은 원래 굴산사에 유래하여 굴산(崛山)이라고 했었는데 여찬리와 학산리의 경계를 이루는 장안재(長安峙) 노송밭에는 학(鶴-왜가리)이 무리를 지어 깃들고 있어서 학산(鶴山)으로 바뀌었다고 하고, 고개 이름 장안재는 고려 말, 우왕(禑王)이 기거하던 곳이라 곧 서울(長安)이라고 하여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굴산사의 많은 유적 중에 단연 돋보이는 것이 굴산사지당간지주(崛山寺址幢竿支柱, 보물 제86호)인데 높이 5.4m로 우리나라 사찰들 당간지주 중에서 제일 크다고 한다. 저 높은 지주에다 불화(佛畵)를 매달아 올리는 당간(幢竿)은 무엇으로 만들었으며 또 불화(佛畵)가 얼마나 컸을까?
우리 어머니는 굴산사 당간지주를 살개바우라고 불렀던 기억이 떠오른다.
‘살개’는 디딜방아의 발을 딛는 부분으로 두 가닥으로 벌어진 부분을 말하는데 당간지주가 돌기둥 두 개를 세워놓았으니 흡사 디딜방아의 살개처럼 보여서 그렇게 불렀을 것이다.
또, 어렸을 때 들었던 재미있는 이야기로 마고(麻姑) 할멈이 치마폭에 살개바우(굴산사 당간지주) 두 개를 싸안고 황병산(黃柄山)을 넘어올 때 주루룩 미끄러져 내려오느라 산꼭대기에 다섯 개의 봉우리가 생긴 것이 오봉산(五峰山)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또, 설래(仙來)마을로 올라가는 산비탈에 눈물 바위라는 커다란 바위가 있는데 아무리 가물이 들어도 눈물을 흘리는 것처럼 물기가 흘러내려 이끼가 자란다.
이 바위는 원래 커다란 하나의 바위였는데 굴산사 당간지주를 만드느라고 잘라내서 지금처럼 바위가 갈라졌고, 그 옛날 자를 때의 아픔으로 지금도 눈물을 흘리는 것이라고 하는 이야기도 있다.
설래라는 지명은 예부터 이곳 하천바닥에 물이 고이지 않고 땅속으로 스며든다 하여 붙여진 지명이라고도 하는데 선녀가 내려온 선래(仙來)가 맞는지 순우리말 설래가 맞는지....
학산에는 굴산사와 관련된 유적들을 비롯하여 그 밖에도 대한민국, 혹은 강원도의 유물이나 문화재로 지정된 것들이 많이 있는데 묶어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①굴산사지(崛山寺址) 국가지정 사적(史蹟) 제448호
②굴산사지부도탑(崛山寺址浮堵塔) 국가지정 보물 제85호
③굴산사지당간지주(崛山寺址幢竿支柱) 국가지정 보물 제86호
④굴산사지석불좌상(崛山寺址石佛坐像) 강원도지정 유형문화재 제38호
⑤정의윤 가옥 - 강원도지정 유형문화재 제93호 ⑥조철현 가옥 - 강원도지정 유형문화재 제87호
⑦학산오독떼기 - 강원도지정 무형문화재 제5호 ⑧학산 은행나무 - 강원도지정 보호수 제11-21-4호